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6편 (6/70)
도무지 알수 없는 노룻이었다. "페하, 사람들이 충피의 석굴을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 피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마도 여기 사람과 충피 사이에는 말 못할 곡절이 있음에 분명하옵니다." 농부가 한마디하자 선비가 뒤를 달았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충피와 원수진 사람을 한두 사람 찾아서 넌지시 물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단지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서 한 작은 점포로 들어섰다. 대나무로 자리를 엮어 파는 점포였는데 노인과 젊은이 한 사람 그리고 한 처녀가 대자리를 엮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무꾼이 은근히 끼여들었다. "어르신,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엮는 게 아닙니다." 웬 사람이 하나 느닷없이 걸고 넘어지자 노인은 의아한 눈길로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뭘 잘못 엮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손님이 나보다 더 잘 엮는단 말이시오?" "글쎄요, 자고로 모두들 어르신처럼 엮어 왔으니 딱히 틀리다고까지야 말할 수 없겠지만……. 이건 나석(蘿崙)이 아닙니까? 나석은 여기에 좀 변화가 있으면 좋지요. 보세요, 여기 하나밖에 없 는 이 무늬들을 두 개로 만들면 자리가 대번에 환해지지요." 나무꾼의 말에 노인은 반신반의하며 엮고 있던 것을 대뜸 내주었다. 그러자 그는 대자리를 앞에 놓고 척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품이 재법 그럴싸했다. 노인 곁에 있던 젊은이와 처녀도 다가와 고개를 늘여 빼고 나무꾼이 하는 양을 들여다봤다. 나무꾼은 원래 대리의 재간꾼으로 나무하는 일 외에도 어떤 공예든 막힘이 없었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뭐 그리 대수롭지도 않게 손을 놀리는 듯했는데 어느새 자리에는 노인과 두 사람이 여태까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무늬가 생겼다. 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신선이라도 보는 양 경이스런 눈길로 나무꾼을 쳐다보았다. "아, 정말 훌륭하오. 그런 식으로 엮으면 천하 못 엮어 낼 무늬가 없을 것 같구려." 노인은 감탄하여 연신 중얼거렸다. 곁에 선 처녀도 눈 한 번 깜짝 않고 뚫어지게 나무꾼을 지켜 보았다. 이 마을에선 그래도 손재간이 으뜸으로 꼽히는 그녀였지만 방금 나무꾼의 자리 엮는 손길이 어찌나 빠른지 도시 어떻게 엮어 나가는지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휴우, 이런 손재주는 보다 보다 처음인데요." 아들인 듯한 젊은이도 침을 튀겨 가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밖에는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노인은 넋을 잃고 나무꾼의 손길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순 사위가 어두워졌음을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서두르며 처녀에게 탁주를 받아 오게 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네 사람까지 청해 들여 자리에 앉혔다. 곧 탁주가 들어오고 술상이 차려졌다. 노인은 한껏 흥이 올라 척척 술을 따랐다. 단지흥은 내내 웃는 낮으로 예의를 갖춰 노인을 대했다. 노인도 인자하고 박식한 공자가 색 맘에 들어 스스럼없이 흉금을 터놓았다. 젊은사람은 젊 은 사람끼리 앉아서 얘기를 나누며 권커니자커니 술을 마셨다. 처녀는 한쪽 구석에 앉아 한 사람을 남몰래 지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저 더없이 듬직하고 좋아 보였다. 그러나 나무꾼은 처녀의 눈길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 술만 마셔댔다. 술을 들이켜는 모습까지, 처녀의 눈에는 나무꾼이 꼭 신선처럼 보였다. 전설 속에 전해 오는 재간뿐 신선이 꼭 그인 것만 같았다. 자기 마을과 인근 어디에도 그처럼 점잖고 조용한 남자는 없다고 그녀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지흥은 이윽고 지나가는 투로 넌지시 노인에게 석굴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 말에 노인은 흠칫 놀라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물었다. "충피네 석굴은 왜 찾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실은 우리 형제 한 사람이 그자의 좀 독에 중독됐습니다. 그 고통이 말이 아니지요.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그래 충피네 석굴을 찾아가 해독약을 구하려고 이렇게 길 을 떠나온 것입니다." 노인은 단지흥의 말을 듣고 젊은이와 처녀를 바라보았다. 