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8편 (8/70)
"단황 나으리,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내 계집들 중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단지흥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경멸 어린 미소를 흘릴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그는 충피같이 황음무치한 자와는 무슨 말이고 간에 주고받기가 싫었다. "단황 나으리는 먼데서 온 귀빈이 아니오? 그러니 내 계집들 중에서 마음대로 하나 골라잡으시오. 한결같이 예쁘고 곱살스러운데, 손님 대접이 그게 아니니 오늘 밤 수청을 들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계집들은 모두 이마를 다소곳이 숙이고 단지흥이 자기를 선택해 주기를 기원하며 가슴을 졸였다. '아, 황제가 나를 골라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난 황제의 여인이 되고 이 지옥 같은 소굴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시는 악마같은 충피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돼. 정말 그런 행운이 내게 떨어진 다면! ……' 그녀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모두 머리를 들라!" 충피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간절하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지홍은 그녀들이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일순 한 여자라도 구해 내는 게 도리가 아닐까 마음 이 약해졌지만 금세 생각을 고쳐 먹었다. '내가 이 구구십팔동까지 온 건 오직 해독약을 얻으려 함이었다. 해독약을 얻어내야만 천룡사 스님들을 구할 수 있다. 충피가 그 어떤 강짜를 부린다 해도 지금은 참아야 한다. 저 놈의 얕은 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단지홍은 여전히 경멸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충피, 내게도 여인들은 많다네……." "아니, 계집 하나를 선사한대도 마다 한다면 이 충피를 하찮게 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내가 그렇게 하찮게 보인다면 다른 말은 더 맙시다. 나도 그 잘난 일양지 소린 다신 안 할 테니까 거기서도 해독약 얘긴 꺼내지도 말라구요." 충피는 우쭐거리며 말했다. 해독약 소리가 나오자 단지홍은 놓칠세라 말꼬리를 잡았다. "내가 천리를 마다 않고 예까지 온 것이 바로 그 해독약 때문이거늘 어찌 그 얘길 안 할 수 있겠나. 제발 그 약을 좀 주게. 여자는 놔두고 천룡사 여러 대사들 목숨이나 좀 살려 주게." "그래도 일국의 황제라 이 충피가 미인까지 내드리며 환대를 하는데도 이 구실 저 구실 들이대며 고깝게 받아들이니,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 둘이 같이 즐겁게 밤을 지내자는 게 뭐 잘 못되었소? 우리 사이가 이렇게 뻣뻣하고 동고동락을 못하는데 해독약은 무슨 해독약……." 충피는 깐죽깐죽 여간 얄밉게 구는 게 아니었다. 단지홍은 속이 탔다. 저자가 자기 계집을 억지로 떠안기며 자기를 휘어잡으려 하니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켠에 서 있던 선비가 대뜸 끼여들었다. "동주께서 정말 그렇게 선심을 쓰려 한다면, 좋소이다. 기왕이면 파미를 내주시오." 그 말에 충피는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단지흥에게 물었다. "뭐라구? 그렇담 정말 황제는 내 새 각시가 마음에 든단 말이오?" 단지홍은 언뜻 선비를 돌아보았다. 선비의 뜻은 분명했다. 한 사람이라도 이 난쟁이 괴물의 손에서 구해 내자는 것이요, 기왕이면 아직 몸을 더럽히지 않은 학미를 구해 내자는 것이었다. 단지홍 은 선비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단황 나으리도 참 어지간하구려. 새 각시를 옷도 못 벗겨 보고 그쪽에 넘기란 말이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어떻게 새 계집을 맛도 못 보고 남에게 내준단 말이오?" 충피는 손까지 내저으며 안 된다는 시늉을 했다. 선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받았다. "이봐요, 동주님! 동주님도 황제 폐하는 멀리서 온 귀빈이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이왕에 환대를 하겠다면 가장 아끼는 물건을 내놔야 도리가 아니겠소? 그래야 더욱 칭송도 받을 거고." 그러자 충피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두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파미와 단지흥을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내뱉었다. "좋아, 좋아. 그 귀한 일양지 비본을 얻으려면 그 정도 대접은 해야겠지. 이 넓은 구구십팔동에 파미말고도 미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좋소! 자, 파미를 황제 폐하께 내드려라!" 충피는 호령을 내지르고는 단지흥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내 파미는 순순히 내드리지! 단, 단황 나으리,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아무리 황제라 해도 나으리 역시 이 고장 법도를 따라야 하오! 