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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1편 (61/70)

2026-09-30 18:24:37 조회 19
그의 한 장이면 육사고는 박살이 날 판이었다. 하지만 육사고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점점 독이 올라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왕중양, 당신도 사내대장부라면 계집을 후려 잡든지 아니면 잡히든지 해야 할 게 아니에요? 한데 당신과 임조영 사이는 오래도록 서로 버성기기만 하다가 끝내 죽어 가는 걸 그대로 내버려뒀으니 정말 꼴불견이군요. 흥, 남의 허물은 잘 알지만 당신 역시 계집 하나 꺾지 못한 양반 아닌가요! 그래도 천하 호걸이랍시고 남의 제사에는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야단을 치는군요! 입이 써요, 입이!" 왕중양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실 육사고의 말도 그른 데가 없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그녀의 도도한 성품에는 결코 수그러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로 육사고의 말마따나 그는 계집 하나 다를 줄 모르는 매력 없는 사내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한 번 절절한 사랑을 고백해 보지도 못하고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사이가 돼 버렸으니, 안 그래도 그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던 터였다. 하나 아무 리 육사고의 말이 일리가 있다 해도 그 말은 그의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그는 사납게 육사고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악기가 또 왕중양에게 대들었다. "왕중양, 왜 섬약한 계집을 못살게 구는 거요. 당신도 강호의 협객이라면 이 쾌도하고 한판 겨룹시다." 왕중양은 감때 사납게 악기를 흘겨보았다. "이 놈, 잔말 말고 있어. 네 놈은 칼이나 휘둘렀을 뿐, 진짜 흉수는 이 계집이란 말야!" 왕중양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주먹을 번쩍 쳐들었다. 그 주먹이 떨어지면 육사고의 머리는 당장 묵사발이 될 터였다. 육사고는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악기, 악기, 날 구해 줘요!" 악기는 힘껏 육사고를 밀쳐 버리고 제가 그 자리에 가 섰다. "왕중양, 내가 대신 죽으리다!" 일순 쾌도의 검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삽시에 그의 머리가 뎅겅 땅에 나동그라졌다. 미처 말릴 겨를도 없었다. 땅에 굴러 떨어진 그의 머리에서 눈만은 애절하게 왕중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육사고 만은 살려 주십사고 간절히 애원하는 듯싶었다. 왕중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수백, 수천 번이나 사경을 넘나든 왕중양이건만 눈알이 뒤집힐 지경으로 놀랐다. 악귀 같은 여편네를 위해 죽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내인가. 아니, 아니다! 과연 쾌도야말로 가장 신의를 지키는 사내인지도 모른다……. 왕중양은 서글픈 마음으로 쾌도의 처참한 시신을 내려다보며 혼자말하듯 중얼거렸다. "어서 이 자리를 뜨게나.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아라!" 육사고는 얼빠진 사람마냥 넋을 잃고 악기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데려가려 왔다가 이런 참변을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중양은 왕중양대로 그녀를 아랑곳 않고 견딜 수 없이 쓰라린 가슴을 움켜잡고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과 임조영 사이를 견주어 보고 있었다. 자신은 악기처럼 이렇게 죽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좋은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망정 만일 죽으라고 한다면 자연 뒷걸음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끝내 방관한 격이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우직한 사나이 악기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밉더라도 결국은 자기 아내인 육사고를 위해서 서슴지 않고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왕중양은 악기의 시신 앞에 풀썩 꿇어앉았다. "악기, 자네는 진짜 사나일세! 난 자네의 부탁대로 자네 아내를 놓아주겠어. 자네의 죽음으로 화산 삼로와 곽명송의 일도 다 끝난 셈이니……." 육사고는 흑흑 흐느껴 울더니 별안간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뭐가 끝났단 말이냐, 뭐가?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어서 내 남편을 살려내! 살려내!" 왕중양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 순간, 선뜻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내처 걸어갔다. "왕중양! 왜 도망을 치는 게냐? 내 남편을 살려내라니깐!" 