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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3편 (23/70)

2026-09-30 18:32:08 조회 15
"좋아요, 내가 진다면 화산 무예 시합에는 안 가리다!" 주백통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좋아했다. "됐다. 됐어. 나의 사형께선 화산 무예 시합에서 그 노독물과도 싸워야 하고, 그 황 괴물과도 싸워야 하고 또 거렁뱅이와도 싸워야 하니 지쳐 죽을 지경일 거야. 그런 판에 무슨 중입네 도사입네 하는 자들과도 싸워야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어? 그러니 내가 대신 몇 합 싸워 사형의 부담을 덜어 드려야지." 주백통은 흥이 나서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아 사내가 누군지, 왜 이러는 것인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됐다, 됐어. 그대는 가짜 중은 아니겠죠? 중이라면 말에 신용이 있어야 해요! 거기서 먼저 지면 곧 돌아가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어도 되겠지요?" 라마 중은 진작부터 이 주백통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라 정색을 했다. "내 말을 믿으시오. 내가 지면 결단코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가지 않으리다." 라마 중은 내심 중원 사람들한테 그다지 알려져 있지도 않은 주백통한테까지 진다면 화산에는 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티베트로 돌아가 수련을 쌓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단단히 마 음을 사려 먹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재간이 있으면 어디 덤벼 보란 말이오." 라마 중은 화난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주백통은 호들갑을 떨면서 헤헤거렸다. "좋소! 싸우고 싶으면 얼마든지 싸웁시다. 나의 사형이 함부로 겨루지 말라고 신신당부만 하지 않았어도 난 벌써 손을 썼을 게요! 아까 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말이오! 내 보건대 거기는 심성이 비뚤어진 것 같으니 한번 뿔이 빠지게 싸워 봅시다!" -제 11권에 계속 - 제12장 《구양진경》에 홀린 주백통 화산 아래에 있는 취선루는 온통 시끌벅적 들끓고 있었다. 라마중과 주백통은 벌써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 동안이나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주백통은 말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겠는지 싸우면서도 연신 떠들어댔다. "이 중 놈아, 이제 그만 손을 드는 게 어떠냐? 네 놈은 죽었다 깨나도 날 못 이겨. 네 놈은 화산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내 용서해 주지……." 라마 중은 그 말에 칼을 더욱 사납게 휘두르며 날뛰었다. 그러나 주백통이 어찌나 날렵한지 아무리 악을 쓰고 대들어도 털끝 하나 다치지 못했다. 주백통은 신이 나서 춤을 추듯 했다. "그까짓 재간으로 언감생심 화산에 오르려 했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주백통은 주먹으로 라마 중의 머리를 쿡 쥐어박았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라마 중은 약이 바싹 올라 악악 소리를 지르며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라마 중은 어떻게 하든지 이 주백통이란 작자와 끝장을 보려 하였으나 주백통의 주먹은 그야말로 번개와 같아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본디 장화도(掌化刀)는 한 번 내칠 때마다 엄청난 내력이 소모되는 것으로 결코 허투루 써서는 아니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백통을 제압할 욕심에 너무 분별 없이 오랫동안이나 화염장도를 펼쳐내는 바람에 급기야는 진이 빠지고 말았다. 그는 도저히 주백통을 이겨 낼 수 없음을 알자 그의 주먹을 피하며 점점 문 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씩 뒷걸음질을 쳤다. 마침내 문까지 다 다다르자 그는 돌연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바람처럼 뛰쳐나가 버렸다. 주백통은 펄쩍펄쩍 뛰었다. "안 된다, 안 돼. 이 놈, 게 섰거라! 아직 실컷 싸우지도 못했는데 비겁하게 도망을 가느냐?" 라마 중은 그러든 말든 아랑곳 않고 나는 듯이 층계를 달려 내려가 그 길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주백통은 발을 동동 구르며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화산파 곽명송이 한눈에 띄었다. 그는 대뜸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구, 이거 정말 싱거운 일이로군. 방금 흥이 날 참이었는데 도망을 쳤으니, 이거 원 손이 영 근질근질해서……. 암만 해도 거기, 당신과 한번 싸워야겠소! 어떻소?" 곽명송은 주백통이 누구인지 익히 알고 있는지라 정색을 했다. "여보시오, 주 영웅. 