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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17편 (17/70)

2026-09-30 18:32:08 조회 10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절더러 다 말하라 하시고선 저를 내쫓으려 하시다니……." "누가 내쫓겠다고 했느냐? 네가 못 잊어 하는 사내에게 너를 시집보내겠다는 거지." "아…… 황제 폐하……." 치주는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며 살포시 단지흥의 품에 안겼다. 휘장이 드리운 방안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흥은 치주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네가 싫다면 몰라도 너만 원한다면 오늘 밤으로 나는 너를 귀비로 맞아들이고 싶다. 어떠냐?" 황제는 치주의 엉덩이를 바싹 당겨 안았다. "아이 참 부끄럽사옵니다……." 치주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기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의 품에 더욱 찰싹 달라붙으면서 도 사뭇 부끄러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하나 불…… 불을 꺼야죠……." "왜? 내 보기가 두려운가? 그러면 치주, 눈을 감아 봐. 눈만 감으면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 "폐하, 그런 건 아니옵니다. 소녀가 폐하를 두려워하다니요. 소녀는 날마다 꿈에서도 폐하를 보곤 했는데……. 하지만 똑똑히 본적은 한 번도……. 폐하만 보면 가슴이 뛰고 눈앞이 뿌얘져서……. 하나 오늘만은 다르옵니다. 소녀, 오늘은 폐하의 용안을 똑똑히 보겠사옵니다. 어쩌면 오늘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그래도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설사 훗날 폐하께서 소녀를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해도 오늘 밤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겠사옵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려면 내가 너를 아랑곳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이렇게도 나를 위하는 너를……." 단지흥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아서 침대 위에 눕혔다. 나긋나긋한 몸은 뼈가 없는 듯 솜처럼 가뿐했다. 그녀는 지친 듯 나른하게 단지흥의 품에 안겼다. 혈기왕성한 젊은 단지홍은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감개에 젖어 말했다. "오늘 이 일은 네가 끌어들인 것도 아니요, 내가 심심풀이로 찾아온 것도 아니다. 이건 연분이다." 치주는 한 순간 단지흥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몸을 비비꼬았다. "아아, 폐하…… 꿈만 같사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단지흥은 이처럼 나긋나긋하고, 이처럼 남자를 미치게 하는 여인은 진정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여러 미인들과 운우의 밤을 보냈지만 치주 같은 여인은 없었던 듯싶었다. 그는 치주를 안고 밤 가 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저녁, 느닷없이 영고가 단지흥을 찾아왔다. 그는 그때 마침 서재에 있었다. 영고는 단지흥 앞에 앉자마자 그를 흘깃 흘겨 보며 대뜸 물었다. "요사인 밤마다 어디서 지내시는 거예요? 내가 궁녀들을 풀어 얼마나 찾아 다녔는 줄 알기나 아세요?" "찾아 다니긴 어딜 찾아 다닌단 말이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소.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조신하게 침궁에 있으면서 궁내의 범절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했잖소? 그리고 내궁 중사대부더러 황중의 예의 범절을 가르치라고 분부해 놓았는데, 그래 얼마나 배웠소?" 단지흥은 그녀에게 아직도 성이 나 있는 참인데, 그녀의 얼굴을 대하자 새삼스레 그때 일이 떠올라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그 많은 황궁 범절을 어떻게 다 배운단 말예요. 너무 많아 들어도 하나도 기억도 안 나요." "이봐요, 여긴 대리국 황궁이오. 그대가 있던 숙녀동이 아니란 말이오. 무슨 일이든 제멋대로 해선 안 돼요. 내궁 관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오, 알겠소?" "내궁 관원들 말이오? 내가 왜 내궁 관원들 말을 들어야 해요? 황제인 당신 말만 들으면 되지, 내가 왜 그 구린내 나는 남자들 말을 들어야 해요? 나 원 참, 알다가도 모를 말씀만 하신다니까." 영고는 눈빛마저 번득이며 막말을 해댔다. 정말 불 같은 성미였다. 그러나 그 성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또 무슨 사단을 불러올지 누가 알겠는가. 