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9편 (69/70)
그녀들은 다들 속으로 곰곰이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 말에 일리가 있어……. 한데 참말 믿어도 될까? 하지만 저 선비는 대리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이라고들 하니 그 언변에 따를 자가 없을 게야. 그러니 번지르르하게 말을 발라 놓으면 감쪽 같이 속아넘어간단 말이야. 저 정도 되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둘러 붙일 수도 있겠어……. 아, 정말 저 사람 말을 믿어야 할까?' 동주 처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자 선비는 그녀가 필시 동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또 설복을 했다. "아무리 명관(明官)이라도 집안 시비는 가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내 보기엔 기실 집안 시비란 뭐 그리 가르기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소. 남자들이란 으레 밖의 일을 주관하므로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게 되고 그래서 자연 시비를 가리기 어렵게 되는 거라오. 황비님과 황제 사이에 알력이 있고 두 분이 불화하신 것은 아마 당신들이 본 게 과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오. 그렇지 않으면 황비님께서 왜 황궁에서 도망치셨겠소? 그러나 두 분 께서 왜 화목하지 못하셨는가, 이는 대관절 누구의 과실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선 아마도 여러분들께서는 그 내막을 잘 모르시는 것 같소이다. 그 내막을 잘 모르면서 당신들이 어떻게 황제의 잘잘못을 가리겠다고 나설 수 있소? 그리고 폐하를 숙녀동에 모시고 간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물며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이시니 대리국에서도 당신네들이 이렇게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게요. 그러니 당신네들이 폐하를 숙녀동으로 끌고 가는 것은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아니고 뭐겠소?" 동주 처녀는 선비의 일장설화가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닫아 붙인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폐하, 저도 폐하가 한 나라의 황제이신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 명고의 일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숙녀동 사람들한테 똑똑히 알려 주어야만 폐하를 믿을 수 있겠어요. 이십 일 후 저는 숙녀동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꺼내 놓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휙 손짓을 했다. 그러자 처녀들은 즉시로 피리를 불어 독수리들을 부르고 큰소리로 코끼리들을 몰면서 떠날 차비들을 했다. 코끼리 떼는 천천히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우지끈우지끈 나뭇가지들이 밟혀서 부러지는 소리, 어린 나무들이 끊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레 진동했다. 단지흥은 그 소리가 끊길 때까지 잠자코 서 있다가 이윽고 숙녀동 여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천룡사 여덟 고승, 사대 시위들과 더불어 대리로 돌아왔다. 황궁에 닿자마자 그는 사대 시위에게 천룡사 고승들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분부하고는 곧장 지난 2년여간 영고가 묵었던 냉궁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헐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냉궁은 오늘따라 더 적막하고 황량해 보였다. 사위를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단 이틀 사이에 벌써 이 지경이 되었구나. 하긴 사람의 인생이란 따져 보면 필시 이 모양으로 짧으면서도 허무한 것 아닌가? 설사 영고와 밤낮으로 마주앉아 금실 좋게 지냈다고 해도 그런 행복한 나날 역시 인생에서는 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울적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그저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가만히 영고의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황궁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그는 조용히 묵상에 잠겨 들었다. '역대 단씨 조상들이 삼천번뇌사(三千煩惱絲)를 깎고 천룡사에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고 불학의 묘경에 심취하게 된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원래 제왕 노릇을 한다는 것도 따져 보면 눈앞에 흘러가는 뜬구름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순간, 문득 인기척이 들리며 궁녀 하나가 들어왔다. "폐하, 황후마마 침궁에 있는 궁녀이옵니다. 승상께서 이리로 납시셨다 하시기에……. 황후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단지흥은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파이인 황후는 종래로 무슨 일로 자기를 부른 적이 없었다. 황후는 아주 얌전한 여자로 종래로 자분자분했고 그 무슨 사단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큰일이 있지 않고서야 황후가 이렇게 친히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급급히 황후의 침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기색을 보니 당혹스러워하는 기미가 역력히 내비쳤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궁녀와 태감들에게 일렀다. "폐하께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거라." 태감과 궁녀들이 다 물러가고 나자 황후는 단지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얼핏 눈물이 고인 듯했다. "폐하, 궁내에 큰 변고가 생겼사옵니다. 천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을 모르겠사옵니다. 