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16편 (16/70)
벌레는 반드시 용맹하면서도 음(陰)에 속하는 것이어야 하구요. 이 벌레는 일단 처녀의 월경 피를 맛보면 그 이후로는 풀을 먹지 않고 계속 처녀의 피만 먹으며 자라는데, 이렇게 3년이 지나면 더 이상 피는 먹지 않아요. 그 대신 처녀는 독충들의 독즙을 이 벌레에게 먹인답니다. 이렇게 하여 자란 벌레는 그 독이 대단해서 세상 아무것도 당해 낼수가 없게 되지요. 추 선생, 내 이 벌레는 6년 전부터 독즙을 먹이기 시작한 벌레인데 여태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독도 아주 셀 겁니다. 모르긴 해도 제아무리 추 선생이라도 견뎌 내기 힘들걸요. 남자들이 이 벌레에겐 물리면 다른 것은 관두고 생식 기능이 마비되어 후사가 없게 될 수도 있지요. 물론 생명도 위험하구요. 자, 어때요? 겨뤄 보겠어요?" 사내는 그 보잘것없이 작은 벌레를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참, 별일도 다 있군! 아무리 독한 벌레라고 해도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다. 이제 와서 물러선다면 얼마나 비웃음을 사겠는가. 뿐더러 강호에서의 나의 명성도 묵사발이 된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죽더라도 저 여자와 결판을 내자, 운남 처녀들이 기르는 독충이 무섭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그런지 내 눈으로 직접 한번 봐야겠다!' "내가 마지막까지 해 본다고 했잖소? 더는 다른 말을 말고 어떻게 할 건지 그거나 말하시오." 사내는 역정을 냈다. 영고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좋아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이 벌레를 손바닥에 잠깐만 올려 놓고 있으면 돼요. 그래도 무사하면 이기는 거죠." 사내는 그 말에 크게 앙천대소를 했다. '이 계집이 정말 미쳤군.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따위 수작인가? 내 별호가 철장 수상표(手上默)다. 이 별호는 내가 생사를 무릅쓰고 철장방 방주 자리를 빼앗을 때 얻은 것이다. 내 철장공과 경공 (輕功)은 천하 무적으로 천하의 영웅 호걸들이 다 몰려들어도 두렵지 않거늘 겨우 대리의 하잘것없는 계집이 날 위협해? 내 오늘 본때를 보여 주리라." "좋소! 어서 올려 놓으시오!" 그래도 영고는 마냥 생글거리며 거듭 경고했다. "그러지 마시고 한 번 더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벌레한테 물려 죽으면 타관에서 객사하게 되는 판인데……." "아이고 잔소리 그만 하고 어서 그 벌레나 이리 내요!" 사내는 성가셔 죽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적이 긴장되어 있었다. 긴장을 털어 버리려고 일부러 역정을 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온몸의 기운을 손에 집중시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왔다. 벌레가 아니라 돌사자라도 그 주먹 한 방이면 단번에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손을 펴서 앞으로 쓱 내밀었다. 손바닥은 숯 검댕처럼 시커맸다. "그 벌레를 그냥 내 이 손바닥에 놓는다고 만 했었소!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사단이 날 줄 아시오!" "염려 마세요. 잠깐이면 돼요. 더는 필요 없어요." 영고는 풀잎으로 벌레를 툭 쳤다. 벌레가 얼마나 독한지 벌레가 닿자 풀잎은 사정없이 부르르 떨렸다. 사내는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튀어 일어날 수도 없는 터, 그는 힘주어 두 눈을 치켜 뜨고는 영고가 벌레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벌레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잠시 꿈틀거렸다. 그러나 정작 별 느낌이 없는지라 사내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손바닥이 짜릿하더니 그 기운이 손바닥에서부터 염통까지 한 번에 쭉 뻗쳐 올라왔다. 그리고는 대번에 염통이 발기발기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사내는 그만 악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그대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러더니 바닥에서 사지를 내뻗으며 한동안 데굴데굴 구르다가 크게 한 번 몸을 부르르 떨고는 걸상 다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앞을 쏘아보았다. 여인의 자태가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자세히 보니 백타산 산장에 간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앞에 모용쟁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용쟁, 미안하오. 그때 구해 주지 못해서……. 나를 보게 한 그때는…… 내가 비열해서가 아니라…… 구양봉이 너무해서 그렇게 된 거요. 그래서 당신이 난산으로 죽은 거요……. 내 탓이 아니 오. 내 탓이 아니라는데……." 