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2편 (62/70)
이제 와서는 치주까지도 애초에는 대환희 보살의 사주를 받아 자기에게 접근했었다는 생각에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한 여인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단지흥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헛살아온 이 일생을 보상받지 못하리라……. 한 순간, 그는 벌떡 솟구치더니 자기 앞에 놓인 상아 걸상을 있는 대로 걷어찼다. 상아 걸상은 대번에 산산조각이 났 다. 단지흥은 씩씩거리며 몸을 홱 돌려 영고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영고는 맥이 빠진 채 처연히 아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녀의 머리가 차츰차츰 잿빛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점점 새하얗게 퇴색해 가는 것이 아닌가. 단지흥은 너무나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더듬더듬 소리를 내질렀다. "그 머리. 그 머리……. 영고, 그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그러나 영고는 그가 뭐라 하든 아기만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참으로 절절하고 사랑과 연민이 충만해 있었다. 단지흥은 입을 다문 채 멍청하니 그녀를 지켜 보았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기의 모든 사랑을 쏟을 때는 다 저런 것일까? 이 여인은 진정으로 그 주가와 아기를 사랑하고 있구나, 내가 아니고…….' 단지흥은 힘없이 거울을 집어 들어 영고에게 건네 주었다. "보오! 당신 머리를 좀 보오! 이제 영고의 머리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 새하ㅇ다. 이 짧은 동안 마치 몇 십 년 세월이 흐르기나 한 것마냥 그녀는 공포와 근심, 회한, 실망, 상심에 부대끼다가 머리마저 세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데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그녀는 거울로 자기의 시선을 가로막는 단지흥이 귀찮기만 했다. "이 거울을 냉큼 치워요!" 그 목소리는 높지는 않았으나 적이 날카로웠다. 단지흥은 너무나 착잡하여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 나가는 듯싶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주백통, 치주, 숙비의 얼굴이 어지럽게 오락가락했다. 그는 아물아물 정신을 잃으며 희끗희끗한 영고의 귀밑머리를 힘없이 건너다볼 뿐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일순 영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를 구해 줄 마음이 없다면 어서 내 혈도나 풀어 주어요. 난 아이를 안아야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단지흥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영고는 손발이 움직여지자마자 성큼 아기에게 다가들어 으스러지도록 힘껏 아기를 껴안았다. 아기는 온통 얼굴을 찡그리고 까무러치듯 온몸을 뒤쳤으나 더 이상 울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양 볼이 새파랗게 질린 채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벙긋거리며 영고를 쳐다 보았다. 마치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아기를 내려다보면서 영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가야, 이 엄마는 네 목숨을 살릴 재주가 없구나. 자거라, 아가야. 달콤한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라!" 영고는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콤한 노랫가락이 힘없이 방안을 떠돌았다. 단지흥은 게슴츠레하니 초점 잃은 눈빛으로 두 모자를 지켜 볼 따름이었다. 일순 아기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어리는 듯하더니 이윽고 더욱 격하게 온몸을 뒤챘다. 아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영고는 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내 귀염둥이, 어서 자야지. 잠이 들면 아프지 않단다. 어서 자거라, 내 귀염둥이야……." 영고는 한참이나 아기에게 중얼중얼 속삭여댔다. 그러더니 한 순간, 단도를 쓱 쳐들더니 아기의 가슴팍을 힘껏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때껏 멍하니 앉아 있던 단지흥은 바위 덩어리로 호되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마냥 정신이 반짝 들며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짓이오? 내 이제 아기를 구, 구하려고……." 