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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13편 (13/70)

2026-09-30 18:32:08 조회 15
그러나 정작 노파 앞에 서자 단지흥은 주저주저하며 말을 못했다. 심경이 복잡했다. 죽이자 해도 죽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을 살려 준 은인인데 이렇게 죽인다면 그것은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파를 데려가 황비로 봉할 수 도 없는 터, 그는 선뜻 단안을 내릴 수 없었다. 노파는 예의 그 까만 눈으로 단지흥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 아무말이 없었다. 다섯 사람은 하나같이 선뜻 말을 꺼내 놓지 못하고 멀뚱멀뚱 노파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선비가 불쑥 나섰다. "노파께선 아무튼 지난밤 대리국의 황비가 되었다고 하니 대리국 승상의 말을 들으시오. 황제를 대신하여 사사(雌凉)를 내리거늘, 순종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그 시신은 황비의 예로 후장 (厚葬)을 해 드리리다." 그 말에 노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단지흥에게서 눈길을 떼고 다른 세 시위를 돌아보며 힘없이 물었다. "모두들 동감이겠군요?" 세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노파는 매서운 눈길로 단지흥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냉소를 치며 물었다. "나 덕분에 환생했다는 걸 잊으셨군요?" 사대 시위는 말문이 막혔다. 단지흥 역시 한숨을 지을 뿐 말을 못했다. 노파는 새까만 눈동자에 원망을 담고 단지흥을 노려보더니 꺼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낭군님도 내가 자결할 것을 소망하고 있단 말이지요? 참말 그래요?" 단지홍은 언뜻 애원과 원망이 뒤섞인 노파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보지. 어젯밤 어쨌든 내가 바보 짓을 했어. 아무리 약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낭군님, 나를 데리고 가야 천룡사 중들을 구한다는데 도 내가 자결하기를 바라시나요?" "천룡사 일은 내 나름으로 해결책이 있으니 염려 마시오." 단지흥은 대뜸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녕 날 버리겠단 말씀이세요?" 노파는 놀란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보다가 그만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버리는 게 아니오. 난 애초부터 원치 않은 일이었소. 어젯밤의 그 일은 당신의 강박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내 자의는 추호도 없었소." "낭군님, 그렇게도 내가 보기 싫단 말입니까? 낭군님 마음에 드는 데가 조금도 없다, 이 말씀이세요? 왜 그토록 날 미워하세요?" 노파는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이 그 동안 무슨 일을 했든 간에 우리는 다. 이해해 줄 수가 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당신 같은 노파를 어떻게 우리 젊은 황제 폐하의 황후로 맞아들인 단 말이오? 이건 천만 불가한 일이라는 걸 왜 모르시오?" 어부가 답답하다는 투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런 까닭이군요. 그런 이유라면…… 낭군님, 말해 보세요. 정말 그래서 내가 싫단 말이에요?" 노파는 눈물이 가랑가랑하여 애처롭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여하튼 이만 해 둡시다. 내 영고라는 이름은 잊지 않으리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 갈 데로 가시오." 그러자 노파는 그 말엔 대답도 않고 이번엔 선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대리국의 승상이랬죠? 장부일언 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이라 했으니 승상의 말씀이야 더 엄중하겠지요? 내가 노파이기에 황비로 봉할 수 없다고 했는데 가령 내가 젊은 처녀라면 어쩔 셈이지요?" 선비는 머리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젊기만 하다면 우리가 이럴 이유가 어디에 있겠소? 황제 폐하가 다소 부족해하실지라도 우리가 받들어 황비로 모시겠소만, 사실이 그렇지 않으니 우리도 할 수 없지 않소." 이미 한번 늙어 버린 몸, 제가 어쩌랴 싶어 선비는 조금의 미련이라도 끊어 놓으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좋아요." 노파는 한숨을 짓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일행은 하나같이 머리들을 숙였다. 노파가 슬피 울면서 기운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기가 어쩐지 면구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노파가 어서 멀리 사라졌으면 했다. 그런데 문득 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자, 보세요. 이러면 되겠어요? 