단지흥은 한동안 할말을 잃 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영고는 단지흥에게 슬쩍 몸을 기대며 한껏 애교를 부렸다. "그런데 폐하, 어젯밤은 어디로 납시셨죠?" "가긴 어딜 가오? 혼자서 불경을 독경했지." 단지흥은 영고 앞에서 치주 얘길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치주에 대해서 얼마나 험악하게 말할 것인가. 영고는 깔깔 웃으며 제멋대로 빈정거렸다. "독경을 했다구요? 무슨 독경을 하필이면 여자들 침대에 올라앉아 하세요? 내가 뭘 모르는 줄 아시나 본데, 잘못 생각하셨어요! 당신과 그 계집애가 밤마다 뭘 하는지 궁 안에 소문이 확 퍼졌단 말예요. 내가 뭐 귀가 먹고 눈이 먼 줄 아세요? 당신은 황제예요, 황제! 황제가 궁내에서 제멋대로 놀면 혼우한 군주가 된다는 걸 모르세요?" 영고는 앞뒤 재지도 않고 나가는 대로 마구 지껄여댔다. 단지흥은 노기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치주를 좋아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치주처럼 나를 사랑하는 여인은 없었다. 그런 치주를 내가 내 마음대로 사랑할 수도 없단 말인가?' "그대가 혼우한 군주가 뭔지 알기나 알고 입을 놀리는 겐가? 내가 귀비를 몇 명이나 더 맞아들여 도 그건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 노라!" 단지흥은 눈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왜요? 왜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난 매일 혼자만 있게 되는데 왜 상관을 안 해요? 난 그럼 그 넓은 방에서 허구한 날 독수공방만 하란 말이에요?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면 날마다 밤마다 나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녜요? 안 그래요?" 영고가 철부지 어린애같이 굴자 단지흥은 그녀가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했다. 이 여인은 그저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단지흥은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낮춰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영고, 난 황제야. 중차대한 국사가 태산 같은데 어떻게 날마다 영고만 데리고 있겠어?" "흥, 날마다 국사가 태산 같다구요? 날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내 모르는 줄 알아요? 날마다 그 계집애가 향불을 피우고 기도드리는 걸 보고 날마다 그 계집을 껴안고 침대에서 뒹굴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요? 그게 그렇게 보긴 좋다면 나도 날마다 향을 피우고 폐하를 위해 기도를 올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다구요!" 영고는 막무가내로 단지흥을 걸고 넘어졌다. 그쯤 되자 단지흥은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시끄러운 황궁을 벗어나 중원으로 훌쩍 날아가 버리고만 싶었다. 당장 내일에라도 화산논검이 치러졌으면 싶었다. 그러면 이 귀따가운 소리들을 듣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그는 휘휘 손사래를 쳐 영고를 물리고 까물거리는 등불 앞에 오래도록 혼자 앉아 있었다. 그의 이마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짙게 내천자가 그려졌다. 이즈음 운남의 대양산(大凉山) 산줄기를 타고 나는 듯이 황궁으로 달려온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 그림자는 황성 성벽 아래까지 와서는 숨을 몰아 쉬며 성벽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쳇, 황성 성벽치고는 그리 높은 축도 아니구먼." 그리고는 두 손으로 성벽 돌들을 그러쥐고는 성벽 위로 잽싸게 기어 올라갔다. 성벽을 넘어선 그림자는 눈 깜짝할 새에 황궁까지 당도하여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어둠 속에 묻혀 아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좀 있으니 황궁 안쪽에서도 두건을 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석벽을 타넘고 이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도 그 그림자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어둠 속에 스며든 듯 서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고는 먼저 암호를 보냈다. "환희불환희, 환희몰료골(歡喜不歡喜, 歡喜沒了骨)." 그러자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이 대번에 응답했다. "환희불환희, 불조야난속(歡喜不歡喜, 佛祖也難贖)." 목소리로 보아하니 여자들이 분명했다. 둘은 서로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마주서게 되자 궁내에서 넘어온 여인이 먼저 인사를 했다. "보살님께 여쭈세요. 저는 이미 귀비가 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구요. 