이 고장에선 화톳불을 켜 놓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혼례를 해야 하오! 황제는 오늘 밤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파미와 성혼을 해야하오. 알겠소?" 단지흥이 이해를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충피는 한바탕 운고 나서 덧붙였다. "우리 구구십팔동 사람들은 성안 사람들처럼 깨이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법도는 갖고 있다오. 즉 각시를 얻었으면 웃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해야 한다 이 말이오. 화톳불을 피워 놓고 다 보는 데서 발가벗고 뒹굴어야 한다는 것이오. 그걸 보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어떻게 믿겠소?" 거창하게 드러내 놓고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는 게 이 지방법도이긴 했으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따위의 법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충피는 지금 단지흥을 호되게 곯려 먹으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애를 태우면서도 아무 소리도 못했다. 단지홍은 아연해져서 사대 시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선비가 나섰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 파미를 내달라고 한 건 순전히 내 동생을 위한 것이었소. 우리 동생과 파미는 이미 약혼한 사이요. 그러니 두 사람이 성혼하도록 해 주시오." 그 말에 파미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충피는 원래 이러니저러니 말만 늘어놓는 덴 딱 질색이라 귀찮다는 듯 소리쳤다. "참 말도 많군. 좋소, 좋아! 멀리서 온 귀빈이니 뜻대로 해주지. 하지만 꼭 이 고장 법도대로 해야 하오." 그리고는 파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켜 우차를 뛰어내려서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나무꾼을 바라보며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갔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마침내 나무꾼 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깊은 눈길을 좇았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녀는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고 나무꾼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입술을 꼭 맞추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설야의 고행 속에서 모닥불이나 만난 듯 와 하고 환성을 올렸다. 충피는 심사가 뒤틀려 이죽거렸다. "저자가 황제의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 밤에는 반드시 이 고장 법도대로 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파미가 저자의 각시가 됐다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 파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가랑이가 찢겨 죽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단지홍은 충피가 허풍을 떠는 건지, 진짜로 이 고장에 이런 법도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충피가 자못 완강하게 나오는 걸로 봐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그는 난감한 눈빛으로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대자리 점포에서 나무꾼은 이미 파미의 애잔한 눈길을 느꼈으나 모르는 척 딴청을 했었다. 둘은 어제 처음 만나 그저 하룻밤 한지붕 아래서 따로따로 묵은 일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성혼이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충피, 결혼이라는 것이 머디 아이들 놀음인가? 자고로 혼사라함은 인륜지대사이거늘 우리 대리의 풍속을 따라 집 안에서 성혼을 치름이 어떤가?" 단지홍은 격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 나으리, 내가 이 큰 우차를 왜 몰고 왔겠소? 이 많은 사람들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줄 아시오? 이 사람들은 오늘 밤 각시가 이 우차로 만든 널찍한 침대 위에서 성혼 하는 걸 보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뭘 알기나 알고 하는 말이오?" 충피는 도리질을 해 가며 지껄여댔다. 그러나 파미는 그의 말은 귓전으로 흘리며 나무꾼의 품안에 살포시 기대고는 소곤거렸다. "나를 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토록 좋은데. 당신이 만일 나를 좋아하신다면 사람들 눈이 뭐 대수예요? 볼 테면 보라지……. 만약 저 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오늘 밤 저 놈은 날 죽이고 말거예요……." 