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4편 (24/70)

2026-09-30 18:32:08 조회 22
"왜 웃는 거냐?" 보살은 무섭게 주백통을 쏘아보았다. 주백통은 간신히 웃음을 참아 가며 되물었다. "아이고, 기가 막혀……. 아이고, 나 죽겠다……. 그래, 어디서 이렇게 많은 괴물들을 주워 모았나?" 그러자 한 사내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주백통, 감히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놀려? 너희 전진교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너희 교주 왕중양은 줄곧 명예욕에 들떠 강호의 패주가 되려 하는데, 그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난 화산에 네 놈의 시체를 널어 놓아 왕중양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검을 쓱 뽑아 들었다. 꼴은 그래도 검을 뽑아드는 품새에선 사뭇 명가의 기백이 풍겨 나왔다. 대환희 보살이 무어라 소리치자 그자는 즉시 온순한 고양이처럼 조르르 대환희 보살 앞으로 달려갔다. 보살은 살이 투둑투둑 찐 손으로 그자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면서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괴묘아(乖猫兒)야, 네가 저 놈을 이겨야 한다. 이기면 상을 톡톡히 줄 테니." 사내는 마치 큰 금덩이라도 얻은 것마냥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연신 헤헤거렸다. 그러더니 주백통 쪽으로 돌아서서 호기롭게 소리를 내지르며 똑바로 검을 찔러 왔다. "네 놈, 목숨을 내놓아라!" 주백통은 실로 가소로울 뿐이었다. 모양이나 차리고 나섰을 따름이지 일단 자기가 손을 쓰기만 하면 한 주먹거리도 안 돼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그자의 검은 날쌔기 그지 없었다. 어찌나 빨리 휘두르는지 주백통은 방어만 하면서 몇 차례 피하다가 옷깃까지 찢겨 나갔다. "큰일났구나, 큰일났어. 살인이야! 이 놈이 사람 죽인다!" 주백통은 엄살을 떨어댔다. 대환희 보살은 신이 나서 응원을 했다. "옳지, 괘묘아야. 저 놈의 몸에 구멍 몇 개만 뚫어 놓고 죽이지는 말아라. 저 놈을 죽이면 왕중양이 우리한테 《구음진경》을 내어 주겠느냐?" 사내는 대환희 보살의 명을 듣더니 이제는 사뭇 조심스럽게 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검법은 날쌔고도 정확하여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주백통은 한 번도 공격을 들이대지는 않고 검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네 놈이 자꾸 핍박하면 나도 선천신공을 쓸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어서 손을 거두어라!" "좋아, 네 놈이 참말로 선천신공을 안다면 한번 써 보려무나. 저 애가 모자라면 그땐 내가 나서지." 대환희 보살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대번에 나섰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선천신공을 보고 싶어 조급증이 났다. 주백통은 일단 싸움을 멈추면 중상을 입을 것 같아 큰소리로 말했다. "사형!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핍박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아야 하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냅다 주먹을 휘둘어댔다. 다음 순간 주먹은 빗발같이 번쩍거리는 검도 사이를 뚫고 상대방의 콧등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가 나며 사내의 코가 단박에 뭉개지고 피가 솟구쳤다. 사내는 악 소리를 지르며 검을 떨어뜨리고는 코를 싸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주백통은 여유만만하게 한마디했다. "자넨 공동파구먼. 자네 검법은 속도가 빠르기는 해도 서른두 가지 초수 중 한 가지가 틈이 있어. 그래서 지고 만걸세."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대환희 보살이 히히덕거리면서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내 일러 줄 게 있으니." 그러자 사내는 오금을 못 펴고 쭈뼛쭈뼛 대환희 보살 앞으로 다가갔다. 보살은 사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적이 정겹게 말했다. "나의 보배야, 너의 검술은 형편이 없구나. 넌 정말 하나도 쓰잘데가 없어." "전…… 전……." 사내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는 꺽꺽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대환희 보살은 더욱 살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놀라지 마라, 놀라지마! 내 말에 겁이 났느냐? 그러지 말고 어서 가까이 와, 가까이 오라니까……." 그녀는 식지를 까딱거려 사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겁을 내진 마라. 내가 너의 목을 살짝, 아주 살짝 쓰다듬어 줄 테니까." 그리고는 그녀는 사내의 목을 살살 어루만졌다. 잠시 후 사내는 별안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공중으로 퐁퐁 몇 번이나 뛰어올랐다. 