황제는 언제나 남이 모르는 밀실에서만 일양지공을 연마하는데 시위 몇을 빼놓고는 그 누구도 얼씬도 못하게 해요. 저도 물론이구요." "아니, 그럼 너도 거길 못 들어간단 말이냐?" 먼데서 온 여인은 다소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러자 궁 안에서 나온 여인은 몹시 난처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요. 나 같은 건 어, 어림도 없어요."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여인이 다소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럼 그 동안 뭘 했느냐? 소임도 제대로 완수 못하고! 보살님도 화산에 가서 천하 무림 고수들과 무예를 겨루어 보실 참인데 네가 일양지공을 알아내지 못하면 보살님께서 무엇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긴단 말이냐? 너 혹시 젊고 영민한 황제한테 아예 반해 버린 거 아냐?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넌 목숨을 보전치 못할걸? 그러니 잘 알아서 처신하라구, 알겠지?" "알아요,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궁에서 나온 여인은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조심해! 헛 생각 했다간 큰코다칠 테니. 대환희(大歡喜) 보살님께서는 천하 어떤 남자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겠지 ? 대리국 단지흥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대양 산에 오면 대 환희구진(大歡喜丸陣)에 사단이 날 거란 말이야, 알았어?" 먼저 온 여인은 사뭇 위엄 서린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궁에서 나온 여인은 대환희구진이란 다섯 자를 듣더니 얼핏 몸을 떨었다. "예, 잘 알고 있어요. 보살님의 대환희구진이 천하무적이라는 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남자로 생겼다면 누구도 그 대환희구진을 어쩌지 못하고 그 진에 녹아 난다는 걸 저도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러자 먼저 온 여인은 음탕하게 웃어젖혔다. "어떤 사내라도 일단 우리 대환희구진에 빠졌다 하면 성한 몸으로는 결코 나오지 못해. 전번에도 봤지? 소림사 화상이 하나 죽어 나는 걸 말이야! 수컷이란 것은 천하에서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살아 나오지 못해! 너, 허튼수작 말고 이 말 명심해!" "알았어요." 궁에서 나온 여인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알았으면 됐다. 내 말은 우리 스스로를 너무 낮게 보지 말잔 말이다. 보살님께서 너에게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을 알아 오라고 보낸 것은 우리 불진(佛陣)의 역량을 더욱 강하게 하여 빛을 내고자함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보살님의 이 심중을 헤아리고 받들어야 하느니라." 궁에서 나온 여인은 그저 허리만 굽실거렸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두 여인은 헤어졌다. 먼데서 온 여인은 나는 듯이 성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둔한 몸집인데도 동작은 의외로 재빨랐다. 궁 안에서 나온 여인은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황궁 벽을 사방으로 살펴 보면서 오르기 알맞춤한 곳을 찾았다. 마침 나지막한 곳을 발견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바로 곁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흡사 쥐새끼가 찍찍거리는 듯한 괴상한 웃음 소리였다. "누구ㄴ?" 여인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나지막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ㄴ?" 그 사람은 농을 치듯 여인의 목소리를 흥내내며 똑같이 따라했다. "네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여인은 다급해서 한껏 목청을 낮춰 급급히 소리쳤다. 자세히 보니 그자는 황궁 성벽 위에 앉아서 조그마한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얌전하게 입다물고 있는 게 좋아. 황제는 네가 이런 야밤에 궁을 나와 웬 여인과 수작을 하고 헤어졌다는 걸 아직은 모를 게야. 그저 자기에게 입의 혀처럼 구는 너를 어떻게 둘째 황후로 봉할까만 궁리하고 있을 테지. 하나 만일 내가 단지흥한테 한마디만 벙긋하면 그땐 어떻게 될까? 네가 야밤에 궁을 나와 웬 여인이 아니라 어떤 젊은 사내와 수작을 하다가 들어갔다고 한마디만 귀띔해 주면 단지흥은 단박에 일양지공으로 너를 죽이지 않겠냐, 히히히……." "넌 누구냐? 누군데 내 손에 죽지 못해 안달이냐?" 여인은 가만있지 않았다. "히히……내가 누구냐고? 나로 말하면, 운남에서 이름난 기충 충피다. 난 너희 단지흥 따위도 하나도 무섭지 않다. 대리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제 꼭 하나밖에 없지. 