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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59편 (59/70)

2026-09-30 18:24:37 조회 20
은근하면서도 매서운 그녀의 눈초리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정녕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다시금 또랑또랑한 노파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잘들 생각해 봤나요? 그쪽에 가서 누가 나설 셈이에요? 셋이 함께 나설 셈인가요?" "내가 나서겠소!" 노래소가 대뜸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노시락이 펄쩍 뛰며 퉁을 주었다. "아 참, 이 친구는 무슨 일에나 욕심을 부린단 말이야!" 노불락도 기세등등하니 대들었다. "자네들은 언제 보나 큰 고기는 제 그물에 넣으려고 설친단 말야. 그러니 난 늘 기분만 잡치는 거라구. 이번만은 결단코 내가 나서야 쓰겠네!" 그러자 한연 사태가 정색을 했다. "화산파의 무공은 시원치 않지만 그들의 계율은 실로 무섭지요. 장문인을 죽이는 자는 어김없이 팔다리가 잘려 뒷간에 처박히고 말 것이에요. 그래도 안 무서워요? 그래, 누가 나설 건가요?" "내가 나서겠소!" 셋은 똑같이 대답했다.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삼로는 한연 사태가 더 할 말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우쭐우쭐 발걸음을 뗐다. 그때 다시금 노파가 발목을 잡았다. "잠깐만!" 셋은 못박힌 듯 다시 그 자리에 섰다. 한연 사태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세 분은 잘 들어 두세요. 누구든지 만약 돼지가 돼서 돌아온다면 이 한연 사태는 늙어 죽을 때까지 그분을 모시겠어요." 삼로는 일순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거야말로 속세의 사람들은 맺을 수 없는 기이한 연분일 것인즉, 한연 사태야말로 절세의 여걸이요 참사랑을 간직한 진짜 여인이 아니겠는가? 그들 셋은 이렇듯 한연 사태와 도저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연분으로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삼로는 차마 뒤를 돌아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뿐더러 울고 있을 한연 사태의 얼굴을 마주보기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화산에는'한검당(閒劍堂)'이라고 하는 넓고 아늑한 대청이 있었다. 지금은 화산파 두목이 집무청으로 쓰고 있지만 기실 이 대청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들여 있다. 옛날에 화산파에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늘그막에 오묘한 도리를 깨쳤다. 즉, 가장 뛰어난 검술은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검을 조용히 놓아두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검당'이라는 대청을 짓고 그후 십년이고 이십 년이고 장구히 검을 놓아두었다 한다. 그랬더니 천하가 태평해지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화산파 사람들은 검을 놓는 대신 검을 부여잡고 싸우기만 하니 남도 죽이고 자기들도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야 어쨌든 선우순과 그의 깐깐한 마누라는 요즘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저 혼자만 의롭고 정직한 체하던 곽명송도 감쪽같이 죽여 없앴겠다, 귀찮게 잔소리만 늘어놓던 삼로도 알아서 이고암에 가 있겠다. 이젠 정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선우순은 허파에 바람든 사람처럼 온종일 입을 벙싯거렸다. 보다 보다 못해 하루는 그 마누라가 얼마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봐요,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세요. 그 귀신 같은 세 늙은이가 또 기신기신 찾아올지 모르니까!" "허, 괜한 근심! 이 어른이 좋은 꾀를 생각해 두었으니 그런 근심일랑 딱 붙잡아 매라구! 한번 들어 보겠소? 일단 그 한연 사태라는 노파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온단 말야. 그 노파만 볼모로 잡고 있으면 감때 사나운 삼로도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게지 별수 있겠어? 제기랄, 여차하면 그 노파를 죽여 버리면 될 것이니까!" 그때였다. 문득 와르르 기왓장 뒤엎는 소리가 나더니 꼬장꼬장한 삼로가 허공에서 불쑥 떨어져 내렸다. 삼로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길로 매섭게 쏘아보더니 개중 노래소가 성큼 나서며 을러댔다. "선우순, 네 놈이 사형을 모해하고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빼앗은 죄, 오늘 우린 그 죄를 따지러 왔다." 뒤이어 노불락과 노시락도 연달아 한마디씩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녀석이 화산파의 대들보 협객 곽명송을 죽였으니 그 죄 역시 가볍지 않으리라!" "네 녀석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느냐! 