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7편 (7/70)
"오빠, 오빠는 왜 가만있어요? 오빠 칼은 나무 찍는 데만 쓰는 거예요? 오빤 사내대장부가 아니란 말예요?" 처녀는 울면서 젊은이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젊은이는 꿈쩍도 안 했다. 젊은이는 내내 머리만 숙이고 있다가 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봐요, 저리들 비키시오, 저리들 비켜!"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여러 사람을 밀치며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래도 다섯은 그대로 주저앉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장 달아나도 충피한테 붙잡힐 판국인데 저렇게 배짱 좋게 버티고 앉아 있으니 죽지 못해 용을 쓰는 격이었다. 그는 발뒤축을 구르며 다섯 사람에게 소리쳤다. "내 누이동생 일은 염려 말고 어서 떠나시오, 어서 떠나! 여기 있다간 아까운 목숨만 버려요." 그가 하도 안달을 하자 내내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던 나무꾼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서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칼 이리 주시오." 젊은이는 다소 뜻밖이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무꾼이 칼로 사람들을 해치고 달아나려는가 보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기왕 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다 여기고 순순히 칼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칼을 받아 쥔 나무꾼은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천천히 칼을 안으로 휘어서 동그란 고리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갑자기 두 눈이 휘등그래져서는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정은이만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도리질을 했다. "소용없어요, 소용없다니까요. 그 놈들 독약엔 아무도 못 당해요! 무예로 겨루는 게 아니라 독약을 뿌린단 말이에요." 젊은이가 애타하는 모습을 보며 단지홍은 이 황량한 곳에도 이처럼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적이 감탄했다. 젊은이는 지금 자기 가정의 재앙보다 이 낯선 사람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하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때 먼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온다, 온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소를 맨 우차 두 대가 천천히 이쪽으로 굴러 오고 있었다. 우차 위엔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듯했다. 기악 소리 같은 것도 들려 왔는데 그 소리는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우차는 점점 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우차 위에는 여자들만 앉아 있었는데 너나없이 요염하게 눈썹을 그리고 피리를 불고 있었다. 피리 소리는 한데 어을리지 못하고 서로 어그러져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그 뒤에 풍막차 한 대가 또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쪽은 앞서 오는 우차와는 달리 사뭇 조용했다. 풍막차에는 좀전의 그 새 다리 사내의 마차같이 해골 바가지나 이름할 수 없이 기괴한 것들이 가득 그려 있었는데 그래도 아까 것보다는 정중해 보였다. 피리를 부는 여인들은 오래 굶주린 사람마냥 탐욕스런 눈길로 남자들을 훑었다. 드디어 우차는 바로 앞에까지 곧추 다가와서 멈춰 섰다. 피리 소리도 멎었다. 술렁이던 사람들도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러나 풍막차 안에는 사람이 없는 듯 한동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제4장 기이한 혼례 "동주님이 오셨다. 모두들 길을 비켜라!"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우차 위의 계집들은 또다시 일제히 피리를 불어대기 시작했다. 잠잠히 가라앉은 위로 가뜩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지니 아예 놋그룻을 박박 긁어대는 것마냥 저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도 계집들은 자기들 피리 소리에 스스로 도취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불어댔다. 한 계집애가 풍막차의 문발을 들치며 한껏 아양을 떨었다. "아이, 동주님, 이젠 내리셔야죠." 그러자 열대여섯 살 난 여리여리한 계집애 둘이 쓱 얼굴을 내밀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내려와 섰다. 