그는 혼비백산하여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껏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언제든지 한번은 내가 이 단도로 당신의 가슴팍을 찌를 날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는 영고는 자기 팔목에 차고 있는 옥팔찌를 들어 보였다. "이건 내가 입궁할 때 당신이 나한테 준 것이에요. 기억하시죠? 두고 봐요, 내가 이 옥팔찌를 돌려드리는 날이 곧 이 단도가 당신 가슴팍에 꽂히는 날일 테니……." 영고는 싸늘하게 뇌까리고는 아기를 안고 훌쩍 창문을 뛰어넘었다. 단지흥은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짐에 따라 미친년 울부짖는 듯한 그녀의 웃음 소리도 점점 멀어져 갔다. 단지흥의 눈앞엔 점점 하얗게 세어 가던 영고의 머리칼이 또렷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는 넋을 잃고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한 순간, 문득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폐하, 왜 홀로 말없이 앉아 계시옵니까?" 단지흥은 소리나는 쪽으로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두 태감과 눈이 맞아 놀아난 바로 그 숙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단지흥의 마음을 돌려 세워 보려고 이렇듯 찾아온 것이었다. 단지흥의 마음을 풀어 주지 못하면 큰 화가 미칠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러가거라! 난 오늘 마음이 몹시 언짢다." 단지흥은 그녀를 외면하며 나직이 내뱉었다. 그러나 숙비는 되레 선뜻 다가들어 야들야들하니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그녀의 손을 탁 떨쳐 내며 퉁명스레 소리를 질렀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홀로 있는 게 소원이노라." 그러자 숙비는 주춤하더니 눈웃음을 치면서 애교를 부렸다. "폐하, 잠시 고정하소서……. 이렇듯 폐하께서 홀로 계시려고만 하신다면 저희들은 할 일이 없게 되지 않사옵니까? 귀비가 그토록 많은데도 폐하가 이렇게 홀로 앉아 계시기만 한다면 그건 저희들 본분이 아닌 줄 아옵니다!" 기실 숙비의 이 말은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황제로부터 소박이라도 당한 양 오래도록 무료하게 세월을 보내다보니 본의 아니게 태감들과 눈이 맞게까지 되었다는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흥은 만사가 다 귀찮아졌는지라 그녀의 말은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숙비는 그가 더는 내치지 않으려 하는 줄 알고 마냥 눈웃음을 치며 살살거렸다. "폐하께서는 나라일로 속을 많이 태우시고 계시는데 저희들이 제때 제때에 속을 풀어 드리지 못하면 용체가 어찌 되겠사와요? 그러니 그만 고집을 꺾으시고 천첩과 함께 이 밤 푹 쉬시와요." 단지흥은 물끄러미 숙비를 건너다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영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영고의 집념에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영고는 일단 한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여자다. 제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다 못해 삼단 같던 검은 머리가 백발로 변했으니 비단 수건에 수놓아 있던 시구처럼 '늙기도 전에 머리가 먼저 센'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지 않은가.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자기를 사랑해 줄 여인을 손꼽을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참담하고 허탈했다. 단지흥이 뭐라 꾸짖지도 않고 멀거니 자기를 바라보자 숙비는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폐하는 필시 날 염두에 두고 계심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면 저리도 넋을 놓고 계시냔 말이야. 저것만 보아도 나에 대한 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숙비는 마음을 턱 놓고는 나긋나긋 단지흥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폐하, 머리 복잡하게 더 생각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그 놈들이야 어디 사내 구실이나 하는 놈들입니까……. 그건 아무런 실속도 없는 헛짓이옵니다. 폐하께서도 그 놈들이 진짜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단지흥은 숙비 말은 아랑곳 없이 깊은 사념에 빠져 들었다. '본시 세상만사는 죄다 진짜로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담 왜 영고만은 그처럼 고집스럽게 모든 걸 진짜로 대하는 걸까? 그녀는 진짜로 제 아들 애를 죽이고 진짜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지 않았는가…….' 여전히 단지흥이 대답이 없자 숙비는 또 생각을 굴렸다. '가련하구나. 일국의 황제가 이처럼 바보 같을 줄이야. 황제가 이런 인간인 줄 미처 알았더라면 내가 왜 그따위 태감 놈들과 놀아났겠는가. 그런 일을 친히 보고도 꾸짖지도 않고 저토록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다니……. 