셋은 서로 눈길만 주고받을 뿐 똑같이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야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충피가 있는 석굴은 화동(花嶠)이라고도 하고, 사인동(死人 )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엔 각 부락에서 모아들인 병신, 미치광이, 유행성 열병 환자들과 요녀가 득실거리지요. 그래서 여느 사람은 감히 접근을 못하고 그들을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그 굴은 이 창산의 귀신 굴이 돼 버렸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마을에 나와 예쁜 여자들을 노략질해다가 충피에게 바친답니다. 그럼 충피는 몇 밤 데리고 놀고는 아랫놈들에게 내주고, 또 새 여자를 구해 오게 한답니다. 정말 악독 한 놈입니다. 그러니 이 산에 사는 사람들은 충피라는 말만 나와도 이를 갈고, 딸 가진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충피네 무리들이 내려올까 늘 전전긍긍이랍니다. 이러다 보니 혼기도 차기 전에 서둘러 시집보내는 집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집에선 아예 밖엔 얼씬도 못하게 가둬 두고 있지요." 젊은이의 말이 끝나자 노인은 처녀를 쳐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처녀는 무척 예뻤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이 처녀를 두고 절대 충피에게 들키지 않게 단단히 조심시키라고 신신당부하곤 했다. 충피가 이런 여인을 보기만 하면 그 당장에 음심이 동해 끌고 갈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단지홍은 그윽이 처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설부화용으로 전형적인 남국의 미녀였다. 이런 처녀를 어떻게 그 극악한 충피에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단지흥의 사대 시위는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벌써 분기탱천하여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씨근덕거려댔다. 단지흥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어르신, 저희가 충피를 찾아가면 아무래도 그 놈과 크게 싸워야할 줄로 압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인데 어찌 가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 놈은 가만 둬서는 안 됩니 다. 저희한테 맡겨 두십시오. 그리고 어르신께선 길만 가르쳐 주십시오. 하면 뒷일은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신선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나도 언제부터 결심한 바가 있소이다. 한두 번은 놈을 피할 수 있다지만 끝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난 언제든 한번은 사생결단을 하기로 진작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놈 충피가 우리 집에 뛰어들기만 하면 목숨을 내놓고 죽기살기로 싸울 심산이었지요. 애지중지 키워 온 여식을 그 악독한 놈에게 그냥 내줄 내가 아닙니다."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에선 분노의 빛이 어른거렸다. 다섯 사람은 묵묵히 노인의 거동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튿날은 이곳의 장날이었다. 단지흥과 그의 시위 넷은 노인의 말대로 저잣거리에 나가서 충피 네 마차를 기다렸다. 그들은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윽고 한 식경쯤 넘었을 때 해골 바가지니 도깨비 화상을 잔뜩 그려 붙인 마차 한 대가 장거리로 달려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차가 나타나자 벌써부터 아우성을 치며 피해 달아났고, 진작에 혼이 나가 한 발자국도 못 떼고 그 자리에 와들와들 떨고 선 이도 있었다. 마차는 저잣거리까지 내처 달려와 멈춰 섰다. 이내 한 사람이 풀쩍 뛰어내렸다. 그자의 모습을 보고 사대 시위는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곳 사람 들이 충피네 석굴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도깨비라고 한다더니 정말 도깨비 형상 그대로였다. 목은 몇 번이나 쭉쭉 잡아당겼다가 퉁겨 놓은 것마냥 살가죽이 질질 밀려 늘어졌고, 낯가죽에도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얼기설기 한데 얽혀 있었는데 거기다 곰보 자국마저 콩마당같이 어지러이 얽죽얽죽해 더럽고 망측하기가 목불인견이었다. 그런가 하면 말라 비틀어진 다리는 길기가 한정이 없어 마치 새 다리 같았다. 추물도 천하에 저런 추물은 없으련만 그는 오히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양 삐뚜룩하니 서서 사람들을 보고 징그럽게 웃음을 흘렸다. 시끌벅적하던 저 잣거리는 쥐 죽은듯이 고요하고 누구 하나 찍소리도 못했다. 놈은 미친 듯이 한차례 앙천대소를 하더니 늘어진 턱주가리를 주억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어째서 날 보더니 갑자기 입들이 붙었느냐? 우리가 너희들한테 무슨 행패라도 부린단 말이냐!"