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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7편 (67/70)

2026-09-30 18:24:37 조회 18
대사님께서 나가시기만 하면 나 홀로라도 빠져 나가는 수가 따로 있습니다." 고선 장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래 안에 있던 사람이 밖을 내다볼 때 기실 나가나 들어오나 다 같은 거지요, 허허허……." 그리고는 고선 장로는 더는 두말도 않고 몸을 훌쩍 날려 코끼리 진 밖으로 떨쳐 나갔다. 그는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대환희 보살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께선 나더러 너희 사악한 무리들을 극락세계로 제도하라 하셨다. 알아들었느냐?" 동주 처녀와 숙녀동 처녀들은 이 고선 장로의 재간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녀들은 일단 고선 장로가 손을 쓰기만 하면 자기네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흥의 말을 듣고 의리를 지켜 코끼리 떼를 날아 넘으면서도 손가락 하나 내흔들지 않았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고선 장로의 인품에 감복해 마지않았다. 코끼리 진 안에 남아 있던 선비와 일곱 중들도 일제히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코끼리 사이로 난 비좁은 길로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 나갔다. 밖에서 뚱뚱보 여인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농부, 어부, 나무꾼 그리고 라마 중은 이들이 진 밖으로 나오자 다급히 소리를 질러댔다. "폐하는 어디 가시고 이렇게들만 나오십니까?" 평소에는 언제나 늑장을 부리던 어부마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승상, 폐하는 어디 계시오?" 선비는 워낙 궁리가 깊은 사람인지라 이쪽의 전열을 흩트리지 않으려고 짐짓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영을 내리셨다! 이 극악무도한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깡그리 잡아죽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급급히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농부와 나무꾼, 어부도 단지흥의 신변이 안전함을 확인하자 마음이 한결 놓여 더욱 기세 사납게 공격을 들이댔다. 대환희 보살은 그만 기겁을 하여 충피를 마구 불러댔다. "충피! 어디 갔느냐? 빨리 독벌과 독사들을 풀어 놓아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충피는 다시금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쥐죽은듯 엎드려 있던 독사들은 대번에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는 어부, 농부, 나무꾼, 선비를 향해 덮쳐 들었다. 여덟 중들은 얼른 내달아 손가락을 휘둘러댔다. 독사들이 새까맣게 몰려 와도 누구 하나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독사들은 두 동강이 나 널브러졌다. "고선 장로님, 이 독사들을 모조리 죽여 주십시오. 살려 두었다가는 이후에도 숱한 생령을 해칠 겁니다." 선비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뱀들을 모조리 죽여라!" 여덟 중들은 일제히 손가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삽시에 공중으로 독사들이 마구 날아오르고 핏방울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고선 장로와 일곱 스님이 쓰는 지법은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눈여겨보니 이들의 지법은 단지흥의 지법과는 퍽 달랐다. 여덟 스님의 손가락이 어지러이 오락가락하자 마치 공중과 땅에 날카로운 검으로 만든 그물이 둘러쳐지기라도 하는 듯 독사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한 장 남짓 밖에서 벌써 몸뚱이가 몇 토막 으로 동강나곤 하는 것이었다. "충피, 저 중 놈들과 결판을 내거라!" 대환희 보살은 조급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충피도 흠칫 놀라며 독사들을 몽땅 풀어 놓았다. 하지만 독사들은 기어가는 족족 여덟 스님의 칼날 같은 지풍에 맞아 무더기로 죽어 갔다. 잠깐 사이에 독사들은 거의 다 죽거나 상했다. 대환희 보살은 악에 받쳐 또 소리를 질러댔다. "충피, 독벌! 빨리 독벌을!" "알았습니다!" 충피는 얼른 또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금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갈수록 점점 커지더니 하늘을 가득 메우고 독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고선 장로는 그 모습을 보고 황황히 소리를 질렀다. "독벌이야, 조심하게나!" 고선 장로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선비, 어부, 나무꾼, 농부 앞에 막아 서서 다시금 지풍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법은 여전히 위력이 대단했으나 방금 전 독사 떼를 소탕할 때보다는 훨씬 못했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 내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이나 흐르자 일곱 중들은 몹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고선 장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았다. '어찌 이다지 흉악할 수 있는가.