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0편 (60/70)
육사고는 앙칼지게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도망칠 생각일랑 싹 집어치ㅇ!" 그 순간 악기가 악 소리를 지르며 육사고를 가로막았다. 육사고와 악기는 독 오른 장닭처럼 서로 무섭게 노려보며 빙빙 원을 그리다가 한 순간 번개같이 맞붙어 검을 휘둘러댔다. 챙강, 챙강! 애처롭게 칼날이 울고 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은 갈라져서 또다시 원을 그러며 빙빙 돌았다. 쾌도가 대뜸 소리쳤다. "저 사람들을 놓아줘야 할걸!" "악기, 계속 나를 막아 선다면 네 놈까지 죽여 버릴 테다!" "그따위 재주로 날 죽여? 소 웃다 코뚜레 터질 소리 말아랏!" "이 엉큼한 녀석! 네 놈은 말끝마다 화산파 여중호걸이요, 화산파의 기둥 같은 여검객이요 하고 나를 치켜 올리더니 그게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내 일찍이 네 년을 추어 준 건 다 네 년이 심지 바르고 선량한 여인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근자에 들어 점점 두 눈 까뒤집고 날뛰니 눈꼴 시어서 봐 줄 수가 없단 말이다!" "뭐야? 이 후레자식 같은 놈!" 육사고는 훌쩍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돌며 화산삼현을 펼치며 연거푸 세 번이나 쾌도 악기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악기는 세 번 다 너끈히 피해 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날렸다. 육사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내심 자기가 이 검법만 펼쳐 보이면 그 당장 악기는 옴짝달싹 못하고 굴복할 것이라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에 검술을 익힐 때도 화산삼현만 펼치면 악기는 손을 바짝 들었지 않았던가! 한데 이제 보니 악기는 여태껏 화산파 검술을 외눈으로도 보지 않고 얼렁뚱땅 속여 온 것이었다. 육사고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싸늘히 쾌도를 노려보았다. 젊은 여승들은 화산파 무리들 앞에서 깍듯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린 암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화산 기슭에 붙어 사는 생령들이 아니옵니까? 똑같은 물줄기에서 나오는 샘물을 먹고 밤마다 똑같은 수림에서 들려 오는 바람소리로 귀를 돋우며 이웃해서 살아가고 있사온즉, 오랜 이웃간의 정을 봐서라도 길을 틔워 주셨으면 하옵니다." 화산파 제자 하나가 유심히 이 여승을 건너다보았다. 미목이 수려하고 말이 청산유수인지라 모름지기 춘심이 동하는 것이었다. 이고암은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니 으슥한 야밤에 몰래 숨어 들어가 저 애티 나는 여승과 정을 통하면 여복이나 좋겠는가. 젊은 사내는 실없이 히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어여쁘신 암주 아가씨, 화산파 삼로만 돌려주면 가마에 태워 보내 드리겠소. 그렇게만 한다면 고작 늙어빠진 세 문지기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혹독하게 고생할 턱이 있겠소?" "남을 착하게 대해야 남도 자기를 착하게 대하는 거지요." 어린 암주는 침착하니 또박또박 말하더니 정중히 합장을 하고는 이내 발길을 옮겼다. 여승들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게 섰거라!" 젊은 사내는 한번 본때를 보일 심산으로 쓰윽 검을 빼 들었다. 여승들은 흠칫 멈춰 섰다. 사내는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멋지게 검을 휘두르다가 어린 암주의 코앞에다 바싹 검끝을 세웠다. 암주의 콧날과 불과 한 촌 거리였다. 사내는 느물느물 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화산파 제자들 중에서도 내 무공이 단연 으뜸이지. 오늘 나의 뛰어난 검술을 보면 이 여승은 눈이 뒤집힐 지경으로 놀랄 게야!' 사내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요란스럽게 검을 부리며 다가와 봉황새가 대가리를 갸웃하는 형상으로 검끝을 암주의 눈앞에 들이댔다. 봉점두(鳳點頭)초수였다. 하나 천만 뜻밖으로 어린 암주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앞에서 나불거리는 검을 똑바로 보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태연하고 냉랭한 자태였다. 만약 이자가 무공깨나 익혔다면 암주가 무서운 정력(定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채고 얼른 물러섰을 터였다. 그러나 본디 미련한 이 사내는 재간을 부린답시고 더욱 바싹 검끝을 들이댔다. 그때였다. 불현듯 암주의 손이 번쩍 하더니 툭 소리가 나며 대번에 검이 두 동강이 나 땅에 떨어져 버렸다.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말고 어서 길을 비키시오!" 어린 암주는 정색을 하고 조용히 꾸짖었다. 화산파 제자들은 너나없이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젖내나는 어린 여승에게 이처럼 무서운 내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암주는 싸늘히 그들을 쏘아보더니 선뜻 몸을 돌려 초연히 한연 사태 뒤를 따랐다. 