당신은 대체 어느 파의 사람이십니까? 보아하니 무예가 매우 출중한데, 그러지 말고 이 사람들한테 우러러 볼 만한 강호의 영웅들에 대한 얘기나 좀 해 주십시오." 주백통은 다시금 문파를 따져 묻자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그 문파 소린 제발 좀 그만둘 수 없소?" 그러자 청수 검객 곽명송은 웃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 보기엔 선생의 무예가 마치 종남산 전진교파의 것과 같은데 옳게 보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주백통은 다리를 철썩철썩 치면서 도리질을 했다. "허허, 그 사람 정말 짓궂은 사람이구먼. 이건 내가 알려 준 게 아니오. 당신이 당신 입으로 내 무예가 전진교 무예라고 말한 것이오. 내 입으론 전진교 사람이란 말은 벙긋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이 주백통이란 사람이 순박하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전진교라고 하자 웬지 친근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곽명송이 재차 물었다. "그러니 딱 부러지게 말을 해요! 내 보기에는 형씨의 일장일식(一掌一式)이 중양 진인의 선천신공(先天神功)과 신통하게도 똑같군요. 형씨는 필시 중양 진인의 수제자인 듯한데 사실이지요?" 주백통은 난처해하며 선뜻 대답을 못했다. 사람들이 재촉을 하자 주백통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난 그분의 제자가 아니오. 난 그분의 제자가 아니란 말이오." 곽명송은 몹시 의아해졌다. '전진교에도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다. 남이 말하기 싫어하는 바에야 더 캐물을 거야 없지…….' 곽명송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백통을 바라보기만 할 뿐 더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아하니 더 이상 묻지 않을 눈치이자 주백통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됐어, 됐다니까. 당신들이 더 겨루어 보려 하지 않으니 여기 있어도 재미가 없군. 난 가겠소." 그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주루에서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주백통은 주루에서 나와 앞만 보며 내처 걸어갔다. 거리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는 가면서도 내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형은 내가 남들과 싸우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싸우기만 하면 영락없이 내가 질 거라고 말씀하셨어. 한데 오늘은 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내 무예가 크게 나아진 것 같아." 주백통은 자못 득의양양해 입이 함지박만해졌다. 때마침 저쪽 켠에서 웬 거렁뱅이 하나가 소리를 치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러분, 무학밀서 사세요. 천하를 주고도 얻기 힘든 무학밀서예요!" '무학밀서라고? 무슨 책일까? 왜 숨겨 두지 않고 팔아 버리는 걸까? 너무 가난해서 귀한 책을 팔아 버리려는 모양이지?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 "이봐, 무학밀서라니 그게 무슨 책인가? 은자 얼마면 그걸 볼 수 있겠나?" 거렁뱅이는 주백통을 보더니 입을 삐쭉거렸다. "당신은 아마 이 책을 사지 못할걸요. 이 책은 《구양진경(九陽眞經)》라고 하는데 우리 가문에서 맨 처음 발견했지요. 원래 우리 가문의 가보인데 가세가 빈한하다 보니 할 수 없이 내놓게 된거요. 은자 삼십 냥이면 보여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예 드리겠습니다." 주백통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생각해 보았다. '진짜일지로 몰라. 강호엔 허다한 파벌이 있는데 개중에 저런 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구양진경》이라니 사형이 얻은 책과 같은 종류의 기서인가 보다. 사형은 《구음진경》을 얻고 나서 매일 그것이 천하의 기서라고 찬탄하곤 했는데 내가 이 《구양진경》을 얻어 가면 무척 기뻐할 게야. 그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날 칭찬해 주시겠지.' 주백통은 그냥 지나치려는 거렁뱅이를 확 잡아당겼다. "자네가 갖고 있는 게 참말 《구양진경》인가?" 거지는 주백통이 사뭇 관심을 보이자 아예 털썩 주저앉았다. "참말이고말고요. 천하에 《구음진경》이란 기서가 있다는 말도 듣지 못하셨나요? 이 화산 아래에서는 요 며칠 동안 북새통이 벌어지고 있는데 천하의 고수들이란 고수들은 거의 다 모여들었답니다. 그분들이 이곳에서 뭘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분들은 유람을 온 게 아니랍니다. 말하자면 무예를 겨뤄 《구음진경》을 얻고자 온 거지요. 그 책에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무예 초수들이 적혀 있다는군요. 중양 진인께서 그 책을 얻으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요?" 