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꼭 얼빠진 사람처럼 입가를 씰룩거리며 가까스로 웃는 낯을 보이려 애썼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옴짝달짝을 못하자 놈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지껄여댔다. "내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주지. 우리 동주( 主)님께서 또 색시감을 고르고 있다. 그러니 어느 집에 예쁜 색시감이 있는지 어서들 말해 봐. 동주님께 시집가면 팔자를 싹 고칠 테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느냐." 오늘은 또 어느 집 처녀가 재앙을 당할지, 사람들은 입도 달싹 못하고 걱정스레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구의 머리 위로 그 화액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놈은 거만스레 한번 휘둘러보더니 천천히 마을사람들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는 연신 괴상한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입가에선 침이 질질 흘러 나왔다. "전번에 시집간 그 계집은 이미 동주님이 우리 동에 있는 이죽(二竹)에게 하사하셨지.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굉장히 예쁜 처녀애를 골라잡아야겠는데……. 실인즉 또 이번에도 동주님께서 싫증이 나시면 그땐 내 차례거든. 그러니 오늘은 내 색시를 고르는 것이나 진배없잖은가!" 놈은 미친 듯이 낄낄 웃어대더니 이번에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들 듣거라. 전번에 네 놈들이 나를 골짜기에 처넣는 바람에 난 하마터면 산 채로 짐승 밥이 될 뻔했다. 다행히 동주님께서 구해 주셔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다마는 내 아직도 그 원수를 못 갚고 있다. 잘 알아듣겠느냐?" 마을 사람들은 더욱 오금을 못 펴며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낮추 꺾었다. 행여라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 도깨비 같은 사내는 싸늘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는 대자리 점포 주인 영감을 발견하자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봐, 영감! 영감 집에 예쁜 계집애가 하나 있다던데? 출가도 안 했고? 그런데 왜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마냥 가만있는 게야! 어디, 내가 직접 좀 봐야겠다. 정말 소문대로 예쁘면 오늘 밤이라도 영감은 잔치 술을 받아먹을 수 있다구!" "어허, 이 사람! 안됐네그려. 우리 애는 자네보다도 추물이라네." 노인은 의외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으면서도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뭣이 어째? 이 노인네가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단단히 부었어! 어서 계집을 내 앞에 대령햇! 안 그랬다간 오늘이 영감 제삿날이 될 테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어서!" 그러자 영감의 아들인 젊은이가 대들었다. "우리 누이동생은 이미 출가했소! 그것도 모르시오?" 사내는 젊은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히죽 웃었다. "시집을 갔다구? 흥, 그걸 내가 왜 모르고 있었을까? 도대체 누구한테 시집을 갔을까?" 젊은이는 사내의 물음에 미처 대답을 못하고 뒤에 있는 단지흥 일행을 힐끔 돌아보았다.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은 저 사람들이 안 보이오? 이분들은 성안에서 오신 귀한 손님들이신데 우리 누이는 바로 저기 저분에게 출가했소." 젊은이는 얼떨결에 나무꾼을 가리켰다. 나무꾼은 너무나 뜻밖이라 자기도 모르게 아니라고 하려다가 단지흥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급히 말을 삼켜 버렸다. 저 사내가 또 어쩌는가 두고 보자는 뜻이었다. 사내는 대번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단지흥 일행을 아래위로 ㅎ어보았다. "아니 그 처녀가 결혼을 했다면 이 어른이 왜 모른단 말이야, 엉?" 원래 이 사내는 오래 전부터 이 집 처녀에게 눈독을 들여 왔었다. 그리하여 노심초사 이 처녀를 예의 주시해 왔는데 그 처녀가 시집을 갔다는 소리는 도통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속이기만 해 봐라. 그때 가선 어찌 되는지 내 본때를 보여 주리라!' 사내는 속으로 쌍심지를 돋우며 나무꾼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 성안에서 왔다고?" 사내는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나무꾼은 군말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사내는 시뜻해서 뇌까렸다. "성안의 놈들은 죄다 오만방자하니 몹쓸 놈들이야. 전번에 우리 동주님이 갔을 때도 성안 놈들이 불손하게 굴어 단단히 노하셨다구. 그래서 성안 놈들만 만났다 하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사내는 코방귀를 킁킁 뀌더니 나무꾼을 똑바로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그래 그 계집하고 잠이나 자 봤냐?" 