그들은 나지막한 걸상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차 문발까지 층층이 포개 올려 놓고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동주님, 이젠 내리세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단지흥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일국의 황제인 그도 저런 호사는 마다하는데, 볼수록 기가 막힐 노룻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저런 것만 보더라도 이 구구십팔동에서 충피의 위풍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헛기침 소리가 몇 번 나더니 풍막차 안에서 작달막하니 땅에 달라붙은 듯한 사내가 하나 뜨직뜨직 굼뜨게 내려왔다. 키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얼굴도 지지리 못나고 음탕한 빛이 질질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충피였다. 그는 짐짓 근엄한 기색으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단지흥 일행에게 눈길이 멈추자 싸늘히 냉소를 지었다. "호오, 황제께서 예까지 친히 행차하셨군! 그래 여기 와서 느낀소감이 어떠신지? 대리면 다 대린 줄 알았겠지만 여긴 내 구구십팔동이오. 여기선 내가 황제요, 내가!"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일순 얼굴에 놀라는 빛이 어리며, 나직이 술렁임이 일었다. 단지흥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기만 할 뿐 대꾸를 안했다. 충피 같은 소인배가 이곳을 무대로 하여 어떻게 전횡을 부리고 있는지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게 누구 없느냐!" 충피는 불현듯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우차 뒤에서 새 다리 사내가 냉큼 뛰쳐나오더니 허리를 낮추 꺾고 굽실거렸다. "동주님, 저자들입지요. 저자들이 바로 동주님의 희비 고르는 일을 훼방논 자들입니다요." 충피는 그 말에 작은 배를 톡톡 치며 깔깔 웃었다. "이 멍청한 놈아, 저 어르신이 누군지 알기나 하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냐? 저분은 바로 대리국의 황제 폐하시다. 이 놈아, 저런 높으신 분이 이 누추한 구구십팔동까지 몸소 찾아 주시니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한데 네 놈은 무엄하게도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어? 이런 몹쓸 놈!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렷!" 새 다리 사내는 난데없는 불벼락에 어리둥절해져서 눈동자를 굴리다가는 황급히 우차 뒤로 꽁무니를 빼 버렸다. 둘러선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 쳐다보았다. 충피는 단지흥을 보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폐하, 정말 잘 생각하셨소. 이렇게 해독약을 가지러 오지 않았으면 며칠 내로 천룡사 고승들이 뭐가 되겠소?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켁 뒈져 버리지 않겠소?" 단지홍은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도 운남 사람 아닌가? 천룡사는 대리국에 큰 공덕을 베푼 호국사요, 여러 번이나 대리 사직을 안정시킨 바 있네. 자네도 운남 사람이라 천룡사에서 은혜 입은 바 크다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곳 스님들을 헤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충피는 히히 웃으며 능청스럽게 이죽거렸다. "단황 나으리!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소리요? 날 찾아 왔으면 두말 말고 어서 일양지 비본이나 내놓으시오. 그러기만 하면 내 약속대로 해독약은 내주지. 중들을 살리고 싶다면 어서 내놓아요! 그저 한 닷새만 지나 보시오, 어떻게 되나. 먼저 온몸에 두꺼비 관등처럼 두들두들 두드러기가 날 거요. 두드러기 안에선 벌레들이 꼬물꼬물 살을 파먹을 거고. 그래도 그 정돈 괜찮소. 이레가 넘어도 일양지 비본을 내놓지 않으면 천룡사 중들은 모두 끝장이오, 끝장! 살 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이번엔 몸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먼저 간을 파먹고 또 염통에 기어 들어가 염통을 파먹고……. 그때가 되면…… 헤헤…… 그때……." 충피의 말에 누군가 기겁을 하며 숨을 훅 들이켰다. 그러나 그말이 너무도 끔찍하여 그 소리마저도 기어 들어가는 듯했다. 새삼 좀 독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깨달은 것이었다. 천룡사 중들이 좀 독에 중독됐다니, 그 광경을 떠올리곤 너나없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충피와 맞닥뜨리기 전에는 단지흥도 어떻게 그를 설득해 해독약을 얻어내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짜 보았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대하고 보니 예상대로 모두 헛수고가 될 게 틀림없었다. 말로 설득을 해서 될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놈과 싸우자니 그 역시 간단치가 않았다. 