파미는 나무꾼에게 꼭 붙어서서 두려운 듯 충피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충피는 그 음탕한 눈빛을 번쩍이며 이 두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남정네들도 자못 흥미롭게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실 파미는 이 구구십팔동에서는 손꼽히는 절색으로 그녀와 단 하룻밤이라도 자고 싶어 남모래 속을 끓인 사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차제에 자신들은 원을 못 풀더라도 이 여인이 밤일을 할 땐 어떻게 하는지 적이 호기심이 동해 저마다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단지흥도 뾰족한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무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비도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대리국에서는 명색이 이품(二品) 벼슬을 하는 고관대작인데 이따위 짓거리에 놀아나야 하다니…… 나무꾼은 속만 탔다. 그 역시 방책이 서지 않아 황제와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선량하기만 하던 이 마을 사람들도 점점 이성을 잃고 빨리 혼례를 치르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두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을 한시 바삐 보고 싶어 야단이었다. 그쯤 되자 단지홍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나무꾼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피 말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나무꾼은 잠시 주춤하더니 한 순간 결심을 내린 듯 파미의 손을 홱 거머쥐고는 천천히 우차 위로 올라 갔다. 충피는 나무꾼과 파미가 우차로 만든 침대로 올라오는 것을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그들의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다. 나무꾼은 엉거주춤하니 파미를 끌어안았다. 나무꾼의 품에 안겨 파미는 얼굴이 발개져서 속살거렸다. "어서 하세요, 어서……. 한 번도 사내를 타지 않은 깨끗한 몸이에요. 거기가 가지세요……." 나무꾼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열여섯 자루 팔뚝 같은 횃불이 우차를 대낮처럼 환히 비추는데 어찌 그리도 남부끄러운 짓을 한단 말인가. 그 역시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선뜻 결단이 서지 않아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미는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누르지 못해 한 순간 거칠게 나무꾼을 옥죄더니 그를 끌어안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당신 손이 그처럼 재간이 있듯, 난 그 마음도 그처럼 백설같이 선하리라고 믿어요……." 파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나무꾼은 좀체로 파미처럼 열렬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차 주위로 몰려들어 손에 땀을 쥐며 그들을 지켜 보았다. 파미의 아버지는 진작에 돌아갔고 그녀의 오빠만이 두 주먹을 부르쥔 채 충피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무꾼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엉거주춤하니 허리춤을 풀어 반나마 및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흘러서야 주춤주춤 파미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그러자 파미는 한껏 달아올라 온몸을 나무꾼에게 찰싹 갖다 붙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파미의 눈빛은 더욱 열정적으로 불타 올랐다. 충피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정색을하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단지홍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이들 두 남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단황 나으리, 어떻소? 또 한 번 단단히 속으셨구려!" 충피는 코웃음을 쳤다. 단지홍은 고개를 홱 쳐들며 외쳤다. "속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네 졸개는 또 내게 중독되었다 이 말씀이오. 풍독(瘟毒)이라는 건데, 저 둘은 한치도 떨어지지 못하고 마냥 저대로 붙어 있어야 한다구요, 히히히…… 한치라도 떨어지면 금세 독이 퍼져 죽고 말아, 으하하하……." 단지홍은 두 눈이 휘등그래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충피는 엉덩이까지 들썩거리며 죽겠다고 웃어젖혔다. 단지흥을 또 한 번 골탕 먹였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요절복통할 일이 아닌가! 이제야말로 일양지공 비본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으니, 구구십팔동은 물론이요 대리와 중원(中原) 천하까지 손아귀에 틀어쥐게 되었지 않은가……. 충피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웃음을 토해냈다. 아니나다를까, 나무꾼은 불현듯 온몸에 오한이 나며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아, 큰일이다. 