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10편 (10/70)

2026-09-30 18:32:08 조회 11
수많은 독사한테 온몸이 친친 감겨 있어 다리를 떼놓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사한테 물려 죽는다는 것도, 급히 내달리면 내 달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도,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노파를 찾을 수 있는지도, 그는 그 어떤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달렸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는지 모른다. 그는 문득 영롱한 빛에 눈이 부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으로 정신없이 뛰어왔는지라 그는 숨을 후 들이켜고는 얼른 사위를 둘러보았다. 독사들은 간데없고 수없이 많은 종유석들이 굴 천장을 가득 메운 채 온통 삐죽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머리를 찌를 정도로 낮게 드리운 그 종유석들이 수백 개의 등불처럼 오색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굴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복판에는 김이 무럭무럭 피 어 오르는 큰 온천까지 하나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물위로 언뜻 무엇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풀어진 머리칼이었다. 머리는 보이지 않고 머리칼만 떠있는 걸로 보아 필시 죽은 사람인 모양이라고 단지흥은 생각했다. 산 사람이라면 저러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단지홍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무당 할미라는 여인은 악독해도 이만저만 악독한 게 아닌 듯했다. 그런데 불현듯 흩어진 머리카락이 서서히 한데 모아지더니 여인의 머리가 물 밖으로 쓱 올라왔다. 단지홍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인도 고개를 들리다가 단지흥을 보고는 적이나 놀란 듯 대뜸 내쏘았다. "거…… 거기 누구예요?" 단지흥은 일순 사대 시위의 얼굴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울분이 치받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 그 할미인지 뭔지 하는 년은 어디……." 단지홍은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물을 필 요가 없었다. 눈앞의 저 여인이 그 할미가 분명했다. 소름이 끼칠정도로 온 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것이 백 살은 족히 넘어 보였다. 단지홍은 흥물을 보듯 경악스런 눈길로 그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단지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금 적이 놀랐다. 느닷없이 뛰어들어온 이 사내는 옷이 후줄근히 젖어 있고, 그 위로 수많은 독사들이 친친 감겨 있었다. 개중 몇 마리는 단박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바깥 사람이 이 숙녀동엔 뭐 하러 왔나요?" 노파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리따운 소녀의 목소리마냥, 은쟁반에 은방을 굴리듯 낭랑했다. "먼저 거기서 대답하시오, 당신이 무당 할미요? 나는 무당 할미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오!" 단지홍은 격하게 외쳤다. "이렇듯 무례한 사람은 처음 보겠군! 맞아요, 내가 무당 할미예요. 아무튼 할말이 있어 왔다니 어디 들어나 봅시다." 노파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단지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주워섬겼다. "나와 나의 네 시위는 본래 목숨을 구해 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었소. 그런데 우리를 뱀 구덩이에 몰아넣고 시위 넷을 죽여 버렸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어서 거기서 나오시오! 내 사대 시위의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니!" 그러자 노파는 단지흥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재미난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껏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그것 참 모를 일인데요. 그 말을 듣자면, 같이 온 사대 시위는 모두 죽었는데 거기선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요? 당신 말대로라면 사대 시위야 원래부터 명이 그뿐이라 죽은 것이고 거기 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 예까지 온 것인즉, 나를 탓할 건 못 되지 않아요?" '정말 언어도단도 이런 언어도단이 있는가? 더 입씨름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흥은 악이 받쳐 소리쳤다.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린 집어치워! 