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3편 (63/70)

2026-09-30 18:24:37 조회 18
대환희 보살은 멍청하니 앉아 있는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 솔직히 말하겠소만 당신의 그 일양지 비결을 나한테 알려만 준다면 난 그저 당신의 한쪽 발과 한쪽 손의 힘줄만 끊어 놓지요. 하지만 경고하건대 알려 주지 않으면 난 폐하를 죽여 버릴 뿐만 아니라 대리 황실의 모든 사람들을 깡그리 잡아죽이겠소." 누구를 죽인다는 말을 듣자 단지흥은 일순 머리가 깨는 듯싶었다. 자기가 바로 천진난만한 어린애를 죽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뿐, 저 여인이 누구를 죽이겠다는 것인지, 그것이 자기를 보고 하는 말인지 하는 따위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처럼 겁을 주어도 단지흥이 여전히 멍청하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대환희 보살은 버럭 화를 냈다. "내 말이 귓구멍으로 안 들어간다, 그런 뜻이오? 어떻게 할 참인가 말이에요?" 대환희 보살이 닦달을 하자 단지흥은 멀거니 쳐다보다가 부지중에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화를 간신히 참으며 그녀는 속으로 궁리했다. '남제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 제 황궁에서 제 귀비에게 중독되어 널브러진 주제가 아니더냐. 죽은 돼지 같은 걸 내 제자들이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입만은 아직 살아 있구나. 내가 네 놈을 죽이자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대환희 보살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일양지 비결을 알려 주겠어요, 안 알려 주겠어요?" 단지흥은 또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사람을 너무 윽박지르지 마라! 난 오늘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한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젖혔다. "일국의 황제라면 사람 한두 명쯤 죽이는 거야 다반사지. 나도 하루에 몇 사람씩은 죽이오." "너무 핍박하지 마라. 까불면 너도 죽여 버릴 테니." 단지흥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쳇, 당신이 알몸으로 덮쳐 들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내가 얼마나 좋아할 줄 알기나 해요?" 그러자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내들과 계집들은 모두 부산스레 손뼉을 치면서 웃어댔다. 뭇 사내와 계집들의 웃음 소리에 단지흥의 머리가 한결 더 맑아졌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찌하여 예까지 오게 됐을까? 분명 저 뚱뚱한 계집들 작간임에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대환희 보살이? 저들이 무슨 수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이곳은 대관절 어디인가?' 기실 단지흥은 내력이 대단한 사람이라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다 보니 모든 내력이 거기에만 집중되어 다른 일에는 무념, 무상, 무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의식을 잃어버린 사람마냥 넋이 나가 있는 터였다. 그러나 답답한 방안을 나와 수림의 신선한 공기를 접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듣게 되니 한데 쏠렸던 내력이 점점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환희 보살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둘러 주위를 잠잠해지게 해 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처지를 안다면 순순히 내 말을 따라요. 그냥 뻗대다가는 손발이 죄다 병신이 된다니까요. 물론 당신 힘줄을 끊어 놓는 게 내 소원은 아니오! 난 그저 일양지 비책을 알고 싶을 뿐……." 그녀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단지흥은 분연히 일어섰다. 그 순간 그의 온몸에 기가 확 뚫린 것이었다. 그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대환희 보살 앞에 우뚝 섰다. 한 사내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단지흥, 이 노옴! 수치도 모르는 짐승 같은 놈! 알몸으로 여자들 앞에 나서다니, 네따위가 황제는 무슨 황제야! 옷을 벗고 나서니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더러운 사내 놈인걸." 그러자 사내들은 다시금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웃어댔다. "대환희 보살!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계속 나를 못살게 굴면 난 네 년을 당장 잡아죽일 테다!" 단지흥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넙죽 주워섬겼다. "호호호, 당신은 볼수록 마음이 동하는군! 