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8편 (68/70)
그럴 거면 이왕에 재미나 보고 죽자.' 한 궁녀는 마침내 작심을 하고는 선뜻 입을 열었다. "달갑게 분부를 따르겠사온즉, 어서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러자 숙비는 냉소를 치면서 손짓을 했다. 어서 태감을 불러들이라는 뜻이었다. 궁녀 몇이 냉큼 뛰어나가 눈에 띄는 대로 태감들을 꼬드겨서는 얼른 데리고 돌아왔다. 태감들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적이 어색하기만 했다. 궁녀와 태감들은 서로 마주선 채 힐끔힐끔 곁눈질이나 할 뿐 누구 하나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평소에는 서로 하나씩 짝을 맞추어 재미를 보느라고 야단들이었으되 오늘은 숙비가 보는 데서 그 짓들을 하자니 자못 불안스러웠던 것이다. '보아하니 저 숙비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폐하한테 보복을 하자는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니 이 일이 폐하한테만 발각되지 않으면 만사대길이나 만의 하나 발각되는 날에는 다들 끝장이다.' 다들 멀뚱멀뚱 서서 눈만 꿈뻑거리는데 누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숙비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멋들어지게 한번 놀아 보십시다." 그 말에 모두들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고도 너나없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데 일순 태감 하나가 쓱 앞으로 나서며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내 벌거숭이 알몸이 되었다. 그러자 앞을 다투어 궁녀들과 태감들이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 숙비의 침궁 침실 안에서는 몇 쌍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발그레 상기 돼서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마주앉았다. 숙비는 상좌에 높직하니 올라앉아 이들을 굽어보았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추상같이 명을 내렸다. "태감들은 듣거라. 너희들은 모두 사내라고 할 수 없는 종자들이니 별로 구경할 만한 거리도 안 된다. 그러니 네 놈들은 각자 계집 하나씩을 맡아 성심성의를 다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멋진 구경거리를 만들어 내란 말이다. 저 계집들의 아래고 위고 죄다 물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게 하란 말이야." 그리고는 숙비는 흥을 잔뜩 돋워 놓으려고 태감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아무리 영이 지엄하다 해도 제정신으로야 할 수 없는 짓 아닌가. 한 순배, 두 순배, 술이 돌자 태감들은 차차 술 기운이 돌아 게슴츠레하니 궁녀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한 사내가 계집에게 후딱 달려들자 저마다 와락와락 계집들한테 달려들었다. 벌거숭이 남녀들은 이내 한데 어우러져 서로 애무를 하고 입을 맞추고 샅을 만지작거리며 바야흐로 사뭇 음란한 정경을 자아냈다. 숙비는 눈 한 번 깜빡 않고 이 남녀들의 정사를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혼자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폐하, 당신의 이 황궁을 좀 보소서. 이 천첩만 사내와 놀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옵니다. 심지어 태감들마저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지 않사옵니까." 숙비는 쓴웃음을 짓더니 불현듯 어깨를 들까불며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춘정이 동해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쏟아 부으며 한데 얽히고설키며 돌아쳤던 태감과 궁녀들은 얼굴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일순 서로를 마주보았다. 급기야 코에서 단내가 확확 나고 큰 바위 덩이에 짓눌린 듯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듯 갑갑하여 시원히 소리라도 질러보려 했으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손도, 팔도, 다리도, 온몸이 뻣뻣하니 굳어지며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미약 독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진 것이었다. 그들은 혹은 부둥켜안고, 혹은 드러누운 채 숙비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숙비는 의미심장하니 이 남녀들을 쏘아보다가 싸늘히 웃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이 그런 게 아니옵니다, 폐하! 어디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시옵소서! 폐하는 후회하고야 말 겁니다. 