그 죄는 일일이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사형과 명송을 모해한 죄는 기어코 보응을 받으리라!" 선우순은 등골이 서늘했지만 짐짓 목청을 높여 으름장을 놓았다. "호오, 그렇소? 그대들은 화산파의 원로 대신이나 다름없으니 화산파 계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는 보검을 쓱 꺼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한검당의 보검을 보시오. 이 보검의 권위를 거역하는 자는 팔다리 없는 돼지 신세가 될 거야!" 선우순은 여편네와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만 던져 놓으면 고분고분 수그러 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장문님의 명령이니 물러들 가세요!" 선우순 곁에 있던 노파가 대뜸 소리쳤다. "뭐, 장문? 장문은 무슨 개코 같은 장문이야!" 장문 앞이라면 이 삼로도 설설 기었건만 오늘따라 안하무인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화산삼현(華山三現) 초수로 껑충 공중제비를 돌아 선우순 앞에 바싹 내려섰다. 다음 순간 삼로의 시퍼런 검이 무섭게 춤을 추었다. 선우순의 길다란 몸뚱이는 단박에 가로세로 대여섯 토막으로 잘려 버렸다. "아이고, 삼로인지 뭔지 하는 두상들이 장문님을 죽였고나! 이 두상들아,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 줄 모르느냐? 네 놈들은 흉물스러운 돼지가 되고 말리라!" 선우순의 괄괄한 여편네는 화들짝 놀라 금세 눈물 콧물 쏟아 내며 울부짖었다. 순간, 노래소의 날카로운 칼끝이 노파의 입 안을 슬쩍 후비고 지나갔다. 그러자 혀가 뭉텅 떨어져 나가고 비릿한 것이 입 안에 그득 찼다. 그녀는 그래도 삿대질을 해 가며 바락바락 삼로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혀가 잘렸는지라 그저 윽윽거릴 뿐 무슨 허튼소리를 내뱉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돼지는 저 년이 먼저 되는 판이군." 노불락은 낯을 찡그리며 검을 치켜 들어 단칼에 그녀의 두두룩한 모가지를 쳤다. 그때 화산파 무리들이 소란스런 기척을 듣고 모두들 대청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이 그저 놀란 기색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삼로의 조카뻘 되는 후배들인지라 감히 화산파의 세 원로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유독 사납기로 이름난 육사고가 냉랭하게 웃으며 선뜻 나섰다. "세 좌상 어른께서 사람을 죽이시니 감히 막아 나서지는 못하겠으나 화산파의 계율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군요. 화산파 원로들이시니 여러 후배들 앞에서 귀감이 돼야 하지 않겠나요?" 삼로는 어쩐지 한풀 죽어 면구스럽게 육사고를 훔쳐보았다. 비록 화산파의 장문 자리에는 선우순이 앉아 있긴 했지만 화산파의 대소사는 필시 육사고가 참여해야 결판을 내곤 했다. 아무튼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삼로는 그저 멋쩍게 서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 나섰다. 쾌도 악기였다. 쾌도는 침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가 문파를 연 지 백여 년 되도록 강호에서 그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화산파 내부가 화목하고 상하지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소. 한데 오늘에 와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만 하니 강호의 어진 이들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옵니다." 화산파 무리들은 너나없이 죄지은 놈들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숙연하게 정적이 감돌았다. 한 순간 노래소가 정적을 깨고 키들키들 웃어젖혔다. "네가 쾌도란 녀석이지? 세상에 입 가진 사람은 다 말할 수 있어도 네 놈만은 입을 닥쳐야 해! 죄는 선우순이 냈겠지만 하수인은 분명 네 놈이야. 아직 곽명송을 죽인 죄를 묻지도 않았거늘 왜 주둥이부터 놀리는 게냐? 화산파 계율은 하룻강아지인 네 놈보다 수염이 시허연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네 녀석은 잔말 말고 구경이나 하거라!" 노래소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늙은이에게 냉큼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삼로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단박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팔다리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세 몸뚱이만 쿵, 쿵, 쿵 땅에 떨어졌다. 좌중은 짧은 숨을 들이켜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청 마당에선 마치 돼지 세 마리가 꾸물거리는 듯했다. 쾌도 악기는 적이 송구스러워 푹 고개를 숙였다. 