왕중양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서서 잡아먹을 듯 육사고를 쏘아보았다. 육사고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악을 써댔다. "당신만 오지 않았던들 내 남편이 죽을 리 있느냐? 당신은 피값을 치러야 해. 자, 칼을 받아랏!" 육사고는 고함을 지르며 냅다 내달아 왕중양의 가슴팍을 향해 똑바로 검을 찔러 왔다. 왕중양은 피할 생각도 않고 피식 웃으며 번개같이 손을 뻗쳐 들어오는 검을 가볍게 받아 쥐었다. 육사고는 흠칫 놀라 안간힘을 쓰며 검을 빼려 했으나 마치 얼어붙은 듯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산파의 검술로 보아 삼로 정도라면 나와 얼마간 어울려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십 합을 넘기기 어려워! 네 년 검술로는 묶어 놓은 양이나 간신히 잡을 정도다! 그따위 재간으로 화산파의 장문이 되려 하다니, 낯뜨거운 일이로군!" "이거야 정말 고자가 물건 자랑하는 격이로군! 하, 그따위 자랑은 임조영이란 년 혼백에나 가서 하란 말야!" 육사고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이 계집이 입에서 구렁이가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도 모르고 주둥아릴 놀려? 실로 네 년 같은 악귀를 위해 목숨을 던진 쾌도 악기만 불쌍할 따름이다. 반병신 같은 사내야!" 육사고가 다시 임조영을 들먹이자 왕중양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되는 대로 내뱉었다. 그러나 이내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이면 신의와 의리를 지켜 비장하게 죽어 간 쾌도 악기를 입에 올리다니……. 그러느라 왕중양이 잠시 틈을 보이자 육사고는 힘껏 검을 뽑아 냈다. 그리고는 단박에 다시금 검을 휘둘러댔다. 왕중양은 육사고쯤은 여반장으로 꺼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손을 쓰지 않고 슬쩍슬쩍 피하기만 했다. 육사고는 약이 오른 고양이처럼 이를 악물고 다시 무섭게 검을 내질렀다. 왕중양은 예의주시하며 기회를 노리다가 일순 장지와 식지로 슬쩍 칼등을 낚아 쥐었다. 검은 또다시 허공에서 요지부동이 되었다. "아이고 분통해라! 이젠 더 청승을 떨지 말고 아예 날 죽여라, 죽여!" "너 같은 것을 죽여 봐야 내 손만 더러워질 뿐." "내 하늘 같은 남편을 죽였으니 나까지 죽여야 속이 시원하지 않겠느냐? 이 악귀 같은 놈아, 어서 나까지 죽이란 말이다!" 육사고는 미친 듯이 왕중양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밀며 길길이 뛰었다. 왕중양은 가볍게 몸을 피해 버렸다. 육사고는 계속 쫓아오며 죽여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왕중양은 번번이 피하다가 육사고가 코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려 살짝 피했다. 그러자 육사고는 그만 나무에 머리를 박고 그 힘에 밀려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래도 육사고는 수그러 들지 않고 팔딱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이 악귀 같은 놈아, 내 지금은 네 놈에게 죽지만 내세에는 네놈이 내 칼을 맞고 죽으리라!" 육사고는 왕중양을 힐끔 쳐다보더니 자기 목에다 대뜸 검을 가져다 댔다. "왕중양, 네 놈에게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빨리 네 갈길이나 가거라!" 그녀는 짐짓 목 자르는 시늉을 해 보이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왕중양은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러지 말고 나도 좀 구경을 하자꾸나. 네깟 계집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모든 사람들이 맘놓고 살 수 있는 거다!" "흥, 왕중양! 그러고도 천하 호걸이랄 수 있느냐? 일개 아녀자를 몰아세워 자결하게 했으니……." 왕중양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회심의 미소를 띤 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육사고는 미칠 지경이었다. 애시당초 그녀는 자결 같은 걸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왕중양을 혼쭐이나 내 주자는 것뿐이었다. 한데 왕중양은 도리어 흐물흐물 웃고만 있지 않은가? 그녀는 몹시도 조바심이 났다. "네 놈은 스스로 정파의 호걸이라고 자처한다면서? 난 정파 사람들에게 이 일을 다 백일하에 드러내겠다. 왕중양이라는 놈은 결코 부처님같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야!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 번 깜짝 않는 악한이라고." "맘대로 해, 하지만 네 년이 자결하는 시늉만 했다는 말일랑은 절대로 꺼내지 말아라! 그럼 톡톡히 망신만 당할 테니!" 육사고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매섭게 왕중양을 쏘아보더니 팔소매를 털며 벌떡 일어나 그 길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숲 속 샛길로 사라졌다. 왕중양은 절로 쓴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악기를 묻어 줄 구덩이를 파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악 형, 자네가 목숨까지 바친 여자건만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누먼. 