출신이야 어떻든 나무꾼은 지금은 대리 고관이라 새 다리 같은 자식한테 이따위 짓거리를 당하자 화도 나고 수치스럽기도 하여 낯이 벌게졌다. 그러느라고 그가 더듬더듬 대답을 못하자 사내는 더욱 의심이 나서 다그쳤다. "어서 대답해! 잤어? 안 잤어?" 그러면서 놈은 칼을 쭉 뽐아 나무꾼의 가슴에 쓱 들이댔다. 나무꾼은 급히 단지흥을 돌아보았다. 단지흥이 허락만 하면 이 따위 놈은 단번에 요절낼 참이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할 수 없이 나무꾼은 무서워서 벌벌 떠는 척하며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소인은 이 고장의 예법을 모르고 그만 이 집 따님과 혼례를…… 혼례를 갖추고……." 그 말에 마을사람들은 또 키득키득 웃었다. 이 고장의 처녀, 총각은 자고로 뭐 별나게 혼례를 갖추는 법도 없이 산속 아무데서나 화톳불을 피워 놓고 몸을 섞으면 그것이 바로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딱히 혼례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혼례였다. 그러니 보통 누가 결혼했고 하지 않았고는 당사자들이 말하기 전에는 남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웃음 소리가 차츰차츰 잦아들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온다, 온다, 저기 온다……." 단지흥이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처녀 하나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바로 대자리 파는 점포 집 딸이었다. 그녀는 이미 만이족(蠻異族)들이 결혼한 표시로 쓰는 꽃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웃사람들 앞으로 사뿐사뿐 다가오더니, 나무꾼의 손목을 잡아 끌며 방긋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요. 어서 오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나는 몸을 한 번 씻고는 내다보고 또 한 번 씻고는 또 내다보고……. 아무리 기다려도 어디 와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처녀는 낯을 붉히며 들릴락말락 낮은 목소리로 계속 나무꾼에게 속살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비록 뒤의 말은 똑똑히 듣지 못했어도 추측만으로도 그 말이 무엇인지 능히 짐 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옆구리를 찔러 가며 쿡쿡 웃었다. 이제 새다리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을 덮쳤던 그 공포스런 분위기는 서서히 가시고 있었다. 누군가는 완전히 긴장이 풀려 떠들썩하게 소리까지 쳐댔다. "어서 가시오, 어서 가. 가서 아래위를 싹싹 한 번씩 잘 씻고 둘이 꼭 껴안고 한바탕 재미를 보시라구!" 그러자 사람들은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한 사람, 새 다리 사내만이 노기등등하게 나무꾼과 처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부르짖었다. "좋다, 이 년아! 네 년이 씻고 내버린 세숫대야라도 동주님은 마다 않을 거고, 네 년이 먹다 버린 사과라도 마다 않을 것이니 잔말 말고 어서 마차에나 올라!" 그 순간 웃음 소리는 싹사라지고,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입을 꾹 다문 채 처녀와 나무꾼 그리고 성안에서 온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동주 충피는 형편없는 호색한이었다. 그는 무예 하나만 믿고 이곳 구구십팔동(丸溝十八端)을 자기의 세습지로 삼아 어느 처녀든 마음에 들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만약 처녀네 집에서 피해 달아나면 어디까지라도 쫓아가 온 식솔들을 까마귀도 먹기 싫어할 만큼 끔찍하게 죽여 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어쩌지 못하고 그저 행여 심기라도 건드리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이날 이때껏 살아온 것이었다. 원래 이 새 다리 사내는 이들이 충피라는 말만 듣고도 오금을 못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무꾼이 그 무슨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자 적이 의아해졌다. 이윽고 단지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네 동주는 언제나 이런 패악만 일삼소?" 사내는 잘생긴 사람만 보면 공연히 심술이 나는지라 단지흥을 보자 대번에 두 눈을 뚝 부릅떴다. "뭐? 어디서 그따위 말버룻이냐? 넌 누구냐? 대체 어디서 굴러 온 놈인데 함부로 주둥아리질이야. 동주님 독주(毒酒) 맛을 좀 보고 싶어?" 이 구구십팔동에서 충피는 여간해서는 좀 독을 쓰지 않고 대신 독주를 썼다. 그나마 어슷비슷한 적수가 되어야 좀 독을 쓰지, 자기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여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애써 만든 좀 독을 쓸 필요가 하등에 없었다. 