내 너의 머리를 잘라 사대 시위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리라." "참 이거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날 죽이지 못해 야단이니 큰일이군요. 글쎄 정 그것이 소원이라면 싸워 봐야지 어쩌겠소?" 노파는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단지홍은 노파가 온천에서 나올 줄 알고 잠시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노파는 나올 생각을 않고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등을 돌려야 옷을 입지요!" '제기랄, 저깟 쭈글쭈글한 할망구가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는 모양이지? 주름지고 말라 비틀어진 몸뚱어리에 춘정이라도 일까봐?' 단지홍은 가소롭기 그지없어 코웃음을 쳤다. "잡아먹진 않을 테니 어서 나오기나 하시오." 노파는 몹시 부끄러움을 타는 계집애모양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나 참, 성화로군! 하는 수 없지. 그냥 나가리다." 단지홍은 한켠에 서서 노파가 물위로 솟아 나오는 모습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나체를 본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천만 뜻밖으로 노파의 살결은 백옥같이 희고 처녀처럼 탄탄했다. 게다가 미끈한 팔이며, 그 섬섬옥수란…… 그때껏 황중에서 숱하게 궁녀들을 대해 봤지만 이처럼 눈부신 자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단지 몸매만 본다면, 그 노파는 물위에 곱게 피어난 부용이나 용궁의 용녀(龍女)에 비견될 만했다. 노파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미끈한 알몸으로 한들한들 단지흥한테로 다가와서는 방실 웃었다. "단황 나으리, 기왕 이 굴 안으로 들어왔으면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요."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이 노파가 무슨 요술을 부려 몸은 어떻게 처녀처럼 변신했지만 얼굴만은 어쩌지 못했나 보다. 몸매가 아무리 황홀하다 한들 얼굴만 쳐다보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오만 정이!' 단지흥은 비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죽일 테면 죽여 보시오. 싸우다 죽는다면 그나마 한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내게 진다면 내 손을 더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스스로 자결을 해야 하오." "맞았어,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거기 몸에 아직 독사들이 감겨 있는데! 난 그 독사들을 떼 줄 순 없어요. 테 주기만 하면 거기서는 당장에 일양지공을 쓸 거고 그럼 내가 당하게 되거든요." 노파는 한마디 내뱉더니 요염하게 호호호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젊디젊은 처녀들이 남정네를 홀리며 웃는 웃음과 같이 기가 막히게 나긋나긋했다. '파파 할미인데도 웃음 소리 하나는 사내들 간깨나 녹이겠는걸. 이 웃음 소리만 들어 봐도 얼마나 요망한지 대번에 알겠다.' 단지흥은 한층 냉엄하게 말했다. "일양지공? 좋소. 내 오늘 일양지공이 뭔지를 직접 보여 주지." 말은 옹골차게 하면서도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노파의 나체에 눈길이 갔다. 빙골설부(米骨雪賦)랄까, 희디흰 살갗도 그렇지만 처녀의 젖가슴처럼 탄탄하게 도드라진 젖봉오리가 단지 흥의 눈길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순간적이나마 별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단지홍은 이빨을 사리물었다. 노파는 짐짓 단지홍을 유혹하려는 듯 미동도 않고 한동안 서 있다가 아주 천천히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보고 있다가 퍼뜩 머리를 흔들었다. '요망한 것! 저 나이에도 남정네를 유혹하려 하다니. 하긴 몸매가 저토록 아리따우니 한창 피어날 땐 뭇사내들의 애간장깨나 녹였을 게야.' 이윽고 노파는 옷을 다 주워 입고 정성 들여 머리를 빗어 올리고는 단지흥을 향해 똑바로 섰다. 옷을 다 입는 데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이나 걸린 듯했다. 노과는 여전히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나와 싸우지 않는 게 어때요? 내 휘파람 한 번이면 그몸에 감긴 독사들이 일제히 대가리들을 쳐들고 당신의 그 잘생긴 얼굴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을 텐데. 그러면 이 굴을 나가기는커 녕 아주 딴 세상으로 가게 된다구요. 그러니 우리 그만 화해를 해요. 황제고 뭐고 거추장스러운 건 다 걷어치우고 여기 남아 나와같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노파는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단지흥은 어이가 없었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내 일양지공이나 받아라!" 단지홍은 대로하여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려 노파에게 공격을 들이댔다. 