화산논검5[중신통왕중양편] - 37편 (37/60)
그런 농담이 아니더라도 여인을 이대로 놓칠 그가 아니었다. 이미 아랫도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달아오른 그였기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병아리 채는 매처럼 조평이 여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와락 여인을 뒤에서 껴안은 조평이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요 불여우 같은 계집아, 가긴 어딜 간단 말이더냐. 나와 신명나게 놀아 보자구." 강호객 몇몇이 모용준을 찾아왔다. 이들은 모용세가의 공자와 함께 뒷산에 가 달빛을 즐기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그 달빛 아래에서 여인들을 끼고 진탕 재미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용준의 방에 들어선 이들은 놀라움과 먼저 마주치게 되었다. 모용준은 그 좋은 흥미거리를 마다하고는 혼자 앉아 사색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강호객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한 나라와도 견줄 만한 재부를 갖고 계시면서도 이렇게 고독하게 계실 게 뭡니까?" 그말에 모용준이 깊은 사색을 털어내며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난 이렇게 혼자 있는 게 좋소. 나의 선조들 역시도 이렇게 청빈한 자세를 잊지 않고 살아왔소이다. 내가 선조들 만한 위업은 못 이룬 채 오히려 그들보다 더 큰 향락만을 누린다면 그게 도리겠소?" 그런데도 강호객들은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날들이 있는데 어떠냐, 대사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은 나가 놀자며 모용준을 회유했다. 모용준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은 자세를 풀지 않고 끝까지 이들의 말을 거부했다. 강호객들이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는 돌아나왔다. 강호객들이 나간 뒤에도 모용준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뜬 그가 사위를 슬쩍 살폈다. 그리곤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졌다. 그러자 침대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침대는 다시 제 위치로 올라왔지만 이미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용준은 지하에 있는 궁전으로 향했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를 반겨 주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여인 중 몇몇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강호객들은 모두 잘 녹여 놓았겠지?" 모용준이 묻자 한 궁녀가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들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옵니다." "강호의 인간들이란 쉽게 녹아버리고 또 나가떨어지는 법이니라. 그러나저러나 금군은 지금 어디에 있다더냐?" 이번엔 다른 궁녀가 아뢰었다. "신첩이 염탐해온 대로 말씀을 올린다면 금군은 지금 여기서 6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사옵니다. 기껏해야 사오백 명 안팎이라 그닥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모두 전멸시켜버려야 하는데 겨우 그 정도의 무리밖에는 모여있지를 않다는 말이더냐?" 모용준이 아쉽다는 투로 인상을 썼다. 또 다른 궁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나섰다. "폐하를 따르면서부터 지금까지 신첩은 하루도 그 원수를 잊어 본 적이 없사옵니다. 오늘 폐하께서 오랑캐 무리들을 치러 가신다면 이 신첩은 기필코 앞장을 서 놈들을 무찌르겠습니다." 단호한 자세를 보이는 궁녀를 따라 모두가 이궁동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허리를 숙였다. "금나라 오랑캐들은 우리 중원을 침범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죽였다. 그 해를 입은 집안이 어디 너희 뿐 이겠느냐? 난 중원에 침노한 오랑캐 무리들을 전멸함으로써 너희와 중원 모든 백성들의 원한을 갚을 것이다!" 결의에 찬 모용준 앞에서 모두들 숙연해졌다. "낭랑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모용준이 물었다. "지금 후궁에 계시옵니다만 요사이 심기가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음…… 짐이 후궁으로 가봐야겠다." 후궁 역시 지하통로로 이어져 있어 깊고도 음침한 분위기에 덮여 있었다. 이 후궁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개의 방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에는 모용준의 총애를 기다리고 있는 궁녀들이 기거를 했다. 그리고 이 방들 가운데 조금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사각으로 된 방으로 조롱처럼 철창이 나 있어 자유스럽지 못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한 여인이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로 다가온 다른 여인이 철창 안에 대고 말을 건넸다 "어떠세요?" 