본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는 졸장부들만 육사고 뒤를 따른 터라 화산파 제자들은 더는 길을 가로막을 엄두도 못 내고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악기는 이제 육사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쪽 여승들 쪽으로 눈길을 던지더니 이내 화산 봉우리를 쳐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아버님, 소자는 죄를 짓고 떠나갑니다!" 그리고는 맨 뒤에서 여승들을 따라 발길을 떼놓았다. 육사고는 얼핏 당혹스런 기색이 스치더니 싸늘히 소리쳤다. "악기, 한사코 떠날 생각인가요? 그럼 다시는 화산파에 못 돌아오는데도?" "그렇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육사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급급히 덧붙였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없겠어요?" "사고, 더는 막아 서지 마오. 내 이렇게 떠나게 되니 한 가지만 알려 주고 싶소. 당신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당신 아버님과 내 아버님은 서로 의형제간이오. 기실 두 분이 의형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연분을 맺게 된 것이오. 하지만 연분은 이로써 끊긴 것이고 나도 그간 당신을 떠받들며 아버님이 진 빚을 얼마간이나마 갚은 셈이오. 그러니 더는 막아 서지 말아 주오!" 육사고는 적이 놀란 눈으로 악기를 쳐다보았다. 악기의 마음을 알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늘 오리무중에 빠져 들곤 했었다. 실로 악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녀 자신은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악기는 화산파 무리들을 둘러보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화산파 형제들, 나는 이만 떠나려오. 부디 안녕히들 계시오." 육사고는 선뜻 악기에게 다가섰다. 어떻게든 만류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녀의 눈에는 애절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악기는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악기는 칼집에 조심스럽게 검을 꽂아 넣으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이여, 검! 이 사내가 산을 내려간 다음에는 좀처럼 칼집에서 나올 줄 모르거라!" 악기는 산등성이를 타고 휘적휘적 산을 내려갔다. 악기는 화산 기슭의 무연한 수림 속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홀로 살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나물을 캐거나 산토끼 따위 산짐승을 잡았으며 저녁에는 화톳불을 피워 놓고 그것들을 구워 먹었다. 그러다가 화톳불이 사그라들면 그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악기는 다시는 남의 장단에 춤을 추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로 거듭거듭 작심했다. 이리저리 달포쯤 흘러간 어느 날, 웬 낯 모를 사내가 이 수림으로 찾아들었다. 헌칠한 키에 도포를 걸쳐 입은 씩씩하게 생긴 사내였다. 사내는 저물도록 초가집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악기는 다 저녁에야 산토끼 한 마리를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낮 모를 사내는 말 한마디 없이 악기를 건너다보더니 대뜸 토방에 걸터앉았다. 악기는 내심 흠칫 놀라며 사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복색이며 점잖은 행동거지며 성품이 강직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악기는 넌지시 운을 뗐다. "노형은 이 누추한 곳에 웬일로 오셨는지요?" "살인하러 온 사람일세." 낮 모를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하나 그 어투란 도시 말꼬리를 이을 여지를 안 주는지라 악기는 더욱 놀라며 더 말을 나눌 멋이 없어 잠자코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됫박같이 큰 주먹, 바위 뿌리처럼 억세게 솟아오른 목, 어디를 보나 힘이 장사요 무공이 뛰어난 무림의 영웅임에 틀림없었다. 사내는 뚫어지게 악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선 화산파의 위망이 높은지? 아는 대로 말해 주시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왜요?" 사내는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어찌 됐든 화산파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화산파 일이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 물어 보는 편이 좋겠소." 사내는 바위처럼 앉아 그윽하면서도 강인한 눈길로 먼 산을 바라다보았다. 악기는 열적게 마주 앉으며 생각을 굴렸다. '이 사내는 실로 범상치 않군. 