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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20편 (20/70)

2026-09-30 18:32:08 조회 16
"저런 것도 다 남자라구……." 일속의 일양지 위력을 익히 아는지라 침대 쪽에서 성큼 나서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던 충피는 그 광경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보살은 입을 한 번 씰룩거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얼굴로 다시 일속을 향해 말을 던졌다. "내가 사내를 밝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 사내나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칠성자 같은 녀석은 재미없어!" 칠성자가 이토록 참혹하게 죽는 걸 보고서도 보살네 수하들은 누구 하나 동요를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보아하니, 한다 하는 강호 무객들을 잡아다 신물이 나도록 갖고 놀고는 진물이 다 빠지면 죽여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 모양이었다. 일속은 치를 떨며 경멸 어린 눈길로 보살을 쏘아보았다. 여간만 지독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하, 내 솜씨가 어떤가? 일속 화상, 당신이 날 따르겠다면 내 그 계집을 자네한테 주겠네. 어떤가?" 일속은 노기가 치받쳐 부르르 몸을 떨 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불문에 몸담은 사람으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불현듯 획 몸을 솟구쳐 일속에게 덮쳐 들었다. 일속은 급급히 몸을 날려 살짝 옆으로 피했다. "괜찮은 솜씨군. 제법 괜찮아." 대환희 보살은 흐들거리며 웃더니 잽싸게 팍팍 장풍을 내치며 일속의 언저리를 획 돌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산더미가 일속을 휩싸고 도는 듯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발을 구르면서 환호성을 올렸다. 일속도 화급히 공격을 들이댔다. 두 사람은 번개같이 잽싸게 돌아치면서 정신없이 초식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십여 합을 싸우니 일속은 기력이 점점 못해짐을 느꼈다. "보살님! 계속 이렇게 덤비면 소승도 더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오." "그 말마따나 내가 보살님인데, 보살님에게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법이 어디 있나? 보살은 자네를 고행에서 구원하고 자네의 육체를 입성(入聖)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모른다면 나하고 하 룻밤만 지내 봐! 그러면 다 알게 될 테니!" 그러자 둘러선 여인들이 손뼉을 쳐대며 환성을 내질렀다. "우리 보살님의 점화를 얻으면 꼭 정과를 이루지!" "일속 화상, 우리 이 애와 재미를 보겠다고? 그게 진심이렷다! 그야 내가 얼마든지 시켜 줄 수 있지. 단 조건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한다. 어때?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내 이 애를 두말 않고 내주지." 대환희 보살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단 일속의 색계를 파해 버릴 작정이었다. 일단 일속이 파계하게 되면 보살은 더는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일속을 끌어안고 원앙침에 뒹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생각만 해로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일속은 이, 삼십 합을 싸우고도 승부를 못 가르자 더 이상 보살을 만만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초수로는 이 대환희 보살을 거꾸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되자 하는 수 없이 한 손가락을 곧게 뻗어 일양지공을 내쳤다. 그러나 보살은 이번에도 재빨리 피했다. 일속은 내심 흠칫 놀랐다. 보살은 비웃음을 흘리며 음충스럽게 내쏘았다. "보아하니 이 앤 싫다, 그거로군? 그럼 나하고 사는 건 어때? 노복이 아니라 내 서방으로! 어때, 그건 싫지 않겠지?" 일속은 간신히 구역질을 참으며 더욱 힘껏 일양지를 내쳤다. 보살도 내심 일양지공의 위력에 혀를 내두르며 급급히 막아낼 따름이었다. 그러느라 그녀는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이 화상은 이제껏 갖고 놀던 놈들에 비하면 인물도 뛰어나고 무예도 굉장하다. 이런 놈을 놓쳤다간 일평생 한이 되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놈을 우선 잡아 둬야겠다. 일단 붙잡아 놓기만 하 면 고분고분 길들이는 거야 어차피 시간문제지.' 대환희 보살은 마음속으로 단단히 벼르며 방어에서 공격으로 옮겨 한 수 한 수 새로운 초수를 펼쳐 내면서 일속의 전신에 맹공격을 가했다. 일속은 이 보살을 제압해야 달아나도 달아날 수 있겠는데 뜻대로 안 되니 걷잡을 수 없이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한번 마음이 흐트러지자 자연 내력도 흩어져서 제대로 일양지를 내칠 수 없었다. 