이러면 나도 대리국 황비가 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일행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다섯 사람은 너무나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들 눈앞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절세 가인이 애련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열 예닐곱 살 꽃다운 소녀, 그녀는 대리국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누구 앞에서도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경국지색이었다! "전 이제까지 우리 숙녀동의 규례에 따라 할머니 형상을 한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예요. 자, 이러면 됐나요?" 단지흥은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며 입이 헤벌어져서는 자기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제7장 방탕한 황비 단지흥 일행은 영고를 데리고 곧바로 천룡사로 향했다. 천룡사 중들이 중독된 지 이미 여러 날이 흘러 내일이면 벌써 닷새째였다. 급히 손을 쓰지 않으면 영영 때를 놓치고 말 것이었다. 그들은 가는 길에 말을 여섯 마리 구해 밤을 도와 천룡사로 내달렸다. 앞장서 천룡사에 이른 단지흥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영고에게 말했다. "영고, 어서 들어가 고승들을 구하시오." 그 사이 선비는 득달같이 달려들어가 주지 일속 대사에게 그들이 왔다는 걸 알렸다. 일속 대사는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던 터라 반색을 하며 얼른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영고의 뛰어난 미모를 마주 대한 순간, 일속은 그 경황에도 흠칫 놀랐다. 황제가 이 여자를 얻은 것이 행여 대리국에 화가 되지는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 조금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사께 인사드립니다." 영고가 먼저 말을 건겠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일속은 환례를 하고 일행을 선방으로 안내했다. 영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놓으면서 일속에게 서둘러 중독된 고승들을 불러오라고 재촉했다. 잠시 후 얼굴뿐 아니라 수염까지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노승 하나가 빈사 상태가 되어 들려 들어왔다. "부축해 앉히세요." 노승을 부축해 앉히자 영고는 작은 손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노승의 몸 이곳 저곳을 모두 열여섯 곳이나 째고 거기다가 작은 병의 약을 발랐다. 일단 그렇게 한 다음 약초를 가져 오라고 해서는 불을 붙여 노승의 곁에 놓았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곱같이 작은 벌레들이 짜개진 노승의 살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작은지 머리와 몸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벌레들은 나오다 말고 방향을 찾느라 그러는지 한동안 몸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여러 사람들은 영고가 미리 당부한 대로 숨을 죽이고 소리 없이 벌레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노승도 선기(禪機)가 깊은 노승이라 아픔을 참고 견디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승의 살에서 기어 나온 벌레들은, 곁에서 타는 약초의 짙은 향기에 취하여 꼬물거리더니 하나씩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두 열여섯 마리였는데 영고가 잽싸게 불붙은 약초를 그 위에 가져다 얹자 벌레들은 피직괴직 타 죽어 버렸다. "이젠 됐어요." 영고는 노승의 상처에 다시 약을 발라 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금할 게 있는데……." 영고는 웬지 말머리만 떼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금해야 할 거라니, 그게 대체 무엇이오?" 단지흥이 얼른 물었다. 영고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을 보니 그는 애련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대사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일인걸요." 그러면서 영고는 단지흥을 보고 방긋 웃었다. 그녀의 눈길엔 뭔가 부끄러운 기색이 맴돌고 있었다. 단지홍은 이내 눈치를 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금하라는 건 바로 남녀간의 그 일을 금하라는 것이었다. 영고도 귀밑이 발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일속은 이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유심히 지켜 보았다. 일순 가슴속에 다시금 불안이 밀려들었다. '이번 남방 만동에 다녀오시면서 황제께서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시고 몹시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런데 저 여인은 용모가 지나치게 아름답고 요염하다. 