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18편 (18/66)
"소씨 어른, 안녕하십니까?"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소씨 거렁뱅이는 주인의 뒤통수라도 두드리듯 녹옥죽봉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한 가지 요청이 있네. 내가 다시 와서 주방일을 보고 싶은데 받아 주겠나?" 주루의 주인은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고 어디로 피해 버리는 건데, 하고 후회하였다. 소씨 거렁뱅이가 주루에 있으면 다시 사람들이 찾아와 난리를 칠 텐데 그러면 홍안루는 끝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주루 주인은 어린애 어르듯 조심스레 말했다. "홍안루같이 형편없는 작은 주루에 오셔서 무슨 고생을 하시겠다고 그러십니까? 그같은 재주로는 얼마든지 좋은 데서 일할 수 있으실 텐데요."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으로 땅바닥을 탕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바닥이 뺑 뚫렸다. "내 보기엔 여기도 좋아. 내 재주가 모자란 것 같으면 재주가 모자란다고 말할 것이지 무슨 가당찮은 소린가? 품삯이 과하다면 그깐 은자 몇 잎 내가 적게 받으면 될 게 아닌가?" 소씨 거렁뱅이가 언성을 높였다. 주인은 좋은 말로 구슬려 소씨 거럼뱅이를 돌려보낼 작정을 했으나 소씨 거렁뱅이는 성을 버럭 내며 한사코 홍안루에서 주방일을 하고야 말겠다니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은 얼굴에 속 좋은 웃음을 담고 여전히 소씨 거렁뱅이를 구슬리려 들었다. "아이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르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우리 주루의 사정이 지금 여의칠 않아서, 그러다가 요리사님의 명성에 누가 될까 염려돼서 그러는 거지요." "그 따위 말은 듣기 싫네." 소씨 거렁뱅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저 날 받아 줄지 말지만 딱 부러지게 얘기하라구!" 기실 주루 주인도 만만치는 않은 인간이었다. 그는 어차피 소씨 거렁뱅이의 비위를 거슬린 바에 끝까지 버텨 보기로 작정했다. "아무래도 어른께선 다른 곳을 택해 찾아가는 것이 피차 좋을 성 싶습니다." 갑자기 소씨 거렁뱅이가 목을 젖히며 크게 웃었다. "악한 짓을 안 하면 악한 놈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더니 정말 그런가 보군. 주인장, 내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주점 주인은 그제야 소씨 거렁뱅이의 손에 들린 물건을 찬찬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새파란 옥으로 만든 막대기인데 거기에는 아주 정묘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녹옥으로 만든 지팡이로군요." "주인장 눈썰미가 그만하면 괜찮구먼. 맞았어. 이건 녹옥죽봉이지. 이 녹옥죽봉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 아나?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지. 용처가 두 가지라, 하나는 개를 단도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부르는 것인데, 천하의 개들, 살찐 개, 여윈 개, 비루 먹은 개, 사냥개 할 것 없이 이 녹옥죽봉에 맞았다 하면 어느 것 하나 살아남지를 못한다 이거야. 그리고 이 녹옥죽봉을 들고 사람을 부르면 천하 개방 제자들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을 못하고 모두 모여든다 이거야." 주루 주인은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런 소리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를 갸웃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을 이었다. "전번에 개방 10대 장로가 홍안루에 와 좀 번거롭게 굴었다고 주인장이 나를 내보냈었지만 이번엔 만일 나를 홍안루 요리사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어. 내가 이 녹옥죽봉을 들고 문앞에 있는 거렁뱅이를 한번 부르기만 하면 반시간도 못 되어 이 홍안루 위아래층 앞뒤 뜨락이 모두 우리 거렁뱅이 천하가 될 텐데 어찌 생각하나?" 주루 주인은 그만 얼굴이 울상이 되어 버렸다. 정말 이 소씨 거렁뱅이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 천하 거렁뱅이들이 몽땅 몰려드는 날이면 홍안루는 그대로 망할 것이다. 주루 주인은 하는 수 없이 땅 꺼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글쎄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어쩌겠습니까? 이 누추한 홍안루에서라도 일하시게 해 드려야지요." 소씨 거렁뱅이는 대뜸 회색이 만면하여 두 손을 모아 쥐고 읍까지 하였다. "고맙네, 고마워." 