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려 했더니 그랬다가는 후한이 무궁하겠구나.' 고선 장로는 즉시 대환희 보살을 향해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대환희 보살, 공손히 승복하지 않으면 당장 너를 죽여 버릴 테다!" 대환희 보살은 점점 우세로 나아가고 있는지라 득의양양하게 응수했다. "이 늙다리 중 놈아, 네가 만일 환희선을 좋아한다면 내 곱게 승복하마. 그런데 환희선을 하더라도 나와 같이 하면 어떠냐? 듣자니 넌 그런 짓거리를 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하더라만!" 고선 장로는 대로하여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곧추 대환희 보살한테 덮쳐 들려 했다. 그 순간 선비가 얼른 옷깃을 잡았다. "고선 장로님, 아직은 내버려둡시다. 지금 제일 괘씸한 것은 저기 숨어 있는 저 난쟁이올시다." 고선 장로는 선비가 가리키는 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무 뒤에서 괴상한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네 놈은 이미 우리 천룡사와 원수진 일이 있는 터, 내 오늘은 가만두지 않으리라!" 충피는 고선 장로의 비범한 초수와 재간을 익히 아는지라 그가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도망치려고 엉겁결에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계속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냅다 뛰었다. 그러자 독벌들은 그 소리를 따라 웅웅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고선 장로는 훌쩍 몸을 솟구쳐 그의 눈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삽시에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짓누르면서 호통을 쳤다. "밥 먹듯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뉘우침도 없느냐?" "후……후회……." 그러나 고선 장로가 힘을 한 번 주자 그는 채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두개골이 우그러 들며 두 눈에서 삽시에 피가 솟구쳤다. 충피는 그대로 땅바닥에 뻗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충피는 평소 피를 먹여서 독벌들을 길들여 왔는지라 독벌들은 충피의 몸뚱이에서 피 냄새를 맡자 대번에 그의 몸뚱어리에 달라붙어 윙윙거리며 피를 빨아먹었다. 충피의 몸뚱이에는 분봉하는 벌 떼처럼 삽시에 독벌들이 몰려들었다. 대환희 보살은 충피가 이미 죽은 송장이 된 줄도 모르고 마냥 충피를 불러댔다. "충피! 빨리 독벌을 풀어 놓지 않고 뭐 하는 게냐? 어서 독벌을 풀어 저 놈을 죽이거라!"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충피는 대답이 없었다. 뿐더러 독벌도 보이지 않았다.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더럭 겁을 집어먹고 얼른 사위를 훑어보았다. 오로지 충피만 보이지 않을 뿐 늙은 중이나 단지흥의 네 시위나 라마 중, 천룡사의 일곱 중은 하나도 빠짐없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래도 버티고 서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질겁을 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얘들아! 저…… 저 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여라!" 사내들과 뚱뚱보 여인들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기는 했으되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고 그저 몇 합 싸우다가는 도망칠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이 사내들은 모두 미약을 먹고 이성을 잃은 놈들이니 각별히 조심들 해야 합니다!" 선비는 나직이 귀띔을 했다. 그러자 천룡사 중 서넛이 달려나가 순식간에 사내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왔다. 사내들은 무릎을 꿇려서도 계속 발악을 해댔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봐라! 난 공동파의 검객이다! 육각유성수가 뭔지 알기나 아는가?" 선비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사내들을 똑바로 노려보더니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따위 악종들을 죽여 버리지 않으면 후일 우환거리만 남기게 됩니다. 가차없이 죽여 버리시오!" 하지만 중들은 차마 살생을 할 수 없어서 죽지 않을 만큼 사정을 두어 팔다리만 끊어 놓았다. 놈들은 팔다리가 끊겨 땅바닥에 나뒹굴면서도 마냥 악담을 늘어놓았다. 고선 장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돌중 놈들, 감히 내 수하 사람들한테 손을 대다니! 이 어르신이 오늘 네 놈들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대환희 보살은 두 눈을 까뒤집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 분에 못 이겨 윗통을 활활 벗어젖히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어댔다. "단지흥 이 놈! 