사내는 두 눈을 홉뜨고 보살을 노려보았다. 삽시에 그의 눈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사내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씩 토해냈다. "네, 네 년은 정말 지독하군, 지독해! 네 년은 나 보고…… 나를…… 네 년은……." "그럼, 한때는 널 잘 대해 주었더랬지. 하지만 그까짓 왕중양의 사제마저 대적해 내지 못하니 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야. 네가 죽은 뒤 내가 대신 복수해 주지! 그럼 됐지?" 대환희 보살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렸다. 사내는 더는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대환희 보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코와 입과 눈에서는 연신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마침내 그는 풀썩 꼬꾸라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단 말인가? 왜 저 사람을 죽이는 거냐?" 주백통은 큰소리로 외쳐댔다. 대환희 보살은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주백통을 보고 싱긋 웃었다. "자넨 달리 대해 주지. 자네가 날 따르기만 하면 늘 살갑게 대해 주겠어." 주백통은 코대답도 않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에잇, 더러운 것들! 난 가겠어!" 주백통은 워낙 여인들과 주고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더구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 널브러지는 걸 보고는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흥, 그렇게 마음대로 갈 수 있을까?" 대환희 보살이 손을 까딱거리자 난쟁이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느물느물한 것이 눈은 짝 찢어지고 보기에도 역겨운 몰골이었다. 난쟁이는 주백통을 노려보며 앵앵댔다. "서랏? 가지 말라는 보살님 말씀도 듣지 못했느냐?" 주백통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날리며 순식간에 공중으로 몸을 홱 솟구쳐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 넘었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경공은 가히 상승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어찌 된 영문인지 난쟁이는 여전히 눈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천하에 기이한 기충이다! 넌 날 알고 있느냐?" 난쟁이는 한껏 조롱거리는 투였다. "알게 뭐야." 주백통은 같잖다는 듯 코대답을 하고는 마냥 내달렸다. 그러나 채 십여 보도 못 가서 갑자기 머리 쪽이 무거워지고 발 쪽이 가벼워지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대환희 보살은 손뼉을 쳤다. "잘했어, 잘해. 놈을 이리로 끌고 오너라." 누군가가 다가와 주백통을 덥석 거머쥐려다가 흠칫 놀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주백통은 그 경황에도 의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거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거지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얼굴이 아주 노쇠해 보였다.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그는 주백통에게서 눈길을 돌려 사내들을 바라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자네들은 어디 사람들인가? 어째서 낯짝을 귀신같이들 하고 다녀?" "이 거지 같은 놈아, 상관 말고 저리 꺼져!" 한 사내가 기분이 상해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 거지는 더욱 흥을 내며 거들먹거렸다. "좋아, 난 지금 화산에 가서 재미난 구경을 하려던 참인데, 이렇게 쉬었다 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싸우고 싶거든 어디 덤벼 봐." '보아하니 저 사람도 화산 무예 시합에 가는 모양이구나. 복색으로 봐선 개방 사람임에 틀림없어. 듣자니 개방에는 두 사람이 무예가 뛰어나다고들 하던데. 한 사람은 전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임 방주 홍칠공이라고 했지 아마. 한데 이 사람은 나이가 많지 않으니 개방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슨 큰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대환희 보살은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는 친절하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오는 거요?" 그러자 거지도 악의 없이 대답했다.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한다기에 구경이나 할까 해서 오는 길이오. 한데 가다 보니 여기서 북새통을 벌이고 있기에 궁금해서 좀 들여다봤소." 대환희 보살은 기색으로 보나 품새로 보나 개방의 그 두 방주는 아닌 듯싶어 단호히 명령했다. "저 놈을 죽여 버려." 