필시 속세를 숨어 다니는 제왕이 아니면 강호의 호걸인데…… 대관절 누굴까?'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화산파 사람들은 내일 만나 봐야겠군." 사내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악기를 보고 말을 이었다. "요즘 화산파 사람들은 정신들이 나간 모양이야. 장문네 내외간을 죽이고 삼로도 폐인이 되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 버렸으니. 아무래도 한번 가 봐야겠어." 그제야 악기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첫눈에 제왕의 풍모다 했더니 과연 천하 무림의 대영웅 대협 왕중양이로구나!' 사내는 정색을 하며 악기를 바라보았다. "내일 화산파들과 만나면 금번 사건의 전후 종말을 알 수 있겠지. 한데 곽명송을 죽인 사내가 바로 자네 아닌가?" 악기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조만간 누군가 이렇게 따지고 들 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곽명송을 죽이기 전에도 여러 번이나 육사고의 사촉을 받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 무림의 대영웅 왕중양이 자기 죄를 물을 줄은 실로 천만 뜻밖이었다. 사내는 다시 느릿하니 말을 이었다. "악기, 세상만사는 인연이 있고 업보가 있는 법일세. 자네는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으니 마음이 편할 리 있겠나?" 악기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만천하에 이름을 떨친 왕중양에게 걸렸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과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요,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악기는 쑥스럽게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치만 매번 다 죽일 만한 연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곽명송만은 죽이지 말았어야 했지만……." "난 화산파 내부 일엔 손대고 싶지 않소. 하지만 삼로의 부탁을 받았으니 곽명송을 죽인 까닭만은 똑똑히 밝혀야겠소. 좌우간 곽명송을 죽인 건 자네가 틀림없겠지?" "틀림없소이다." 사내의 너부죽한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비꼈다. 그는 악기가 강호의 쾌도로 이름을 날렸고 됨됨이도 정직하다고 익히 들어 왔었다. 한데 장가를 든 후부터는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나쁜 짓만 한다는 것이었다. 육사고란 계집이 대관절 얼마나 요망스러운 계집이기에 선량하고 정직한 사내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사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쾌도 악기도 분명 덮어놓고 계집의 장단에 춤출 지경으로 어리석은 사내는 아닌 듯하고, 여기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악기, 하고픈 말이라도 있으면 툭 털어놓으시게." "날도 저물었고 또 예까지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저를 죽이시려거든 요기나 하고 죽여 주시오." 악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저녁이나 들고 보세." 악기는 더는 사내와 말수작을 않고 가죽을 벗겨 내고는 토끼를 화톳불에 노랗게 구워 냈다. 그리고는 조롱박에다 술을 내놓으면서 벙긋 웃었다. "자, 한잔 하십시다. 퍽 오래 전부터 천하 영웅을 논할진대는 대협 왕중양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는 말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 내 첫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이제껏 명성만 자자하게 들어 오다가 이참에 한자리에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게 되었으니 이 한평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은 것 같소이다." 악기가 허허 웃자 왕중양도 맞받아 껄껄 웃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술을 마시고 담소하는 악기가 내심 대견스럽기 그지 없었다. 둘은 권커니자커니 술잔을 나누고 토끼 고기를 뜯어먹으면서 강호에 떠도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주고받았다. 두 사내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간처럼 서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어느새 중천에 걸렸다. 왕중양은 악기를 건너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서글서글하고 후덕한 사내가 여북하면 사람을 죽였을까……. 왕중양은 데면데면하니 악기를 건너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악 형, 이젠 아까 하던 얘기나 좀 해 봅시다. 가슴에 응어리 진 얘기가 있을 법한데 어디 속시원히 말 좀 해 보시오." "곽명송을 죽인 건 정말 잘못된 노릇이지요. 중양 진인께서 곽명송을 위해 복수코자 하신다면 소인은 할말이 없소이다." 