거지는 입담 좋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주백통은 큰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왜 그걸 모르겠나? 중양 진인께서 바로 내 사형인데." 거지는 손뼉을 탁 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더 잘됐지요. 《구음진경》이 있는데 《구양진경》이 없을까. 아, 마누라는 있는데 영감이 없어서야 되나요?"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마누라가 있으면 영감이 있고 영감이 있으면 마누라도 있게 마련이지. 옳아, 옳아……. 아니야, 아니야." 주백통은 한창 신나서 말하다가 문득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아니란 말이지요?" "그럼 난 왜 마누라가 없냔 말이야? 사형도 마누라가 없거든. 그러니 자네 말은 틀렸어. 자네한테는 그 무슨 《구양진경》이란 게 있을 수 없어. 자넨 날 속이는 거야!" 그래도 거지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주백통을 바라보았다. "당신 사형한테 마누라가 없는 건 연세가 너무 많기 때문인 거죠. 당신한테 마누라가 없는 건…… 저, 그렇지요, 당신은 아직 젊으신데 왜 마누라를 얻지 못했소?" "마누라는 얻어서 뭘 해? 마누라가 무예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마누라는 뒀다가 어디다 써먹는 거냐구? 마누라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되물었다. "당신은 바보인가요, 바보인 척하는 건가요? 마누라를 얻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그래요? 나 같은 소인배도 다 아는 사실인데 중양 진인의 사제라면서 왜 그걸 모르나요?" 그러자 주백통은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여편네를 얻은 사내들은 하나같이 피로해하고 힘들어 하더구먼. 그러니 여편네는 얻어 뭘 하겠나?" 거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흘끔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 툭툭 먼지를 털었다. "책을 사지 않을 거요? 생각이 없으면 난 가겠소." "아니, 아니, 기다려. 나도 함께 갈 테니." "가기는 어딜 가요? 무엇 하러?" 거지는 마땅찮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사! 산다니까!" "그럼, 은자가 있나 먼저 좀 보여 봐요. 당신한테 은자가 있어야 데리고 가도 갈 거 아니오." 그러자 주백통은 한참이나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은자를 한움큼이나 꺼내 거지에게 보여 주었다. 세 보니 삼십 냥 남짓했다. "됐구나, 됐어. 이젠 그 《구양진경》은 내 것이다." 주백통은 어린애같이 펄쩍펄쩍 뛰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그 《구양진경》을 드릴 테니 먼저 은자를 주세요." 주백통은 의심하지도 않고 은자를 톡톡 털어 그 거지에게 다 내주었다. 그러자 거지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사형에게 칭찬을 들을 생각에 한껏 기분이 들떠 건들건들거리며 줄레줄레 거지를 따라갔다. 거지는 주백통을 데리고 거리를 벗어나 내처 걸어갔다. 사위를 살펴보니 갈수록 황량한지라 주백통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책은 어디 있나?" "뭐가 그리 급해요? 그냥 따라오면 될 건데." 거지는 발걸음을 다그치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걸어서야 한 낡은 절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는 불상들은 너무도 헐망하여 이젠 그 형상조차 알아보기 힘들었고 머리에는 군데군데 삼 검불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거지는 그 절이 아주 익숙한 듯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나 주백통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은지라 선뜻 들어가지를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잠시 후 그 거지가 절 문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 말했다. "왜 안 들어오고 게서 계시오? 들어오세요! 아, 어서 들어오라니까!" "낡은 절간엔 왜 들어가자고 그래?" "두려워서 그러시오? 두려우면 관두시구려. 당신은 《구양진경》을 가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려." "난 이미 돈을 다 치렀으니 어서 그 책을 갖고 나오게." 주백통은 한 발짝도 떼놓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제가 어찌 그 책을 갖고 대처로 떠돌겠소? 그러다 이 목숨 다 날려 버리라구요? 난 그 책을 이 절에다 숨겨 두었소. 그러니 그 책을 가질 양이면 어서 들어오란 밖에. 함께 책을 파내야 하니까." 주백통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대뜸 되물었다. "그래, 자넨 그 책을 땅 속에 파묻었단 말이지?" "당신은 보기보단 총명하군요. 들어와 보시면 알게 돼요." 주백통은 하는 수 없이 거지를 따라 절 안으로 들어갔다. 