아마도 폐하께서 친히 가 보시고 처리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단지흥은 영문을 몰라 근심스러이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숙비의 침궁에 가 보시면 다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단지흥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숙비의 침궁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침궁 밖에서 파수를 보던 위사들은 황제를 보자 굽실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대로 있으라 이르고 선뜻 침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한 무리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알몸으로, 그것도 한껏 음란한 자태로 쌍쌍이 부둥켜안은 채 돌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표정이며 눈빛을 보아하니 다들 죽을 임박까지도 음희에 빠져 있었음이 분명했다. 상좌에는 다름 아닌 숙비가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짐짓 비웃는 듯한, 적이 음란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궁내에서 이렇듯 음희판을, 그것도 숨어서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공공연히 벌였단 말인가. 일국의 법도가 땅에 떨어져도 유만부득이요, 하늘이 울고 땅이 통탄하고 천인공로할 짓거리가 아닌가. 그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자기 대에 이르러 대리 황궁이 이렇듯 문란의 극에 치닫다니, 모두 자기의 부덕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금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끔찍한 광경을 둘러보았다.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한지 머리 속에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탁상 위에는 어지러이 술잔이 널려 있었다. 이들은 필시 독주를 마시고 죽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는 숙비가 시킨 짓일 터였다. 그는 음란하게 웃고 있는 숙비의 두 눈을 멍청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자기에게 분명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죽음으로써 자기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기를 뼈에 사무치게 증오했 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녀와 이 궁녀, 태감들은 몰래몰래 숨어서 음희를 즐겼으며 이는 모두 황제가 부덕한 소치라는 것을……. 그는 도망치듯 비칠비칠 그곳을 빠져 나와 미친 듯이 서재로 달려갔다. 영고며, 치주며, 방금 전에 본 그 참혹한 광경이며 오만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숨이 턱에 닿도록 서재에 달려들어서는 허물어지듯 털버덕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알지 못할 것들이 많았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이래 줄곧 만사가 형통하고 나라일은 뜻대로 술술 풀려 나갔다. 하늘의 뜻인지 그 무슨 기상 이변도 없어 재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 막중한 황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언제나 마음은 편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기운이 점점 사라지더니 마음 편치 못한 일들만 겹겹이 들이닥쳤다. 맨 먼저 치주가 자결하고, 이어서 영고가 황궁을 떠나 버렸으며 오늘은 이런 일마저……. 그는 자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모두 자기 탓이 아니겠는가. 일순 수십, 수백의 원망 서린 눈동자들이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그는 흡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무엇에라도 놀란 사람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멀거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한 순간,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황제를 떠나서 한 인간, 한 사내로서도 그의 그 짧은 생은 결코 원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로서 그 어떤 여인도 온전히 다 차지하지 못했고 어떤 여인도 진정 어린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하진 않은 것만 같았다. 회한과 자책의 눈물이 조용히 그의 뺨을 적셨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 한 구절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비단 짜는 틀에서 실북이 오락가락 짜 놓은 비단폭엔 원앙새 한 쌍 날으네 불쌍하구나, 늙기도 전에 머리가 세었으니 궁전의 앞뜰엔 봄 풀이 파릇파릇 꽃샘의 찬바람 이는 깊은 궁궐 속에서 그대와 마주앉아 녹의홍상 차려 입네. 단지흥은 참을 길 없이 마음이 쓰리고 아파 격하게 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으로 스며들었다. 단지흥은 정신마저 혼미해 지는 듯 몽롱한 눈길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뜻밖으로 라마중이 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라마 중은 대뜸 말을 꺼냈다. "폐하, 저는 생각다 못해 되돌아왔습니다. 이곳 남방 대리까지 왔다가 폐하에게 진짜로 한 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떠난다면 설사 서역으로 돌아간다 해도 늘 유감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 폐하와 꼭 무예를 한번 겨뤄 보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스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 나는 지금 그 누구와도 무예를 겨룰 경황도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폐하, 무림 고수들은 자고로 생사에 괘념치 않는 법입니다. 비록 폐하께 큰 변고가 있으시더라도 이렇게 풀이 다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일장춘몽으로만 생각하십시오. 나는 너무나도 꿈을 많이 꾼 사람이었소." 단지흥은 여전히 아무 동요도 없이 사뭇 초연한 기색이었다. "저는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옛날 고승이었던 구마습이 쓴 책을 말입니다. 그 고승은 자기가 무예를 연마하던 끝에 창안한 화염도에 대해 상세히 써 놓았지요. 저는 일심으로 이 화염도를 익혀 이렇게 중원에 찾아온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중원 종남산 전진교의 주백통이라는 사람을 내놓고는 적수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화산에서 무예를 겨룬 당신들 5대 고수 말고는……." 