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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14편 (14/66)

2026-09-29 08:03:11 조회 28
사내애는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말 명심해야 한다?" 처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갈게, 누나." 사내애가 과감히 몸을 돌렸다. 그는 몇 발짝 걸어 나가다가 고개를 다시 누나를 쳐다보았다. 처녀가 얼른 사내애를 외면했다. 아이는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세 놈은 처녀에게 음탕한 눈길을 던지며 능글맞게 웃어댔다. "혈도가 눌렸으니 네 목숨은 이제 우리 손에 달린 거야. 알아?" 거수란 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진정 개방 사람들이라면 의당 날 방주한테 데리고 가서 방주의 처리에 맡겨야 도리이지, 여기서 날 죽인다면 개방에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처녀의 말에 거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아직도 정신이 안 드는 모양이구나. 오늘 밤 우리 셋이 실컷 재미를 본 다음에 널 죽여서 네 시체를 네 기둥서방과 함께 한 침대에 눕힌 다음 이 집에 불을 질러 버리면 그만이야. 그러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신도 모를 거라구. 핫하하……." 놈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처녀에게로 다가들었다. 이때였다. 곁의 놈이 갑자기 그를 잡아당기며 홍칠을 가리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홍칠의 모습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거수라는 놈이 비아냥거렸다. "계집년의 수작도 보통이 넘지. 사내를 얼마나 제멋대로 다루고 싶으면 저렇게 꼼짝못하게 만들어 놨을까? 음탕한 계집년 같으니." 놈은 홍칠이 누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홍칠을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다 죽어 가는 몰골인데 내 깨끗이 저 세상으로 보내 주지. 이 침대는 오늘 밤 우리 셋이 쓰기에도 비좁으니까!" 그는 한바탕 웃어대고는 홍칠의 이마 위로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제8장 애증의 인연 거수가 손을 치켜 들어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치려고 하자 홍칠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속으로 탄식했다. '이제는 끝장이로구나. 엉뚱하게 이런 놈들 손에 죽게 되다니…….' 그런데 세차게 내려오던 손바닥은 홍칠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딱 멎어 버렸다. 순간 거수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며 온몸이 나무처럼 꼿꼿이 굳어졌다. "나무아미타불……." 문득 염불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에서 메아리치듯 들려 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서른 살 가량의 젊은 공자 하나가 문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무늬가 아롱지고 색깔이 현란한, 일견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보이는 호화로운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유난히 크고 또렷했다. 눈빛이 어찌나 위엄 있고 무서워 보이는지 거수 일행은 대뜸 이 공자가 보통 범속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공자의 뒤에는 또 네 명의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모습들이 저마다 달랐다. 횐 바탕에 검은 무늬가 그려진 옷차림의 여윈 사람은 길고 넓은 소맷자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일견 글 읽는 선비인 듯했고, 작달막한 키에 몸이 다소 비대해 보이는 한 사나이는 호복(胡服) 차림에 짚신을 신었는데 일견 농군 같았다. 그런가 하면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몸집이 여위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않았으나 떡 벌어진 어깨에 손에는 도끼를 한 자루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첫눈에도 나무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손에 가늘고 긴 막대기를 하나 쥐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낚싯줄이 매여 있었다. 초립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은 어째선지 거수를 보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등허리가 침으로 쑤셔 대는 듯 아파 오면서 허파, 쓸개, 콩팥 등 내장과 척추가 모두 뻣뻣하게 마비되어 버린 거수는 그동안 연마해 온 무공이 모두 무산되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이러는 거요?"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너희들이야말로 철장방 놈들이 아니냐?" "철장방이고 개방이고 네 놈이 무슨 상관이냐? 우리 손에 죽지 못해 환장했느냐?" 거수는 악에 받쳐 소리치고 부하들을 시켜 공자에게 덮쳐 들게 했다. "나무아미타불……." 공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꿈쩍도 하지 않고 염불만 외웠다. 거수 일행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공자를 후려치려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감히 우리 주인님을 해치려 하다니." 공자 뒤에 서 있던 네 사람이 일제히 공자를 에워싸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거수 일행 중 한 놈이 호복 차림의 사나이를 겨냥하여 칼을 내리치자 호복 차림의 사나이는 긴 피리 하나를 번개같이 꺼내어 칼을 막았다. 피리가 칼에 부딪치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허공에 날려 멀리 떨어졌다. 놈은 그만 혼백이 나간 듯 눈을 흡뜨고 피리 든 서생 타입의 사나이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한편 다른 한 놈은 낚싯대를 든 사나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어부 차림의 사나이는 잽싸게 낚싯줄을 던져 놈의 허리를 걸어 홱 잡아당겼다. 놈은 낚싯줄에 걸린 생선처럼 질질 끌려 오다가는 어느 순간 대들보 위로 휙 던져 올려졌다. 어부는 낚싯줄을 몇 번 흔들어 놈의 허리띠에서 낚시를 빼고는 낚싯줄로 도로 감아 버렸다. "이 망할 놈들아! 어서 나를 못 내려놓겠느냐?" 놈이 대들보 위에서 소리쳤다. 