싸워 놈을 죽여 버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인다고 해독약이 나오겠는가? 생포한다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을 쓰는 놈을 잡기도 어렵거니와 꼼짝없이 잡는대도 무슨 수로 해독약을 얻어낸단 말인가? 실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홍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단지흥이 아무 말도 없자 충피는 안달이 나서 다시 또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먼데서 온 귀한 손님이니 손님 대접을 안 할 수야 없지. 자, 우리 구구십팔동에서는 귀빈 대접을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시오. 야, 새 다리! 너 이리 좀 와 봐. 어서 가서 그 계집년을 좀 데리고 와. 어떻게 생겼는지 우선 인물부터 좀 보자." 그가 한마디 소리치자 아까의 그 새 다리 사내가 쏜살같이 달려와 굽실 절을 하더니 다시 헐레헐레 뛰어가 대자리 집 처녀를 끌고 충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을 팍 내질러 충피 앞에 무릎을 꿇렸다. 처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꾼을 자기 남편이라고 하며 자못 의연하더니 충피 앞에 끌려 오자 그만 질겁을 하여 몸을 벌벌 떨어댔다. 충피는 건들건들 그녀 앞으로 걸어오더니 음탕한 눈길로 아래위를 훌어보았다. "쓸 만하구먼. 지금 있는 것들보단 그래도 예쁜 축이야. 자, 상을 내줘라." 그는 뒤를 돌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우차 한 귀퉁이에 앉은 여인이 새 다리 사내에게 쇠가죽으로 만든 작은 술병 하나를 던져 주었다. "고맙습니다요. 헤헤, 고맙습니다요." 새 다리 사내는 입이 헤 벌어져서 술병을 그러안고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 사이 처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무꾼이나 그 일행이나 충피의 적수는 못 될 것 같았다. 이들이 충피를 대적해 내지 못하면 충피의 독약에 온 마을 사람들이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충피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흉포한 자였다.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비칠 몸을 일으키며 충피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가 순순히 자기한테로 걸어오자 충피는 으쓱해져서 연신 입이 벙싯벙싯 벌어졌다. 그는 뱀 가죽같이 징그러운 작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슬쩍 쓸어 보며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파미(巴美)예요." "파미? 파미? 거 좋은 이름이로군! 얼굴처럼 예쁜 이름이야." 충피는 연신 음탕한 웃음을 흩뿌리며 파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가 워낙 작아서 손이 머리에 닿지 못했다. "자자, 파미! 머리를 숙여야지, 허리도 굽히고. 내 손이 닿아야 쓸어 주지. 내 색시가 되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내가 네 머리를 쓰다듬어 줄 기색이면 넌 눈치 빠르게 머리를 내 손 밑으로 밀어 넣고, 허리를 만져 볼 기색이면 내 손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야 한단 말이야. 그러지 않았다간 내 심사가 뒤틀려 재미 없는 일이 생긴다니까……." 파미는 그 말에 치가 떨렸다. 징그러운 벌레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했다. 그녀는 나무꾼을 한 번 바라보고 싶었지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칫 나무꾼 일행이 큰소리라도 내는 날이면 충피가 악에 받쳐 독약을 뿌릴지도 모르고 그럼 다섯 모두 꼼짝없이 죽게 된다. '저이들을 구해야 해. 난 저이를 사랑해. 내가 충피에게 잡혀 가 유린을 당할지언정 저이는 구해야 해, 이 구구십팔동 처녀들치고 이 징그러운 놈의 마수를 벗어나기란 어차피 틀린 일인걸.' 그녀는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팠지만 애써 나무꾼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저이는 정말 재간이 뛰어나. 저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그녀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데 대한 감미로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진정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그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징그럽고 음충스럽기 짝이 없는 충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라지만 나보다도 못하지 않소? 난 겨우 구구십팔동 동주일 뿐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이 넘쳐 귀찮을 지경이거든. 내가 어느 계집이 좋다고 한마디만 하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렇게 갖다 바치잖소? 그럼 난 몇 밤 데리고 놀고는 아랫놈들에게 하사해 주는데 그거 싫다는 놈은 한 놈도 없는 거요. 