절간은 바깥에서 볼 때도 헐망하기 그지없더니 정작 안으로 들어가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낡아 버려서 눈앞이 다 산란하였다. 뿐더러 냄새까지 코를 찔러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이구, 이거 정말 못 참겠다. 그래, 그 책을 어디에다 묻었지? 어서 파내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네." 그러자 거지는 정색을 했다. "당신이 직접 파내세요." 주백통은 영 마뜩치 않으면서도 이 거지와 실랑이를 하느라고 시간을 끌기 싫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과연 무슨 표지가 한 개 보였다. '그렇구나. 저 거지가 거짓말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형 말씀이 《구음진경》을 얻을 때도 그 주변이 아주 괴이하더라고 하셨지. 이곳은 딱히 이렇다 하게 괴상하지는 않지만 사문(邪門)의 맛이 좀 나는군.' 주백통은 거지를 돌아다보며 손가락으로 표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래요, 거기요! 파기만 하면 됩니다." 주객전도라더니 거지는 이제 꼿꼿이 서서 자못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주백통은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갈 욕심으로 대거리를 할 염도 내지 않고 허리를 굽히고는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팠을까. 한참을 팠는데도 무슨 《구양진경》 따위는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그는 점점 성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단박에 머리를 들고 돌아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십여 명 되는 사람들이 뒤쪽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모양도 아주 괴상한 것이 사내들은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분을 가득 처바른데다 저마다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었고, 반면 여인들은 어찌나 크고 뚱뚱한지 마치 작은 산봉우리처럼 울뚝불뚝 솟아 있었다. 주백통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라 입이 딱 벌어져서 소리쳤다. "누구냐? 여긴 뭣 하러 왔느냐?" 주백통은 한편으론 저쪽의 기색을 살피면서도 방금 파던 구덩이를 얼른 몸으로 가렸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뭘 파는 거지요?" 살집이 터져 나갈 듯이 뚱뚱한 여인이 주백통을 보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주백통은 얼버무렸다. 그러자 여인은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것이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커다란 볼우물이 푹 패었다. "기서를 파내려는 거지요? 《구양진경》을? 안 그래요?" 주백통은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고함을 쳤다. "아무리 파 보아도 왜 없나 했더니 그쪽에서 벌써 파 간 거 아냐? 맞아, 너희 년놈들이 파 갔지? 어서 내놔. 그 책은 내가 은자 삼십 냥을 주고 산 거야. 비겁하게 훔쳐가다니, 어서 내놔!" 여인은 온몸을 흐들거리며 더욱 요란스레 웃어댔다. "당신은 전진교 사람이지요?" "내가 전진교 사람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야?" 주백통은 심통이 나서 내쏘았다. "당신은 전진교 사람이고 주백통이지요?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사제, 아니에요?" "그러는 네 년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내 사형을 들먹여?" 주백통은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짐짓 더욱 성을 내며 외쳐댔다. "난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어요. 난 당신의 사형께서 기서를 두 권 얻은 것도 알고 있지요. 그 기서는 《구음진경》인데 그분은 그 책을 자기가 갖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서요? 그래서 천하의 무림 사람들을 모두 화산으로 불러다가 무예 시합을 벌여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그걸 내주기로 했다면서요? 그렇지요?" 뚱뚱보 여인은 가슴을 쓱 내밀고는 딱부러지게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죠? 아신다면 아마 당신은 아주 놀랄 거예요. 난 대환희 보살이에요! 벌써 알고 계실 텐데?" 주백통은 대번에 안색이 핼쑥해졌으나 사뭇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아아, 거기가 운남의 대환희 보살이었구먼그래. 그래 운남 사람이 중원엔 뭣 하러 왔나?" 대환희 보살은 주백통이 자기에 대해 알은척을 하자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목에 힘을 주었다. "당신 사형께서 나더러 천리나 되는 이 중원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난 그저 온 게 아니라구요. 