그는 연신 헛손질만 해댔다. 일속이 당황해 하는 꼴을 보자 대환희 보살은 입심 좋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글쎄, 그렇게 안간힘 쓸 필요 없이 내 말을 들으라니까! 사내는 여윈 축이 좋고 계집은 실한 편이 나아. 남녀간에 일을 치르는데는 그게 딱 제격이라구. 계집은 퉁퉁해야 색이 강하고 힘도 좋거 든. 젖가슴이 몽실몽실하고 살도 부들부들해야 사내하고 쩍 붙으면 그 기묘함이 무궁하여 필설로는 이루 형언할 수 없게 되는 법이라구. 흐흐흐…… 사내는 또 반대로 여윈 치들이 그런 일엔 기운을 쓴다 이거야. 여윌수록 그런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내가 왜 칠성자를 죽였는지 아는가? 나를 배반하기도 했지만 그 녀석은 살이 너무 쪘단 말이야. 살찐 놈들은 먹기만 하고 제구실을 못해서 쓸모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알맞게 여위었거든. 서방으로 삼기엔 금 상첨화지. 내 당신을 누구보다도 제일 위해 주지. 그리고 당신이 날 위해 주기만 하면 난 우리 저 예쁜 것들을 내주어서 맘껏 데리고 놀게 해 주겠어." 보살이 음탕하게 사설을 늘어놓자 뚱뚱보 여인들은 음탕한 웃음을 질질 흘리며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일속을 쳐다보았다. '불경에서 말하는 지옥에 가도 이런 천한 계집들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속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금 일양지를 내쳤다. 그런데 이번에도 대환희 보살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어찌나 번개같이 빠른지 보살은 금세 피하는 듯싶더니 어느새 한 손을 번쩍 치켜 들어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러자 쌩 바람소리가 일며 일속을 향해 칼 세 자루가 날아갔다. 일속은 얼떨결에 한 손에 하나씩 두 개를 맞받아 쥐었다. 그러나 이마를 겨냥해 날아오는 하나는 도저히 어찌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몸을 약간 솟구치며 입으로 칼을 받아 물 었다. 대환희 보살은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탁탁 털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만하면 실로 뛰어난 재간이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당신과 늘 이 장난만 쳐도 심심치 않겠어." 그러자 일속은 칼을 퉤 뱉어 손에 받고는 악이 나서 소리쳤다. "그따위 소린 집어치우고 던질 테면 던져 봐라!" "아니, 또 싸워 보자구? 당신은 이미 졌어! 졌으면 항복을 해야지 또 싸우자구?" "내가 지다니? 내가 뭘 어떻게 졌단 말이오?" "이거야 정말 밤새 곡을 하고서도 누구 초상을 치렀는지 모른다더니, 꼭 그 짝이로구먼, 금세 내 칼을 그 입으로 물지 않았나? 그 칼엔 독이 묻어 있다, 독! 이제 조금만 있므면 독이 온몸에 퍼 질 건데도 항복을 안 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속은 온몸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충피도 성큼 내달아 앞으로 뛰어나와 손뼉을 치며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일속이 독에 중독되었다니, 그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슴푸레하더니 날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다. 나무며 풀, 수림의 자태가 똑똑히 눈에 잡혔다. 뚱뚱보 여인들과 사내들은 이제 얼마간 지쳐서 눈을 멀거니 뜨고 대환희 보살 이 이제 또 무슨 재미나는 일을 시작하려고 저러나 가슴을 졸였다. "얘, 치주야, 이리 좀 오너라. 이리 와서 이 화상과 그것 좀 멋들어지게 한번 해 봐. 피곤한 차에 우리도 눈요기나 좀 실컷 하게." 대환희 보살은 사뭇 요염을 떨며 치주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징그러웠다. 치주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마지못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어 나와 보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애원의 눈길로 보살을 바라보았다. "보살님, 저는 황궁에 들어가서 이제야 겨우 황제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일양지공의 비결도 탐지해 낼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오늘…… 오늘 이런 일을 하면 장차 보살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 년 사설도 많다! 누가 네게 그런 것까지 따져 보라더냐. 어서 내 말대로 냉큼 시행하지 못할까!" 치주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일어나 한 발 한 발 일속에 게로 다가갔다. 일속은 중독이 되어 못박힌 듯 꼼짝못하고 서 있었다. 치주는 처연히 일속을 바라보았다. 정녕 그를 파계시키기는 싫었으나 보살의 명을 거역한다면 자기나 이 일속은 목숨을 건질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팠다. "보살은 소식(素食)을 하고 중은 육식을 하니 인간의 일이란 알 수가 없네." 