냉큼 나서지 못할까! 내 오늘 네 놈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네 놈의 대리국에는 모두 죽일 연놈들밖에 없어! 사내 놈들은 죄다 쓸개 빠진 놈팽이들뿐이고 계집들은 죄다 낯가죽이 쇠가죽보다 두꺼운 화냥년들뿐이야! 이 노옴, 내 네 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눈을 감으리이……." 코끼리 진 안에는 달랑 단지흥 혼자 서 있었다. 동주 처녀는 그윽이 그를 바라보고 있더니 넌지시 물었다. "폐하의 용기에 참으로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저의 코끼리 떼를 당해 낼 수 있을까요?" "난 살고 죽는 건 이미 초월했다. 그런 건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 사람이야. 영고의 아들은 내가 죽였다. 난 영고한테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죽어 마땅한 죄지! 하여 네가 나를 죽여도 원망하지 않겠노라!" 단지흥은 비장하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푹 주저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할머니, 무슨 술수라도 피우는 게 아닐까요?" 계집애는 대뜸 소리치면서 코끼리 잔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내처 단지흥 앞으로 바투 다가가 갑자기 단지흥의 대혈을 쿡 찌르고는 연거푸 몇 군데 혈도를 거의 다 찔러 놓았다. 선중혈( 中穴)이 찔릴 때 단지흥은 일순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내비치고 낯빛마저 삽시에 변했지만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할머니, 이제는 용 빼는 수가 없을 거예요. 어서 내려오세요." 다른 계집들도 여남은 코끼리 잔등 위에서 뛰어내려 단지흥에게 바싹 다가갔다. "달갑게 죽으려 한다는데 그 소원 기꺼이 성취시켜 주마. 지옥에 가서 고생이나 실컷 해 보아라!" 동주 처녀는 행여 다시 망설이게 될까 봐 급급히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때였다. 계집애가 갑자기 외쳐 불렀다. "할머니!" 동주 처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언뜻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머리가 돈 것 같은데…… 참말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요? 사람을 억울하게 죽여도 마음이 편치 못할텐데……." "그게 그러니까……. 나도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냐! 말끝마다 영고의 아들이라고 하니 정말 이상스럽지 않느냐? 필히 영고의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란 뜻이 아니고 뭐냐? 난 지금도 바로 그 말 때문에 어쨌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동주 처녀는 사뭇 시무룩했다. 계집애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순 손뼉을 탁 쳤다. "묘한 수가 있어요. 죽이지 말고 먼저 우리 숙녀동으로 끌고 가요! 그런 연후에 영고더러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면 되잖아요! 어때요?" 동주 처녀는 대번에 반색을 했다. 실로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조그만 것이 영특하기 이를 데 없구나. 좋다. 그럼 네가 끌고 가도록 해라." 계집애는 단지흥을 움켜잡은 채 몸을 날려 코끼리 잔등 위로 단 번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다들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대리국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귀담아들으라! 너희들의 황제는 우리가 끌고 간다. 너희들이 황제의 목숨을 중히 여긴다면 섣불리 우리 숙녀동 사람들을 노엽게 하지 말거라!" 독수리들은 무리를 지어 빙빙 하늘을 맴돌고 코끼리 떼는 수림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제36장 부처에 귀의한 남제 밤이 깊을수록 숙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시름시름 앉아 있다가 대뜸 궁녀를 보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 "어머나 숙비님도 참……. 승상님께서 황제 폐하의 침궁에서 숙비님을 발견하고 혈도를 풀어 준 연후에 숙비님께서는 승상께 폐하의 행방을 알아 오라고 분부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황비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이르고도 깜빡 잊었구나." 숙비는 또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궁녀를 보고 대뜸 말했다. "네가 가서 그 진짜배기와 가짜배기를 어서 불러 오너라. 내 긴히 할말이 있으니." 그러나 궁녀는 숙비를 힐끔 바라볼 뿐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숙비는 버럭 화를 냈다. "들었느냐, 먹었느냐? 빨리 가지 못할까!" "숙비님께 아룁니다. 그 두 사람은 궁내 연못에 빠져 죽었사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지 반 시진이나 지나서야 송장을 발견했사옵니다. 