그 《구음진경》은 꼭 내 것이 될 거예요." "《구음진경》차지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걸. 당신은 화산에 몰려든 천하의 영웅들을 다 이겨야만 그 《구음진경》을 가져 갈 수 있어!" 주백통은 겁이나 잔뜩 집어먹으라고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대환희 보살은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백통, 중원 무림과 천하의 군웅들 중에서 누가 제일 무예가 출중하다고들 하던가요?" 보살은 한담이나 즐기려는 사람마냥 여유작작하게 물었다. 주백통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러는가 의아해하면서도 말을 꺼냈다. "잘 모르긴 해도 사형 말씀에 의하면 동해 도화도주가 일괴(一怪)이고,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도 일패(一霜)라고 하더구먼. 나머지는 그리 대단치 않다더군. 가만있자, 그리고 또 두 사람이 더 있는데……." "그 둘 중에 내가 있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살은 눈을 크게 뜨며 낚아채듯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주백통은 멀뚱거리며 반문했다. "우리 사형 말씀이 운남의 한 문파 중에 대환희 보살이라는 문파도 있다더군. 그 여인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독약을 사용할 줄 아는데 그 독이 아주 지독하다고 하시더니, 그게 당신을 두고 한 말인가?" "그래요, 맞아요. 당신의 사형은 비록 무예가 천하 으뜸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약을 피할 순 없을 거예요." 대환희 보살은 가슴을 쭉 펴며 사뭇 거들먹거렸다. 주백통은 여기서 이렇게 한담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됐어. 난 당신들과 떠들고 있을 사이가 없어. 그만 가야겠어." 그리고는 그는 대뜸 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백통이 채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아 뚱뚱보 여인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왜 이러는 거야?" 주백통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그저 왕중양한테 이 한마디를 전하려고 그럴 뿐이에요. 사제가 내 손안에 잡혀 있으니 《구양진경》을 내놓으라고!" 그러자 주백통은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허튼소리! 네 년이 내 《구양진경》을 가져 가고도 또 《구음진경》까지 탐내? 《구음진경》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낡은 절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당신은 듣던 대로 참말로 완동이로군요. 당신은 그래 이 낡은 절 안에 《구양진경》인지 하는 게 정말 있다고 믿었단 말이오?" "무슨 소리냐? 그럼 《구양진경》이 없단 말이냐? 영감이 있으면 마누라가 있게 마련이고 사내가 있으면 계집도 있게 마련이거늘 《구음진경》이 있는데 《구양진경》이 왜 없어? 그게 뭐가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자 뚱뚱보 여인 하나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바보 같으니. 《구양진경》이 있다고 한 건 다 속임수였다! 네 놈을 속여 이 절간으로 끌고 오려고 속임수를 쓴 거라구!" "뭐라구? 이 비겁한 년들! 너희 년들이 작당을 해서 날 꼬여내?" 주백통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년들아, 너희 년들은 상대하기도 싫으니 냉큼 물러서라. 내 일평생 속임수라곤 써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어서 비켜! 썩 물러서지 않았다가는 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 투실투실한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고야 말겠어, 괘씸한 년들!" 주백통은 길길이 날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더 불을 지르겠다는 심보인지 보재기 터지듯한 웃음을 토해냈다. "주백통, 네 놈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내 더이상 《구음진경》은 상관 안 하고 그대로 물러가지! 하나 그게 그리 쉽지 않을걸!" "흥, 그래? 그런데 어쩌나? 우리 사형은 《구음진경》을 천하에 덕 있는 사람에게 준댔지, 가장 뚱뚱한 사람에게 준다고는 안 하시던데." 대환희 보살은 그래도 여전히 깔깔거렸다. "호오, 그렇다? 한데 네 녀석은 살집이 많은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그녀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합창을 했다. "우린 좋아요! 여인은 뚱뚱해야 좋아요! 여인은 역시 보살님이 최고지요." 주백통은 그 소리를 듣고는 사내들을 쏘아보면서 허리를 꺾어 가며 죽겠다고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