이를 지켜 보던 공자가 천천히 처녀에게로 다가섰다. "아가씨는 누구요? 이자들이 뭣 때문에 아가씨를 해치려는 거요? 처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갑자기 공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여인들의 마음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겉으로만 봐서는 그 속생각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게 여인들이라니까." 그리고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 어쩐지 쓸쓸한 빛이 감도는 듯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속세에 나오질 말아야 했어. 속세에 나와 봐야 이렇듯 마음만 흐려지는걸……." 혼자말로 중얼거리던 그가 문득 홍칠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홍칠은 이 공자를 어디서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은 언젠가 만났던 일속과 흡사했는데, 일속보다는 얼굴이 좀 크고 눈은 작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당신은 혹시 대리 단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신지요?" 홍칠은 있는 힘을 다해 가까스로 물었다. 공자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대리 단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지요?" "난 홍칠이란 사람입니다." 단 공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녀에게로 몸을 돌려 손가락을 천천히 뻗쳤다. 순간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처녀의 눌렸던 혈도들이 모두 풀어졌다. 처녀는 공자에게 읍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단 공자님의 이 은공은 잊지 않겠습니다." "원래는 당신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칠까 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저 세 사람들이 뛰어드는 바람에 우리도 이렇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마치 자기가 처녀의 평안한 휴식을 깨뜨려 놓기라도 한 듯 몹시 미안한 태도를 보였다. 처녀는 천천히 홍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기 바로 앞에 그래도 개방 사람 중에 믿을 수 있던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홍칠이 지금 심한 내상을 당해 곤경에 처해 있지 않은가. 단 공자와 그의 수하 넷은 대들보 위에 던져 놓았던 자를 끌어내려 놈들의 혈도를 모두 눌러 놓고는 조용히 한쪽에 가 앉았다. 잠시 후 방안엔 단 공자의 염불하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명심명불(明心明佛), 내 마음에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을 내가 보았거늘 온갖 사악한 것들은 침노를 못하리라. 마음은 대도(大道)를 향하니 크게 깨달음이 이로부터 비롯되어……." 이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어린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요. 어서 와 보시라니깐요?" "내 말했잖느냐. 난 이제 개방 사람이 아니라고." 한 사나이의 옹글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개방 사람이 아니라니요? 누가 모르는 줄 알아요? 어르신이 개방 11대 장로 중 한 분이시란 걸 난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개방 사람들이 지금 해를 입고 있는데 알고도 모른 체하신다면 전 두고두고 어르신을 원망할 거예요." 아이의 목소리엔 안타까운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난 이미 개방에서 나온 사람이다. 이젠 나하고 개방은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다." "그 놈들이 우리 누나를 죽이려고 해요. 개방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부터 구하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가 답답한 듯 울며 소리쳤다. "난 개방 사람이 아니야. 이 점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야." 사나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아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래, 좋다. 갈 테면 가라! 옥면검객 호심이라구? 이름이 좋다! 네깐 놈이 무슨 검객이냐!" 아이는 울면서 문을 밀었다. 문이 안으로 잠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은 아주 손쉽게 열렸다. 집 안에 들어선 아이는 역시 뜻밖의 정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안은 그가 떠날 때보다 더 어지러워졌고 사람도 다섯 명이나 더 늘어 있었다. 벽을 등지고 앉아 있는 한 공자는 그가 들어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고, 다른 네 사람은 그 옆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정신을 가다듬어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듯했다. 한편 거수네 패거리 셋은 문어귀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는데 보아하니 혈도가 눌린 듯했다. 아이는 급히 집안을 둘 러보다가 침대 옆 걸상에 앉아 있는 처녀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누나!" 처녀가 목이 메어 간신히 한마디했다. "네가…… 네가 왔구나……." 찌뿌둥한 표정으로 문간에 서 있던 옥면검객 호심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몸을 돌렸다. "호 장로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처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호심은 자기를 알아보는 처녀의 말에 놀라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 셋이 자칭 개방 사람이라 주장하면서 저와 동생을 죽이려 했어요. 마침 오셨으니 한번 봐 주세요. 저 사람들이 정말 개방 사람들인가요?" 옥면검객 호심은 말없이 그들 셋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젓더니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람들은 옥면검객 호심이 그들 셋을 요절내려는 줄 알고 긴장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심은 칼끝으로 거수의 털북숭이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수련한 것이 한장(寒掌) 무공임에 틀림없으니 개방 사람은 아니고 십중팔구 철장방 인간일 것이오." 