그는 당장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향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신명이 나서 주방 안에서 한창 솜씨를 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주 소중한 물건인 녹옥죽봉도 부뚜막 한쪽에 되는대로 세워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싱글거리는 품이 홍안루의 요리사 일이 개방 방주 자리보다 몇 갑절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때였다. 주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하나는 사개 정원이고 다른 하나는 소미타 추우였다. 소미타가 웃으며 말했다. "방주님께 아뢸 일이 있어 왔소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다짜고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만 가만. 내가 그럴 새가 어디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는 걸 보지 못하나. 여하튼 우선 누각 위에 올라가 앉아서 술이나 몇 잔 마시고 있으라구. 이따 객이 적어지면 내려와 나를 다시 찾게나." 그러나 사개 정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느 놈이 개방 장로를 둘이나 죽였는데 신임 방주님께서 조처를 해야 할 게 아닙니까?" "뭐? 누가 죽었다고?"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서 장로와 제갈 장로님이 죽었습니다." 사개 정원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주걱을 옆에 있는 요리사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어느 놈의 소행이지?" "우리도 모릅니다. 아무튼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여아 아씨까지 죽였습니다." "여아 아씨가 누구야?" "미운산 방주님의 여인입지요." 소미타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 둘이 집법장로가 아닌가? 그러니 자네들이 가서 그 흉수를 알아 오게. 알게 되면 나한테 알리게나." 사개와 소미타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개방 방주라면 개방의 대소사를 모두 관여하고 처리해야 하는 법인데 이런 중대한 일까지 남에게 미루어 버린다면 그게 무슨 방주인가? 그러나 그들은 감히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소씨 거렁뱅이는 지금 일대제자가 아니라 개방의 방주이다. 그러니만큼 소씨 거렁뱅이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소씨 거렁뱅이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와 둘이 한동안 의논을 하고는 하는 수 없이 부하들을 풀어 수소문하게 했다. 소씨는 부뚜막 앞에서 바삐 몸을 놀리며 방금 소미타와 사개가 와서 하던 말을 머리에 되새겨 보았다. '두 장로를 죽이고도 또 미운산의 여인까지 죽였다고? 왜 미운산의 여인까지 죽였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개방하고 원수를 졌다면 개방 장로를 죽이면 그만이지 여아 아씨까지 죽일 건 뭔가?' 이때였다. 심부름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요리사님, 손님 한 분이 강산이개 요리를 청합니다." 그러나 지금 소씨 거렁뱅이는 강산이개 같은 걸 만들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개방의 일이 염려되어 밖으로 나가 볼 참이었다. 계속해서 심부름꾼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화가 났다.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강산이개를 청할 게 뭐야?' "아직 멀었습니까요? 빨리 음식을 내놓라고 야단들인뎁쇼!" 심부름꾼이 다시 재촉했다. "내 즉시 해다 줄 테니 좀 가만있으라고 해라!" 소씨 거렁뱅이는 이렇게 소리치고 재료들을 갖추어 놓고 강산이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속언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서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 소씨 거렁뱅이는 마음 급하여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강산이개를 처음 먹어 보는 사람들이라면 음식이 되었는지 어떤지 알 게 뭐냐?' 소씨 거렁뱅이는 평소와는 달리 강산이개의 맛이 좀 덜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심부름꾼을 불렀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그 강산이개를 가지고 누각 위로 올라가자마자 욕지거리가 들려 왔다. 놈들은 홍안루의 요리사는 물론 홍안루 주인에게까지 모조리 욕을 해댔는데 그 욕지거리는 점점 더 거칠어 졌다. 그 바람에 다른 주객들은 겁이 나서 모두 슬슬 피해 가 버렸다. 이에 놀란 주루 주인이 황황히 올라가 보니 흉악하게 생긴 세 사람이 앉아서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손님들께서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신지요? 잘못된 일이 있으면 널리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인이 걱정스레 말하자 세 사람 중 까까머리를 한 자가 사납게 물었다. "이 홍안루에 제일 이름난 요리가 강산이개 맞지?" "그렇습니다만……." 