자고로 이런 만이 (蠻異)의 굴 안에는 천생적인 이인(異人)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대부분은 각기 독특한 요술과 법 술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단지흥은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들과 싸우려면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그러나 노파는 금방 그 어떤 생각에 도취되어 한창 몸이 단 참이라 단지흥의 공격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흥이 내친 지풍은 그녀의 몸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아이 참, 일국의 황제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점잖지 못하게!" 노파는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순간 단지홍은 흠칫하며 이미 내친 손가락의 방향을 급히 돌렸다. 그러자 지풍은 노파를 바싹 비켜 나가 기세 좋게 석벽을 때렸다. 순식간에 석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지홍은 원래 노파에게 손을 내뻗칠 때 이 노파가 여자라는 것을 고려할 새도 없이 잽싸게 손을 썼었다. 오직 이 악귀를 단번에 쓰러뜨리려는 일념으로 곧바로 그녀의 젖무덤에 있는 유돌대혈(乳突大穴)을 향해 일양지 지풍을 내쳤던 것이다. 그때 돌연 여인이 나무라는 소리를 듣고 단지홍은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무리 노파라도 여인임에는 틀림없는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는 여인의 가슴에 지풍을 내친다는 것은 남자로서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기는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 노파는 단지흥이 왜 자기를 죽일 좋은 기회를 이렇게 포기하는가 잠시 의아했으나 곧 그 영문을 깨닫자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자, 이젠 내 솜씨를 보시겠어요?" 노파는 말을 마치자마자 매섭게 장풍을 날렸다. 단지흥은 얼른 몸을 피했다. 노파의 무예 역시 매우 출중했다. 그 손이 얼마나 빠른지 여느 사람 같으면 채 서너 합도 못 되어 꼬꾸라지고 말 터였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노파는 여느 때 없이 애를 먹었다. 단지흥은 좌우 두 손을 다 쓰면서 일양지 지풍을 가로세로 정신없이 팍팍 내쳤다. 노파는 그때마다 살짝살짝 피했지만 그 지풍에 스치는 바람에 노파의 옷엔 벌써 구멍이 뺑뺑 뚫려 버렸다. 단지흥은 손을 쓰기 시작하면 몸에 감긴 독사들이 가만 안 있을거라는 우려도 없지 않았으나 이렇게 된 바에야 그깟 뱀이 무서워서 공격을 늦출 수도 없는 터였다. 일단 이를 악물고 싸우기 시작하니 뱀 같은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뿐더러 기이하게도 뱀들은 단지흥을 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정신을 집중하여 일양지공을 내치고 또 내쳤다. 그럴수록 내력은 더욱 강해지고 한층 신묘해져서 노파마저도 감탄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팍팍팍 연거푸 세 차례 지풍을 내쳤다. 노파는 그 순간 잠시 틈을 보였던지라 머리채에 그대로 지풍을 맞고 말았다. 그러자 틀어 올렸던 노파의 머리채는 삽시간에 풀려 흐느적거리며 미끄러져 내려 노파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 내 머리! 내 머리칼을 이렇게 망치는 법이 어딨어요?" 노파는 어린 소녀가 하는 양으로 울먹울먹하며 투정을 부렸다. 기이하게도 노파의 머리칼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흑발이었는데 그녀는 필시 그 머리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단지홍은 노파가 어찌하든 간에 코방귀만 뀌었다. 사대 시위를 죽인 원수인데 머리칼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려도 시원치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노파는 목숨 따위엔 관심도 없는 듯 아예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얼굴을 감싸쥔 채 엉엉 울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남을 업신여기며 약을 올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단지홍은 노기를 풀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개탄스럽기 그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 운남의 남만(南蠻) 동굴에서 수족 같은 사대 시위를 잃고 천룡사 고승들을 살릴 해독약을 얻기도 다 글렀으니……. 나 자신도 살아서 나갈 가망이 거의 없 다. 이제 더 볼 것이 무에 있는가. 이 노파를 죽여 다시는 죄업을 못 저 지르도록 목숨을 끊어 놔야겠다!' "그 동안 지은 죄를 안다면 죽기를 아까워 말아라." 단지흥 엄하게 호통쳤다. 그러자 노파는 문득 울음을 그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물 고인 맑은 눈을 들어 되묻는 것이었다. "내가 죄악이 많다니 무슨 말이에요? 난 선한 사람은 한 번도 죽인 적이 없어요." "선한 사람은 죽인 적이 없다고? 내 시위 넷은 그래 누구 손에 죽었느냐?" 