악기는 달빛 쏟아지는 밤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며 숙연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왕중양은 측은한 생각이 새록새록 깃들였으나 삼로의 부탁을 저버릴 수도 없는 터, 침울한 기색으로 조용히 악기를 꾸짖었다. "악기, 그렇게 악한 짓을 할 건 뭔가?" 악기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왕중양을 똑바로 쳐다보며 선뜻 말했다. "중양 진인, 물론 노형의 무공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한번 겨루어 보고 죽기가 소원입니다!" "좋아, 한번 겨루어 봄세." 왕중양은 악기의 됨됨이가 적이 대견스러워, 그의 마음을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었다. 작금에 이르러 강호 무림에서는 대협 왕중양과 더불어 무공을 겨루다 죽는 것을 더없는 영예로 알고 있는 터였다. 왕중양은 조용히 일어나 악기와 마주섰다. 그는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악기 쪽에서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수림에서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악기, 악기이!……." 악기는 흠칫 놀라더니 귀찮은 듯 이맛살을 찡그렸다. "중양 진인, 마음을 가다듬어 노형과 싸우고 싶으니 잠시 틈을 주시오." "좋아! 누군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니, 내 기다리지." 왕중양은 선선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숲 속에서 껑충 뛰어나왔다. 서른 살 될까말까 한데 다소 거친 데가 엿보여도 꽤나 반반하게 생긴 계집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쪽에 장승처럼 서있는 왕중양은 보지 못했는지 냉큼 악기 쪽으로 다가가며 반가운 기색으로 종알거렸다. "내 진작부터 알았지요, 멀리 가지 않을 줄 말예요……." "내가 멀리 가든 가까이 있든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오?" 그러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기, 당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당신은 늘 저한테 양보만 했지요. 더욱이 결혼한 후부터는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어요. 그 통에 결국 제가 이 꼴 이 지경이 되었지만." 어두운 그늘 밑에서 왕중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은 제가 저지르고 죄는 남정한테 들씌우다니, 실로 요망스러운 계집 아닌가. 악기는 말 한마디 없이 어둠 속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육사고는 악기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좋은 말로 몇 마디만 구슬리면 원체 어리숭한 사내라 꼭 나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악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도 잘못한 게 많았어요. 당신은 쾌도 악기로 천하에 이름이 났는데 제가 집에서 늘 들볶아대고 바가지만 긁었으니까요. 더욱이 남들 보는 데서까지 당신한테……." 그래도 악기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육사고는 더욱 살갑게 눈웃음을 치며 빌고 들었다. "악기, 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 슬하에서 응석받이로 자랐어요. 당신한테 시집간 후에도 당신이 아끼고 쓰다듬어만 주었으니 이런 철없는 계집이 된 것 아니겠어요? 이제 당신마저 절 버리면 어느 사내가 저를 주워 가겠나요?" 육사고는 일순 짐짓 통곡을 해댔다. 악기는 그래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읊조렸다. "악기, 화산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어요. 장문인 내외간이 피살당한 후로는 저 혼자서 화산파의 중임을 메고 감당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이럴 때 저를 돕지 않고 언제 돕겠어요? 사내대장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절 좀 도와주세요, 네?" "난 당신을 도와줄 힘이 없소."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한테는 얼마든지 힘이 있어요. 지난번 한검당에서 맞섰을 때 보니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당신은 이제껏 절 속이기만 했어요. 이봐요 악기, 제발 우리 화산파를 헐뜯고 미워하는 놈들을 몽땅 죽여 주세요. 그러면 저는 화산 대회를 열고 천하의 호걸들을 청해 큰 잔치를 벌이겠어요. 그때 가면 누가 감히 이 육사고를 업신여길 수 있으며 어느 무리들이 감히 우리 화산파를 넘볼 수 있겠어요?" 육사고는 말할수록 신바람이 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들며 침을 튀겼다. 악기는 어쩐지 속이 울컥울컥 치받쳐 올랐다. 이토록 철면피 같은 계집과 여태껏 살아 온 자신이 한스러웠다. '내가 왜 이 욕심스럽고 괴팍한 계집의 비위만 맞춰 주면서 살아왔던가? 만약 내가 일찌감치 이 계집과 갈라섰더라면 지금쯤은 천하 영웅들이 부러워하는 진짜 쾌도가 되었을 텐데……. 