히히…… 아무리 일국의 황제라도 나 충피처럼 즐겁게 살 수는 없지." 단지홍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충피가 떠벌리는 걸 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대 시위 중 선비는 그들 넷이 함께 달려들면 충피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생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놈을 생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지홍은 충피가 중구난방으로 낄낄거리며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내심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음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선비에게 급급히 눈짓을 보냈다.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단번에 사로잡지 못하면 오히려 큰 낭패만 볼 뿐이었다. 더욱이 생포한다 해도 뾰족한 수도 없는 터, 단지홍은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먼데서 온 손님들한테 우리 고장 혼사 구경까지 시켜 줘야 예의지." 충피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새 다리 사내를 불렀다. "야, 새 다리, 여기다 화톳불을 지펴라. 난 오늘 밤 여기서 저 계집과 혼례를 치러야겠다." 그러자 새 다리 사내는 별안간 환성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둘씩 입을 벙긋거리며 환성을 올리는 척했다. 뒤미처 우차 위에서 계집애 몇이 우르르 내려와 파미를 에워싸고는 냇가로 끌고 갔다. 그와 동시에 대자리 집 영감과 젊은이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계집애들은 파미를 냇가로 데려가더니 그녀의 머리를 마구 풀어 헤치고는 다시 자기들 식으로 빗어 주었다. 파미는 넋을 놓은 채 그저 계집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둘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충피와 그 밤에 지독한 일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나무꾼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충만한 채 그만을 생각하려고 애를썼다. 어느새 달이 떠올랐다. 교교한 달빛이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을 내리비췄다. 화톳불 주변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쭉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충피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파미를 끼고는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키가 어찌나 작은지, 신랑이라고 차려 입긴 했으나 신랑이 아니라 자그마한 어린애가 파미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술판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울적하게 앉아 있었지만 술을 두어 잔 걸치자 거나해져 충피에게 저당 잡혀 있다시피 한 자신들의 신세가 한탄스럽고 뭐고 점점 무감각해져 갔 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취기가 올라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살뜰한 정이 담긴 사랑가였다. 산 위에 바위는 나 그대는 나를 껴안은 파초일 바람이 크게 일어도 그대, 가만있어요 나를 꼭 껴안고 가만있어요 나는 계곡에 흐르는 벽계수 그대는 그 물에서 노니는 선녀 내 품에 숨어서 그대 , 가만 있어요 동주님 눈길이 찾고 있어요. 충피는 흥에 겨워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게슴츠레 단지흥을 바라보며 지껄였다. "단황 나으리는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이 충피는 어쩌지 못하오. 나한테 조금만 함부로 굴어도 천룡사 늙은 중이고 젊은 중이고 모두 구더기 밥이 될 텐데……." 그리고는 충피는 또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어젖히고는 음탕한 눈빛을 반짝 빛내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황제는 후궁에 희비들이 얼마나 있소?" 단지홍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때껏 살면서 이런 음탕한 짓거리를 대하기는 실로 처음이었다. 그는 입을 딱 닫아 붙인 채 함구 무언 말이 없었다. 그러자 충피는 또 낄낄 웃으며 빈정거렸다. "기실 우리들은 모두 속세 인간들인데 계집을 싫어할리야 있겠소? 거기도 계집들이 수두룩하겠지만 내게도 내 계집이 허다하다오. 그쪽 계집들도 단황 나으리 말을 잘 듣겠지만 내 계집들도 내 말이라면 설설 긴다오. 그래, 내 위세가 대단하지 않소? 과연 황제와 맞먹지 않느냐 말이오?" 단지홍은 듣기가 거북해 마지못해 한마디 내뱉었다. "글쎄,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쳇, 내 말을 믿지 않는 게로군! 그럼 믿게끔 해 주지." 