화산파 젊은 제자들은 쭈뼛쭈뼛 눈길을 들었다. 일순 피투성이가 된 삼로의 얼굴이 달려들 듯 두 눈으로 뛰어들어 저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화산파 제자라면 응당 삼로 같은 사내대장부가 돼야 하리라! 삼로의 팔다리가 끊어져 나간 부위에서는 선지피가 흘러 나와 실개천을 이루었다.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놓아두면 피를 다 흘리고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좌중은 우르르 다가갔다. "가만 놔두지 못할까? 다가가는 놈은 가차없이 죽이리라!" 육사고가 표독스럽게 고함을 지르며 쓱 검을 빼 들었다. 그녀는 매섭게 좌중을 노려 보다가는 삼로를 흘겨보며 내뱉었다. "이젠 옴짝달싹 못하고 죽게 됐군. 내 그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게 하리라! 너희 삼로는 피를 몽땅 쏟아 내고 거미처럼 말라 죽게될 게야. 그래야 장문님 내외간을 죽인 피 값을 물어낼 수 있어!" 화산파 제자들은 두 눈 뻔히 뜨고 삼로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못내 한스러워서 발을 동동 굴러댔다. 더러는 발을 구르며 목놓아 울부짖기도 했다. 노래소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아니 올까?……." "너무 보채지 말게! 그 여인은 꼭 오고야 말아!……" "암, 오고말고!……." 노불락과 노시락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삼로는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둘러선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세 노인은 이따금 까무러쳤다가는 다시 깨어나곤 했다. 쾌도 악기는 사람들 속에 끼여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다가 차마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육사고에게 사정사정했다. "사고, 저 죽어 가는 선배님들을 저대로 내버려두는 건 너무 지독해……." 그러자 육사고가 눈꼬리를 치뜨며 쏘아붙였다. "당신은 손님이지 결코 화산파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해요!" 쾌도는 기가 막혀 낯선 사람 보듯 아내 육사고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늙은 여승 하나가 허공에서 휘익 떨어져 내려 곧장 삼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찬찬히 살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여승은 대뜸 꿇어앉아 삼로를 하나하나 부축해 앉히고는 약을 한 알씩 꺼내 먹였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대나무 잎 같은 약초를 꺼내 피가 뿜어 나오고 있는 곳에 붙여 주며 또 한 번 끌끌 혀를 찼다. "이, 이게 무슨 꼴인가? 이런 봉변을 당할 줄 내 미리 알았지만 그래도 도리를 다 하려는데 야……." 육사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쾌도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저 주제넘은 여승을 어서 몰아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악기는 두 손 딱 붙이고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육사고는 잡아먹을 듯이 그를 흘겨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왜 주제넘게 화산파의 내분에 끼여드는 거요?" 그러나 여승은 먼 산을 쳐다보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묻는 거요? 화산파 장문이라도 되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은 물론이요 그의 여편네마저 삼로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했으니 이젠 표면적으로 육사고가 장문 아닌 장문 아닌가? 여승은 코를 벌름거리며 빈정댔다. "검을 고이 모신다고 한검당이라고 했건마는 검이 춤추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니 견딜 수가 없구려!" 그녀는 한마디 던지고는 장삼 자락에 삼로를 싸안고 쓱 대청을 나섰다. "섰거라!" 육사고가 훌쩍 날아와 여승 앞을 가로막았다. 제32장 의기 남아 육사고는 쌀쌀히 웃으며 호통을 쳤다. "우리 화산파를 허투루 보고 하는 수작이군! 그래 도둑괭이처럼 뛰어들었다가 인사 한마디 없이 갈 셈인가?" 늙은 여승은 장삼 자락을 부여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삼로를 안고 있는지라 육사고가 달려든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쾌도 악기는 여승이 가련하기 그지 없었다. 여승에 대한 연민이 더할수록 인정머리없는 육사고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쾌도 악기는 더는 참지 못하고 껑충 몸을 솟구쳐 두 여인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사고!" 육사고는 눈알을 부라리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악기, 중뿔나게 당신이 뭣 땜에 간섭하고 나서는 거예요? 어서 썩 비키지 못해요!" 