말수 적은 옥면검객이 이렇듯 한 번에 네 마디 이상이나 말을 한다는 것은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옥면검객은 고개를 돌려 단 공자 일행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호심이 놀라 물었다. "대리국(大理國) 황제 단지흥(段智興)이라는 분이 아니십니까?" 대리 황제 단지흥이 천하 최고의 무림 고수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일양지신공(一陽指神功)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대단한 무공이었다. 옥면검객 호심은 얼른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시생이 단 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단지흥은 날카로운 눈길로 옥면검객 호심을 훑어보더니 묵묵히 답례를 하였다. 옥면검객 호심은 단지흥 일행 네 사람에게도 읍을 했다. "대리의 준걸이신 어(漁)·경(耕)·초(樵)·독(讀), 이 네 분의 명성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단지흥 수하 넷도 말없이 답례를 했다. 옥면검객 호심은 이제 거수 패거리를 향해 말했다. "네 놈들 셋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우리 개방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 모양인데 나를 만났으니 참 안됐구나." 옥면검객은 들고 있던 칼끝으로 거수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옥면검객의 이 칼은 일단 뽑았다 하면 하늘에 나는 참새든 바다에 솟구치는 파도든 간에 무엇이든 찔러 꺼꾸러뜨려야만이 직성이 풀렸다. 그러한 그의 칼이 거수의 가슴팍에 막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단지흥의 입에서 긴 탄식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소리에 호심은 들었던 손을 멈췄다. "선생의 그 칼엔 극히 흉한 운수가 깃들어 있는 것 같으니 그 칼을 그냥 쓰는 것은 대단히 상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단지흥의 말에 옥면검객 호심은 적이 놀랐다. 불경에 능통하며 대단히 박식한 대리 황제 단지흥이 자기 검에서 무슨 불길한 징조를 보아 내지 않고서야 섣불리 이런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검객들은 모두 자기 손때 묻은 장검들을 아주 아끼는 법이다. 호심도 마찬가지였다. 호심은 자기 손에 들린 장검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스스로도 칼을 쓰면서 한 번도 흡족함을 느껴 본 적이 없으니 하늘을 기쁘게 하기란 더욱 불가능하지요. 내 마음속에 쌓인 울분도 이 칼로 풀지를 못하고 있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단지흥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 검을 내려놓으시오. 한 10년 그 검을 쓰지 않아야 큰 재앙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호심이 큰소리로 웃었다. "저더러 검을 내려놓으라구요? 검객이 검을 내려놓고도 어찌 산 목숨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호 장로님, 내가 장로님의 검을 보니 불평과 울분이 가득 서려 있는데 그 연고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호심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와 소검 오평 사이에 있었던 일을 대충 들려주었다. "내가 이 칼로 무고한 사람 하나를 해쳤으니 창천이 나를 용서치 않을 겁니다. 암요, 용서하지 않고말고요……." 호심이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단지흥도 한숨을 지었다. 그때서야 호심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홍칠을 발견했다. 그는 깜짝 놀라 홍칠을 향해 물었다. "홍칠이, 어떻게 된건가? 도대체 누가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나? 저 놈들 짓인가?" 순간 홍칠의 머리 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사실 이 세 놈들이 자기를 직접 해친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철장방 무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그들을 살려 두었다가는 나중에 또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생각이 이쯤 이른 그 는 호심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로 이 세 놈이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이 놈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옥면검객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수를 향해 힘을 주어 칼을 푹 내질렀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옥면검객 호심의 검에 거수가 즉사하는 것을 본 나머지 둘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부르짖었다. "단 공자님,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쇼. 제발……." 단지흥은 머리를 숙이고 무심히 염불만 외웠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그였으나 더는 옥면검객 호심을 말릴 수 없었고 세 놈의 소행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호심은 검을 몇 번 휘두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은 두 놈을 모두 요절내어 버렸다. 그런 다음 호심이 처녀에게 말했다. "난 이제 개방 사람이 아니오. 그저 나를 수검(銹劍) 호심이라고 부르든가 아니면 그저 호심이라고 부르시오. 개방과 난 이제부터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었소." 그는 곧 단 공자 일행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단지흥 일행은 잠이 든 듯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홍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황야(段皇爺),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소이다." 단지흥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일속 대사도 홍칠공을 호걸답다고 칭찬하시던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철장방 구천인과 내력을 겨루는데 그 패거리들이 등을 기습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홍칠공의 상처는 내가 치료해 드릴 수 있지만 한나절이 실히 걸려야 합니다. 