그러자 일곱 사내가 병장기를 들고 척 나섰다. 한 사람은 두 손에 창을 들고 있었는데 왼손에 든 창은 길고 오른손에 든 창은 짧았다. 그는 쌍창을 일제히 내밀며 가슴과 머리를 겨누어 똑바로 찔러 왔다. 또 한 사내는 사슬망치로 목을 겨누고 치달려 왔다. 그 사슬에 목이 감기기만 하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은 쌍장으로 목을 겨누며 일곱 가지 초식을 연거푸 이어 대며 흉악하게 달려들었다. 그 밖에 세 놈은 단도를 들고 일제히 두 어깨를 노려 질풍같이 내달았다. 마지막으로 난쟁이 똥자 루만한 녀석만은 손을 쓸 생각도 않고 멀찌감치 서서 비위 상하게 웃고만 있었다. 놈이 바로 충피였다. 전후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주백통은 몸을 일으키더니 발을 동동 굴러 가며 큰소리로 한탄을 했다. "글렀구나, 글렀어. 괜히 참견할 게 뭔가? 그러니 목숨을 잃게 됐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놈들의 병장기가 저절로 절컥절컥 움직이며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돌연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모두들 한 발자국씩 비틀비틀 물러섰다. 여섯 사내들은 일순 얼떨떨해져서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거지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손짓 한 번 안 하는데도 일순 병장기들이 여섯 놈들 손에서 스르르 빠져 나가더니 마구 얼크러지며 공중으로 휙휙 날아다녔다. 창은 다 른 놈의 어깨와 땅바닥에 박히고 사슬망치는 들고 있던 놈의 목에 감겼다. 놈은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맥없이 두 팔을 너풀거렸다. 누가 풀어 주지 않으면 질식할 판이었다. 쌍창을 휘두르던 놈은 팔이 부러진 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도 모르고 멍청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거지는 정색을 하며 장풍을 내치려던 사내에게 외쳤다. "네 놈은 장법을 쓰기에 다른 놈들보다 운수가 좋은 셈이다. 대신 네 놈이 날 기습하려 했으니 내 네 놈 손을 좀 손봐 줬을 뿐이다." 대환희 보살은 깜짝 놀라 생각을 더듬었다. '저 놈이 손을 쓰는 게 왜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 놈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저자는 바로 홍칠공이다. 방주라고 해서 꼭 나이가 많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쌀쌀한 어조로 짤막하게 외쳤다. "그대가 홍칠공인가?" 거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13장 치주를 찾다가 닥친 조우 단지흥과 네 시위들도 대리를 떠나 화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황궁을 나선 김에 혹시나 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붙잡고 2년여 전에 사라진 치주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녀는 돌연 궁에서 사라진 뒤로는 영 감감무소식이었다. 만약 일속이 있었다면 당연히 함께 동행했겠지만 그 역시 행방이 묘연하여 단지흥은 네 시위만을 데리고 떠나왔던 터였다. 치주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찾아보겠노라고 천룡사를 떠난 일속은 그 참에 왕중양을 찾아가 《구음진경》을 한번 구경하겠노라고 했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어쨌든 그는 자기를 위해하려는 누군가가 치주를 납치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단지흥은 치주가 일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어 지금까지도 그녀를 못 잊고 가슴을 앓고 있었다. 화산에는 강호의 각 문파들이 다 모여들 터, 화산에 가면 치주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그들은 밤을 도와 발길을 다그쳤다. 마침내 화산 아래에 당도해 보니 그곳은 이미 산지사방에서 한다하는 무림 인사들이 다 모여들어 자못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단지흥은 형세를 살피고는 네 시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치주가 실종된 건 필시 강호 누군가의 짓일 터, 우리에게 아주 불리할지도 모르네. 각별히 조심들 하게." 그들은 화산 아래에 있는 작은 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목도진(木桃鎭)이라고 하는데 가옥이 약 2백 여 호쯤 되는 곳으로 이즈음 전에 없이 술렁대고 있었다. 단지흥은 이곳에서 하룻밤 여장을 풀 생각이었다. 이곳에는 객점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일행은 객점으로 들어가 술과 요리를 시키고는 주위를 살폈다. 별다른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상이 차려지고 막 먹으려 하는데 객점 안으로 한 사 람이 성큼 들어섰다. 장작개비처럼 빼빼 마른 꺽다리였다. 그는 문어귀에서부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아, 싸다 싸! 구슬 사시오, 구슬! 자, 싸구려, 싸!" 