주인은 대답을 하면서 심부름꾼에게 어서 소씨 거렁뱅이를 불러 오라는 눈짓을 하였다. 누각 위에 올라온 소씨 거렁뱅이는 첫눈에 벌써 이 세 놈이 좋지 않은 놈들임을 알아보고 눈길이 매서워졌다. 까까머리가 강산이개 접시를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소씨 거렁뱅이지?" "그렇다." 소씨 거렁뱅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네가 뭐 거렁뱅이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녹옥죽봉인지 뭔지를 들고 다닌다면서?" 까까머리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대답 대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소문에 의하면 강산이개가 아주 대단한 요리인 것 같던데 막상 와서 먹어 보니 순전 엉터리구나. 이런 형편없는 잡탕으로 사람들을 속이다니, 이래 가지구 계속 장사를 해먹겠느냐? 그래, 이게 그 잘난 강산이개라구? 어디 네가 맛 좀 봐라. 강산이개 맛이 어떤지?" 까까머리는 강산이개 접시를 젓가락으로 집더니 소씨 거렁뱅이 면상에 대고 홱 집어 던졌다. 소씨가 코웃음을 치며 슬쩍 한 손으로 그 접시를 받아 들었다. "은자 석 냥이나 들인 요리를 먹지 않고 함부로 내던지다니, 거 너무하는구만." 소씨 거렁뱅이는 웃으면서 접시를 척 받쳐들더니 몸을 한바퀴 뱅그르 돌아 제자리에 내려섰다. "강산이개 맛을 모르는 모양인데 내 톡톡히 맛을 보여 주지." 소씨 거렁뱅이는 탁자 위에서 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접시 위의 고깃덩이 열 개를 한 번에 한 칼씩 얇게 베어 냈다. 그는 베는 족족 세 놈의 면상을 향해 집어 던졌는데 종잇장처럼 얇은 고기 조각들은 주름살 하나 없이 놈들의 얼굴에 착착 들러붙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손을 놀리며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이건 돼지고기…… 이건 꿩고기다……. 이건 양고기고…… 이건 개고기다……." 세 놈은 하나같이 크게 놀랐다. 보통 무공으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들은 요리를 트집잡아 소씨 거렁뱅이를 혼내 줄 작정을 했던 것인데 생각 밖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무공이 자기들보다 높은 것을 알고 잔뜩 기가 죽었다. "우린 안산(雁山) 삼귀(三鬼)다." 까까머리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담량이 있으면 오늘 저녁 수림으로 오거라. 거기서 한판 겨뤄보자."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고기 조각을 떼어 낼 생각도 못하고 일행들과 함께 서둘러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소씨 거렁뱅이는 주루 주인을 한번 힐끗 보고는 곧장 주방으로 가서 요리사들에게 일을 맡기고는 홍안루를 나왔다. 밤이 깊어 갔다. 먼 곳에서 야경꾼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불조심하시오 불조심!"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미운산과 운낭은 넓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미운산은 운낭을 보며 말이 없었고 운낭은 머리를 길게 풀어 내려 그 까만 머리칼로 미운산의 목을 부드럽게 감으며 정답게 소곤거렸다. "방주를 그만둔 건 잘한 거예요. 그간 방주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뭐해요? 공연히 마음만 복잡하지. 그나저나 아래를 못쓰게 되었으니 그게 무엇보다 답답한 일이군요. 여아도 떠나가고……. 당신은 여아가 떠난 걸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죠?" 미운산은 운낭의 희고 풍만한 젖가슴을 들여다보며 두 젖무덤 사이의 계곡을 묵묵히 쓰다듬기만 했다. 운낭의 유방은 여아의 유방보다 풍만하고 탄력이 있었다. "여아 생각을 하시는군요." 운낭이 소곤거렸다. "그래……, 여아는 날 떠나지 말아야 했어." 미운산은 한숨을 지었다. "당신이 이해하셔야죠. 여아는 나하곤 달라요. 당신이 성할 때도 여아는……." "그만해!" 미운산이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그래 운낭은 어떤가? 자네의 속마음을 실토해 봐. 나 같은 병신과 허구한 날 이렇게 밤을 새우는 게 운낭도 진저리가 나지? 솔직히 말해 보라구!"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구요." 운낭은 미운산의 가슴에 얼굴을 얹으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여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난 누구보다 잘 알아요. 여아가 떠난 걸 못내 서운하게 여기신다는걸. 그러면 못 가게 붙들면 되었을 것을 죽이긴 왜 죽인단 말이에요? 왜……." 미운산은 괴로운 듯 다시 역정을 냈다. "듣기 싫다! 너도 떠나고 싶으면 떠나! 계집들이란 다 한가지야! 맘에도 없는 소리로 날 우롱하지 말고 떠날 테면 어서 떠나라구!" 운낭의 울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당신이 절 데려 왔잖아요? 난 당신의 여자인데 가긴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난 못 가요. 당신의 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떠나요. 