자네의 죽음은 이렇게도 값없단 말인가? 그래도 단 한사람, 나만은 자네의 충정과 신의를 오래도록 기억할 걸세." 왕중양은 세상의 야박한 인심에 새삼스러이 진하게 회의가 몰려왔다. 그는 슬그머니 내력을 운행시켜 손끝을 놀려 땅을 파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제33장 애증 새로 삼경이 지났으나 단지흥은 뒤척이며 좀체 잠들지 못했다. 자꾸만 눈앞에 숙비와 두 태감이 놀아나던 장면이 어른거려 그는 연신 장탄식만 토해냈다. 실로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다가 황궁의 법도가 이다지도 문란해졌단 말인가! 그는 온통 뒤숭숭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 순간, 밖이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발이 들쳐지며 영고가 태감들을 물리치고 성큼 들어섰다. 단지흥은 적이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하며 한팔로 아기를 안고 있는 품이 자못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냉큼 바닥에 꿇어 엎드려 대성통곡하며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이 아이를……." 단지흥은 얼른 일어나 급히 굽어 보았다. 과연 아기의 두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숨소리도 몹시 가쁜 듯했다. 실로, 예사로운 일이 아닌지라 그는 얼른 아기를 받아 안아 강보를 헤쳤다. 자세히 보니 아기의 뒷잔등 늑골이 이미 다섯 대나 부러져 있었다. 영고는 미친 듯이 연해 울부짖었다. "폐하, 천첩이 지은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하오나 제발 이 아기의 가련한 목숨만은 구해 주소서! 한시가 급하옵니다, 폐하!" "아기가 왜 이렇게 됐소?" 단지흥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라 재우쳐 물었다. 그러나 영고는 그 말엔 대답도 없이 그저 울며 애원할 뿐이었다. 단지흥은 거듭 물었다. "말을 해야 알 게 아닌가? 누가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영고는 끝내 대답을 않고 어깨를 들까불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단지흥은 도무지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필시 냉궁에 무슨 변고가 생겼음에 틀림없었다. "폐하께서 천첩더러 죽으라고 해도 저는 아무런 원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애, 이 애만은……." 단지흥은 부아가 났다. "누가 그대더러 죽으라던가? 대관절 아기는 왜 이 지경이 된 거요? 말을 해요, 말을!" 그제야 영고는 비칠비칠 머리를 들어 단지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한 가닥 기대의 빛이 어려있었다. "그러시다면 정녕 폐하께서 시킨 일이 아니로군요!" 단지흥의 목소리는 갑자기 격하게 떨려 나왔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대관절 어떤 놈이 그랬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독한 짓을 했단 말이야?" 영고는 유심히 단지흥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필시 단지흥이 시킨 짓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즉시는 미처 생각을 못했으나 그자가 단지흥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품이 내심 매우 미심쩍었던 것이다. 단지흥이 시켰다는 것을 은폐하려고 일부러 더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 보아하니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영고는 대번에 자신을 휘감아 돌던 안개가 풀리는 듯했다. "알았어요, 폐하의 성지가 아니라면 이 애는 살 가망이 있어요." 영고는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단지흥은 황급히 몸을 굽혀 영고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살내음에 단지흥은 부지중 몸을 흠칫 떨었다. 다른 사내의 계집을 범하려 할 때 꼭 그러하리라. 그녀의 살내음은 단지흥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호되게 자신을 질책하며 영고를 침대에 기대 놓고 아기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무슨 수를 써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 로지 무서운 진동 때문에 혈맥들이 끊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떤 놈이 그랬을까. 필시 만만치 않은 놈임에 틀림없어. 한데 왜 이처럼 사정을 두었을까? 이 애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서 대단히 사정을 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단지흥은 아이를 내려놓고 부랴부랴 냉궁으로 달려가서는 이 잡듯이 샅샅이 살펴봤으나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다만 창문과 지붕 위의 기왓장들에만 보일락말락 발자국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단지흥은 다시 급급히 침궁으로 돌아왔다. 영고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폐하, 황후께서 하사하신 단설기에 독약이 들어 있었사옵니다." 