단지흥은 실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보아하니 이 라마 중은 중원의 5대 고수들과 무예의 높고 낮음을 겨루기 전에는 서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스님, 나는 스님과 무예를 겨룰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도 보셨겠지만 대리국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절망하고 비관합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고, 다투고, 겨루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소. 이 회염도는 무림에서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것으로 나에 이르러 간신히 맥을 잇게 된 것이오. 하여 중원과 대리의 5대 고수들과 한번 무예를 겨루어 보기만 하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코끼리 진 안에서 비록 폐하께 은공을 입기는 했으나 난 꼭 폐하와 겨뤄야만 하겠소!" "이보시오, 스님! 중원 무림에서 무예가 제일 높은 사람은 아마도 전진교 교주 왕중양일 겁니다. 그 사람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더러 무덕도 높은 분으로 누구도 당해 내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무예를 겨루기를 원한다면 왜 왕중양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바로 눈앞에 당신 같은 고수가 있는데 하필 왕중양은 뭣 하러 찾습니까?" 단지흥은 멀거니 라마 중을 바라보더니 더는 말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라마 중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리분별에 밝은 덕망 높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헛 보았군. 계속 이 핑계 저 핑계 들이대며 발뺌을 하는 걸 보니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마중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곧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삽시에 손을 모로 세워 있는 힘껏 단지흥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것이 바로 백여 년 동안이나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던 화염도란 장법이었다. 단지흥은 대번에 동가슴을 얻어맞아 울컥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래도 그는 그냥 제자리에 앉은 채 라마중을 그윽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라마중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지금 3할밖에 쓰지 않았다. 내게 이만한 재간밖에 없는 줄 알고 여유를 부리는 모양이나 오산이다. 오산! 내가 당신을 죽이자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하지만 내가 너무나 쉽게 죽여 버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계략을 부려 이겼는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입은 있으되 할말이 없게 되지 않겠는가.' 라마 중은 이빨을 사리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단황 나으리,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람 대접을 한다면 어서 내 요구에 응하시오. 그렇지 않고 이토록 끝까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난 당장에 당신을 죽여 버리겠소!" "당신은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전에는 나 역시 당신처럼 하늘 넓고 땅 넓은 줄 모르는 인간이었소. 그때를 돌이켜보면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 남과 힘을 겨루고 사람 잡기나 겨루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참으로 우스운 일이요, 너무나도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거리란 말입니다." 단지흥은 얼마만한 고행을 통해 이토록 철저한 깨달음에 달할 수 있었던가. 그러니 라마 중이 그것을 이해할 리 만무였다. 그는 그저 자기를 야유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더욱 발끈 화를 냈다. "좋다! 그럼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거린가 아닌가!" 라마 중은 또 한 장을 내갈겼다. 이 한 장은 더욱 위력이 컸다. 단지흥은 앉은걸음으로 수장이나 뒤로 밀려나고 다시금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런데 정작 선지피를 토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거뜬해지는 것이었다. 단지흥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살점을 베어서 독수리에게 먹이셨다. 부처님께서 왜 자기 살점을 독수리한테 베어 주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독수리는 부처님과 달리 일생의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보아하니 이 라마 중도 사리를 모르는 자이니 나 역시 부처님께서 독수리 대하듯 이 중을 대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단지흥은 침잠한 채 조용히 묵상하고는 길게 탄식했다. "스님께서는 서역에서 오셨다니 구마습이라는 고승이 후에는 천하 《역경》을 집대성하셨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라마 중은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스님께서 보건대 구마습이란 고승이 후에 불경을 번역하신 게 옳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이전에 살인에 열중한 게 옳았다고 여기십니까?" 라마 중은 단지흥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이때에 왜 이따위 말만 늘어놓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구마습 스님은 무예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이 대리에서도 보정제와 한번 겨루어 이긴 바 있습니다. 나 역시 내 무예로 천룡사 모든 고수들을 무릎 꿇릴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줄곧 품어 왔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런즉, 당신의 그런 질문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소이다!" 단지흥은 정색을 하고 듣고 있더니 불현듯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웃기는 왜 웃소?