한평생 이 광경을 뇌리에 담아 두게 될 겁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태감과 궁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잽싸게 손을 놀리며 더한층 음탕해 보이도록 궁녀들과 태감들의 자세를 이리저리 돌려놓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들어 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내배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지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쭉 휘둘러보더니 일순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꼭 미친년처럼 주절거렸다. "폐하께서는 나를 죽이려 해. 그러니 너희들은 모두 내가 저승길로 갈 때 나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탓하진 말아라. 이 모든 것은 폐하가 부덕한 소치이니라." 태감과 궁녀들은 몸뚱이는 비록 뻣뻣이 굳었을지언정 정신만은 또렷하였다. 그들은 숙비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정을 봐서 용서해 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숙비는 궁녀와 태감들을 둘러보다가 일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나더러 용서하라구? 그럼 나는 누가 용서해 준단 말이냐?" 숙비는 일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나보다 더 가련한 줄은 내 익히 알고 있노라. 어쨌든 난 한때 폐하에게 은총을 받았다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너희들은 죄다 가짜배기들하고만 어설프게 놀아난 게 아니더냐. 그러다가 오늘날 이 꼬락서니들이 됐으니 이 얼마나 처량한 신세인가. 실로 너희들은 오명을 뒤집어쓰기에는 너무 너무 억울한 것이야." 숙비는 짐짓 침울하니 늘어놓더니 또 한바탕 미친 듯 웃어댔다. 세상일을 모르는 듯 밤은 무정하게 깊어만 갔다. 새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황궁 안으로 은은히 울려 퍼졌다. 숙비는 문득 넋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폐하, 천첩은 폐하한테 이 장면을 보이겠어요. 때로는 폐하의 궁중에서 사는 사람들도 모두 아주 음충한 짓을 하고 싶어한답니다. 폐하는 정녕 이걸 막아낼 수 있나요?" 밤이 깊도록 숙비는 울고 또 울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자책을 하며 연신 주워섬겼다. "너는 폐하께 아들을 낳아 줄 수도 있었어. 그러면 더는 숙비가 아니라 황후마마가 되어 이 세상에서는 더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지 누가 알아! 그래, 그럴 수도 있었어." 그녀는 짐짓 눈물을 훔치며 태감과 궁녀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또 중얼거렸다. "오늘 밤 일은 참말 잘됐어. 내일 날이 밝으면 폐하께서 돌아오실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는 보기 싫어도 너희들을 보러라도 이곳에 오실 게 아니냐? 하지만 너희들의 이 꼬락서니들을 보시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진노하실 게야!" 숙비는 갑자기 술주전자를 집어 들더니 입에다 콸콸 들이부으면서 비칠비칠 태감과 궁녀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이 한 쌍은 영 틀렸어. 맘에 안 들어. 죽은 송장도 아닌데 이따위 자세로는 재미를 본다 할 수 없지 않아?……이 한 쌍은 참 멋지구나! 폐하께서도 보시면 아마 칭찬할 거야. 웃는 맵시 역시 일품이다. 그리고 이 한 쌍은……." 그녀는 주절주절거리더니 천천히 상좌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젖혔다. 그렇게 알몸이 된 채로 궁녀와 태감들을 게슴츠레 바라보며 다시 술주전자를 들었다. 바로 태감과 궁녀들이 마신 그 술이었다. 그녀는 주둥이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다리를 쩍 벌려 자기의 옥문에다가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옥문에서 술이 철철 흐르자 그녀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코끼리 떼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 밖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제일 앞서가는 코끼리 잔등 위에 단지흥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대리의 사대 시위들은 대번에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두지 못할까! 어서! 폐하를 내놓아랏!" 동주 처녀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지흥에게 외쳤다. "저 사람들을 물러나라고 하세요. 다시 싸움이 붙으면 피차에 재미 없어요." 그러자 단지흥은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선비를 바라보았다. "여보게 승상, 자네들한테 한 말은 모두 내 진심이노라. 그러니 자네들 넷은 급히 황궁으로 돌아가 내 아우 단지방을 잘 보필하게. 단지방은 필히 성군이 될 것인즉!" 