앞으로 저 여인 때문에 뜻밖의 일이 일어나 대리국에 해를 끼치게 될까 크게 저어되는구나.' 하나 지금은 천룡사 중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 그는 우선 이 생각은 접어 두었다. 영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바삐 손을 놀렸다. 그러면서도 매우 신중했다. 열 몇이나 되는 중들을 치료해 주고 나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폐하, 다행히 때를 놓치지 않았으니 그렇지, 이 몇 대사님들의 목숨이 그만……." 영고는 숨을 할딱이며 웃는 얼굴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예쁘디예쁜 영고가 천룡사 대사들의 생명까지 구하자 단지흥은 마냥 싱글벙글 입이 벌어져서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오. 천룡사 대사들의 몸에서 독을 빼내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내 이젠 만 가지 근심이 싹 가셔 버렸소. 정말 고맙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세요. 폐하의 일이자 소첩의 일인데요. 꼭 남의 일을 해 드린 듯이 말씀하시네요." 영고는 짐짓 뾰로통한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오, 아니오! 내 그런 뜻이 아니오! 영고가 너무나 많이 수고를 해서 내 그리 하는 말이니 달리 생각 마시오, 응 영고!" 단지홍은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영고를 달랬다. 그러자 영고는 살짝 눈을 치뜨며 애교스럽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일속은 웬지 민망하여 불쑥 끼여들었다. "폐하, 황비께서 잠시 쉬시게 우리는 나가십시다." 그러자 단지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과 일속 등은 조용히 선방을 나와 대응보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이곳에서 천룡사 중들이 충피에게 중독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영고가 온 정성을 다해 천룡사 중들을 구해 내니 단지흥은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영고가 아니었다면 도시 어떻게 될 뻔했던가. 만일 그때 숙녀 동에서 자기가 극구 영고를 내쳤다면 오늘의 이 일은 기대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이처럼 아름다운 황비를 언감생심 어디에서 얻는단 말인가. 단지홍은 사뭇 흡족하여 자기도 모르게 연해 입이 벙싯거렸다. 그러는 양을 일속은 내내 근심스러이 지켜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황비는 예사 여인이 아니었다. 혹 저 여인으로 인해 대리국에 먹구름이 드리우지나 않을까. 그는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일말 의 불길함을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로 인해 그 역시 얼마나 마음을 앓았던가. 황제도 자기처럼 저 여인에게 빠져 버리면 국사를 뒷전으로만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속은 안 되겠다 싶어 선뜻 말을 꺼냈다. "저, 황제 폐하, 저 황비님은……." "정말 뛰어난 여인 아니오? 저 여인은 진정 보배요, 보배! 두고 보십시오, 우리 대리국이 저 여인으로 인해 한층 흥성하게 될 것이오." 단지흥은 일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만만하게 한마디했다. 그러자 일속은 그만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황제가 저토록 저 황비에게 흡족해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속은 차후에 기회를 보자고 마음을 다지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자, 어서 스님들을 치료해야지요." 단지흥은 관후한 미소를 지으며 일속을 바라보았다. 일속은 말없이 읍을 하고는 앞장서서 선방으로 향했다. 영고가 천룡사 중들을 다 해독시키고 나자 단지흥은 사대 시위와 영고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고를 각별히 총애했으며 형고와 정사를 치르면서부터는 다른 귀비들과 달리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영고 이전의 여인들은 대개 부르면 와서 그저 단지흥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는 형편이니 둘이서 하는 정사라도 기실은 한쪽밖에 재미를 못 봤다. 그러나 영고는 달랐다. 서로 농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며 한데 어울려 열을 올리다 보면 원래 남녀간의 정사란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새록새록 재미가 났다. 영고는 그녀의 침궁에서 단지흥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가면 몇 달 만에 만난 것마냥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하였다. 그런 나날이 몇 날 며칠이고 흘러 어느덧 두어 달 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궁녀들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흘리며 일심으로 단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반가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자 그녀는 반색을 하며 뛰어나았다. "어머나, 이제야 오세요? 