그 사람은 유독 단지흥 일행을 주시하면서 그쪽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하나 네 시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 채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평소 단지흥이 엄하게 단속한 바 있어 시위들은 귈 밖에서는 대개 남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더욱이 중원 땅에서는 중원의 관습에 익숙치 않은 터라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시끄러운 시비에 휘말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더군다나 객점에 와서 구슬을 사라고 소란을 피우는 게 수상쩍어 아예 못 본 척 거 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목이 터져라 싸구려를 외쳐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이처럼 훌륭한 구슬도 사려는 이가 없으니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치인(痴人)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치인이야 치인, 사람만 알고 구슬은 모르니 치인인가 치주(痴珠)인가?"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무심코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구슬 주자와 어리석을 치자를 합쳐 치주라고 하니 바로 그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단지흥은 얼른 시위들의 기색을 살폈다. 그들도 황제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단지흥이 앞장서서 잰걸음으로 객점을 나왔다. 시위들도 뒤따라 문을 나섰다. 거리에 나서니 그림자 하나가 얼핏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발밑에서 바람소리가 나도록 황급히 뒤쫓아 갔다. 그러나 시위들은 다소 떨어져서 걸음을 늦잡으며 짐짓 여유롭게 뒤따랐다. 한참이나 뒤쫓아서야 단지흥은 먼 곳에서 늘쩡늘쩡 걷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단지흥은 그가 거리를 벗어나는 것이 좀 의아했으나 행적이 괴이할수록 더욱 치주의 소식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아 급히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가 거의 따라잡을 만했을 때 갑자기 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여유작작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 뒤를 쫓는 겁니까?" 단지흥은 그렇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대번에 치주 얘기부터 꺼낼 수도 없어 그는 말을 돌렸다. "방금 술집에서 구슬을 팔겠다고 했소?" 그 사람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구슬을 팔려고는 합니다만 당신 같은 사람한텐 안 팔겠습니다. 사라고 할 땐 안 사더니……. 그런데 참말로 구슬을 살 생각이 있긴 있는 거요?" "글쎄, 당신이 파는 구슬이 어떤 구슬인지 몰라서……. 동주(東珠)요, 야명주요, 식주(飾珠)요? 아니면 벽독주(酸毒珠)?" "그런 건 아니오." 구슬 장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래도 단지흥은 여전히 인자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견식이 짧기에 더 좋은 구슬이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오. 하지만 나한테 은전은 넉넉히 있으니 우선 구슬이나 한번 구경합시다." "이렇게 따라와서까지 사겠다면야 못 팔 것도 없지요. 하나 번거롭게 보이고 어쩌고 하진 않겠소." 단지흥은 잠시 망설였다. 이 사람이 치주의 행방을 참말로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만일 치주의 행방을 모른다면 공연히 구슬만 사게 되는 꼴 아닌가. 그러나 단지흥은 의심이 들수록 더욱 공손히 물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보여 주오!" 그 사람은 눈을 껌벅거리더니 구개를 저었다. "글쎄, 안 된다면 안 돼요! 당신도 이미 본 적이 있는 물건인데 괜스레 다시 보겠다고 우기는군. 사려면 그냥 사지 시끄럽게 굴지 마시오." 단지흥은 한층 의아심이 들었다. 그때 얼핏 네 시위가 당도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멀찌감치 흩어져서 단지흥의 손끝 하나라도 다칠새라 뚫어지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좋소, 당신의 구슬을 사겠소!" "살려면 사슈, 은자나 내놓고." "그래 구슬 값이 얼마요?" "에누리없이 팔만 냥이오." 사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자약하니 말을 받았다. 단지흥은 내심 더욱 의아해지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마냥 여유롭게 물었다. "당신의 구슬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소만 물건을 보이지도 않고 팔만 냥이나 부르다니……. 너무한 것 아니오?" "나나 되니까 팔만 냥이지 딴사람한텐 배를 주고도 못 살 거요. 그래, 사시겠소, 안 사시겠소?" 