선비가 다급히 외치려는데 라마 중이 한 발 앞으로 내달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단황님, 사나이의 의리를 지켜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시는군요. 이전에는 단황 나으리의 위인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알고 보니 실로 탄복하옵니다. 살아서 숙녀동에서 돌아오신다면 꼭 한 번 무예를 겨루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라마 중은 홱 몸을 돌려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라마 중이 가 버리자 앓던 이 하나가 빠져 버린 듯 속이 시원했다. 보살은 기분이 좋아서 우쭐대며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선비 놈아, 네 놈은 네 상전이 붙잡혀 가는데도 그냥 이 어르신과 까불어댈 거냐? 넌 네 상전도 구해 주지 않으려느냐?" "대환희 보살, 안 그래도 오늘 황제 폐하의 엄한 영도 있으니 네 년을 필히 죽이려던 참이다. 네 년은 그렇게도 죽고 싶으냐?" 선비는 대갈일성을 내지르고는 다른 세 시위와 함께 일제히 손을 썼다. 천룡사 스님들도 그와 동시에 나섰으므로 보살네 허다한 뚱뚱보 여인들을 삽시에 제압해 버렸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노기충천하여 달려들었다. "이 놈들! 난 네 놈들과 끝까지 해 볼 테다! 네 놈이 우리 애들을 죽였으니 내가 너희 대리국의 모든 씨를 말리지 않으면 대환희 보살이 아니야!" "하동(河東)에 울부짖는 사자가 있다더니 하서(河西)에도 울부짖는 사자가 하나 있었군?" 선비는 한껏 비아냥거리며 보살을 노려보았다. "먼저 네 놈 승상 놈부터 없애야겠다! 자, 재주가 있으면 피해 보아랏!" 대환희 보살은 선비 앞으로 바싹 덮쳐 들었다. '흐흐흐…… 나한테 미인(媚人)이란 독약이 있다는 걸 모를 테지……. 너희들은 아직 그 맛을 몰라. 이 독약을 처음으로 안겨야 할 놈은 아무래도 이 선비 놈이야.' 대환희 보살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독약 가루가 담긴 봉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찰나, 고선 장로가 소리쳤다. "나무아미타불! 대환희 보살은 허울좋게 보살이란 이름만 썼을 뿐 보살의 마음은 갖추지 못했군. 그 독약 가루를 뿌려 사람을 죽일 작정이냐?" 대환희 보살은 피식 웃으며 코방귀를 뀌었다. "그으래? 그렇게도 남이 고통받는 게 가슴이 아프냐? 그럼 어디 네 놈부터 먼저 쓴맛을 한번 보아 봐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독약 봉지는 고선 장로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조심하십시오!" 선비는 고함을 지르며 중간에서 독약 봉지를 가로채려고 홱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천룡사 고승이 그를 제어했다. 고선 장로는 꼼짝도 않고 그 독약 봉지가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것을 똑바로 노려 보면서 장탄식을 했다. "대환희 보살, 어찌 이리 무고한 중생을 해치려고 못된 궁리만 하는 게냐?" 고선 장로는 일순 손을 앞으로 뻗쳐 손가락을 가볍게 한번 톡 퉁겼다. 그러자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면서 독약 봉지는 도로 대환희 보살이 서 있는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원래 독약 봉지가 터져 고선 장로가 독약 가루를 옴팡 뒤집어쓰지는 못할 지라도 티끌만치는 그의 몸에 묻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만 돼도 고선 장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중들도 부득이 장로를 살려 보려고 달려들 테니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으로 고선 장로가 그저 손가락을 한번 통기니 독약 봉지는 엉뚱하게도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보살은 기겁을 하며 부랴부랴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껑충 뛰어 몇 길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 독약 봉지는 마치 눈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묘하게도 그녀를 쫓아 정통으로 날아왔다. 그녀는 다급히 내공을 모아 두 손바닥을 확 펴서 내밀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되레 독약 봉지에 맞아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뿐 더러 바로 그 순간, 독약 봉지가 툭 터지며 삽시에 온몸에 독약 가루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눈으로 코로 독약 가루는 풀풀 날아들었다. 독약 가루가 눈에 들어가자 대환희 보살은 불에 덴 듯 눈이 따끔 따끔하여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면서 부랴부랴 품속을 더듬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황하여 순식간에 서너 봉지나 꺼냈으나 해독약 봉지는 그중에 없었다. 다급할수록 그녀는 손이 점점 굳어지고 비명소리만 각일각 높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눈 장작할 새에 대환희 보살의 뚱뚱한 몸집은 빼빼 마른 장작개비처럼 변하더니 키도 점점 작아지고 급기야는 어른 허리춤에나 닿을까말까 하게 작은 난쟁이가 돼 버리지 않는가. 