일각쯤 전에 황후마마께서는 사람을 시켜 송장을 건져 올리라고 영을 내리셨사옵니다." 그 말에 숙비의 얼굴빛은 삽시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서둘러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다. '이런 끔찍한 일이……. 폐하께서는 필시 나한테 무슨 벌을 줄 것인가 궁리하고 계실 것이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에는 난 죽고 말겠지. 두 태감도 그 일을 누설할까 봐 폐하께서 자결하라고 시킨 것일 게야! 결코 나를 용서해 줄 리 없어. 조만간 나를 죽이고 말 거야……."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댔다. 새로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했을 때 불현듯 풍경 소리가 왈강달강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밖에 있는 궁녀에게 소리쳐 물었다. "폐하께선 아직도 안 돌아오셨느냐?" "숙비님께 아룁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사옵니다." 그녀는 한편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도무지 진정이 안 돼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고 궁녀를 불러들였다. "이리 들어오너라. 나하고 좀 놀아 보자꾸나." 궁녀는 놀아 보자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나 차제에 두 태감이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일단 방에 들어서기는 했으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숙…… 숙비님,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제발……‥ 숙비는 벌컥 화가 나서 매섭게 궁녀를 쏘아보면서 따져 물었다. "평소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해 주었느냐?" 궁녀는 나오는 말투가 벌써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는 방바닥에 꿇어 엎드려 애걸하기 시작했다. "숙비님, 평소 이 미천한 것한테 베푸신 은혜는 실로 백골난망이옵니다. 하오나……." 숙비는 궁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손을 쓱 뻗쳐 궁녀의 귀를 있는 힘껏 잡아 비틀었다. "어서 말해 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비틀어 대니 궁녀는 숨이 꺽꺽 막힐 지경이었다. 너무 아파서 입을 딱딱 벌리는 궁녀를 내려다보면서 숙비는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호, 내 은혜에 백골난망이라니 됐다. 그런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을 수 있겠지? 그렇지? 어떠냐, 난 너하고 함께 죽으려 하는데 네 생각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궁녀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일순 귀가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숙비님, 소인은 평소 숙비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사……." 궁녀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숙비는 쥐어뜯을 듯이 세게 한 번 귀를 비틀고는 그녀를 홱 밀쳐 버렸다. 궁녀는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그 꼴도 못 보겠는지 숙비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궁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쌀쌀맞게 웃었다. 꼭 실성한 사람 같았다. "너는 어서 가서 다른 계집애들을 몽땅 불러 오너라!" 그리고는 그녀는 세차게 궁녀를 뒤로 밀어붙였다. 궁녀는 윽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얼마 후 궁녀들이 잠이 덜 깬 눈두덕을 연신 비비대면서 영문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와 숙비 앞에 대령했다. 숙비는 얼떨떨해 있는 궁녀들을 휙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얼마 후에는 죽고 말 것이다.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 숙비의 낯빛이 적이 심상치 않은지라 궁녀들은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려나 하고 잔뜩 가슴을 졸였다. 한참이나 아무도 대꾸가 없더니 이윽고 평소 아첨을 떨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궁녀 하나가 대뜸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폐하께서 숙비님을 그토록 총애하고 계시온데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무 변고도 없을 것이니 숙비님께선 시름을 놓으십시오." "그럴까? 그렇게 됐으면 오죽이나 좋겠느냐. 그렇담 이런 재수 없는 얘긴 그만두고…… 나한테 좋은 술이 있으니 오늘은 모두 시름을 잊어버리고 술이나 진탕 마셔 보자. 중원 땅에서 폐하한테 보내 온 술이노라. 어서 그 술을 가져 오너라!" 숙비의 궁녀가 냉큼 일어나 쪼르르 달려나갔다. 