보고 싶어서 혼이 났어요." 그녀는 서둘러 황제를 방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폐하, 부탁이 있사와요! 내일 위사들에게 명해서 날 좀 마음대로 궁 밖으로 나가게 해 줘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네?" "영고, 여긴 숙녀동이 아니라 대리 황궁이오. 나도 마땅치 않을때가 다소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종(祖宗)의 법이 지엄하거늘 난 들 어쩌겠소, 그대로 지켜야지. 영고도 이제 황비이니 황중의 법 을 지켜야 한다니까. 더욱이 그대가 거리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그대를 황비인 줄 알아보면 한켠으로 기한다 길을 내준다 야단법석을 떨어야 하니 그런 번거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소? 그런 대 로 황궁에 정을 붙여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궁귈이 숙녀 동보다 좋으니 내가 온 거지 이렇게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바에야 숙녀동에 그냥 있지 예까지 무엇 하러 왔겠어요?" 영고는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곁에 있던 궁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싸쥔 채 키득키득 웃었다. 대리 황궁에 영고처럼 황제의 말에 대꾸질하는 여인은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예의를 모르는 영고를 비웃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듣고도 꾸짖지 못하는 황제마저도 비옷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영고, 이러면 못쓰오. 황비의 체모를 지켜야지." "체모요? 그럼 어떻게 말하란 말이에요? 숙녀 동에서 나한테 장가들 때는 예의고 뭐고 한마디 못하더니, 궁귈에 오니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이건 무슨 예법이 이리도 많은지. 그럼난 벙어리처럼 입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라, 이 말이에요?" 단지흥은 이대로 나갔다가는 궁녀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라 손을 내저어 궁녀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잔뜩 언성을 낮추어 영고를 달랬다. "천하의 일은 어디나 다 법도가 있게 마련이오. 숙녀 동에도 숙녀동 법도가 있더구먼. 그대도 그 법을 지켰지 않소? 아무리 숙녀동의 할머님이고 뭐고 해도 그 법도를 지키지 않았나 말이오."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난 숙녀 동에서 그 많은 예법을 모르고도 잘만 살았어요. 게다가 숙녀 동에는 이따위 거추장스러운 예법은 없었다구요. 이때껏 잘 참다가 하필이면 황제하고 연분이 돼 서…… 어쨌든 난 예법 따위엔 골치가 아프단 말이에요. 당신을 만나면 먼저 무릎부터 꿇어야 하고. 글쎄 무릎 꿇는 게 뭐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수도 있는데 왜 여자만 무릎을 꿇어야 하고 남자는 무릎을 안 꿇는가 말이에요. 당신은 황제이고 난 황비인데 황비가 무릎을 꿇으면 황제도 같이 무릎을 꿇어야지 왜 가만있어요?" 영고는 막무가내로 생트집을 잡았다. 단지흥은 기가 막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단지흥은 노기를 띠지 않고 사뭇 부드럽게 영고를 달랬다. "황비 자리에 앉아 있는 그 고충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황상 자리도 마찬가지요. 평민 백성들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지만 황제는 원래 그럴 수가 없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도 좀 자숙하면서 궁성 생활에 적응해 봐요. 아, 내가 있잖소, 내가!" "아이고, 그런 말은 다 그만두세요. 시끄러워요. 한 가지만 대답하세요. 나를 계속 황비로 곁에 두고 싶으시면 바깥 구경 좀 하게 날 좀 제발 내보내 주세요. 갑갑해서 죽겠어요. 한 번만요, 네?" 단지흥은 방법이 없었다. 이 야생마 같은 영고를 단 몇 달 만에 길들여 조신하게 후궁에만 틀어박혀 있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좀 내놓아 바깥 구경을 시키면서 차차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정 그렇다면 궁 밖을 좀 나가 보오만 궁녀들과 위사들은 데리고 나가야 하오." 그 말에 영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다만 시종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몹시 성가셨지만 싫다고 하면 황제가 자기를 아예 내 보내지도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그것만은 양보하기로 하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아이, 좋아라. 뭐 딱히 위사들이 안 따라가도 좋지만 어쨌든 내보내 주시기만 하세요!" "안 되오, 위사들이 꼭 따라가야 하오! 아시겠소?" 