악기는 귓불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집 안에서는 늘 아내에게 훈계를 받고 꾸지람 듣기를 밥 먹듯 할지언정 숱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이토록 남편의 체면을 깎아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악기는 울컥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러자 육사고는 악기를 밀치고 여승을 쏘아보며 바락바락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우리 화산파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 악귀 같은 늙은이들을 안고 가는 거요?" 여승은 쓸쓸히 웃음을 지었다. "이왕 폐인이 된 불쌍한 늙은이들 아닌가? 불쌍한 늙은이들을 박대하면 죄업만 쌓을 뿐이야!" "닥쳐요! 이 영감태기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기나 해요? 우리 화산파 장문님을 난도질해서 죽였단 말이에요. 지은 죄를 보아서는 강물에 처넣어 고기밥이 되게 하고 싶지만 본디 화산파 원로였던 만큼 땅에 묻어는 주겠어요. 한데 당신이 무슨 심사로 끼여들어 가져 가나 말이에요? 까마귀 먹이로 가져 가는 건가요?" 그 말에 늙은 여승은 난데없이 주르르 눈물을 떨궜다. '이 불쌍한 늙은이들을 까마귀 먹이로 내던진다고? 이 독한 계집아, 이 세 사내를 두고 몇 십 년 간 애타게 그려 온 이 내 마음을 네가 아느냐? 내 가슴은 썩고 곪아서 피고름이 흐르고 있다!' 늙은 여승은 쓰라린 추억을 훌쩍 털어 버리고 은근한 눈길로 쾌도를 쳐다보았다. "쾌도 이 사람아, 계집을 얻으려면 제대로 된 계집을 얻어야지! 남정의 말을 잘 듣고 남정을 잘 섬기는 어질고 착한 계집이 진짜 계집인 게야. 제 남정을 동네 집 아이 다루듯 하는 이런 개차반 같은 계집하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게!" 그러자 육사고는 대번에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망할 놈의 할망구가 우리 내외간을 이간 놀 셈인가?" 늙은 여승은 그저 픽 웃더니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갔다. 육사고는 매서운 눈길로 화산파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나서기를 저어하는 눈치였다. 육사고는 악에 받쳐 버럭 고함을 쳤다. "무릇 저 늙다리 여승을 막아 나서지 않는 자는 화산파 법에 따라 처단하겠다!" 그래도 모두들 요지부동으로 한 사람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폐인이 된 세 불쌍한 늙은이를 안고 비틀비틀 간신히 걸어가는 여승을 어찌 막아 나선단 말인가……." "등신 같은 놈들!" 육사고는 짓씹듯 내뱉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여승의 가냘픈 어깨에 검을 힘껏 내리쳤다. 삽시에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내려놓지 못할까!" 육사고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그러나 여승은 시답지 않다는 듯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대가 날 죽여도 이 세 늙은이들만은 내려놓을 수 없노라.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내려놓을 수 없단 말이다. 알겠나?" 여승은 단호하게 한마디 던지더니 또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육사고는 악 소리를 지르며 껑충 몸을 솟구쳐 여승을 막아 서며 시퍼런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젱겅 소리가 일며 육사고의 검이 번쩍 위로 쳐들렸다. 육사고는 신경질적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검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쾌도 악기였다. 육사고의 얼굴은 단박에 독 오른 고춧빛이 되었다. "아니, 당신마저 날 거역할 셈이에요? 저리 비켜요, 비켜!" 악기의 얼굴도 푸르뎅뎅한 것이 만만찮아 보였다. "난 이제껏 네 년한테 괄시와 수모를 받을 대로 받았어. 네 년은 사람이 아니라 악귀야, 악귀!" "뭐? 악귀? 이 양반 이거 정신나간 거 아냐?" "오늘부터 난 네 년과는 남남이다, 남남! 칼로 베듯 갈라서겠단 말이다!" 몇 년 간이나 가슴에 응어리 졌던 그 말을 토해 버리고 나니 악기는 그야말로 비길 데 없이 가슴이 후련했다. 육사고는 성난 암두꺼비처럼 젖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아니…… 뭐…… 뭐…… 날 따르지 않고 뛰쳐나가겠다고?" "그렇다! 너는 그 동안 얼마나 나를 들볶고 종처럼 부려먹었냐? 나도 이젠 사내답게 살아 봐야겠다. 이 악기란 남정네는 네년 손에서 노는 꼭두각시가 아니란 말이다! 강호를 주름잡고 다니는 영웅 쾌도란 말이다!" "흥! 쾌도는 무슨 썩어빠진 쾌도? 길러 준 정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같으니라구!" 악기는 그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여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연 사태님, 어서 가시지요!" 악기와 한연 사태는 나란히 한검당을 나섰다. 다급해진 육사고는 대청에 떨어진 한검당의 보검을 주워 들고 화산파 무리들을 둘러보며 성마르게 외쳐댔다. "화산파 제자들은 들으시오. 