철창 안에 앉아 있는 여인, 즉 임조영은 지금 정력을 써 운공(運功)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에게 말을 건넨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싸늘하게 뇌까렸다. "난 너와 말하고 싶지 않다." 임조영의 냉대에도 자지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화를 푸세요. 그리고 저는 긴밀한 말을 전하려고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할말이 없다는데도!" 임조영의 온몸에서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 역시 처음엔 그 사람이 좋은 분인 줄로만 알았어요. 처음 그는 중원에서 자기가 큰일을 해낼 테니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웃기는 소리군. 그따위 인간이 큰일을 한다구?" "그건 모르는 말씀이예요. 모용 공자님은……." "듣기 싫다. 그 소인배와 다름없는 자의 이름을 꺼내 내 귀를 더럽히지 마라!" 임조영이 언성을 높였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그 사람이 하려는 큰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금나라 오랑캐들을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하자는 거예요. 그는 또 중원의 여러 주(州)의 수재민들을 구제하는 등 좋은 일들을 적지 않게 했답니다. 비록 그의 수단이 옳지는 않지만……." "넌 정말 그 사내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로구나.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가는 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제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난 오로지 언니가……." 언니? 임조영은 자지의 말에 당황했다. 또한 조금 마음이 흔들리려고 했다. 그러나 얼른 그같은 미온적인 태도를 털어냈다. "왜?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하더냐?"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어요. 그렇지만 난 그 사람의 성미를 알아요. 언니가 말을 끝내 듣지 않으면 해칠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 언니가……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자지의 한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있는 임조영 역시도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역시 서궁낭랑은 다르다니까! 내 마음을 어쩌면 그토록 잘 헤아리고 있는지." 호탕한 웃음을 앞세우며 나타난 사람은 모용준이었다. "동생, 좀 어떤가?" 그는 기분이 좋은지 임조영에게 툭 내뱉으며 다가왔다. 임조영은 자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고는 발끈했다. "어서 날 풀어줘라! 그렇지 않으면 난 너와 사생결단을 내릴 것이다!" 모용준도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손을 들어 궁녀들을 불렀다. 궁녀들은 벌써 모용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의자 하나를 재빨리 대령했다. 그 의자 위로 거드름을 피우며 앉은 모용준이 다시 입을 벌렸다. "동생……." "집어치워! 동생은 누가 동생이란 말이요?" "우리가 의형제를 맺은 걸 벌써 잊었나?"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동생, 그러지 말고 나를 이해하게. 잘못하는 점이 있다면 내 기꺼이 반성을 하겠네.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더욱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말 뻔뻔한 사람이로군요?" 임조영이 코웃음을 쳤다. "하하하, 그래 난 뻔뻔한 사람일런지도 모르지. 또 우리 모용세가가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이 뻔뻔함 때문일 테고……." 모용준은 임조영의 반응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슬쩍 자지를 껴안았다. 자지가 그를 뿌리치려고 애를 썼다. "난 그대 임조영을 처음 보았을 때 속으로 다짐했었지. 만약에 여인이라면 꼭 자지와 함께 내 손에 넣고 말겠다고. 그 바램과 추측은 운좋게도 맞아떨어졌지 뭔가?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을 곁에 두고 있으니 하하하!" "꿈을 꾸고 계시는군!" "하하하, 그리고 또 한 가지 난 그대와 이 자지를 동시에 황후에 봉하려고 하지." 그러더니 모용준이 자지의 볼을 어루만지며 히죽거렸다. "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 "아니, 나더러 어디로 가란 말이야?" 철창을 부여잡고 있는 임조영의 손이 떨렸다. 이 철장만 없었더라면 벌써 모용준의 가슴에 검을 박았을 것이다. "내 그만 농짓거리를 거두고 한 가지 묻겠는데 대답할 수 있겠소?" 모용준이 안색을 싹 바꾸며 조용히 물어왔다. 