사람 몸뚱이가 작아지느라고 뼈다귀들이 아드득아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수림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한결같이 치를 떨면서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이 끔찍한 광경에 아연실색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고선 장로 역시 이 독약 가루가 이처럼 무서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던 터라 할말을 잃고 말았다. 단지흥은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서 땅바닥에서 발발 기어 다니는 난쟁이 대환희 보살을 굽어보다가 힘없이 고선 장로에게 말했다. "고선 장로님, 저 여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대환희 보살을 굽어보고 있자니 치주가 눈앞에 어른거려 그는 고개를 툭 떨군 채 외면해 버렸다. 세상만사가 죄다 암담하게만 생각되었다. 동주 처녀는 단지흥의 기색을 살피고는 언뜻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갑자기 대환희 보살이 불쌍해지기라도 하셨나요?" 단지흥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대환희 보살은 운남에서 그 악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저런 악인이 어찌 불쌍하겠는가. 난 단지 대환희 보살 손에 저 지경이 됐던 내 귀비 하나를 떠올리고 있노라." 단지흥은 몹시 비장해 보였다. 동주 처녀는 일순 호기심이 일어 눈을 반짝이며 그 후일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르르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와 더듬어 보니 치주야말로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했고 자기도 그 어느 황비들보다 치주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치주야말로 자기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어야 할 여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치주였지. 그 여자는 죽었어. 너무나 작아져서 밤에 침대 위에서 가슴 설레는 그런 쾌락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못내 애달파하다가 그만 자살하고 말았어……." 단지흥의 목소리는 적이 침통했다. 동주 처녀는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보아하니 이 사내는 정이 많은 사내야. 그런 사내가 아니라면 그 여인 치주가 왜 자살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다정다감한 사내가 영고하고는 왜 정분이 끊어졌을까? 이들 둘 사이에는 필시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처연히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대환희 보살은 참을 수 없이 혹독한 고통에 온몸이 옥죄인 채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손끝, 발끝으로 고통이 밀려 나가면서 웬지 몸이 가뿐해 짐을 느꼈다. 보살은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치떴다. 그 순간, 보살은 그만 눈앞의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거대하게 보이고 사람들이 갑자기 키가 다섯 자는 더 자란 듯해 보였으며 까마득히 먼 곳에 괴물 같은 코끼리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실 그때껏 혼비백산하여 의식을 잃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차츰차츰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독약 봉지가 손바닥에 맞아 터지면서 그녀는 바로 자기가 뿌린 미약에 자기가 중독된 것이었다. 그녀는 일순 전율을 느끼며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렇게 사느니 자살하는 것이 백번 천번 나을 터였다. 그녀는 정신없이 뱅뱅 돌아치다가 언뜻 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와락 달려들어 칼자루를 손에 쥐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제는 칼 한 자루 들어올릴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바락바락 안간힘을 쓰면서 두 손으로 칼을 들어올렸지만 번번이 무릎 위까지도 올리지 못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놈들아! 날 죽여 다오! 어서 날 죽여 다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독약 가루가 흩어져 있는 곳을 찾아서 벌벌 기어갔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널린 독약 가루를 한줌이나 와락 움켜잡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난 죽어야 해! 죽어야 해!……." 