양 옆구리에 떡하니 손을 짚고 쌀쌀한 얼굴로 비껴 서 있는 품이 아무래도 무림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의 팔은 사뭇 단단해 보였다. '보아하니 호수(好手)인 것 같군!' 단지흥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 호수들은 대체로 침착하고 태연자약하다. 천룡사에도 고선 장로라는 고승이 하나 있는데 그는 십여 년 동안이나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서 한 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는 일에서나 사물의 도리를 깨치는 일에서나 대리에서는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수행을 쌓아 끝내 성과(聖果)을 이루었다. 이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단지흥은 웬지 저도 모르게 고선 장로를 떠올렸다. 고선이 수행을 쌓듯이 이 사람이 무학을 터득했다면 필시 높은 경지에 올랐으리라. 단지흥은 선뜻 응답했다. "좋소, 내가 사겠소. 그런데 창졸히 떠나오다 보니 그렇게 많은 은자를 갖고 오진 못했소이다. 여기에 물건 두어 개가 있으니 당신이 팔만 냥이 될지 한번 보시오." 그는 흥정을 하는 체하며 몸을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그 사람은 단지흥이 하는 양을 쌀쌀하게 지켜 보았다. 단지흥은 먼저 머리에 쓴 모자에서 옥성(玉星)을 끌러 내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것은 진짜 옥이었는데 수만 냥은 족히 넘는 것이었다. 그는 또 허리띠에서 구슬 한 알을 뜯어냈다. 이 구슬은 창산 이해의 정안주(定顔珠)로서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는 또 생각을 굴리다가 품속에서 부채를 꺼냈다. 이 부채도 값을 헤아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 다. "이만하면 안 되겠소?" 단지흥이 묻자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쓱 건더다보더니 별다른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겨우 될 것 같긴 한데……. 좋소, 날 따라오슈." 그 사람은 더 이상 뭘 물을 틈을 안 주려는 듯 홱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단지흥은 묵묵히 따라갔다. 네 시위도 멀찌가니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구슬 장수는 오랫동안 걸어서야 한곳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단지흥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날 놓치지 말고 단단히 따라오시오." 그리고는 몇 발자국 걸어가 나무 뒤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단지흥도 그 사람 뒤를 따라 나무 뒤쪽으로 잽싸게 걸어갔다. 그랬더니 일순 난데없이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흥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하여 거세게 도리질을 치면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 속에서 별빛 같은 것만이 몇 점 가물거릴 뿐이었다.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꼭 지옥에라도 온 것 같군. 무슨 괴상한 것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구슬 장수는 이제 더는 한마디도 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단지흥은 놓칠세라 얼른 내달아 그 뒤에 바싹 붙어 서서 걸어갔다. 꿈에서도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이 사람인지 귀신인지조차 도시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은 단지흥에게 바싹 달라붙어 주위를 맴돌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 사람 아니면 귀신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한 순간 구슬 장수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웬 높직한 단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 위엔 늙은 노파가 하나 앉아 있었다. 길다란 머리를 당조 때 유행하던 식으로 양쪽 귀 위로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사람 같지 않았다. 얼굴은 길쭉하니 말상이었다. 낯빛이 끔찍하리만치 창백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마치 원귀가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자넨 누군가?" 노파는 사뭇 위엄이 있어 보였다. 단지흥은 겸손히 답했다. "소인은 대리 사람입니다." "무슨 사람? 이거야, 원!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대리 사람이건 중원 사람이건 여하튼 조만간 다 이곳에 오게 돼 있어. 어디 사람이든 마찬가지야. 한데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어디 사람이냐고 물었나?" 아무래도 중원 말씨는 아니었다. 단지흥은 정중하게 되물었다. "노파는 누구십니까?" 그러자 노파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