그것도 여자야. 하 지만 너는 아니거든……." 여인은 충피라는 소리를 듣고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갑자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기선 거기 일이 있고, 난 내 소임이 있는데 왜 이러는 거예요. 우리 둘은 서로 상관없는 사이니 내 일에 참견 말아요." "네가 누군지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남방 대환희 보살네 사람들중에 연약한 여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쯤은 나도 익히 알고 있지. 그런데 뭘 그렇게 내숭을 떨며 가련한 척하는 거야? 그런 내숭은 단지흥한테는 통할지 몰라도 나한텐 도통 안 통한다니까." 충피는 계속 히히덕거렸다. 여인은 이윽고 성벽 위로 다 올라가 살며시 충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충피는 성벽 위에 달랑 올라 앉은 채 히히 웃으며 여인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여인은 충피에게 가까이 접근하자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제비처럼 훌쩍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져 내리며 충피를 덮쳤다. 충피는 몹시 왜소하지만 날쌔기 그지없어 여인이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성벽 위에서 냉큼 날아 내리며 기분 나쁘게 히히거렸다. "이봐, 내가 단지흥처럼 어리석은 줄 아느냐?" 그리고는 여인을 향해 똑바로 솟구쳐 올랐다. 둘은 허공에서 한바탕 일전을 벌였다. 여인의 병장기는 입에서 내뿜는 구슬이었다. 여인은 충피의 이마를 겨냥해 단단한 쇠구슬을 똑바로 내뿌렸다. 다행히 충피가 알고 미리 방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구슬에 명맥(命脈), 쇄심(鎖心), 현기(玄機) 삼대 요혈(要穴)을 맞고 진작에 꺼꾸러졌을 터였다. 그러나 충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충피는 파르르하게 대로해 소리를 질렀다. "내 손에 죽지 못해 환장이 났구나. 오냐, 내 오늘 너를 황천에 보내 주마……. 아니, 그게 아니지! 그래선 안 되지. 난 단지흥과 달라! 예쁜 계집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구. 속는 줄 뻔히 알면 서도 난 계집들을 끌어안고 한 침대에서 마구 뒹굴거든. 난 기실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 목숨은 얼마든지 살려 둔다구. 단 나는 그저 잡아다가 들여앉혀 놓고 날마다 독약을 먹이는 수법을 쓸 뿐이지. 그러면 제가 나한테 순순히 따라야지 별수 있다더냐?" 충피는 숨이 넘어가도록 낄낄 웃어댔다. 야밤 삼경의 부엉이 울음 소리처럼 소름이 끼쳤다. 여인은 그 말엔 코대답도 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제 재간으로는 도저히 충피를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인은 기가 죽어 말했다. "이제 그만 비켜요. 우린 서로 좋게 헤어져 제 할 일이나 합시다." 그러나 충피는 도리질을 했다. "안 돼, 안 되지. 난 널 꼭 잡아 둬야겠다. 그래야 너희 보살님이 와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게 아니냐? 그러니까 너를 인질로 잡아두겠다, 그 말이지." 난쟁이 충피는 그녀 앞뒤로 콩콩 뛰었다 내렸다 하면서 히히덕거렸다. "난 여자를 앞도 보고 뒤도 보고 남보다 자세히 훑어보는 습관이 있거든. 보면 볼수록 참 괜찮은데. 정말 끝내 주는 몸매야! 그러니 대환희 보살이 너를 내세워 미인계를 쓰려 한 거겠지. 단지흥도 홀딱 반할 만해. 아무튼 이번엔 내가 너를 데려다가 재미를 좀 봐야겠다. 히히히……." 그러면서 충피는 냉큼 뛰어 덮쳐 들었다. 여인은 삽시에 피했으나 연신 숨 가쁘게 들이대는 충피의 공격에 채 몇 합도 못 겨뤄 힘이 다 빠져 버렸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어? 그럼 정말 화를 낼 테다. 정말 화를 낼 테야!" 충피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여인을 덥석 잡아당겼다. 여인은 그만 중심을 잃고 픽 꼬꾸라져 버렸다. "히히히…… 나도 이젠 참아야지. 자, 날 따라가자. 날 따라가면 단지흥보다야 훨씬 잘해 줄 테니……. 단지흥한텐 희첩이 얼마나 많으냐? 너쯤이야 싫증나면 금세 실총을 당하기 십상이라구. 하지만 날 따라가 봐, 난 다른 계집은 모두 뒷전으로 하고 너만 총애할 테니! 화도 내지 않고……." 여인은 어느새 충피한테 혈도를 눌려 팔다리를 꿈쩍도 못하고 다급하게 소리만 질러댔다. "날 놓아주어요, 놓아주어요! 난 궁에 들어 가야만 해요." "요 귀염둥이야, 단지흥만 너를 갖고 재미 보란 법 있니? 나도 재미 좀 보자꾸나. 순순히 내 말을 들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정말 성을 내겠어! 내가 성을 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여인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이제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흥이 지금 어디 있는지 적이 걱정이 되었다. 