영고는 고개를 들어 빤히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지흥은 흠칫 놀랐다. 독이라니……. 단지흥은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어 장탄식을 토해냈다. "독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고? 그렇담 그대의 궁에 널브러져 있는 궁녀들도 모두 독에 중독된 것이란 말이오? 난 방금 그대의 궁에 다녀왔소. 얼핏 보아도 중독된 것이 분명한데……." 영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그토록 온화하던 황후가 이런 악독한 짓을 하리라고는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만일 단지흥이 종일토록 수심에 잠겨 있고 또 자기를 그토록 미워하지 않았다면야 황후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고는 일순 단지흥을 향한 증오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단지흥은 영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단설기는 내가 보낸 거요. 황후와는 아무 상관도 없소!" 영고는 눈이 화등잔만해지더니 곧 비 오듯 눈물을 쏟아 냈다. "폐하! 왜, 왜 독약을 뿌렸어요? 왜요?……." 그녀는 정신나간 사람마냥 울부짖었다. "난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소! 이 일은 그 찬합을 가져 간 두 태감에게 물으면 즉시 알 수 있을 것인즉!" 단지흥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하고는 지체 않고 그 두 태감을 불러들였다. 두 태감은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덜컥 겁을 집어먹고는 다 죽은 사람처럼 혼이 빠져 넙죽넙죽 걸어 들어왔다. 태감들이 들어오자 단지흥은 벽력같이 호통을 내질렀다. "네 놈들은 내막을 알 것인즉, 이실직고하렷다!" 그러자 개중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소, 소인들은 모,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다만 찬합을 들고 가던 도중 갑자기 쥐가 나 찬합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것밖에는 없사옵니다." 단지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깊은 상념에 잠겨 들었다. 그는 두 태감에게 그만 물러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들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꽁무니 빼듯 황황히 물러 나갔다. 영고는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아무리 봐도 단지흥이 자기 모자를 죽이려고 계책을 꾸민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단지흥은 정색을 하고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 자객은 재주가 대단한 놈이야. 특히 경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 우리 대리국에는 나를 내놓고 이만한 공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영고는 단지흥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갑자기 낯빛이 질려 부르짖었다. "그럼 그 사람이란 말인가요? 그 사람이 왜 자,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겠어요?" 근자에 들어 많은 경난을 치러 낸 단지흥은 그 자객이 필시 주백통이 사주한 놈일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너 같은 아녀자의 소견으로는 그자가 도저히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겠지. 네가 어찌 그자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자가 속해 있는 전진교는 중원에서는 소문 높은 명문대교야. 그러니 주백통이 전진교의 얼굴에 먹칠하는 걸 보고만 있을 리야 없지. 후일 강호 무림에 이 아기의 이름을 꺼내 놓는다면 전진교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영고는 새파랗게 질려서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절대로 그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단지흥은 그저 영고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평소의 그 아리따운 자태는 간데없고 살기마저 섬뜩하게 풍겨 나왔다. 단지흥은 아무 대꾸도 않고 그저 묵묵히 강호 무림 중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손꼽아 보았다. 그러나 여러모로 따져 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진교 사람들이라면 왕중양을 제외하곤 마옥이나 구처기(丘處機) 같은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설사 이들이라 해도 왜 자기가 하사한 음식을 이용하여 독을 쓰고, 더욱이 필시 이 아기를 죽여 버리려 했음이 분명한데 왜 완전히 죽이지 않고 실오리만큼이라도 목숨을 붙여 둔 것일까? 만일 이들이 아니라면 서역의 구양 봉……. 