그건 그야말로 허투루 낭비하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새 다리 사내는 지금 영문도 모르고 고작 독주로 단지흥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네 동주가 아무리 살인마귀라 하더라도 도리는 지켜야 할게 아니오? 이미 출가한 새 색시를 억지로 빼앗아 가는 건, 그래 어디서 배운 수법이오? 그건 강도 짓이 아니오?" 새 다리 사내는 흠칫 놀랐다. 이때껏 자기 앞에서 이렇듯 당당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자들은 어딘지 달랐다. 그는 흘끔 이 다섯의 기색을 살폈다. 이들에게서는 긴장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럭 의심이 들었다. '대관절 이자들은 누구지? 성안에서 온 놈들이라했는데……. 전번에 동주님이 성안에 다녀와서 심기가 좋지 않아 야단이더니 이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 아냐? 이자들이 진짜 동주님의 적수 들이라면 이거 조심 해야겠는걸…….' 새 다리 사내는 눈알을 뱅글 돌리다가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모두들 듣거라. 동주님께서는 처녀 하나를 골라 오늘 밤 화톳불을 밝혀 놓고 재미를 보려 하신다. 한데 네 놈들이 이렇게 방해를 놓다가는 크게 후회하게 될 줄 알아라!" 그는 성이 나서 붉으락푸르락하고 섰더니 홱 돌아서서 돌아가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야단났는걸. 저 놈이 저대로 돌아가는 날엔 이 마을에 날벼락이 떨어질 텐데. 모르긴 몰라도 이 마을 전부를 도륙내 피바다를 만들고 말지.' 마을 사람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서로들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가 개중 몇 사람이 간신히 용기를 내 쭈뻣쭈뼛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거머잡았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서로 상론하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미리성을 내시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 마을에 어디 예쁜 처녀가 저 처자 하나뿐이겠습니까? 저 처녀는 이미 시집을 갔다고 하니 다른 처녀를 고르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새 다리 사내는 더욱 시뜻해졌다. '흥, 네 놈들이 내가 동주님한테 일러바칠까 봐 무서워 이러는 모양이지만 네 놈들은 한번 호된 맛을 봐야 한다. 그래야 이 구구십팔동의 주인이 누군지를 잊어버리지 않지, 내 동주님을 찾아가 단단히 고해 바쳐야겠다. 동주님이 직접 나서서 이 성안 놈들을 중독시키면 이 놈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될 게다. 이 성안 놈들을 능지처참을 해서 이 고장 놈들 이 꿈에도 이 놈들 송장을 볼까 두렵게 만들어 놔야겠다.' "흥, 네 놈들이 내 말을 안 듣고 그처럼 뻗대니 나도 동주님한테 고해 바칠 수밖에 별도리가 없지 않느냐!" 놈은 이렇게 뇌까리고는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을 홱 뿌리치고는 마차를 몰아 정하니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마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만 쳐다보고 있다가 냉랭히 표정을 굳히며 단지흥 일행을 똑바로 꼬나보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좁혀 들며 그들을 에워쌌다. '모두 이 다섯 사람 탓이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온 마을이 날벼락을 맞게 됐다. 이제 충피가 보복하러 내려오면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선 이 다섯을 내빼지 못하게 해야겠다. 이 다섯을 잡아두어야 우리도 변명할 말이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정작 다섯은 내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충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마을은 또다시 괴괴한 적막에 잠겨 들었다. 아이들마저도 다가올 재난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찍소리도 못했다. 마을엔 죽음 같은 적막이 흘렀다. 단지홍은 고개를 젖히더니 미소를 띤 채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때 갑자기 무거운 침묵을 깨며 처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왜들 이러고만 계세요, 빨리 도망가지 않고. 어서 가세요, 어서 가! 그 놈은 악마예요.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니까요. 어서 피하세요, 어서요!" 처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없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처녀가 아무리 울며불며 야단해도 다섯을 에워싼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비켜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