아무리 해독약을 얻으러 온 처지라지만, 그리하여 저 놈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뭇 조심하고 있는 터이지만 황제가 저토록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사대 시위는 너나없이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졌다.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저런 미친놈! 저따위 놈하고 무예를 겨뤄야 하다니, 한심한 일이로다. 완전히 고주망태가 돼서 정신이 가 버리면 저 놈을 잡아 엎어 놓고 해독약을 뺏어 내야겠다.' 사대 시위는 눈을 부릅뜨고 충피를 쏘아보며 기회를 노렸다. "자, 이리들 오너라!" 충피는 거들먹거리며 제 계집들을 불렀다. 계집 여럿이 한껏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단황 나으리, 내가 이 산간 벽지에서 나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이렇게 여러 계집에게 시중을 받으며 즐기기 때문 아니겠소? 내 이 계집들 좀 보시오. 얼마나 예쁜가. 이 구구십팔동 것들 도 있고, 타고장 것들도 있지만 모두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능이라도 한다오." 충피는 득의양양하게 지껄여댔다. 그리고는 한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러자 계집들은 충피를 사뿐 안아다가 한 우차 위에 올려 놓고 파미도 그 곁으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는 우차 두 개를 서로 끌어다 붙이고는 바삐 손을 놀리더니 금세 평평한 침대를 하나 만들었다. 이어 네 귀퉁이에 빙 둘러 팔뚝 같은 횃불을 열여섯 자루나 켜 놓았다. 횃불은 피지직피지직 타오르며 침대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자, 이제 됐다. 모두들 가까이 오너라!" 충피는 호기롭게 호령을 했다. 단지홍은 이 산간 벽지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이곳 사람들 사이엔 타지와 다른 기괴한 일들이 많음에 놀랄 만큼 놀랐고 충피의 음탕함에도 신물이 날 정도가 되었으나 지금 이 난쟁이가 또 무엇을 하려는 수작인지 쉽사리 알 수가 없었다. 충피의 한마디에 계집들은 두말없이 다가들었다. 그녀들은 충피 곁으로 가더니 차례차례로 허리끈을 풀었다. 그러자 하늘하늘한 속치마가 다 드러났다. 봉곳한 젖가슴, 탱탱한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교교한 달빛, 이글거리는 횃불 밑에서 그녀들의 모습은 적이 고혹적이었다. 충피는 한 어린 계집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계집은 엉덩이를 흔들어 가며 충피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충피는 한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받쳐 올리더니 물었다. "이 동주님이 너와 몇 번을 즐겼느냐?" 그 계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일곱 번밖에 안 되옵니다." "그래, 그래. 내 몇 번은 더 부르지." 충피는 그녀를 물리며 낄낄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계집이 허리를 비비꼬며 충피에게 달려들었다. "동주님은 저하고는 벌써 열다섯 번이나……." 충피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열다섯 번? 그렇게나 많이? 으, 질린다, 질려! …… 어떻소, 단황 나으리! 이만하면 신물이 나지 않겠소? 이 계집이 좀 아깥긴 하지만 이제는 새 계집으로 갈아야겠소! 거기 새 다리, 너 이리 좀 오너라." "예예, 동주님, 무슨 분부십니까?" 새 다리 사내는 냉큼 뛰어가 충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네가 오늘 밤 내게 새 각시를 골라 바쳤으니 그 상으로 이 계집을 내주마. 네 놈한테는 과분하지만…… 어쨌든 저 애는 네가 가져라!" 그 말에 계집은 눈이 휘등그래졌다. 충피도 싫었지만 이 새 다리 사내는 더 싫었다. 충피에게 몸을 버린 것만 해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집에 있는 부모 형제의 안위가 걱정되어 온갖 애교를 다 부리며 꼭두각시처럼 충피가 하라는 대로 몸을 굴렸는데 이제는 이 천하의 추물 새 다리 사내한테까지 유린을 당해야 하다니, 그녀는 자기의 신세가 처량하여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기분이 상한 충피가 벌컥 성을 냈다. "이 년아, 울긴 왜 울어? 날 떠나기 섭섭해서 우는 거냐? 섭섭 해도 할 수 없다. 난 네 년에게 진저리가 났단 말이다. 넌 오늘 밤 저 새 다리와 자야 돼, 알겠어? 오늘 밤으로 저 새 다리한테 시집을 가야 한다구!"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 다리 사내는 우차 위로 훌쩍 뛰어 올라 계집의 손목을 와락 거머쥐고 밑으로 끌어내려 숲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통곡 한 번 못하고 가녀리게 어깨를 들썩이며 애원 어린 눈길로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그녀의 눈길을 애써 외면할 뿐이었다. 단지흥 일행 역시 주먹을 불끈불끈 쥐면서도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마저 점점 멀어져 갔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충피가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