대환희 보살은 시라도 읖조리듯 한껏 멋을 부려 얄궂은 소리를 토해 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화상! 속세의 재미를 한번 맛보는 것도 가히 나쁘진 않을 것인즉, 부처님도 날고기의 비린 맛을 맛봤다지 않은가?" 치주는 원망 어린 눈길로 흘낏 대환희 보살을 쳐다보았다. 그 말은 기실 어서 일속 화상을 홀리라는 분부와 다름없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군 채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는 이윽고 일속에게 바투 다가서서 허리를 비비꼬며 일속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스님들은 모두 겉으로는 태연해도 내심 이런 정사가 어른거려 속을 않는다면서요? 스님도 한창 나이인데 왜 여자들이 싫겠어요? 안 그래요?" 치주는 일단 마음을 먹자 오로지 이 일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사뭇 나긋나긋 말하며 일속의 옷을 다 벗겨 냈다. 그리고는 사락사락 자기 옷도 벗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스르르 흘러내리고 나자 백설같이 하얗고 매끈한 나체가 매혹적으로 드러났다. "화상도 일생에 몇 번은 여자 맛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색(色)은 공(空)이고 공도 색이라는데 색을 두려워할 게 뭐예요?" 일속은 백옥 같은 치주의 살결을 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종래로 색은 공이거늘, 그따위로 말을 돌리면서까지 날 유혹해서 어쩌겠다는 것이오? 더군다나 그대는 일국의 황제의 황비로서 어찌 하여……." 일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살이 잽싸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뭐, 색은 공이라고? 허튼소리 집어치워라! 계집 사내가 다 벗고 아랫도리를 맞추는데 색이 없겠느냐, 소리가 없겠느냐? 난 너희들에게서 그런 살방아 찧는 몸짓, 그런 숨넘어가는 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흐흐흐……." 그리고는 보살은 징그럽게 웃어젖혔다. 하지만 치주는 일속이 황제를 입에 올리자 참괴감이 솟구쳐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일속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불문에 몸담은 사람으로 이렇듯 중독이 되어 꼼짝도 못하고 부처님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제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닐 터였다. 그는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조차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자포자기한 채로 입을 다물고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 순간, 다시금 난데없이 백면라살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치주는 잠시 멈칫하다가 모든 것이 자기의 기구한 팔자 때문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될 대로 되라는 심경으로 일속에 게로 더욱 바싹 다가가 몸을 찰싹 갖다 붙였다.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속은 치주의 매끌매끌한 몸이 살에 닿자 흠칫 놀라며 소리 높여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잘한다, 우리 치주 잘한다. 더 바싹 붙어라, 더 바싹 붙어야지." 보살은 곰 발바닥 같은 손바닥을 탁탁 마주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대는 지아비가 있는 몸으로 어찌 이리 방종하게 구오?" 일속은 엄하게 치주를 꾸짖었다. 그러나 치주는 애써 그 말을 귓전으로 흘려 버렸다. 그녀 역시 이미 단지흥에게 돌아가기는 틀린 몸이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런 말은 마세요. 이제 와서 남들 모두 즐겨 하는 일을 스님이라고 마다할 게 뭐예요? 그걸 참느라 이렇게 스스로 고생하실게 무엇이냔 말예요. 다른 생각은 마시고, 자, 어서요! 모든 게 다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에요. 인생은 한갓 일장춘몽일라구요, 일장춘몽……." 치주는 속삭이며 자꾸만 몸을 비벼 왔다. 일속은 정말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아니 정말 꿈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한 순간 귓전에 어렴풋이 부처님 말씀이 울려 왔다. '일속아, 지금껏 네가 털어 버리지 못하는 그 일속은 세속의 상쟁이나 시비에 대한 속념이 아니라, 바로 색에 대한 미련이니라. 그래서 오늘 이런 일을 당하는 게다.' 일속은 번쩍 눈을 떴다. 자신을 바싹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치주는 마치 꿈속의 요녀처럼 느껴졌다. 옥같이 하얀 그녀의 살결도 오히려 무섭도록 창백하게 보였고, 그 몸에 끌려 자기는 지금 헤어 나올 수 없는 피 못을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여인…… 이 여인은 바로 백면라살…….