단지흥은 다소 화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영고는 뜨끔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단지흥은 영고와 마주앉아 있기가 웬지 떨떠름하여 영고의 처소를 나와 버렸다. 단지흥은 심기가 몹시 울적하였다. 영고가 그저 일심으로 자기만 바라보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못내 서운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발길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가다 보니 그는 어느덧 취옥궁(翠玉宮)에 다다라 있었다. 이 침궁은 단지흥이 황위에 오르자마자 처음으로 맞아들인 파이인(擺夷人) 황후의 처소였다. 단지흥이 들어서자 파이인 황후는 흠칫 놀 라더니 반가움에 겨워 땅에 부복을 한 채 머리채가 땅에 끌리도록 큰절을 하였다. 금방 목욕을 하고 나온 듯 함치르르한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 미모는 요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폐하께서는 새 황비를 맞으신 후부터는 소청은 아예 잊으셨나이까?" 파이인 황후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황제가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해 아름다운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이 여인은 단지흥보다 두세 살 위였다. 그래서인지 매우 숙성해 보였다. 단지흥이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 궁중 숙방(淑房)엔 황비가 없었다. 대신들이 하나같이 이는 천의 (天意)에 어긋나는 일이 라고들 간언에 간언을 하여 단지흥은 궁녀들 중에서 가장 아리따운 이 파이인을 택해 황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첫날밤, 파이인은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속삭였었다. "폐하,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렇게 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단지홍은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황제도 남자였다. 그것도 여인들과 통정 한 번 못해 본 동정남이었다. 단지흥은 얼굴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라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 둘은 부처간이니 그대는 나의 황후요. 앞으로 나를 진심으로 많이 도와주어야겠소." 그 말에 파이인은 방그레 웃으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그 미끈한 허리를 폈다. 그날 밤부터는 그녀가 남녀간의 그 일을 그에게 가르쳐 주는 황제의 선생인 것이었다. "폐하, 오늘 밤 여기엔 다른 시녀들이 없으니 소첩이 폐하의 옷을 벗겨 드리겠나이다." 파이인은 단지흥 앞으로 더욱 바싹 다가들며 정답게 속삭였다. 단지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가슴은 널뛰듯 하였다. 언젠가 무예 비본에서 남녀간의 일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일 뿐이었다. 이렇게 막상 신방에 들어 파이인과 마주앉아 있자니 그는 실로 당황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대 뜻대로 하시오. 오늘 밤 난 그저 그대 하라는 대로만 하겠소." 파이인은 단지흥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냈다. 그리고는 또 살갑게 속삭였다. "폐하, 남자와 여자가 동심동체(同心同體) 하나로 어우러지면 일천(一天)이라 하옵니다. 폐하는 여느 사내가 아니라 황상이시라 세상 모든 여인을 다 안으실 수 있사옵니다. 폐하의 마음에만 든다 면 이 대리의 여인은 어느 여인이든 가질 수가 있지요." "나는 오늘 그대만 마음에 든다니까." 단지흥은 빙그레 웃었다. 성격이 활달한 파이인은 황제의 손을 잡아 슬그머니 자기 몸으로 가져 가며 속살거렸다. "폐하, 천하의 여인들은 모두 폐하를 시중들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이 소첩을 겪어 보시지 않고서야 어찌 다른 여인들을 견주어 보겠사옵니까?" "다른 여인들과 견줄 필요는 없도다!" 단지흥은 여색에 흠뻑 취하여 눈동자마저 몽롱해졌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천하 여인들은 각기 제나름의 색깔이 있는 법이옵니다. 오늘은 제가 제일인 것 같겠지만 내일은 또 다른 여인이 더 좋아 보이실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파이인은 벌써부터 자기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다. 황제의 여인들은 비록 오늘은 총애를 받는다 해도 언제 실총(失寵)을 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두려워 다짐하듯 같은 말만되풀 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있나. 내 비록 다른 희첩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래도 그대가 첫정이니 너무 상념하지 마시오." 단지흥은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파이인은 살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비애부터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