단지흥이 지금 취화궁(翠華富)을 찾아왔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취화궁에 와서 그녀가 없는 걸 알게 된다면 온 궁의 사람들을 다 동원해 샅샅이 뒤질지도 모르는 터였다. 충피는 그 뱀 껍질같이 징그러운 손으로 그녀의 두건을 홱 낚아챘다. "이따위는 뭣 하러 쓰고 다녀? 난 벌써 네 정체를 다 알고 있어." 그리고는 또 징그럽게 웃음을 흩뿌리며 그 뱀 껍질 같은 손으로 치주의 몸을 정신없이 쓸어 만졌다. "자, 내 좀 만져 보자. 가만있어야지, 옳지. 안 그러면 내가 성을 낼 테야. 옳지, 옳지." 충피는 그 징그러운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다가 이내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를 더듬으며 연신 기성을 질러댔다. "멋들어져! 정말 멋들어져!" 치주는 충피를 보지 않으려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지흥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충피의 몰골이 눈물 나도록 싫어서인지……. 제9장 뚱뚱보 여인들 치주가 야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궁인의 보고를 듣고 단지흥은 당장에 대리 황궁 내외의 관원들을 모두 풀어 치주를 찾게 했다. 하나 사흘 낮 사흘 밤을 찾아 헤매도 치주의 행방은 끝내 알 길이 없었다. 단지흥은 매우 의아스러웠다. '치주는 대체 어디 가 있는 겐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제 발로 나갔으면 궁내에 본 사람이 있을 터인데 누구도 모르게 감쪽같이 없어졌으니 실로 괴이한 일이로다. 그러나 이 일로 지나치 게 법석을 피울 수도 없는 터, 일국의 황비가 어느 날 잠자기 실종 되었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는가?' 단지흥은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하였다. 근자에 들어 누구보다도 총애하던 치주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단지흥은 심기가 말이 아니었다. 허전한 마음 달랠 길이 없었다. '혹시 영고의 작간이 아닐까? 영고는 평소 치주를 시새워하고 생트집을 잡기 일쑤였는데, 그 계집이 쥐도 새도 모르게 치주를 끌고 가 해쳤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꼭 영고의 짓 같기만 했다. 일단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자 단지흥은 지체 않고 황급히 첩안궁(疊安宮)으로 향했다. 영고는 정원 돌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런 시각에 황제가 정원으로 들어서자 영고는 반색을 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요사이 매일 중사대부한테서 황궁의 예의 범절인 궁금(宮禁)을 배우느라 영고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영고는 중사대부를 바라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 화상은 여편네가 없나? 아이고, 있다면 그 여편낸 나 영고보다 훨씬 더 적적 하겠다. 이런 목석 같은 화상하고 사는 그 여인도 팔자 한번 우라지게 타고났군. 그 여인에 비하면 내 팔 잔 백 배 더 나은 셈이다!' 그러니 그 앞에 앉아 있다 해도 귀로 중사대부의 말이 들어갈리가 천부당만부당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입다물고 조신하게 앉아 있으려니 울화통이 터져서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번번이 화를 내며 중사대부를 쫓아 보내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렇게 중사대부를 내몰고 돌의자에 앉아 있는데 황제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아이고 이제야 오시네. 어서 오셔요. 이건 그 영감태기한테 매일매일 귀가 따갑도록 말만 듣고 앉아 있으려니 머리가 다 빠개지는 것 같았는데……. 자, 어서 앉으세요. 어서요!" 영고는 마냥 입이 벙싯 벌어지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 동안 영고는 가뭄에 단비 기다리듯 황제를 기다려 왔다. 숙녀동에서 치른 그 초야의 정을 부여안고 잊지 못할 그날 밤의 일을 돌이켜보며 영고는 몸을 불태워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단지흥은 적이 쌀쌀맞았다. 그는 영고를 쏘아보며 차디 차게 물었다. "요사인 또 무슨 일들을 하였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단지흥의 물음에 영고는 대번에 낯색이 변하며 날카롭게 되받았다. "무슨 일들을 하다리요? 하긴 무슨 일을 해요? 매일 궁 안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갑갑하여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지만 나가지 못하게 하니 낸들 별수 있어요? 낮에는 창문으로 밖에서 오가는 궁 녀들이나 내다보고 밤에는 하늘에서 가물거리는 별이나…… 세어 보고……." 일단 말이 나오자 영고는 그만 코허리가 시큰해지며 금세 눈물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