지금 얼간이 같은 놈들이 감히 우리 화산파를 짓밟고 있소. 실로 화산파의 운명은 경각을 다투고 있다 할 것이오. 이젠 저 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길밖엔 없어요. 이제부터 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저 놈들과 한통속이 되어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처벌하겠어요? 자, 모두들 합심해서 저 사악한 무리를 쳐 눕힙시다!" 화산파 제자들은 쾌도가 선뜻 나서서 삼로와 한연 사태를 구해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듯 육사고가 발악을 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괜히 팔짱 끼고 구경만 하다가 역모 죄를 뒤집어쓰는 날엔 애매한 죽음을 당하지 않겠는가? 모두들 서로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육사고는 매섭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서너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한사람, 두 사람 뒤를 따랐다. 화산파 제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육사고 뒤를 따라 한검당을 나섰다. 쾌도 악기와 한연 사태가 채 얼마 가지도 않았을 때 육사고와 화산파 한 무리가 와 소리를 지르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쾌도 악기는 그들을 바라본 순간 검을 비껴 들고 죽기 살기로 한연 사태가 삼로를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엄호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악기, 오늘 내 검술을 보여 주겠어요. 내 검 아래 황천객이 된다 해도 날 원망 말아요!" 육사고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검을 곧추 들어올렸다. 평소에 두 내외간은 가끔 서로 검술을 연마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악기는 매번 슬그머니 져 주곤 했다. 그럴수록 오만한 육사고는 신바람이 나서 어깨를 으쓱거렸고 차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말 자기의 검술이 남편보다 뛰어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육사고와 악기는 두 장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육사고가 고함을 쳐댔다. "저 늙은 중 년을 놓치지 마라!" 그 소리에 뒤미처 난데없이 뒤쪽에서 쟁쟁하게 염불 외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육사고가 얼핏 돌아보니 이고암 여승들이 일고여덟이나 빙 둘러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승들은 모두 새파랗게 젊었는데 개중 제일 어려 보이는 여승은 겨우 열서너 살 될까말까 해 보였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염불만 외워대고 있었다. 한연 사태는 젊은 여승들을 보고 흠칫 놀라 재우쳐 물었다. "암주, 여기까지 올 건 뭔가? 화산파와 원한지간이 되면 꽤나 시끄러울 텐데!" 제일 어려 보이는 여승이 이고암 암주였다. 그녀는 한연 사태에게 정중히 합장을 하고 아뢰었다. "저 여인이 저희 암자의 문지기 늙은이들을 죽이고자 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육사고는 이 한 무리의 여승들을 외눈으로도 보지 않았다. 화산 기슭 구석에서 향불이나 피우고 부처님을 마주해 종일 합장배례나 하는 처지니 그 재간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니 필시 한연 사태와 삼로를 빼돌리려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일 터였다. 육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늙어빠진 연놈들을 빼돌리는 자는 중이고 속인이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그래도 젊디젊은 여승들은 태연자약하니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실로 난처한 형세였다. 죽은듯이 합장을 하고 서 있는 애젊은 여승들을 상대로 덮어놓고 찌르고 베어 죽이기는 뭣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화산파 제자 하나가 꽥 소리를 질렀다. "우리 사숙님께서는 분명히 삼로를 내려놓으라 하셨다. 냉큼 시행하렷다!" 한연 사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젊은 여승들도 합장을 한 채 의연히 뒤를 따랐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형상이었다. 육사고는 볼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저 능청스런 년들이……. 오늘 삼로를 잡아 칼로 쳐 죽이지 못한다면 이 육사고 어찌 다시 강호에 낯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저 악기란 녀석까지 나를 능멸하다니! 감히 남들 앞에서 내게 대답질을 하고…… 무례한지고! 좌우간 먼저 저 청승맞은 한연 사태 년부터 모가지를 비틀어 놓고 나서 세 늙다리를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