앞으로는 매일마다 이 단황을 내 침궁으로 끌어들여야겠어!' 숙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단지흥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이미 깊은 사념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터라 꿈속을 떠도는 사람이나 진배없었다. 그리하여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되 바로 이 시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귀비는 그를 침대로 끌고 가 가만히 눕혔다. 그리고는 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벗겨 냈다. "궁중에는 사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태감들이야 사내라고 할 수도 없는……. 폐하께서도 태감들이 사내가 아니란 건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 놈들은 천첩과 마찬가지로 폐하의 시종에 불과해요. 시종들의 본분이야 의당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잖아요, 호호호……." 숙비는 워낙 음탕한 계집으로 한때는 단지흥의 총애를 받기도 했었다. 그녀는 자기가 갖은 애교를 다 부려 단지흥의 마음을 일단 녹여 놓기만 하면 그가 더는 자기를 꺼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한 순간, 단지흥의 침궁 문이 스르르 열리며 누군가 잽싸게 안으로 스며 들어가 번개같이 병풍 뒤에 몸을 숨겼다. 그 기척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비가 들어오면서 이미 태감과 시위들을 물린 터였다. 바야흐로 숙비는 단지흥의 몸을 일심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제정신을 끊은 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일순 괴상한 웃음 소리가 방안을 휘저었다.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ㄴ?" 그러자 병풍 뒤에서 세 여인이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세 여인은 모두 볼썽사납게 추하고 뚱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들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왔다. "방금 보자니깐 사내 다루는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난 그걸 보고 눈이 다 아찔아찔하고 너무나도 간지러워서 오줌을 다 쌀 뻔했단 말이야." 한 여인이 대뜸 내뱉었다. 그러자 다른 한 여자가 말을 받았다. "넌 이만한 재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 찾아오지 않았지? 그런 재간만 있다면야 보살님의 일을 훌륭히 거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뚱뚱보 여인 셋은 일제히 박장대소를 했다. 숙비는 강호 사람이 아닌지라 대환희 보살이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감히 황궁 안에 이처럼 숨어 들어온 것만 해도 대죄이거니와 단지흥의 무예는 대리에서도 첫손꼽히는지라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된통 호통을 질러댔다.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 그냥 버티고 있다가는 다들 죽는 줄로만 알아라!" 그러자 한 여인이 냉큼 나섰다. "네 년은 대체 뭐 하는 년인데 우리에게 오라가라 호통을 쳐?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년을 잡아다가 우리와 똑같이 뚱뚱보 계집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주둥이 닥쳐! 나 같은 뚱뚱한 몸집을 가지고 이 바람둥이 황제를 어떻게 홀리나 어디 두고 볼까." 숙비는 기겁을 하며 사람을 부르려고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뚱뚱보 여인은 잽싸게 한 손을 날려 그녀의 아혈을 찔렀다. "이제 됐다. 아무리 악다구니질을 치고 싶어도 마음뿐일걸. 우린 이 단황과 얘기를 좀 나누어야겠으니 넌 저리 가 있어!" 뚱뚱보 여인은 숙비를 확 밀치고 단지흥에게 성큼 다가섰다. "폐하, 폐하도 벌거벗으니 한갓 필부에 불과하군요, 호호호……. 폐하께서 일양지를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 가르쳐 드리기만 하면 보살님께서는 십분 목숨을 살려 줄 것이고 저도 단황님을 모시고 기쁘게 해 드리겠사옵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거절했다가는 폐하의 목숨은 지금 이 자리에서 끝장인 줄로 아뢰옵니다." 뚱뚱보 여인이 한껏 비아냥거리는데도 단지흥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정신이 혼미해진 채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영고는 어찌하여 나한테는 그토록 냉담하고 그 주백통이라는 놈에게는 그토록 미련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영고도 죄다 잊지는 않았을 텐데, 내 저를 그토록 사랑한 것을…….