이 욕심 사나운 계집은 지금도 나를 장기쪽처럼 다루려고 하지 않는가?' 악기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담당히 말했다. "일전에 내 그대에게 얼추 말한 적이 있지만 당신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의형제를 맺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소. 오늘 좀더 자세히 말해 볼까. 우리 아버님은 임종시에 그대를 아내로 데려다가 평생 목숨을 걸고 아끼고 보호해 주라고 유언을 남기셨지. 왜 그랬는지 아오? 그대의 아버님이 우리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기 때문이오." 그 말에 육사고는 두 눈에 함빡 웃음을 머금고 바짝 다가들었다. "그래요? 저는 정말 몰랐네요. 아무튼 저는 그 동안 당신을 너무 괴롭힌 것 같아요. 이제부턴 착하고 어진 아내가 되어 당신을 극진히 섬길 테니 다시 한 번 의좋은 부부로 살아 봐요, 우리!" "아니오. 당신의 남편으로는 이만 됐소." 뜻밖의 소리였다. 육사고는 그만 온갖 기대가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하여 대번에 악에 받쳐 소리를 쳤다. "악기, 방금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당신네 아버님 목숨을 구해 줬고 그 대가로 당신은 한평생 나를 아끼고 보호해 주기로 언약했다고!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다시 한 번 더!"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자 악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그런 언약이 있었고 또 나는 그 언약대로 했던 거요." "당신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언약을 지켜야 해요.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화산파로 돌아가 저를 도와주세요!" 육사고는 대뜸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러자 악기는 거세게 뿌리치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렇담, 오늘 안으로 내 목숨을 그대에게 바치면 되는 것 아니겠소? "뭐요? 오늘 안으로 뭘 어째요? 흥, 나를 놀라게 할 거라면 그따위 수작은 그만둬욧!" 그러자 악기는 어둠 속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중양 진인, 죄송스럽지만 좀 이리로 나와 화산파의 새 장문 아씨에게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그 말에 육사고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왕중양은 어둠속에서 몸을 드러내며 육사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늘 안으로 꺼져 버려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악기가 급급히 소리를 쳤다. "잠깐만요!…… 말씀하셨다시피 의당 곽명송을 죽인 자가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곽명송은 내가 죽였으니 나를 혼내 주시오!" "악기, 자낸 참 답답한 사람이구먼. 이런 악귀 같은 마누라를 감싸 주는 이유가 대체 뭔가?" "중양 진인, 악귀든 마귀든 아직까지는 내 아내니 섣불리 손을 대선 안 되오. 죽이려면 어서 나를 죽이시오!" 악기는 발끈 성을 냈다. 왕중양은 허탈하니 미소를 지었다. "이 벽창호 같은 사람아!" 왕중양은 악기에게로 성큼 다가서며 전신에 내력을 운행시켰다. 왕중양의 온몸이 불더미처럼 달아오르고 무서운 기류가 악기의 몸에 닿기 시작했다. 악기는 점점 숨이 가빠지고 바람에 펄럭이는 돛폭처럼 온몸이 앞뒤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사지가 나른해서 그는 검을 잡을 힘도 없었다. 쾌도는 마치 천애절벽과 마주선 사람처럼 숨이 막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모습을 보고는 육사고가 혼비백산하여 물어뜯을 듯이 왕중양을 쏘아보며 악을 써댔다. "당신이 그 왕중양이란 사람인가요? 당신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리 화산파 일에 간섭하는 거예요?" "나는 본디 싱거운 사람이오. 천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고 발벗고 나서는 싱거운 사람이란 말이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왜 속도 모르고 닷곱에도 참례, 서 홉에도 참견이냔 말예요? 까놓고 말해 자기 뒤도 구린 양반이……." 그 말에 왕중양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 계집이 지금 임조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 추잡하고 망측한 계집이 언감생심 임조영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왕중양의 얼굴에는 대번에 살기가 내비쳤다. 악기는 얼핏 눈치를 채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왕중양 앞을 막아 섰다. "중양 진인, 곽명송을 죽인 죄인이나 논죄하십시오!" 그러나 왕중양은 시끄럽다는 듯 잔뜩 양미간을 찌푸리고는 악기를 옆으로 확 밀어 버렸다. 그리고는 육사고에게 더욱 바투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