나머지 궁녀들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저마다 속궁리를 하면서 숙비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를 살펴봐도 대관절 무슨 심사로 술판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전이 하는 노릇을 언감생심 물어 볼 수도 없는지라 모두들 속앓이만 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졌다. 궁녀들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으나 감히 술잔을 들어올릴 염도 못 내고 숙비의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봐라, 어서 술들 마시잖고 뭐 하고 있는 게냐?" 숙비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너도 나도 천천히 술을 입에 갖다 댔다. 워낙 좋은 술이라 일단 혀끝에 닿자 향긋한 내음이 쏴하게 돌며 입에 착 감겨 왔다. 그러니 일단 한잔 마시고 나자 두 잔째부터는 술술 잘도 넘어갔다. 이내 얼큰하게 취기가 돌며 궁녀들은 그 무슨 불안감과 공포심도 없이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 궁녀가 숙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숙비님, 소인은 폐하께서 꼭 숙비님을 잘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하옵니다. 황비 영고는 원래 폐하의 총애를 받았지만 종당에는 떠나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귀비 치주 역시 폐하께서 그토록 아끼셨으나 결국은 죽고 말았지요. 총애가 유별한 황비님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궁중에 계시는 분은 오로지 숙비님 한 분뿐이옵니다. 그러니 폐하의 은총은 자연 숙비님께서 독차지하게 될 게 아니옵니까?" 궁녀들은 다들 옳은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숙비는 그 궁녀를 쏘아보며 속으로 냉소를 쳤다. 자기 앞에서 발린 말들만 골라 하느라고 신경을 쓰고 있는 궁녀들이 가소롭기 그지 없었다. 술판은 이제 막 한창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쯤 되자 궁녀들은 모두 얼굴빛이 복사꽃처럼 발그스름해졌다. 궁녀들은 가슴이 갑자기 세차게 뛰고 숨결도 가빠지면서 서로를 흘끔흘끔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답답해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궁녀들은 저마다 저고리 앞자락을 움켜쥐고 마구 잡아들기 시작했다. 숙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뜻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내가 폐하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다. 난 더는 참아 낼 수가 없어. 너희들이 평소 서로 어떤 짓들을 해 왔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남의 눈을 피해 사내들을 홀려서는 온갖 재미들을 다 보았지? 하지만 나만 재수 없게 폐하한테 들켰단 말이다. 오늘 너희들은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해. 그래야 난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어." 뺨이 홧홧 달아오르고 앞가슴이 툭툭 뛰어 정신없이 얼굴과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궁녀들은 그제야 숙비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희들한테 솔직히 알려 준다마는, 난 너희들이 방금 마신 술에다 미약을 타 넣었다. 사내 생각을 하게 하는 춘약(春藥) 말이다. 너희들 몸에 해롭지는 않지만, 정욕을 풀지 못하면 결코 좋지 못할 게야!" 궁녀들은 너나없이 오늘 큰 봉변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숙비의 표독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개중 담이 좀 큰 궁녀가 숙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다가 대뜸 말했다. "폐하께서 계시지도 않으신데, 저희들은 숙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태감들을 불러 올까요?" "그으래? 눈치 하난 빠르군. 그래 태감들은 다 어딜 간 게냐?" 숙비가 사뭇 쌀쌀하게 내쏘자 한 궁녀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다……다들 후원에……." "내가 또 보잘까 봐 알아서 후원에 나가 있으라 한 게야, 응? 내가 그따위 반편 같은 사내놈들을 또 보잘까 봐?" 숙비가 버럭 역정을 내자 모두들 감히 말을 못하고 굽실 머리를 조아렸다. "내 말을 거역했다간 다 죽게 된다는 걸 명심하거라. 하나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 주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녀들은 일제히 방바닥에 꿇어 엎드려 분부를 기다렸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저녁나절에 이 숙비와 두 태감 놈이 어설픈 재미를 보다가 폐하한테 발각당해 혼쭐이 났었다. 그래 두 태감놈은 그 죄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가. 오늘 우리들이 이 숙비의 말을 거역해도 죽음이요, 고분고분 듣는다 해도 역시 저 숙비가 우리들 일을 다 불어 버려 한 동아리로 끌고 죽음으로 들어가려 할 테니 엎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