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언제 여기에 온 것일까. "아아, 그대는 백면라살……. 아아, 백면라살……." 일속은 정신없이 헛소리를 해대며 와락 백면라살을, 아니 치주를 끌어안았다. 한 순간 그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마침내 그는 치주와 한 몸이 된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며 눈빛을 반짝이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급기야 일속은 파계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마다할 핑계가 없어진 것이다. 설사 마다한다 해도 염려 없다. 말을 듣게 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윽고 치주의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를 홀리는 소리였다. 뚱뚱보 여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헤벌린 채 거칠게 숨결을 토해냈다. "잘한다, 치주! 좋다, 멋들어 진다! 화상, 기운이 대단한데! 역시 방사 한 번 못해 본 숫총각이야, 숫총각!" 대환희 보살은 탄성을 높이 올렸다. 너무나 격동된 탓인지 그 목소리는 차라리 황소의 영각 소리를 방불케 했다. 치주는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예기치 못했었다. 바로 그 순간 단지흥의 얼굴이 떠오를 줄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폐하, 폐하 저를…… 저를 잊지 마세요. 저를…….' 대환희 보살은 자신도 늘 음사를 즐겼을 뿐 아니라, 수하의 여인들과 벽남 사내들을 맞붙여 놓고 구경하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오늘 일속과 치주를 억지로 붙여 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던 보살은 음심이 부쩍 동해 소리를 내질렀다. "이봐 일속, 이제 그만하면 나하고도 한번 재미를 봐야지." 일속은 일순 멍하니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시 알 길이 없었다. 좀전의 그 여인, 백면라살은 어디로 간 것일까.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는 정신없이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아무데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일속 화상,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대환희 보살은 손까지 내저으며 성화를 부렸다 일속은 가까스로 눈꺼풀을 치켜 올리며 소리난 쪽을 바라보았다. 웬 뚱뚱보 여인이 가물가물 멀리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 백면라살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계 속 이렇듯 혼미해 있다가는 일생의 수행(修行)이 수포로 돌아가고 몸과 마음이 다 타락하여 부처님에 대한 정성마저 없어지고 말 것 인즉,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겨우겨우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억누르며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녕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거대한 힘이 끌어당기는 듯 그는 자기도 모르게 대환희 보살 쪽으로 차츰차츰 발길이 끌려가는 것이었다. 보살은 일속이 아직 서너 발짝 떨어져 있는데도 두 손을 쭉 내뻗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일속은 솜덩이 같은 그녀의 살무더기 안에 콱 파묻혀 버렸다. "요 귀염둥이 화상아, 이제부터 넌 내 것이다. 하자면 하고 놀자면 놀고 웃으라면 웃고……. 흐흐흐…… 내 말만 들으면 복이 터져요, 복이." 그러더니 뚱뚱보 여인들을 힐끔거리며 연신 주워섬겼다. "자 봐, 내 이 제자들도 천자만흥(千紫萬紅) 얼마나 예쁜가? 이 아이들도 당신 마음대로 갖고 놀라구." 일속은 무엇에라도 홀린 사람마냥 스르르 머리를 돌려 그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일속이 아니었다. 마음이 물같이 깨끗한 일속은 어디로 가고 그는 점점 전혀 딴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여인들을 쳐다보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비대해서……." "자, 이것 봐. 아직 철부지구먼. 계집은 동등해야 좋다고 입이 닳도록 말해 줬건만! 사내가 계집을 왜 좋아하는 줄 알아? 살 때문이라구. 사내들이 좋아하는 건 계집의 살이야, 살!" 기실 일속은 지금 대환희 보살의 그 어떤 법술에 홀려 있었다. 그는 지금 여인이라면 아무리 추녀라도 다 선녀처럼 보였다. 아니, 그가 그토록 애절하게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여인, 백면라살로 보이는 것이었다. 언뜻 일속의 눈에는 대환희 보살이 백면라 샅로 보였다. 그는 애타게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당신은 내 여자, 내 여자……." 대환희 보살은 두 팔로 일속을 안고 어린애같이 둥둥 어르면서 쪽쪽 입을 맞춰댔다. 