그러나 임조영의 가슴에는 이미 그가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임조영이 화기를 내리눌렀다. "강호 무림을 위해 큰일을 해볼 생각이 없소?" 뜻밖의 제의였지만 임조영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또 악인의 탈을 쓰고 술수를 부리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지금 무림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금나라와 맞서 싸우는 것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를 도와 금을 물리치는 일에 힘을 쓰지 않겠소?" 점점 가관이 아닐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성미가 곧은 그녀로서는 어떠한 말도 곧이 들리지 않았다. 모용준의 말은 계속되었다. "셋째, 난 큰형님과 언약이 이미 다 돼 있다네. 큰형님은 내가 무림을 지휘하여 금나라와 대적하는 것을 찬성했다고. 또한 그렇게만 하면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는다고 다짐까지 하셨다네." 그러나 그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임조영이 자지의 태도를 은근히 살폈다. 자지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왕중양이 정말 이 비열한 인간과 손을 잡겠다고 했다는 말인가. 임조영은 혼란스러웠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용준에게 맹주 자리를 대신하게 하여 사람들을 제멋대로 지휘한다면 큰 낭패만 불러올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난 이번 일로 큰형님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지. 허나 큰형님은 무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어 안타까울 뿐이라네. 하지만 내가 약속을 드렸지. 오랑캐를 물리친 다음에 꼭 형님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천하 무림에 어느 누가 있다고 해도 이 일을 성사시킬 수는 없지. 나와 큰형님을 제외하고는 절대 성공할 수가 없어." 임조영의 눈에는 그저 자신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비칠 뿐이었다. 임조영이 열쩍은 태도로 일관하자 다시금 모용준이 물었다. "정말 내 황후가 되기 싫은가?" "꿈에서 어서 깨어나시지!" "하하하! 정말 바보로군. 세상의 여인들이 모두 내 발에 입을 맞추려고 안달인데 이해할 수가 없어." 차라리 미친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었다. 갑자기 우울해진 모용준은 자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훌쩍거렸다. 그러면서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럼 왕중양만을 생각하겠단 말이지?" 임조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하지만 이젠 소용이 없어. 그 잘난 왕중양은 이제 폐인이나 다를 바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나약한 궁녀 하나만 보내도 그를 죽일 수 있게 만들었으니 이 일을 어쩌지?" 겉으로는 빈정대는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번뜩거렸다. 그런 모용준의 모습을 바라보는 임조영의 가슴 역시도 분노로 타올랐다. 자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를 한쪽 팔로 안아주고 있는 자지 역시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를 품에 넣은 어머니와도 같은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가서 그만 쉬도록 하세요. 지쳐 보여요." 스스럼없이 따뜻한 말을 흘리고 있는 자지에게서 임조영은 낯설고도 섬뜩한 기운을 감지했다. 모용준이 떨리는 손으로 자지의 앞가슴을 더듬었다. 자지의 봉긋한 젖가슴을 손에 넣은 모용준이 정신없이 주물러댔다. 그러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자지가 모용준을 감싸 안은 채 지하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제22장 철의법왕과 맞선 왕중양 보름날 밤이 되었다. 모용세가에는 이미 강호의 호걸들이 흑도와 백도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상태였다. "이렇듯 많은 강호의 인사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왕중양의 공덕이요!" 소림사에서 온 지비 대사(智悲大師)가 이렇게 감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무당파(武堂派) 운심도장(雲心道長)이 그의 말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요. 왕중양이 아니라 지비 대사께서 불렀어도 금나라 오랑캐를 치자는 것인데 누군들 오지 않겠소?" 여기저기서 껄껄 웃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일리는 있지만 어쨌든 뜻은 하나라 괘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용 공자가 미인계를 써서 흑도 사람들을 꼬드겨 내고 있다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소?" 