잠시 후에 내가 치료해 드리리다." 홍칠이 깨어난 것을 본 처녀는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문득 모두들 시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쌀이 있으니 저와 동생이 가서 밥을 지어 오겠습니다." 그녀는 곧 사내애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조촐한 밥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아닌게아니라 몹시 배가 고팠던 단지흥 일행은 체면 불구하고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홍칠은 안타깝게도 젓가락을 집을 기운조차 없어 물끄러미 제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저분을 좀 도와드리렴." 처녀가 동생에게 말했다. "그런 건 여자인 누나가 하는 거지, 무슨 나한테 시켜?" 사내애가 투덜거렸다. "조그만 게 남자 행세부터 하려 들어? 너도 남자 축에 드니?" 처녀가 툭 내쏘았다. 그녀는 홍칠을 바라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가 아무래도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그녀가 밥그릇을 들며 말했다. "몇 숟가락이라도 좀 들어 보세요." 홍칠은 밥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처녀의 성의를 봐서 몇 술 받아 먹어 보았다. 그러나 음식물이 들어가자 창자가 뒤틀리는 듯하며 자기도 모르게 왈칵 토해 버리고 말았다. 내용물은 온통 처녀의 옷자락에 튀어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홍칠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처녀는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물대접을 들어 홍칠에게 권했다. "밥을 못 잡수시겠으면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세요." 조반을 다 먹고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 단지흥은 수하들에게 분부했다. "홍칠공을 치료하자면 한나절은 실히 걸릴 것 같네. 그런데 이곳은 아무래도 위험이 많은 곳 같으니 자네들 넷은 내가 치료하는 동안 외부인이 얼씬대지 못하도록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넷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단지흥은 이제 처녀와 사내애에게 부탁했다. "두 사람도 밖으로 나가 기다려 주게.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들어와선 안 되네." 단지흥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중히 말하자 처녀도 숙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공자님 말씀대로 따르지요." 그녀는 지체없이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단지흥은 홍칠을 부축하여 똑바로 앉게 하고는 홍칠의 등뒤에 앉으며 말했다. "이 상처는 나만이 치료할 수 있소. 이것을 대리 일양지공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당신의 심맥이 철장공에 의해 크게 상한 상태라 당장 절맥지법(截脈之法)을 써서 심장을 옆으로 좀 당겨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의 심장 위치와는 좀 달라지는데 이게 아주 어렵고 위험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홍칠은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담담히 말했다. "생사는 하늘에 달렸은즉 단황야께서는 마음놓고 법수를 써 보십시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천하에 으뜸가는 절기의 하나로서 그 기교가 복잡하고 공력이 깊어 여느 장법들은 상대가 안 되었다. 단지흥은 손을 내밀어 우선 홍칠의 심포낙도경맥(心包絡圖徑賑)을 눌러 일양지공의 세찬 힘에 그의 심맥이 상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놓았다. 그는 잠시 후 홍칠의 뒷머리에 있는 옥침혈(玉枕穴)을 누르면서 그 혈을 통해 천천히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한 줄기 큰 힘이 뒷머리의 옥침혈로부터 경추를 지나 심실로 들어갔다가 온몸에 퍼지는 바람에 홍칠은 온몸이 따뜻해지고 가뿐해짐을 느꼈다. 단지흥이 홍칠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무공이 뛰어난 분인데 어쩌다 이렇듯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부상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홍칠은 깜짝 놀랐다. 대리 단씨의 무공이 기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내력을 발산하면서도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말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리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이 단씨 가문의 무학은 중원의 무공에 조금도 처지지 않는구나. 그리고 이 단지흥은 불학(佛學)이 심히 깊은 사람으로 그의 일언일행이 보통사람과는 확실히 다르구나. 이때였다. 단지흥이 문득 탄식조로 말했다. "내가 괜한 말을 물어 보았구려. 이럴 때 다른 생각이 오가면 뜻밖의 일이 생길 수 있음을 깜빡 잊고 말이오. 그러니 이제부터 정신을 가다듬어 단전(丹田)만 지키면서 생각을 집중시키시오." 단지흥도 더는 말이 없이 오로지 내력을 불어넣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홍칠은 온몸이 시원하고 개운해져 갔다. 그는 눈을 감고 점차 망아(忘我)의 경지로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느닷없이 밖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수, 거수! 여지껏 뭘 하고 있는 거냐?" 누군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철장방 무리들이 다시 온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력을 불어넣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홍칠도 잠자코 있었다. "내 말 들으시오. 대리국 사걸이 여기 있으니 할말이 있으면 떠들지 말고 우리 넷한테 말하시오." 대리국 사걸 중 한 사람의 음성이었다. "대리국 사걸이라구? 아하, 그래서 그 계집이 우리 철장방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를 부렸구만 그래? 대리국 단황 나으리가 뒷받침을 해 주고 있다 이거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철장방 방주이신 모양이구려?" 선비 차림의 사람이 묻는 말소리였다. "그렇소, 내가 구천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