계집들이 당신과 한 번만이라도 살을 섞기를 그토록 영원하는 까닭을 이제야 알 만해! 그런데 당신 손발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는 그 무슨 재미를 볼 수 있겠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 재미를 봐? 그래 내 당신 손발의 힘줄을 끊어 놓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래선 안 되겠군! 그 재간에 대해선 참말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야!" 그러자 한 사내가 선뜻 나서며 한마디 던졌다. "보살님께서 저 놈에게 미약을 좀 안기기만 하면 저 놈은 보살님만 생각하게 되고 또 보살님과 재미를 보려고 미친 듯이 따라다닐 겁니다. 그러면 좀 좋습니까?" 단지흥은 대환희 보살 무리들을 쏘아보며 내력을 돋우기 시작했다. 범상한 사람들이라면 혈도를 눌리면 적어도 몇 시진 동안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법이나 그는 일양지라는 세상에 보기 드문 초수를 몸에 지니고 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별로 어렵지 알게 혈도를 풀 수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가 중독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단지흥이 이미 혈도를 풀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지라 여전히 웃으면서 거들먹거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미약만 자시면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해도 나와 재미를 보려고 덤벼들 테니! 이 미약을 잡숴 보시겠소?" 단지흥은 냉랭하니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았다. "난 사람을 죽이는 게 소원이 아니다. 난 오늘 이미 한 사람을 죽였어. 더 죽이고 싶지는 않다!" 대환희 보살은 코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그렇게 극구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지만 난 당신을 죽이고 싶으니 어쩝니까? 하지만 먼저 데리고 놀아야겠어요. 데리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그때 천천히 죽여 주지……. 자, 어서 미약을 먹어욧!" 대환희 보살이 손짓을 하자 두 뚱뚱보 여인이 단지흥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여인이 다가들자 대뜸 고함을 질러댔다. "네 년들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계속 거들먹거리다간 후회해도 이미 늦을 테니." 그러나 두 뚱뚱보 계집은 단지흥을 시들방귀로도 여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섰다. "폐하는 참말 복이 있네요. 보살님께서 친히 보살펴 주시니 얼마나 복 많은 남정네예요." 한 계집이 선뜻 다가들어 그의 입을 쩍 벌려 놓고는 약 한 알을 집어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단지흥은 그 약을 번개같이 낚아채서는 휙 던져 버렸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단지흥의 발치로 훌쩍 날아왔다. "요 귀염둥이, 제발 성깔 부리지 마! 성깔 부리면 몸이 상한다구! 그러면 어떻게 나와 재미를 볼 수 있겠나?" 대환희 보살은 마냥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단지흥은 여전히 그 한마디만 곱씹었다. "난 오늘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난 다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약을 올리지 말아라……." "내가 왜 그렇게 하게 하겠어요? 기쁘게 해 드리려 해도 다 못 하겠는데……. 당신이 살인을 하도록 약을 올려서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구……." 대환희 보살은 히죽거리며 능청을 떨었다. 그리고는 수하들에게 잽싸게 손짓을 했다. 그것을 신호로 뚱뚱보 여인 넷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단지흥에게 덮쳐 들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맞설 태세를 취하지 않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또다시 그 말을 곱씹었다. "오늘 이미 한사람을 죽였으니 더 죽이고 싶지는 않다……." 네 계집의 병장기가 빗발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을 들이대지 않고 경공을 써서 슬쩍슬쩍 피하다가 네 계집의 포위망을 완전히 뚫고 나갔다. 병장기가 어지러이 난무하는 속에서 일순 단지흥이 눈에 띄지 않자 보살은 흠칫 놀라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보살은 그만 입이 헤벌어지고 말았다. 단지흥은 저만치에 외따로 떨어져 서서 멍청하니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에 걸려 있는 보름달은 쟁반같이 동그랬다. 제34장 황제의 비가 대환희 보살은 의아해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언제 혈도가 풀렸지? 