혼자 웅얼거리던 사내는 또다시 픽 쓰러져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 사숙님들과 사조(師祖)님들을 내가 죽인 건 사실이에요. 그들이 내가 방주가 되는 걸 한사코 반대하니 전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는 또 영고를 쳐다보며 계속 헛소리를 했다. "모용쟁! 모용쟁이 맞지? 맞아, 안 맞아? 모용쟁이 맞다면 날 따라가자구. 난 이젠 철장공을 장파했으니 구양봉 같은 건 무섭지도 않아. 구양봉이 오기만 해 봐. 내가 단번에 쳐죽일 테니." 그는 눈까지 뻘게져서 마구 헛소리를 내지르더니 냉큼 뛰어 일어나 아우성을 치면서 잡히는 대로 탁자와 걸상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언뜻 문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이젠 끝났군.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영고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궁녀들과 위사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서로 조심스레 눈길을 주고받으며 굽실굽실 뒤를 따라갔다. 제8장 흘연히 사라진 치주 영고는 희색이 만면하여 궁으로 돌아왔다. 황제를 해치려던 중원의 무림 고수 하나를 자기 손으로 내쫓았으니 황제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녀는 사뭇 득의양양했다. 단지흥은 그 소식을전해 듣고 득달같이 그녀의 침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단지흥을 보자마자 기세등등하게 생글생글 웃으며 수다를 떨어댔다. "내가 오늘 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하나 만났는데 뭘 했는지 아세요? 글쎄, 내가요……." "일국의 황비가 도대체 그게 무슨 추태요! 주루에 올라가 술을 안 먹나. 뭐 또 내기를 해? 그래 그대가 강호를 쏘다니는 호걸인가? 독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소란을 피우게. 정말 그 무슨 추태 야!" 단지흥은 대로하여 영고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영고는 너무나 뜻밖이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머나, 그 사람이 나쁜 심보를 갖고 폐하를 찾아왔기에 내가 쫓아 보낸 거예요. 폐하를 돕느라고 그런 걸 가지고 왜 화는 내요, 화는?" 단지흥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 있는지라 그런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또 소리를 질러댔다. "누가 그대더러 도와 달랬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다 하니 그런 참섭일랑 말라구! 어느 안전이라고 황제 일에 참섭을 하려 들어, 참성이!" 그러자 영고도 영고대로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눈물부터 왈칵 쏟아 냈다. "좋아요, 좋아. 당신은 황제니까 마음내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고 난 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라 그거죠? 좋아요. 내 다시는 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어요! 나가지 않겠다구요! 그래 나는 이 침궁 안에서 고삐 매인 망아지처럼 갇혀 있는데, 폐하는 며칠에 한 번이나 나를 찾아올 건가요? 숙녀동에 있을 땐 날마다 곁에서 동무 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내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다 했다구요!" 영고는 울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이 여자는 아직까지도 숙녀동에 있을 때의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는 게야. 계속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말썽을 부리면 앞으로 무슨 풍파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노룻이다. 아무래도 선생을 하나 모셔다가 예의 범절을 가르쳐야겠다.' 단지흥은 단단히 벼르며 엄포를 놓았다. "어쨌든 이젠 더는 밖으로 나가지 마오. 그렇게 막된 여자로 굴어서야 황실의 권위가 서겠소? 황비의 치신을 지킬 줄 알아야지, 남의 웃음거리나 돼서는 안 된단 말이오." 그 추씨라는 무침 고수를 쫓아 보내 버렸으니 궁에 돌아오면 단지흥이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칭찬이 대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훈계만 당하니 영고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이젠 자기 황궁 안이니 다시는 내 도움이 필요 없다 그거죠? 그래요, 당신은 황제예요. 황제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하시란 말이에요." 