이거 야단났는데……." 나무꾼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어찌나 떨리는지 이빨이 떡떡 마주치고 눈은 점점 흐릿해 졌으며 동공은 바늘귀처럼 작아졌다. 정신도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파미는 속으로 겁이 덜컥 났으나 조금이라도 위로해 볼 요량으로 나무꾼을 그러안고 애절하게 말했다. "너무 염려 말아요. 다 괜찮아요. 동주 말을 들었지요? 내가 그냥 당신을 끌어안고만 있으면 죽지는 않는대요." 단지흥과 시위 세 사람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볼 뿐, 누구 하나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날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파미와 나무꾼을 지켜 보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개중에는 그들을 구경하다가 몸이 후끈 달아올라 서로 짝을 지어 으슥한 골짜기로 달려간 이들도 있었지만 거개는 좀전의 자기를 질책하며 근심스런 기색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충피는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단지흥을 기분 좋게 쳐다보며 으르댔다. "단황 나으리, 이제 순순히 일양지 비본을 내 놓으시지. 해독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룡사 중들을 고치는 약뿐 아니라, 당신의 저 시위를 해독시키는 약도 당장 내놓겠어! 그래, 일양지 비본 은 어딨지?" 단지홍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나무꾼이 저대로 날마다 파미를 끌어안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일양지 비본을 내주고라도 나무꾼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이마에는 골 깊게 내천자가 그려졌다. "단지흥, 일국의 황제 주제에 제 시위 하나 못 살려내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는가? 자, 어서 일양지 비본을 척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도 모두 저 꼴이 돼." 충피는 사뭇 득의양양했다. "폐하…… 저 놈의 허튼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저와 이 여인이 죽을지언정…… 일양지 비본을 저 놈한테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비본을 얻으면 저 놈은 더욱 흉악해져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천하를 제 맘대로 주무를 것입니다……." 나무꾼은 더듬거리면서도 성마르게 외쳐댔다. 그러자 충피는 코웃음을 쳤다. "이 앞뒤 분간도 못하는 놈아, 당장 죽게 된 놈이 무슨 사설이 그리도 많으냐! 너희 두 년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그나마 목숨은 건질 수 있으나 잠시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그 당장 죽는다, 죽 어!" 세 시위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기탱천하여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충피에게 덮쳐 들었다. 제각각 선비는 검, 농부는 쇠갈퀴, 어부는 쇠로 만든 노를 들고 미친 듯이 휘둘러댔 다. 그러나 충피는 여간 날쌘 게 아니었다. 놈은 소리를 지르며 획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피하더니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고는 땅에 사뿐 내려섰다. "나 같은 것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 대리국의 황제라고? 히히히…… 그 이름이 무색하구나." 충피는 지들거리더니 낯색을 굳히며 짧게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그러자 우간 밑에서 난데없이 독충과 독사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만큼 큰 전갈, 두 자는 됨직한 긴 독사, 그외에 이름 도 모르는 독충들이 새까맣게 땅을 뒤덮고 충피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네 사람을 포위해 들어왔다. 단지흥 일행은 즉각 몸을 피하려 했으나 때를 놓치고 말았다. 우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은 기겁을 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사방으로 튀었다. "야단났다. 동주가 독충들을 풀어 놓았다. 독충들을 풀어 놓았다!" 독충과 독사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들었다. 선비는 검을 들어 서슬 푸른 검기(劍氣)를 내뿜었다. 빗발치는 검기가 무지개를 이루며 독충들의 접근을 막아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독충들은 물불 안 가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농부는 돌개바람이 일 정도로 쇠갈퀴를 세차게 휘둘러댔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리 오래 견딜 수는 없었다. 무거운 쇠갈퀴를 정신없이 휘둘러대니 숨이 가쁘고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손을 놓으면 황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에 농부는 이를 악물고 계속 쇠갈퀴를 휘둘러댔다. 