하나 이미 중독되어 있는 이상 내가 오늘 남제를 내 수중에 넣지 않고 언제 또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있으랴?' 그녀는 지체 않고 불같이 호령했다. "저 놈을 잡아랏!"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숱한 사내들이 일제히 단지흥에게 달려들면서 외쳐댔다. "단지흥 이 놈, 네가 아무리 황제 노릇을 한다 해도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따르는 것보다는 못할 거다!" 하지만 단지흥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난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또 사람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이제 더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한 사내의 고함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단지흥 이 놈! 어디 일양지를 펼쳐 보아라. 우리들도 견식이나 좀 넓히게……." 그 소리에 단지흥은 몸을 홱 돌리며 슬쩍 피했다. 창 한 자루가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뱀마냥 그의 몸뚱이를 바싹 스쳐 지나갔다. 재빨리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몸뚱이에 구멍이 뻥 뚫릴 뻔했다. 사내는 창을 꼬나 쥐고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단지흥 이 놈! 빨리 손을 써라! 계속 그렇게 손을 쓰지 않다가는 당장에 송장이 될 테니!" 하지만 단지흥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화산에 가지 않고 그냥 영고와 함께 있었다면 영고의 아들은 내 아들이었을 게야. 그 애가 내 아들이었더라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었을 리 만무하지. 난 더는 살인을 할 수 없어!' 사내들은 단지흥이 중독된 줄로만 알고 용기백배하여 창과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들었다. 사내들이 일제히 창과 칼을 치켜 들자 단지흥은 숱한 창과 칼 밑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그 모습을 보고는 기뻐서 연신 입에 먹을 것을 집어 넣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장하다, 장해! 내 귀염둥이들이 참말로 장하구나! 누구든지 저 놈 몸뚱이에 상처를 입히기만 하면 난 그 녀석을 내 허벅다리 위에 앉힐 테다!" 대환희 보살의 허벅다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 사내들에게는 비할 바 없는 영광이었다. 그 말에 사내들은 저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 단지흥에게 병장기들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지흥은 이번에도 경공을 써서 창과 칼 밑을 뚫고 나왔다. 알몸인 단황과 여러 사내들의 대결은 그야말로 괴이한 싸움이었다. 사내들은 저마다 공을 세우려고 전심전력으로 공격을 들이댔으나 단지흥은 끝끝내 손을 쓰지 않고 그저 사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단지흥이 자기들을 깔본다고 여기고는 더욱 악에 받쳐 덮쳐 들었다. 대환희 보살의 수하가 된 지 이미 오래 된 터, 세상사람들이 죄다 자신들을 깔본다고 여기고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그런 기색만 내비쳤다 하면 물불을 안 가리는 것이 었다. "단지흥, 이 놈아! 네 놈이 손을 안 쓴다고 해서 네 놈을 살려 줄 것 같으냐?" 그 말과 동시에 서릿발 같은 빛이 번쩍하더니 긴 검이 단지흥의 정수리를 겨냥해 똑바로 내리찍혔다. 단지흥이 용케 머리를 비키니 이번에는 더욱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겨누고 검이 들어왔다. 단지흥이 또 몸을 피하자 그자는 이제 초수를 바꿔 공격해 들어왔다. 그는 이번에는 단지흥의 잔등을 겨냥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저 스치고 지났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사내는 그만 힘이 빠져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한 사내가 구리 철퇴를 휘 두르면서 덮쳐 왔다. 철퇴는 단지흥의 왼쪽 가슴을 겨누고 똑바로 날아왔지만 그는 역시 묘하게 몸을 피했다. 그때 단지흥은 얼핏 영고를 떠올렸다. 영고가 조금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필시 자기를 사랑했었다. 사랑하긴 했으되 한 사내로서가 아니라 황제라는 자리에만 눈이 어두워 영고가 자기를 따랐다면 그는 그녀의 몸만 차지했을 뿐 마음은 차지하지 못한 셈이 아닌가. 그렇게 딴생각을 하다 보니 단지흥은 자연 틈이 생기고 말았다. 일순,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퇴가 단지흥의 잔등에 똑바로 내리꽂혔다. 그의 잔등에선 순식간엔 피가 솟구쳤다. 철퇴잡이는 기쁨에 넘쳐 환성을 올렸다. "보살님, 찔렀습니다. 내가 단황을 찔렀습니다!"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장하다, 장해! 