영고는 황제 앞인데도 무례하게도 발딱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단지흥은 그 꼴을 보고는 한층 더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잘하라고 타일러도 백방이 무효일 것 같았다. 그는 분을 내리누르지 못한 채 영고를 내버려두고 그곳을 나와 버렸다. 그는 못내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며 자기 처소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후원에 이르렀을 때였다. 얼핏 궁녀 하나가 자그마한 제단 앞에 향불을 피워 놓고 하늘을 우러러 무엇인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묘령의 궁녀는 검은 머리칼에 몸에 꼭 달라붙는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아주 고왔다. 단지흥은 화가 난 중에도 호기심이 일어 가만히 서서 그 궁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 보았다. "그이께서 언제나 웃는 얼굴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시기를…… 소녀 간청 드리옵나이다. 그이께서는 돌보아야 할 일, 골치 아픈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으십니다. 창천께서 이렇듯 그 많은 대사를 그이께 위임하셨으니 언제나 그이의 몸에 탈이 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대리의 일은 모두 그이에게 달렸고 그이가 있기에 대리의 오늘이 있사옵니다. 저희 아버님 말씀같이, 그이는 이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 천상의 신이옵니다. 그이의 만수무강을 빌고 또 비옵니다……." 단지흥은 그녀가 누구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이렇듯 축망을 받으니 그 사람은 복도 많구나. 이 여인이 흠모하고 있는 사람은 필시 기인(奇人)인 모양이다.' 단지흥은 더욱 숨을 죽이며 그 궁녀의 기도를 유심히 들었다. "나는 그이를 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어서……. 그이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이만 보면 가슴이 설레어 말은 한마디도 안나오니, 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창천이 이 내 마음을 아신다면 그이에게 영원토록 즐거움을 주옵소서, 복을 주옵소서. 그러면 소녀 죽어도 원이 없사옵니다." 궁녀는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녀 앞에 놓인 향로에서는 향연(香烟)이 하늘하늘 피어 올랐다. 궁녀는 무릎을 꿇고 사뭇 정중하게 아홉 번이나 큰절을 하였다. 단지흥은 그 모습을 보자 감개가 무량해졌다. '내가 전에 본 시서에는 그대와 나의 사랑 영원히 변치 않으리 하는 시들이 퍽이나 많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래 보지를 못했구나. 만인지상 황제가 되었지만 그런 절절하고 변함없는 사랑은 지금껏 해 보지 못했다. 황제의 자리란 다 그런 것인가……. 기도드리는 말로 보아서는 상대는 이 궁녀가 저토록 연모하고 있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단지흥은 듣다 못하여 흠흠 헛기침을 하며 대뜸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만 네가 기도드리고 있는 그 남자는 대체 누군고?" 그러자 궁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등뒤에는 황제가 서 있었다. 야밤에 기도를 드리면 아무도 모르려니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한테 이런 모습을 들키다니……. 궁녀는 낯이 새하얗게 질려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었다. 사정없이 온몸이 떨리며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단지흥은 그녀가 몸을 오그리고 떨고 있는 것이 불쌍하여 손수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궁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 하게 말했다. "폐하…… 널리 용서하시옵소서, 누구에게도 이 마음 아뢸 길 없사와 하늘에……." 그러더니 궁녀는 눈물을 뚝뚝 떨궜다. 단지흥은 이 여인의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게 여겨졌다. '응당 남자의 보호를 받고 응석이나 부릴 연약한 계집이거늘, 오히려 남자를 이렇듯 살뜰히 염려하고 있다니. 그 남자가 알면 얼마나 가슴이 뭉클할꼬.' "그래 네가 그렇게 축망하고 있는 사내는 대리 어디에 있느냐? 내 너를 밖으로 내보내 줄 터인즉, 어서 찾아가 둘이 금실 좋게 살도록 하라." 황제의 말에 궁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야밤에도 보일 정도로 그녀의 눈은 반짝 빛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지었다. "소녀가 사모하는 그분은 대리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시지만, 정작 그분께선 이 미천한 것을 잘 알지도 못하옵니다." 단지흥은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가 넓고 콧날이 오똑한 것이 빼어난 미인이었다. 