그러자 노파는 한껏 교태를 부리며 웃어젖혔다. "그럼 그 넷이 내 손에 죽었단 말이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똑똑히 봤어요? 뱀에게 물렸다고 다 죽는다는 법이 어디 있나요? 물려도 죽는 사람이 있고 죽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내심 자기 시위 넷은 분명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단지흥은 그 말에 일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노파 말대로 사대 시위가 살아 있다면 구태여 이 노파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 시위들은 죽었소. 난 그들이……." 단지흥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시 바삐 노파를 제압해 두려고 번개같이 손을 뻗어 노파의 혈도를 찍었다. 노파는 꼼짝없이 그자리에 그대로 못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긴 머리채가 얼굴을 뒤덮어 흡사 천년 묵은 요괴가 하나 서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카락 사이로 굴벽 석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노파는 악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뭐예요, 이게? 나를 이렇게 능욕하려면 아예 날 죽여요, 죽여 버려." 노파는 속이 터져 눈물을 뚝뚝 떨구다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얘들아, 그 네 녀석의 시체를 어서 이리 메고 오너라!"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숙녀동의 여인들이 사대 시위의 시체를 들것에 메고 들어왔다. 들것에 반들이 누운 넷에게선 숨소리 하나 들을 수가 없었다. 네 시위의 시체를 보자 단지홍은 가슴 미어지는 듯하여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노파를 절대 살려 두지 않으리라. 그때 노파가 또 소리쳤다. "이제 혈도를 풀어 줘요. 어서 풀어 달라는데!" "풀어 달라구? 내 시위들을 환생시키기 전엔 절대로 풀어 줄 수 없다." 단지홍은 노기충천하여 인정 사정 없이 내쏘았다. "이제부터 내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온 숙녀동의 여인들이 다 당신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내 몸을 달라고 하셔도 선뜻 바치겠으니 어서 날 풀어 줘요." "네 몸? 말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내 너 같은 요귀를 없애 버리지 않고서는 이 한을 풀 길이 없다." 단지흥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노파는 영롱하게 까만 눈동자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애련한 눈빛이었다. 단지홍은 얼른 그 눈길을 피해 버렸다. '이건 구미호다, 구미호! 사람들을 홀려 잡아먹는 구미호! 이런 구미호는 냉큼 죽여 버려야 세상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다!' 단지홍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애원해도 소용없다. 살려 뒀다간 아무 득도 없으니 넌 죽어야만 해! 단 네 사혈(死穴)을 찔러 편하게 죽게는 해 주지." 그리고는 그는 서서히 손가락 하나를 뻗쳐 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요란하게 굉음이 일었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노파도 보이지 않고 사대 시위의 시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직 그 혼자 천길 지옥 속으로 떨어지듯 몸이 쑥 꺼지며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떨어져서야 비로소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영문을 몰라 허등지등 사위를 살폈다. 넓지도 않은 그곳은 돌벽이 빽빽하니 사방을 막고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이었다. 그의 몸을 감고 있던 독사들은 마치 무슨 신호라도 들었는지 다투어 그의 몸에서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벽 밑으로 난 구멍을 향해 구불구불 기어가더니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뱀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그는 한결 온몸이 거뜬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사방 돌 벽에 눈길이 닿자 그는 새삼스레 절망감으로 치를 떨었다. 빽빽한 돌 벽엔 빠져 나갈 만한 틈이라고는 한치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들고 위를 쳐다보니 몇 십 길이나 되는지 아득한 꼭대기 위에 희미한 빛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내가 그만 그 요망한 노파의 간계에 빠져 이 나락에 떨어져 죽는 길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이젠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이렇게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그는 체념하듯 마음을 비우고 축축한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운공을 하여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누르며 그는 차츰 망아(忘我)의 경지로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꼭대기 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요, 이젠 노여움이 좀 사그라지셨나요? 