내 이제 너를 매일마다 내 허벅다리 위에 앉혀 놓으마!" 그 말에 철퇴잡이는 더욱 으쓱해져서 달려들었다. "단지흥 이 놈! 내 철퇴에 죽는 줄 알아랏!" 비록 피를 보긴 했으나 단지흥의 상처는 그다지 중한 편은 아니었다. 무릇 단지흥 같은 무림의 명수에게 중상을 입힌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철퇴가 몸에 닿는 순간 단지흥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그나마 그 무서운 일격을 피해 냈던 것이다. 철퇴잡이가 사기충천하여 고함을 치자 단지흥은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이자들은 나를 죽이려고 사생결단을 하는구나! 한데 왜 내가 이자들 손에 죽어야 하나? 나와 영고 사이에는 수 없이 많은 매듭이 있지만, 이자들하고야 아무런 원수지간도 아닌데 왜 이렇듯 악다구니로 대드는 걸까? 대환희 보살은 대리의 악물이다! 이 계집을 제거하지 않고서야 내 한도 풀 수 없으리라!' 일순 단지흥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터져 나왔다. 고함소리는 수림을 뒤흔들어 놓고 밤 하늘을 향해 길게 꼬리를 끌며 울려 나갔다. 마치 한 마리 용이 울부짖기라도 하는 듯한 소리에 덮쳐 들던 사내들은 모두 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쏴하니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천천히 사내들을 향해 돌아서더니 선뜻 손을 뻗쳐 창잡이에게서 긴 창대를 잡아채서는 삽시에 두 동강을 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더니 훌쩍 몸을 날려 검잡이한테로 다가들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검잡이의 손에서는 검이 퉁겨 나가 젱그렁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단지흥은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끝으로 퉁겨서 제 손에 잡자마자 검잡이의 몸뚱이를 비스듬히 내리쳤다. 검잡이는 삽시에 썩은 나무토막처럼 허리가 잘려 땅바닥에 털썩 나뒹굴 었다. 철퇴잡이는 눈앞의 광경에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홱 몸을 돌렸다. 그러나 등뒤에는 대환희 보살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뺑소니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도망을 치려구, 요 귀염둥이야?" 철퇴잡이는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변명은 듣기 싫다!" 대환희 보살은 쌀쌀맞게 내뱉고는 쓱 손을 뻗쳤다. 철퇴잡이는 보살의 손이 닿기만 하면 뼈와 살이 썩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얼른 몸을 피했다.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그가 피하려는 쪽으로 냉큼 몸을 솟구쳐 머리로 그의 배때기를 들이받았다. 대환희 보살의 머리는 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것인 듯, 다음 순간 철퇴잡이는 그 즉시 몇 길 밖으로 나가떨어져 땅바닥에 엎어지자마자 덜컥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단지흥은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진작에 사태는 일변해 있었다. 이제 사내들은 다 물러가고 뚱뚱보 여인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엔 잠시 당혹스런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보살은 의기양양하니 이죽거렸다. "폐하, 왜 옷을 벗고 계십니까?" 그러더니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그래, 난 워낙 알몸으로 나선 황제를 더 좋아하지. 알몸이니 황제인지 뭔지 분별할 수도 없는 터, 뭐 무서울 게 있겠소?" 보살은 잠시 단지흥을 쏘아보더니 뒤를 향해 소리를 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사내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와 굽실 허리를 꺾었다. "보살님, 무슨 분부가 계시옵니까?" "어서 초롱에 불을 밝혀라, 황제의 몸뚱어리를 샅샅이 살펴보아야겠으니. 황제의 몸뚱어리가 범상한 인간들의 몸뚱어리와 뭐가 다른지 내 한번 봐야겠다! 무엇이든 다른 점이 있기에 우리 치주라는 년이 그토록 반했겠지!" 단지흥은 치주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일 치주가 이 자리에 있다면 나와 대환희 보살 중에 누가 이기기를 바랄까? 그 애는 보살의 등살에 못 이겨 아마 나한테 호감을 나타낼 엄두도 못 낼 거야. 계집들이란 다 그런 거야. 계집으로 생긴 것은 할 수 없지……." 대환희 보살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은 좀 희한한 방법으로 겨루기를 해야겠다. 옛날에는 싸움을 할 때 초롱에 불을 밝히고 싸웠다는데 오늘 우리가 그걸 따른다 해도 남들이 비웃지야 않겠지. 이미 단황 나으리께서 대낮처럼 밝은 보름날 밤에 벌거벗고 나섰으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도 우리 폐하를 본떠서 알몸으로 나서려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대환희 보살의 말에 누구라고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으랴. 