어부도 쇠로 만든 노를 바람이 씽씽 일 정도로 힘차게 휘두르며 독충들을 내리쳤다. 어부의 쇠로 만든 노는 농부의 쇠갈퀴보다는 쓰기가 한결 가뿐했지만 몰려드는 독사와 독충들을 다 막아내기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독충들은 지독하게 악취를 내뿜어 속이 메슥거리고 골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래도 어부는 분을 못이기며 눈을 질끈 감고 닥치는 대로 마구 내리쳤다. 대가리가 터져 납작하게 된 독충과 독사들이 바닥에 확 깔리기 시작했다. 가운데 선 단지흥은 잠시 망설였다. 자기 혼자만이 라면 내공으로 이 벌레들을 일시 막을 수는 있으련만 시간을 오래 끌수록 사대 시위의 신상은 위태해지고 만다. 단지홍은 일순 마음을 굳히고 일양지공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지풍이 팍팍 소리를 내며 뿜어 나가자 과연 독충과 독사들은 배때기가 터지며 연신 죽어 나자빠졌다. 팍팍팍, 그는 일양지공을 번개같이 사방으로 내질렀다. 순식간에 독충과 독사들이 죽어 널브러져 새까맣게 땅을 뒤덮었다. 단지흥 일행은 향을 세 대 피울 시간 동안이나 독충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으로는 조수마냥 끝없이 밀려드는 이 독충과 독사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게다가 충피의 계집들은 무슨 발광이 났는지 충피 뒤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계속 독충과 독사들을 부리고 있었다. 구구십팔동 그 많은 산과 골골의 독충과 독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불러 다 단지흥 일행을 물어뜯게 할 참인 것 같았다. 단지홍은 절로 한 숨이 나왔다. '이젠 다 글렀구나, 해독약을 구해 천룡사 중들을 살려 보자 했더니 해독약은 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게 됐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이야 문제가 아니나 대리의 호국사가 나에 이르러 파멸당하게되니 죽어도 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폐하, 저희 셋이 막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농부가 소리쳤다. "지존께서 이렇게 수난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어서 여기를 피하십시오, 어서!" 선비도 애가 달아 소리쳤다. "폐하, 어서 가십시오. 차후 저 독충 같은 놈을 잡거든 저희들의 원수나 꼭 갚아 주십시오." 어부도 숨을 바투 쉬며 외쳤다. 단지흥은 비록 자기 목숨이라도 자기 멋대로 함부로 여길 수 없는 황제의 신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시위 넷을 사지에 버려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군신간이라 해도 정은 수족 같고 형제나 다름없거늘, 어떻게 저 혼자만 살겠다고 몸을 피하겠는가. 단지홍은 장탄식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은 그만두게. 부처님께서도 스스로 수리 개에게 뜯기기를 자원하셨거늘, 나도 내 몸을 저 독충들에게 뜯기게 할지언정 자네들을 버려 둘 수는 없네." 그 말에 선비, 농부, 어부 세 사람은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네 사람은 아무 방비도 않고 손을 거두었다. 그들은 이제 처연히 죽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자지러지는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순간 싱글벙글 입이 헤벌어졌던 충피도 우거지상이 되어 버렸다. 뒤미처 단지흥 일행 앞에 출연히 여인들 몇이 나타나 떡 버티고 섰다.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몸매로 보아 여자들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아무 말도 없이 충피를 노려봤다. 이윽고 충피가 어깨를 몇 번 으쓱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아니, 여긴 왜 왔습니까? 난 무당할미의 규례를 위반하는 짓은 한 적이 없는데." 그래도 여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단지홍은 충피가 이 여인들을 무서워하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들이 나타나자 충피는 더는 독사들을 몰아대지 못하고 그녀들의 눈치만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대관절 이 여인들은 누구인가. 어떤 여인들이기에 저 기세등등하던 충피마저 저 모양 저 꼴로 꼼짝못하는 것일까, 이 여인들이 그 어떤 신기(神技)라도 갖고 있는 걸까.' 단지홍은 자못 궁금하였다. 그 여자들이 단지흥 일행을 막아 선채 묵묵부답으로 입을 닫아 붙이고 있자 충피는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외쳐댔다. "아이고 답답해라. 무슨 분부가 있는지 말씀을 하십시오. 내 분부대로 다 해 드리리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이윽고 개중 한 여인이 느직느직 입을 열었다. "이봐 충피, 무당 할머니께선 어서 이분들을 놓아주라는 분부시다." 충피는 화가 벌컥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더니 꼭 그 짝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