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잊어버리고 주백통과 정이 맞아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애시당초 날 사랑하지는 않은 게야!' 단지흥은 남이야 어쩌건 말건 자기와 영고 사이에 맺어졌던 지난날의 정을 돌이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고는 그 석굴 안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들켰기에 마지못해 자기한테 시집을 오게 했다고만 낙착이 되자 그는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하나 뚱뚱보 여인들은 천만 뜻밖으로 단지흥이 자기네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멍하게 누워 있기만 하니 자못 어리둥절해졌다. 자세히 보니 눈빛마저 흐릿해져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단황은 중독된 것 같아. 너희들 보기에는 어때?" 한 여인이 묻자 다른 두 여인들도 단지흥을 아래위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눈에 정기가 없는 걸로 봐서는 중독된 것 같아. 하지만 괴상하구나. 자기 황궁 안에서 이 단황이 어찌 중독될 수 있겠어?" "저 년이 그런 거 아냐? 저 년은 필시 이 바람둥이 임금과 무슨 알력이 있었을 게야. 맞아, 분명 저 년이 독을 안겼을 거야." 한 여인이 숙비를 가리키며 내뱉었다. "하, 이거 정말 어부지리로구먼!" 한 여인이 쾌재를 부르자 뚱뚱보 여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크게 웃어젖혔다. 한참이나 웃어대더니 개중 하나가 키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단황 놈을 끌어다가 보살님께 갖다 바치자! 보살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니?" 그러자 두 여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이미 아혈을 찔린 뒤라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여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폐하, 미안하게 됐사옵니다. 잠시 억울함을 당하셔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폐하의 아혈과 혈도 몇 군데를 찔러서 대환희 보살님께로 모셔 가겠습니다." 그래도 단지흥은 그녀를 마주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뚱뚱보 여인은 재주가 뛰어났다. 그녀는 번개같이 손을 날려 단지흥의 혈도를 꾹꾹 찔러 놓고는 두 여인을 돌아보았다. "옷을 입혀 줄까?" 그러자 다른 한 뚱뚱보 여인이 말을 받았다. "넌 옷을 입은 황제들을 본 적이 더 많으냐, 아니면 알몸으로 나선 황제들을 본 적이 더 많으냐?" "그야 물론 옷을 입은 황제밖에 못 봤지." 세 여인은 히히덕거리며 서로 눈을 맞추고는 이불로 단지흥을 둘둘 싸서는 꽁꽁 동여맸다. "사람들은 임금의 몸뚱어리는 천만 금도 넘는다고 하지 않던? 한데 왜 이다지도 가벼울까?" "저 불여우 같은 년들한테 정혈(精血)을 몽땅 빨린 게지 뭐!" 셋은 단지흥을 친친 동여매고 나서 매섭게 숙비를 쏘아보았다. "미리 알려 준다마는, 만일 내 년이 궁중 안 누구에게라도 우리가 누구라는 걸 알려 주기만 하면 사흘 안으로 목숨이 달아난다는 걸 명심해, 알겠느냐? 만일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 날에는 이 단지흥과 네 년의 시체를 바꿔 갈 테니!" 숙비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그 여인들이 단지흥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스런 기색이 어른거렸다. 세 여인이 커다란 뭉치를 들고 황궁 담을 뛰어넘자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뚱뚱보 여인 하나가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뭘 잡아 오는 게야?" 한 여인이 의기양양하게 내쏘았다. "대리의 단황 단지흥!" 그러자 마차를 모는 여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허튼소리 작작 해! 단황이 어떤 사람이라고 감히 너희들한테 잡혀. 보살님께서 친히 납시셔도 그자를 이길까말깐데 너희들 재간으로 남제를 잡아? 바빠 죽겠는데 왜 농을 치고 난리야, 제길!" 그러자 다른 여인이 나서며 입을 비쭉거렸다. "믿지 못하겠으면 네 눈으로 한번 직접 봐라." 밖에서 지키고 있던 여인은 급급히 등불을 밝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이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단지흥이 아닌가. 그녀는 잠시 어리벙벙해 있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참말로 단황을 통째로 생포했네그려." 마차를 모는 뚱뚱보 여인은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단지흥의 팔뚝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한데 어떻게 이 대단한 자를 사로 잡았어?" 마차를 모는 여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재우쳐 물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이미 제 귀비 년한테 중독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더라구. 