사내는 냅다 다가가서 보살의 옷을 몽땅 다 벗겨 주었다. 그러자 보살은 단지흥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이제부터 난 폐하와 겨루겠으나 조금도 텃세를 하진 않겠어요. 아주 공평하게 겨루려고 해요. 그래야만 져도 불만이 없을 게 아닌가요?" 대환희 보살은 알몸으로 단지흥 앞에 버티고 섰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나 살이 쪘는지 모가지는 거의 어깨 넓이와 비슷했고, 배에는 군살이 여러 겹으로 접쳐 있었으며, 그 아래로 뻗은 두 다리는 너무나 피둥피둥해서 다리인지 고깃덩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우리 둘이 어우러져 싸우다가 씨름판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마 당신은 내 배 밑에 깔려 숨도 바로 쉬지 못할걸! 호호호……." 대환희 보살은 죽겠다고 킬킬거렸다. 그러자 유들유들한 군살이 일제히 흔들거렸다. 단지흥은 코대답도 않고 이를 악물었다. '이런 능욕은 실로 듣도 보도 못했다. 내 오늘 사람을 하나 죽였지만 이제 너마저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치주를 죽인 년, 네 년이 아니었다면 치주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이냐?' 단지흥은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대환희 보살, 넌 오늘 끝장이다. 공손히 죽음을 기다려라!" "이봐요, 단황 나으리, 아무리 실랑이를 해도 당신이나 나나 하등 다를 게 없어요. 당신한테 귀비 년들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우쭐대지 말란 말예요. 나한테도 남첩이 수십은 되니까. 당신이나 나나 다 권세 있는 사람 아닌가요. 서로 합심해야 할 처지인데 왜 자꾸 생트집을 잘아요? 함께 화목하게 지내면서 향락을 누리는 게 옳은 게지 싸우기는 왜 싸운단 말이에요? 내 말이 틀린가요?" 단지흥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삽시에 두 사람은 한데 어우러졌다.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사정을 두지 않고 손을 쓰자 내심 덜컥 겁이 났다. 단지흥은 이미 화산 무예 시합에서 천하의 5대 고수 중 하나로 지목되었은즉, 그와 맞서 본대야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뿐더러 중독된 줄 알고 있었는데 그도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하나 그녀 역시 운남에서는 소문이 뜨르르한지라 결단코 단지흥한테 녹녹하 게 보이지 않으려고 전심전력하고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손을 쓰겠으니 조심하세요!" 대환희 보살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지금은 보살의 수하가 된 충피가 독충을 잘 부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충피가 오늘은 무슨 독충들을 부릴까 저어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니나다를까 충피가 또르르 굴러 나오더니 능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폐하, 그때 만일 그 숙녀동의 노파가 아니었더라면 단황 나으리는 벌써 저승 원귀가 돼 있을 게 아닙니까?" 충피가 한마디 내뱉자마자 스륵스륵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두 눈을 찌푸렸다. 수천 수백 마리나 되는 독사들이 땅바닥을 새까맣게 뒤덮고 벌벌 기어오고 있었다. 단지흥은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또 독사 떼를 풀어 놓았군! 이를 어찌한다……." 독사들은 이미 혀를 쌀름거리면서 그에게 바투 기어들었다. 충피는 연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장단 맞추듯 독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그에게 덮쳐 왔다. 단지흥은 손가락 하나를 곧게 펴서 앞으로 곧추 내질렀다. 그 찰나 쾅하고 굉음이 터지더니 독사 몇 마리가 삽시에 몇 동강이 났다. 비릿한 냄새가 쏴 번졌다. 그 냄새를 맡자 독사들은 기갈이 난 것마냥 더욱 사납게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래도 단지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연신 손가락을 지르고 퉁겼다. 동강이 난 독사들이 순식간에 무더기로 쌓였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리 단씨의 일양지였다. 대환희 보살은 보면 볼수록 뛰어난 무예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외쳐댔다. "훌륭하다! 훌륭해!" 보살의 수하들도 모두 숨을 죽인 채 단지흥 홀로 독사 무리 속에 우뚝 서서 태연자약하게 손가락을 휘둘러대는 것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환희 보살은 일순 일양지가 너무나도 탐나 성마르게 소리를 질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