대환희 보살은 독약 가루를 주먹째 입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더니 즉시로 땅바닥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삽시에 그녀의 몸뚱어리는 점점 더 점점 더 작아지더니 급기야는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쪼그러 들었다가 이윽고 한 덩어리의 고깃덩이로 변하고 종당에는 사람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때 운남 땅에서 내로라하던 대환희 보살은 순식간에 뼈다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얼빠진 사람마냥 한결같이 넋을 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니……. 그 광경을 굽어보고 있던 단지흥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자, 세상만사 진토와 같다 했거니 이런 꼴들을 더는 보구 싶지 않다!" 단지흥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동주 처녀가 휘파람을 불자 코끼리는 다시금 천천히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선비는 크게 낙담하여 황황히 코끼리 떼 앞을 막아 나서면서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승상님, 당신도 들으셨겠지만 황제 폐하 스스로 숙녀동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에요." 동주 처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보게 승상, 길을 비키게! 더는 다른 말 말고 제발 내 말대로 하게나!" 선비는 단지흥이 이렇게 떠나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여 부복을 하고는 간곡하게 말했다. "폐하, 소신의 소견으로도 단지방 어른께서 즉위하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의당 절차가 필요한 것이옵니다. 지금 황궁에는 폐하께서 채 처리하시지 않은 국사가 가득하옵니다. 이런 나라 대사들을 제때 제때 처리하시지 않으면 기필코 중도이폐하게 되옵니다. 소신이 보건대 폐하께서 숙녀동 사람들한테 무슨 약속하신 일이 있으시더라도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 국사들을 처리하신 뒤에 가세도 늦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때 가서는 우리 시위들이 직접 폐하를 모시고 숙녀동으로 가겠나이다." 선비의 말은 구구절절이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많은 국사들을 아직 매듭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주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보오, 동주. 만일 이 단지흥의 사람됨을 믿는다면 먼저 대리로 돌려보내 주게나. 열흘이나 이십 일 말미만 주면 되이. 그때 가서 내 꼭 숙녀동으로 찾아가겠어. 만일 정 믿기지 않는다면 나한테 독약을 줘. 먹은 후 열흘이나 이십 일 후에 죽는 그런 독약을!" 동주 처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안 돼요! 우리가 어찌 당신을 믿겠어요? 우리 할머님께선 폐하 하나만 믿고 이 숙녀동을 떠나가셨는데 폐하는 우리 할머님에게 어찌하셨지요? 구박하다 구박하다 못해 우리 할머니 아기까지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할진대 어찌 폐하를 믿을 수 있겠나요?" 동주 처녀는 적아 단호했다. 숙녀동의 다른 처녀들도 모두 똑바로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하나하나의 눈빛에는 불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비는 동주 처녀를 쏘아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뭐지요? 왜 웃는 거예요?" 동주 처녀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네 숙녀동 사람들이 너무나 우스워서 그러오. 나는 당신들이 왜 폐하에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는지 정말 모르겠소. 폐하께서 황비님을 구박했다고 그렇게 일심으로 떠들고 있지만…… 좋아요, 그 말대로 폐하가 황비님을 구박했다고 칩시다. 그렇담 그렇게 구박을 당하면서도 황비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몇 년간이나 계속 황궁에서 계셨겠소? 진작에 도망치시지 않고? 당신들도 황비님의 성미를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래 황비님 성미로 그렇게까지 견디셨 겠나 말이오! 칼부림이 나도 벌써 났지!" 그러자 동주 처녀는 고개를 반짝 쳐들고 쏘아붙였다. "당신네 황제는 천하 5대 고수 중 한 분이에요. 그런데 하물며 우리 할머니께서 어찌 단황의 적수가 될 수 있어요. 일국의 승상이라는 사람이 너무 억지를 부리는군요." "황비님께서 폐하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건 한치도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폐하가 황비님을 구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셈이오. 정박을 하려 들었다면 황제께선 진작에 손을 썼고 그럼 황비님은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지 않았겠소?" 선비는 조목조목 근거를 들이댔다. 그러자 숙녀동의 처녀들은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