우린 거저 주운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자 마차를 모는 여인은 신이 나서 지껄여댔다. "알고 보니 귀비 년들도 다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돕고 있었구먼. 호호호……." 이윽고 마차는 질풍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모두 준마들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우거진 수림에 다다랐다. 여인들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단치흥을 들어 내렸다. 이 수림에는 장막이 가득 쳐 있고 장막마다에는 모두 등불이 켜 있었다. 그 등불 밑에서 여인들이 둘러앉아 한창 게걸스레 먹어대고 있었다. 여인들은 입가가 번들번들해서는 우악스럽게 씹어대다가 네 여인이 이불 뭉치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는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저걸 봐, 또 무슨 좋은 물건을 보살님께 바치는가 보다!" 그러나 네 뚱뚱보 여인들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대환희 보살에게 똑바로 걸어가 그녀의 발치에 이불 뭉치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입이 함지박만해지며 대뜸 말했다. "보살님, 훌륭한 물건을 가져 왔사옵니다." 대환희 보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물었다. "너희들더러 대리에 가서 단황이 무얼 하고 있는가 잘 살펴보고 오라고 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지체되었느냐?" 그러자 한 뚱보 여인이 선뜻 나섰다. "보살님, 우린 단황을 청해 왔사옵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침을 탁 뱉었다. "허튼소리 그만 해. 단황이 너희들을 따라왔다니, 감히 날 놀리려는 수작이냐?" "아이고 보살님, 그런 천 부당만부당한 말씀 마시고 이걸 일단 보기나 하세요. 이게 단황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에요?" 뚱뚱보 여인은 말을 하면서 헐레헐레 이불을 헤쳐 놓았다. 과연 알몸동이 단지흥이 꼼짝없이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대환희 보살은 냉큼 내달아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단황을 모셔 왔느냐? 폐하, 그래, 어찌하여 예까지 오셨소? 내일부터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대환희 보살은 입이 헤벌어지며 이죽거렸다. 한 뚱뚱보 여인이 입을 열었다. "보살님, 단황은 제 귀비 년한테 중독되었어요. 그런 걸 우리가 데려왔지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여 너스레를 떨어댔다. "으하하…… 그랬었다구? 폐하, 그래 어찌 계집을 경솔히 믿을 수 있겠어요? 세상 믿지 못할 물건이 바로 계집들인 거예요. 단황께선 여태껏 그것도 모르셨소 그래?" 단지흥은 아무 말이 없었다. 표정은 여전히 멍청했다. 대환희 보살은 그가 참말로 중독되었다 여기며 큰소리로 분부했다. "여봐라, 어서 이분을 수습해 드리고 자실 것을 가져 오너라!" 보살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뚱뚱보 여인들이 한 무리 우르르 보살 앞으로 몰려왔다. 개중 한 여인이 단지흥을 일으켜 보살 앞으로 데려다 앉히며 말했다. "폐하, 사실 우리들은 오래 전부터 사돈간이 아니옵니까? 단황의 황비였던 치주가 바로 우리네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냉큼 그녀를 밀치며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중독되었을 때 마침 우리 수하들이 나타난 건 바로 폐하가 저와 인연이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 아니겠어요? 먼저 내 제자들을 시켜 폐하께서 마음껏 향락을 누릴 수 있게 해드리지요. 아마 황궁에서는 생각도 못한 색다른 맛을 느끼시게 될 거예요." 보살은 얼른 종전의 그 여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잽싸게 다가와 단지흥을 텁석 품에 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마치 아기다루듯 단지흥을 자기의 허벅다리 위에 앉힌 다음 삶은 고깃덩이를 쭉쭉 찢어서는 연신 그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단지흥은 입을 벙긋벙긋 벌리며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기실 혈도가 눌려 꼼짝도 못할 지경일 뿐더러 그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죄다 흐리멍텅한 환영에 불과했다. 자기가 어디로 끌려 왔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분간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앞에 나타난 사람이 계집인가 사내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영고만, 지난날 영고와 다퉜던 일만, 그녀의 아기를 마땅히 구해야 했던가 하는 것만, 그리 고 끝내는 자기가 아기를 죽여 버린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