이런 당신을 두고 어떻게 가요. 난 못 가요. 못 간다구요……." 운낭의 울부짖음에 미운산도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내가……." 운낭이 와락 미운산을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둘은 서로 얼싸안은 채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미운산이 운낭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맥없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은 자네를 망치는 일이야. 내 걱정은 말고 자네도 어디로든 떠나게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런데 그럴려면……." 미운산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운낭이 뭔가 이상한 기미를 느끼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저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으신 거죠?" 운낭이 다그쳐 묻자 미운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이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하는 수 없군 그래."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자네는 나를 떠나되 여아처럼 떠나지는 말아. 그렇게 떠나다간 여아처럼 죽게 될 테니까. 떠나려거든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떠나버려." 미운산은 말을 마치고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여기 있을 거라구요." 미운산은 말없이 운낭을 바라보았다. 여아의 일로 상심한 그는 운낭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잠시 후 운낭은 미운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들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숨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미운산은 자신의 목을 감은 운낭의 머리칼을 풀어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깊게 잠이 든 운낭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미운산은 한동안 운낭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짓고는 다리를 끌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미운산은 힘겹게 어느 밀실에 이르렀다. 밀실 안에서는 한 젊은 여인이 꼭두각시들을 갖고 놀고 있었는데 얼굴은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너는 오빠, 너는 누이동생, 아니, 아버지와 딸이 좋겠다……." 미운산이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하니 그제야 여인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바로 미립이었다. 미립이 미운산을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머나, 아버지가 오셨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난 아버지가 웃을 때가 젤 좋더라. 웃어 봐요, 어서!" 그녀의 애교에 미운산이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립이라는 여자, 미운산의 분부를 받고 홍칠도 불러오고 소씨 거렁뱅이도 불러오던 그녀는 자신이 미운산의 딸이라고 했었다. 미립은 미운산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와락 미운산의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심기가 영 좋질 않아 보이시는데?" "무슨. 심기 나쁠 턱이 없지. 너를 만나면 난 즐겁기만 한데?"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부녀지간은 아니었다. 미립은 미운산의 목에 매달려 말없이 그에게 음란한 눈길을 보냈다. 미운산은 그녀의 젖가슴이 뭉클하니 눌러 오는 느낌에 숨이 가빠졌다. "이…… 이 손을 놓으라구……." 미운산이 가까스로 말했다. 미립은 씩 웃어 보이고는 천천히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백옥같이 하얀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알몸이 고혹적으로 드러났다. 미립의 모습은 너무도 요염했다. 그녀는 잘록한 허리를 배배 꼬며 앵두 같은 입을 열었다. "남들은 내가 당신의 딸인 줄로만 아는데 지금 우리 둘의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놀랄까요? 그래 당신은 무섭지 않아요?" "무섭긴 왜 무서워?" 미운산이 나직이 대답했다. "무섭지 않다고요? 당신이 병신이 아니고 당신의 그 다리도 독해당한 것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이 지금 독해를 당하여 병신이 된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까 봐 겁나지 않아요. 