게다가 호리호리한 몸매에 봉곳 솟은 젖가슴, 실팍한 엉덩이…… 달빛을 받아 그녀의 모습은 적이 교태 로웠다. "참으로 예쁜지고……. 그래, 그렇게 한숨만 짓지 말고 그 사내가 누구인지 어서 말만 하여라. 궁 밖으로 나가 결혼하는 것을 내 허락할 것인즉." 궁 밖으로 나가 자유로운 몸이 되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어째서인지 궁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살포시 얼굴을 들고 단지흥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그런 말씀은 마시오소서. 소녀는 오직 마음 속으로 그분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나이다. 제발 그분이 누구인지는 묻지 말아 주소서, 그 사람이 소녀를 모르는데 소녀가 어찌 이름을 밝히오리까?" 궁녀가 굳이 그 사내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자 단지흥은 다소 갑갑증이 일었다. "이거 답답하군. 그 사람이 누군가만 말하면 내 그 사람에게 명을 내려 너와 결혼을 하게 한다는데도." "폐하의 명에 못 이겨 마지못해 치르는 혼례라면 무슨 기쁨이 있겠사옵니까. 마지못해 나를 맞이하는 그런 혼례는 소녀도 싫사옵니다." 궁녀는 한마디하고는 다소곳이 황제 앞을 물러나와 향로를 걷어 들고 발걸음을 뗐다. "폐하, 밤이 깊었사오니 폐하께서도 돌아가셔서 침소에 드소서." 궁녀가 돌아가자 단지흥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나도 저 같은 사랑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 진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황제 자리라도 내놓을 수 있으련만.' 오늘 밤은 이대로 잠을 이룰 것 같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하늘을 우러르던 궁녀의 고운 자태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단지흥은 천천히 궁녀의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이슥한데도 예기치 않게 황제가 행차하자 궁녀들은 화들짝 놀라 급급히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단지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만들 하고 오늘 밤은 다른 곳으로 가 취침을 하거라. 저기 저애만 남고! 난 저 애와 따로 할 얘기가 있느니라." 기도를 드리던 그 궁녀는 흠칫 놀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른 궁녀들은 황제가 특별히 그 궁녀에게 은총을 내리시려고 그러는가 보다 생각하고 내심 그녀를 부러워하며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다. 단지흥은 궁녀들이 침소 밖으로 모두 나가기를 기다려 말했다. "네 마음속에 그리는 그 사내가 누구인지 이젠 알려고 하지 않으마, 그저 너만 원한다면 궁을 나가 그 사람과 만나도록 해 주겠다." 그러나 궁녀는 분같이 하얀 목선이 다 드러나 보이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등불에 비친 그녀는 더욱 사랑스러웠다. 옆으로 비껴 보이는 그 얼굴은 부끄러움에 노을 빛으로 물들었고, 매끈한 두 손은 안절부절못하며 양 무릎 사이에 올려 놓기도 하고 몸 뒤로 가져 가기도 했다. 그러는 양을 보고 단지흥은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 좋다. 이젠 내 더 이상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지. 대신 내일 사람을 시켜 너를 궁 밖으로 내보낼 터인즉, 그 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라. 예단감으로 명주 2백 필을 하사하겠노라." 그러자 궁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의 마음에 있는 그 사람은 그런 비단필은 소용없는 사람이옵니다." "허허…… 그럼 뭣이 필요한가? 말만 하면 내 다 준비해 주겠노라." 단지흥은 인자하게 껄껄 웃었다. 궁녀가 그리는 그 사내가 황궁안의 관원이라면 자기의 칙명을 거역하진 못하리라. 예단감을 갖추어 주자는 건 다만 이 궁녀를 더 기쁘게 해 주자는 데 불과하였다. 궁녀는 단지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분한테…… 그분한테 소실로 들어간대도……." 그리고는 말을 못 맺고 애타는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그렇게도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이 아이를 안고 싶구나. 그러나 이미 사모하고 있는 남자가 따로 있는데 그럴 수는 없도다. 그 남자가 나라면…….' "내 약속하지 않았더냐, 말만 하면 그 사내에게 시집보내 준다고." "폐하, 그 말씀 참말이시지요?" 궁녀는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단지흥은 껄껄 웃었다. "얘야, 황제가 그런 일에 실언을 하겠느냐. 네가 사모하는 남자가 싫다고 해도 난 그 남자를 돌려 세울 수가 있는 사람이다. 이 대리국에 내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염려 말고 그 사내가 도대체 누군지나 어서 말해 보아." "우리 아버님께선 그분에게 큰 희망을 걸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죠. 