지비 대사가 의문을 제시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흑도의 사람들이야 우리와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금나라 오랑캐를 족치겠다면야 상관할 게 못 되지 않소?" 운심도장의 시큰둥한 대답에 지비 대사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제형의 말씀도 일리가 있소이다." 상좌에 있던 모용세가의 가신 일기충천 지청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 영웅님들, 좀 조용히 합시다!" 그러자 좌중에서 웅웅대던 말소리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모두들 앞쪽을 향해 주목했다. 무림의 맹주 왕중양은 한복판에 앉아 있고 그 곁에는 모용준이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자격을 굳이 따지자면 모용준이 왕중양 곁에 서 있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곳이 모옹세가이고 또 그에게 페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러분, 맹주님께서는 요 며칠 무예를 연마하시느라고 지치셨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저희 모용 공자님께서 대신 말씀이 있겠습니다." 지청이 다시 좌중을 넓게 돌아보며 주의를 모았다. 왕중양이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곧 만면에 희색을 띤 모용준이 몇 걸음 나서더니 사람들을 향해 읍을 했다. "저희 모용세가가 이런 백년일우(百年一遇)의 대사로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모용준이 한껏 겸손한 인사말을 내뱉자 좌중에서 누군가 이죽거렸다. "그런 인사치례는 그만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오!" 모용준은 도량이 깊은 사람처럼 쓰윽 그쪽을 돌아보며 의연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일깨워주셔서 고맙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밤 달빛이 휘엉청 밝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실 줄 압니다……. 여러분, 맹주님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오늘밤 정강부(靜江府)에 다녀와야겠소이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밤 진정 거사를 치룰 작정이로구나. 하는 긴장된 가운데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강호에서 난다 긴다 하던 사람들인데 며칠 동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보니 좀이 쑤셨던 차였다. 그러니 거사가 임박했다는 말에 이들이 흥분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곳에 금나라 오랑캐들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고 합니까?" 누군가 큰소리로 물어왔다. "그곳의 금군은 사오백 남짓밖에는 되지 않지만 제법 지위가 높은 장수가 몇 있습니다. 우선 그놈의 목을 따서 금군들의 전의를 떨어뜨리는 것도 좋은 계략이 될 겁니다!" 모용준이 소신 있는 의견을 내놓자 좌중에서 찬동을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옳소! 놈들을 편히 잠자게 내버려둘 수는 없소. 당장 쳐들어가 가차없이 놈들의 염통을 창에 꿰어 큰거리에 걸어 둡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준이 맹주의 영기(令旗)를 들어 보이며 목청을 뽑았다. "우리 형님의 분부입니다. 한 갈래 사람들이 먼저 정강부 앞에 이르러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도록 합시다. 그 다음 모두 돌격해 들어가는 겁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불붙는 사이 다른 곳에선 도적질을 한다는 식이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발각된다면 당장 목을 베어버릴 테니 그리 아시오!" 모두들 엄숙한 자세로 모용준의 말을 경청했다. 모용준은 맹주 왕중양의 명령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일곱 갈래로 나누어 진공하게 일렀다. 이 전략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왕중양의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보름달은 정강부의 하늘에도 높이 떠 한층 밤을 무르익게 만들었다. 정강부의 지부(知府 ; 관명) 여광(呂광)은 금군 장수 셋을 불러 여흥을 베풀었다. 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지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 분 장군님들께서 오늘 저녁을 마음껏 즐기도록 제가 계집 몇을 부를까 하옵니다만……." 몸집이 우람한 금군 장수 올리요(兀里夭)가 그말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하하하, 그런데 지부 어른께서 우리의 취향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마 모른다고 할 수 없었던 지부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알지요. 알다뿐이겠습니까? 