강호의 영웅이, 개방의 방주가 이런 짓을 한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텐데요?" 미립의 말에 화가 난 미운산은 사나운 기색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쳐 죽일 듯한 기색이었다. 미립도 표독스러운 눈길로 미운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미운산이 갑자기 요란하게 웃어댔다. "웃긴 왜 웃어요?" 미립이 여전히 표독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네 걱정이나 하라구. 그래 네가 미립이 아니고 조정에서 보낸 어린 갈보년이란 걸 남들이 알면 넌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리냐? 네가 개방에 기어든 세작(細作)인 줄 개방 삼십만 형제들이 알게 되는 날엔 어떻게 될까? 한 개 분타의 사람들만 모여들어도 너 같은 건 그냥 육장이 되고 말걸? 그 참혹한 광경을 말해야 알겠느냐?" 미운산이 언성을 높였다. "그런가요?" 미립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미운산의 눈길은 어느새 분노로부터 색탐과 음욕의 눈길로 바뀌었다. 미운산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여인의 젖통을 와락 움켜쥐더니 사정없이 비틀었다. "방주님, 왜 이러세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야? 네가 무슨 내 딸이냐? 내 딸을 어쨌느냐? 진짜 내 딸을 데려와……." 미운산이 거칠게 미립을 침대에 쓰러눕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운산과 미립은 땀이 흥건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좀 전의 그런 매서운 눈길들은 물론 아니었다. 미립이 팔을 벌려 미운산을 끌어안고 한 쌍의 젖무덤을 미운산의 가슴에 지그시 눌러 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정말 내 아버지가 되어 주지 않을래요? 그러면 난 사랑도 더 받고 응석도 더 부릴 수 있을 텐데. 안 그래요?" 미운산은 지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지 뭐. 넌 내 딸, 내 미립이다……." 갑자기 미운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어올랐다. "미립…… 미립아……." 미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군. 눈물을 백 날 흘려 봐요. 딸이 돌아오나. 그런 꿈은 꾸지도 말아요." 그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매섭게 말했다. 미운산은 잠자코 계집을 쏘아보았다. '네 년이 내 딸을 어디다 치우고는 내 딸로 가장하여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하신을 못쓰는 것처럼 가장하게끔 나를 협박하여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게냐? 좋다. 내 딸 미립을 찾을 때까지만 참아주마. 미립을 찾기만 하면 조만간에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이 개방 방주의 재주가 여인들과 살을 섞는 데만 있지 않다는 걸 꼭 보여 주리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평소 미운산의 뒤에 서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을 천진하게 웃곤 하던 그녀가 가짜 미립이리라고 누가 감히 의심이나 해 봤겠는가? 미운산은 망연자실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미운산을 마주하고 앉아 그의 알몸을 손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 만지기도 하던 손이 하복부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사타구니 사이의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미운산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재미있다 는 듯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호……. 아래는 든든한데 그저 담이 작은 게 탈이라니깐요." 미운산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다시 방주 자리를 차지하려면 힘이 좀 들텐데……. 먼저 내가 지금 방주로 내세운 소씨 거렁뱅이를 죽여 주지요. 그리고나서 홍칠이까지 없애 치우면 다른 것들이야 염려할 게 없겠죠?" "……." "지금쯤 안산 삼귀가 소씨 거렁뱅이를 없애 치웠는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에 미운산이 툭 내뱉었다. "당치도 않은 소리. 안산 삼귀가 소씨를 없애 치워? 도리어 소씨한테 맞아죽지나 말라지. 사람을 잘못 내세웠네." 그러나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느린 걸음걸이로 숲에 당도했다. 이곳은 홍안루 앞에 있는 한 수림으로 여름이면 과일들을 난전에 내어 놓고 팔곤 했다. 이미 날이 저물었는지라 인적이 끊기고 날짐승 한 마리 날지 않아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숲에서 세 사나이가 소씨 거렁뱅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소씨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