하나 영고의 말에 의하면 그 자객은 몸집이 작은 그 추 선생이라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골이 장대한 구양봉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 그 추 선생이란 대관절 누구인가? 그때였다. 영고가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폐하, 이…… 이걸 보세요……." 영고는 아이를 부여안고 애절하게 단지흥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깜빡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고 있었다. 그는 영고에게서 얼른 아이를 받아 안았다. 영고는 처연히 아이를 바라보다가 그예 다시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영고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아이를 안아 올리다가 일순 번개가 번쩍 정수리를 내리치는 듯하여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처 보지 못했으나 아이를 감싼 비단 강보에는 그때 주백통이 떨구고 간 그 비단 손수건에 그려진 것과 똑 같은 원앙새 한 쌍과 시가 수놓아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 두 남녀의 사랑의 정표……. 영고는 그 멍청한 사내를 못내 그리면서 아이를 이 비단 수건으로 싸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단지흥은 일순 손길을 멈춘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이 정표는 영고와 주백통 그리고 이 아기를 한데 묶어 주고 있는 끈이요, 언제나 마음을 같이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비록 천애지각에 떨어져 있다 한들 함께 있음과 진배없었다. 일순 단지흥은 숙녀동에서 보낸 그 달 밝은 첫날밤이 떠올랐다. 그녀는 얼마나 일심으로 자기를 사랑했던가. 황궁에 들어온 후에도 그녀는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손길을 그렸었는데……. 그러던 영고가 주백퉁과 눈이 맞아 아이까지 낳았다. 그뿐 아니었다. 일단 자기가 황궁을 비우면 귀비들마저 태감 놈들과 눈이 맞아 돌아치고……. 그는 일순 두 주먹이 불끈 쥐여졌다. 이제껏 아무 가치도 없는 일생을 헛살아 왔다는 자책감이 걷잡을 수 없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마음이 일단 그렇게 돌아가자그는 자기의 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이 주백통의 씨를 살려내야 하는지 선뜻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영고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가물거리더니 차차 단지흥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아기를 치료해 주기는커녕 그저 강보만 내려다보며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그녀는 독기가 피어올라 이를 악물고는 지체 없이 품안에서 단도를 쓱 뽑았다. 그리고는 선뜻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폐하, 폐하는 끝내 천첩의 원을 저버리려 하시는군요. 그렇담 좋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더는 살아갈 면목이 없는 목숨, 천첩의 이 목숨으로 아기의 목숨을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천첩은 내세에 소나 말이 돼서라도 폐하의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영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 단도로 자기의 가슴을 쿡 찔렀다. 단지흥은 깜짝 놀라 금나법(擴拿法)으로 영고의 손에서 장도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칼끝은 이미 영고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대번에 그녀의 앞가슴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단지흥은 영고가 또 죽으려 덤빌까 봐 그녀의 손발에 있는 혈도를 잽싸게 눌렀다. 그리고는 앞가슴의 상처를 동여매 주고 편히 눕혔다. 그러는 동안 내내 영고는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애절하게 단지흥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애원의 빛이 흘러 넘 쳤다. 아기의 가냘픈 숨소리는 연해 들려 왔다. 그러나 단지흥은 아기의 숨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지나간 일들에 대한 상념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영고는 진정 다른 궁녀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녀와 더불어 얼마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었던가. 그녀로 인해 진정으로 여인을 알았고 진정으로 자기가 사내임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영고는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했던가. 그는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만일 그녀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어떻게 주백통과 그런 짓 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