그저 분부만 내리시지요." "이 사람은 술도 좋아하고 미녀도 좋아하지요. 그러니 술도 주고 미녀도 주되 살점이 넉넉한 계집으로 안겨 주시오." 울리요가 자기 편 장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껄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장수 역시도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이 동생은 좀 다르외다. 허리가 가는 미녀만 있으면 되는 사람이지요. 허리가 가늘면 가늘수록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나는 하나 갖고는 안 되니까 둘을 주시오. 둘! 하하핫!" 지부는 이들의 비위를 마주느라고 즉 관기 넷을 불러들였다. 송나라 때 부(府)마다 교방(敎坊)이 있었는데 바로 관기들이 있는 곳이었다. 관기들은 대부분이 죄를 범한 관리들의 처나 딸이었다. 그리고 더러는 백성들 중 호구지책으로 자원해 들어온 여인들도 끼여 있었다. 그들은 보통 때는 술좌석에 나와 기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술시중을 드는 일을 했지만 몸마저도 마다않고 내주었다. 오늘 이 오랑캐 장수 셋은 노래나 기녀들의 연주를 듣자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기꺼이 객고를 풀 요량으로 기녀들을 청한 것이었다. 이윽고 기녀들이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나타났다. 한층 술판은 흥이 뜨겁게 무르익어 갔다. 몇 순배 술잔이 돌자 올리요가 더는 못 참겠다며 죽는 소리를 했다. "안 되겠어. 어서 한 번 진탕 놀아보자구." "장군님은 어떻게 노시겠습니까요?" 지부가 옆에서 부추겼다. "저 달을 보라구. 저 밝은 달빛 아래서 한바탕 놀아 보는 거야." 올리요가 두 명의 기녀들을 덮쳤다. "어머, 안으로 들어가서 이러셔야죠? 호호호." 몸이 실한 기녀가 억지웃음을 말끝에 달았다. "안돼! 난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게다." 올리요는 벌써 기녀의 품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는 열심히 더듬어 갔다. "장군님, 무엇을 그리 찾으십니까?" 지부가 물었다. "달…… 달을 찾고 있지." "달이야 저 하늘에 떠 있지 않습니까?" "야! 찾았다! 봐 이게 여인의 달이라구." 올리요가 기녀의 젖꼭지를 손으로 집어 들어 보였다. "동그랗게 생긴 달이 여기도 있잖은가?" 그말에 지부가 히히히 이빨을 내보였다. 이즈음 금군의 진영에서는 수상한 그림자가 달빛에 희끔희끔 드러나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였는데 진영 안을 기웃거리다가 파수꾼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놀란 파수꾼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누구얏!" 그러는 사이 그림자 하나가 번개같이 날아 소리지른 파수꾼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도적이야!" 그가 쓰러지면서 비명을 지르자 다시 다른 그림자가 장을 날려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이것이 신호였다. 일단 파수꾼을 내친 그림자가 신호를 보내자 수많은 그림자가 진영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갔다. 한창 정신없이 술을 마셔대던 금군들은 미처 취한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비명을 남기며 고꾸라졌다. 어떤 자들은 그래도 자세를 수습하고는 칼과 창을 내던졌다. 하지만 돌격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게는 역부족이었다. "자, 받아랏!" 돌격해 들어오던 무리에서 장이 뿜어졌다. 창을 막 던지려던 자는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널브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금군은 모두 쓰러졌다. 이 싸움을 지휘한 사람은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놈들의 수금을 싸 갖고 갑시다!" 지청이 말하자 사람들이 금군의 막사를 칼로 베어내어 놈들의 머리들을 챙겼다. 금군의 진영에서 나온 지청과 강호객들은 막사에다 불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올리요가 기녀를 끌어안고 한바탕 열을 올리고 있는데 지부가 혼겁하여 소리쳤다. "저길 봐요! 저…… 길!" 지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곧 아래로 허물어질 듯했다. 그 바람에 올리요는 벌거벗은 채로 우뚝 몸을 일으켰다. 병영 쪽에서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우리 진영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말에 기겁을 하고는 서둘러 병장기를 집어 들었다. 이때 이들 앞으로 낯선 사람들 몇이 불쑥 나타났다. 이들은 말도 없이 서서 오랑캐들이 옷을 주워 입기를 기다렸다. 이들 속에는 도사도 있고 중도 끼여 있었으며 험상궂게 생긴 강호객들의 모습도 더러 보였다. 올리요가 낭아봉을 거머쥐고는 호통을 쳤다. "뭣하는 놈들이냐!" 그러나 나머지 두 놈들도 재빨리 칼을 들이댔다. 놈은 먼저 앞에 서있는 소림사의 지비 대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비 대사는 태연하게 나무아미타불을 읊으며 두 손을 마주하고 합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