할머님이 끼니를 갖다 드리래서 가져 왔는데 드시겠어요?" 단지흥은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시장하던 참이라 먹을 것을 가져 왔다는 말에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하튼 주는 밥이야 먹고 봐야지. 그런데 이거 빠져 나갈 길이 없으니 큰일이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이야 아무 문제도 아니다. 내가 없으면 왕위는 동생이 이어받으면 되지만 천룡사 중들의 목숨은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천룡사가 망하면 대리국의 존망도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다.' 단지홍은 안달이 나서 크게 외쳤다. "밥보다도 당신네 무당 할미를 보내시오. 할말이 있소." 그러자 꼭대기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뻔뻔스럽게 우리 할머님이 목욕하시는 걸 훔쳐 보았다면서요? 할머님은 지금 매우 노여워하고 계시니 할말이 있으면 저희들한테 해요. 전해 드릴 테니." 단지홍은 선뜻 대꾸를 않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도리를 말해서 들을 노파가 아니었다. 그런 바에야 구구이 사정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렇게 손 놓고 멍청히 있을 수도 없는 터, 그는 속이 탔다. "어쨌든 노파를 만나야겠소. 내가 직접 말해야 해!" 단지흥은 또 소리쳤다. "그럼 올라와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그런데 한 가지, 올라오려면 이 독약을 마셔야 돼요. 그래야 할머님을 만나게 해 주겠어요." 그리고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에 자그마한 병을 하나 매달아 밑으로 내렸다. 받아 보니 작고도 깜찍하게 생긴 옥석으로 만든 약병으로 '빙청여아심갱심(氷淸女탔tl更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 었다. 단지홍은 그 말뜻을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음장 같은 여인의 냉혹한 마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독약을 내려보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단지흥은 다른 방법이 없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연히 그 약병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러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계집애들이 웃으며 재잘댔다. "할머님 말씀이 정말 맞는데. 저 사람이 꼭 마실 거라더니, 봐, 정말 마셨잖아!" "별걸 갖고 다 호들갑이야. 할머님 예측이야 언제나 귀신 같지 않았니? 할머님이 마실 거라면 꼭 마시게 되는 거야." "그것 참, 할머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거지? 독약을 마시래도 마시고. 참 한심한 황제로군. 남이 죽으라면 죽는 그런 황제가 무슨 황제야." "얘, 그런 말 말고 좀 내려다봐. 눈여겨보라구! 얼마나 잘생긴 황제님이시게. 세상에 없는 미남자지? 너 저 황제한테 시집 안 가련? 그러면 적어도 황비(皇妃)가 되는 거야, 황비! 황비가 되면 어떤지 아니? 여직껏 꿈도 못 꾸어 봤지? 한번 돼 보련, 응? 한 번 돼 봐!" "얘 얘, 난 싫다. 너나 해라! 네가 황비로 나서겠다면야, 기왕에 죽을 거, 저 황제도 마다하지 않을걸. 그런데 저 황제가 이제 할머님 손에 덜컥 죽게 될 텐데 그러다 같이 순장을 당하면 어쩌 냐?" "너 정말 그런 얄궂은 소리만 할 테야, 엉 ? 날더러 어서 죽으라고 제사를 드려라, 제사를! 고약한 계집애같으니라구!" 둘은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느라고 밑에서 독약을 마신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흥은 급해서 소리쳤다. "난 이미 독약을 다 마셨소! 빨리 나를 끌어올려 무당 할미를 만나게 해 줘야지 왜들 그러고만 있는 거요?" 여자들은 그제야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며 밧줄에 큰 바구니 하나를 매어 흔들흔들 내려보냈다. 단지홍은 이미 기력이 다하여 기다시피 간신히 바구니에 올라앉았다. 여인들이 영차영차 바구니를 끌어올렸다. 단지흥이 마신 독약은 보통 독약이 아니었다. 단지흥은 운공을하여 그 독을 단전 한곳으로 모아 놓을 수는 있었으나 몸 밖으로 내뿜어 버릴 수는 없었다. 이 노파는 무슨 작정으로 이 독약을 내 려보낸 것일까. 처녀 둘은 단지흥을 올려 놓고는 또 실랑이를 했다. "네가 안아라. 네 황제가 아니냐? 네가 안아 할머님한테 데려다줘." "어머나, 왜 내가 안고 가? 누가 황비인데. 황비가 안고 가야지." 둘은 단지흥을 흘끗흘끗 곁눈질하며 얼굴이 도화색이 되어 속닥거렸다. 그러다 둘은 서로 힘을 도와 단지흥을 안아 들고 석굴 안의 넓은 방으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