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당신은 불법을 모르는 중이로군요. 그러니 내가 왜 웃는지 의당 알 수 없을 테지……. 옛날의 구마습 같은 고승도 종당에는 불경을 해석하는 대사가 되지 않으셨소? 천룡사 스님들도 매일 그분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계시오. 그분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나서는 누구나 선행을 베풀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지요. 구마습 스님께서 천하 중생들에게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서역에서 오셨으면서도 그분의 선행은 본받지 않고 그 무슨 화염도 만 믿고 남들과 완력이나 겨루고자 하니 왜 웃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라마 중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단지흥의 입가에 흘러내린 선지피를 보면서 딴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벌써 내상이라도 입은 게야? 왜 싸울 생각을 안 하느냔 말이야? 지금 이 사람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때를 놓치게 된다?' 라마 중은 마음을 도사려 먹고는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단황, 당신이 입으로 연꽃을 토해낸다 해도 내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즉시 두 손을 앞으로 쓱 뻗었다. 이 한 장이면 단지흥은 끝장이 나고야 말리라. 일순 천지를 진동하듯 요란한 소리가 두 사람을 뒤흔들더니 단지흥은 그만 그 힘에 비칠 자빠질 듯하다가 간신히 몸을 가누면서 호통을 쳤다. "그따위 재간으로 나를 어쩔 테냐?" 간신히 몸을 추스르기는 했지만 단지흥은 또다시 선지피를 토해냈다. 라마 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다구나. 드디어 중상을 입은 게로군! 이자가 내력을 잃은 틈을 타서 일격에 죽여 버려야겠다! 그러면 내 손으로 천하 5대 고수 중 한 사람을 제거하게 되는 셈이다!' 라마 중은 급급히 손을 모로 세우고는 단지흥을 향하여 똑바로 내질렀다. 이번엔 단지흥은 살짝 몸을 피했다. 그때였다. 돌연 독경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더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마 중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백발 노승 고선 장로가 버티고 서 있었다. 고선 장로는 라마 중을 쏘아보면서 대뜸 호통을 쳤다.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으로서 이런 악행을 저지를 때에는 이미 악귀의 길에 들어선 것이나 진배없느니라. 일찍이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그 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라마 중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입을 못 뗐다. 고선 대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듣자니 네 놈의 사부는 구마습 스님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이런 불초한 제자가 나타났을꼬?" 고선 대사가 서릿발같이 부르짖자 라마 중은 할말이 궁했는지라 고선 장로를 쏘아보면서 그저 소리만 질러댔다. "흐흐흐, 고선 장로! 마침 잘 왔다. 네 놈과도 겨뤄 보려던 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미 네 놈과 겨루지 않았느냐? 네 놈은 이미 졌어!" 라마 중은 코방귀를 뀌면서 냉소를 날렸다. "내 이미 너희 그 잘난 황제에게 중상을 입혔거늘 그게 무슨 소리냐?" 고선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장탄식을 했다. "불행한 일이로고! 구마습 대사께 이따위 개망나니 후예가 있다니……. 구마습 대사께서 살아 네 놈이 이따위 행실을 하고 다니는 걸 보셨다면 그 참괴감이 하늘을 찔렀겠다. 이 노옴! 네 놈은 벌써 세상만사 사리 이치에서 졌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한지고, 가련한지고!" 라마 중은 말귀를 알아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뻐들뻐들하니 방약무인하게 외쳐댔다. "고선 장로, 그따위 허튼소리는 그만두시오. 만일 장로가 나를 이긴다면 그따위 소리도 순순히 다 받아들이지. 하나 장로가 진다면 천룡사 무예는 죄다 거짓말이 되는 것 아니겠소?" "가련토다, 가련토다……. 기어코 한번 겨뤄 보겠다? 할 수 없군! 정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보게. 자네가 화염도 초수로 내 앞가슴을 세 장 갈겨 보게. 만일 내가 내상을 입으면 자네가 대리국을 이긴 것으로 치고 대리국 단씨를 이긴 것으로 치지! 어때?" 라마 중은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저 늙다리 중이 드디어 나한테 속았구나. 내가 화염도를 한 절반쯤 익혔다고 하니 참말로 믿고 있잖아! 사실 나는 이미 6, 7할쯤은 익혔어. 평소에 허풍치기 싫어하는 성미라 그렇게 말했을 뿐인걸. 이 늙다리야, 넌 오늘 영락없이 내 손에 죽었다. 그리고 너희 대리 단씨도 내 이 서역 무예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해!' "그럼 시작해 볼까요?" 라마 중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제자리에 선 채 급히 운기하여 기를 단전(丹田)에 몰아넣고는 라마 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라마 중은 고선 장로와 두 장 거리를 두고 서서 기를 안정시키고는 침짓 별 대수롭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고선 장로는 이전에 구마습도 바로 이런 초수로 일양지의 육맥신검을 제압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장로는 인자한 표정으로 라마 중을 노려보았다. 고선 장로는 라마 중이 지금 비록 태연하게 처신하고는 있지만 그의 화염장이 내리떨어지는 날에는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 생각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가 손을 쓰기만 기다렸다. 일순 라마 중은 손을 치켜 올리더니 번개같이 장화도로 고선 장로의 앞가슴을 내리갈겼다. 고선 장로는 라마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부터 이 일격이 대단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라마 중의 손은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단지흥도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고선 장로는 뒤로 두 걸음 비칠 물러서서 라마 중을 쏘아보더니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화염도는 이미 6할 이상의 위력을 가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