어찌나 세게 맞추는지 잔뜩 불어난 돼지 오줌통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뚱뚱보 여인들마저 흠칫흠칫 놀라며 저러다가 일속이 잘못되면 어쩌나 은근히 근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환희 보살은 그저 제 욕정에 취해 일속을 품에 넣고 못살게 굴었다. 마력(魔力)에 걸려든 일속이 이렇듯 고분고분해지자 뚱뚱보 여인들은 저마다 속이 달아오르고 샅이 가려워졌다. 어서 빨리 자기 차례가 오기를, 그녀들은 숨을 꼴깍꼴깍 삼켜 가며 손에 땀을 쥐었다. 충피도 쾌재를 부르며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살과 일속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먼데서부터 홀연 퉁소 소리가 울려 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때로는 격하게 유유히 울려 오는 그 퉁소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울려 퍼지는 천국의 음향 같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종긋 귀를 세웠다.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사색을 던져 주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뭇 설레게도 하는 그 퉁소 소리에 저마다 제 나름의 비애에 물들어 갔다……. 그중 화산파(華山派)의 검객으로 있다가 대환희 보살에게 홀려 노복이 된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 퉁소 소리를 들으며 마냥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천하 무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기백, 그 위세는 다 어디 가고 오늘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이냐. 계집의 치마폭에 휩싸여 부서진 기왓장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 다시 세상 사람을 대할 면목도 없구나. 이렇게 살아 무엇하리…… 아 구차스럽다.' 사내는 오만 가지 착잡한 생각에 젖어 들어 몽롱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광채가 번쩍 빛을 발했다. 에라, 이렇게 개같이 살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사내 는 불꽃이 번쩍 튀도록 잽싸게 검을 뽑아 들더니 삽시에 제 목을 홱 베어 냈다. 다음 순간, 그의 목에서 벌컥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털버덕 고꾸라지더니 더는 꿈쩍도 안 했다. 그가 자결해 버리자 다른 사내들도 온통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본디 모두 명성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공리를 생명보다도 중히 여기던 강호의 무사들인지라 퉁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참괴한 마음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사내들은 한결같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있었다. '옳다, 죽자!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옳았던 것을…….' 퉁소 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어 들려 왔다.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더 비장해졌다 몸이 건장하게 생긴 한 사내가 부르짖었다. "나도 죽겠다! 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난 내 사촌 누이를 죽인 놈이오. 내 이종사촌 누이를 죽였단 말이오. 그 여잔 인물도 좋고 검술도 나보다 월등했소. 하나 내가 청혼을 하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내의 체면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니, 나는 그만 악에 받쳐 그 여잘 죽여 버렸소. 죽이고서도 못 참아 시체를 간음했소. 난 이런……." 퉁소 소리는 한층 낭랑하게 울려 왔다. 사내는 죄책과 비애, 울분과 절망이 밀려들어 머리를 쥐어뜯더니 미친 듯이 수림 속으로 뛰쳐가 버렸다. 다른 사내들도 주먹들을 불끈불끈 쥐었다. 단 한 사람, 이 퉁소 소리를 듣고 마음이 샘물같이 맑아지고 더 할 나위 없이 평온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일속이었다. 대환희 보살의 마법에 걸려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일속은 얼굴 이 안온해지면서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대환희 보살을 밀치고 조용히 빠져 나와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았을망정 그는 마음속으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대환희 보살도 퉁소 소리에 눌려 넋을 잃고 수림 쪽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퉁소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쩌면 이제 지척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나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