그분은 결코 날 좋아할 수가 없다면서 말예요." 궁녀는 여전히 수심에 잠겨 말했다. '이렇게 예쁜 계집을 어디서 얻을 수 있다고……. 그 사내는 왜 그것을 모를까? 대관절 얼마나 잘났기에 그러는 걸까. 그 사내가 원치 않는다 해도 내 필히 이 궁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단지흥은 애를 태우며 더욱 궁녀를 재촉했다. "다른 말은 그만두고 그 사내가 누군가만 말하거라. 그러면 내 꼭 네 소원을 이루어 줄 터인즉, 그 사내가 꼭 너를 맞아들이게 해 주겠다." 그 말에 궁녀의 눈빛은 샛별같이 빛났다.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의 장중보옥(掌中寶玉)으로 자라면서 경서도 읽었고 금기서화(琴棋書畵)도 조금은 할 줄 아옵니다. 소녀가 어릴 적부터 품은 평생 소원이라면 마음에 드는 낭군에 게 시집을 가는 것이었사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궁녀는 무릎을 꿇더니 고두사배를 하였다. "그래, 그 사나이가 누구지?" "폐하, 소녀는 속세의 한 티끌에 불과하지만 폐하께선 하늘의 별이시며 일국의 제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소녀는 어렸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폐하를 보고 나서는 꿈속에서도 폐하를 잊지 못하고 자랐사옵니다. 폐하의 거룩한 모습에 반하여 침식을 잊고……. 폐하 같은 분은 세상에 없다고……. 소녀 언제나 폐하만 그려 왔사옵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단지흥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 궁녀가 불철주야 사모하며 날마다 창천에 기도까지 드리고 있는 사내가 바로 다름 아닌 단지흥, 자신이라는 것을 알자 그는 어정정하여 궁녀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궁녀는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드디어 모두 내놓고는 마음이 몹시 후련해 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또 말을 이었다. "소녀는 이 황궁으로 들어온 이후로 비록 폐하 가까이서 시중을 들 수는 없었으나 먼발치에서나마 매일 뵈올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사옵니다. 소녀는 오로지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폐하의 쾌락과 건강을 축망하는 것으로 폐하에게 제 마음을 바치기로 하였사와요. 이 주제넘은 계집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흐느끼며 눈물을 쏟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그 순간 행복에 겨워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이렇듯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염려해 주고 축원해 주는 여인이 있었는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는 이 궁녀의 마음 씀씀이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궁녀들은 기실 모두 단지흥의 여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에게 침대머리에서 시중을 들려고 애를 쓰며 총애를 받으려고 교태를 부린다. 그러나 그 속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진정 이 궁녀처럼 날마다 자기를 위하여 하늘에 기도까지 드리며 자나 깨나 걱정하고 사모하는 궁녀가 있을까? "네 이름이 뭐지?" 단지흥의 목소리는 적이 가라앉아 있었다. "치주(癲珠)이옵니다." 그는 그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쓸어 만졌다. 그러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 어떻게 그렇게 날 사모하게 되었는지 좀더 소상히 말해 보거라." "소녀가 열세 살 나던 해였사옵니다. 그때는 폐하가 아직 등위하시기 전, 태자로 계실 때였사옵니다. 그때 거리에 나갔다가 소녀는 우연히 폐하를 우러러보게 되었사옵니다. 그때 첫눈에 가슴이 설레며 '바로 이분이다, 내가 꿈속에서 본 바로 그분이다'……그렇게 부르짖었사와요. 그 다음부터 소녀는 그만 폐하에게 완전히 미쳐 버렸사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저 폐하 생각 만 하였사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소녀를 크게 꾸짖으면서 이름을 치주라고 바꿔 버렸답니다. 그래도 밤낮 폐하 생각에 침식을 잊고 지내자 아버님께서는 하는 수 없어 소녀를 궁으로 들여보냈사옵니다." 젊은 황제 단지흥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이 세상에 이토록 자기를 미친 듯이 사모하는 여인이 있었다니……. 그는 탄복을 금치 못하며 치주를 와락 껴안았다. "치주, 내 이제 진짜로 너를 시집보내겠노라." 궁녀는 그 말에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더니 단지흥의 품에서 발버둥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