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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55편 (55/70)

2026-09-30 18:24:37 조회 13
"형님, 형님!……." 두목이 나가떨어지자 운남 십팔마들은 우왕좌왕 비틀거리더니 다시 뭉쳐서 일제히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열여섯 놈이었는데 개중 둘은 이미 두 눈을 잃고 무리에 섞여 허우적허우적 달려들고 있었다. 무시로 철퇴가 날아들고 시퍼런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머리 위에 떨어졌다. 황약사는 아형을 안고 경공으로 슬슬 몸을 피하며 속삭였다. "아형, 당신은 말끝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 그럼 이 개 같은 놈들도 죽이지 말아야 하나?" 그러자 아형은 곱게 눈을 흘겼다. "저들도 사람인가요? 저는 분명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녀는 깔깔 웃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능청을 떨었다. "아무렴, 과연 동사 황약사의 여편네가 다르긴 다르군! 그럼 내 저 놈들을 잡아죽이는 걸 보라구!" 황약사는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아형을 데리고 떠다녔다. 흉물스럽게 생긴 사내 하나가 검질기게 다가들었다. "황약사, 네 놈의 여편네를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오지랖 넓게 나서는 게냐?" 황약사는 픽 웃으면서 그 놈의 정수리에 한 장을 먹였다. 팍 소리가 일며 사내의 두 눈알이 벌컥 튀어나왔다. 놈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꼬꾸라져 버렸다. 그 틈에 다른 한 놈이 아형의 가슴을 겨누고 시퍼런 장검을 똑바로 쏘아붙였다. "네 년이 황약사의 여편네냐? 내 네 년부터 먼저 죽여야겠다!" 그러나 아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기실 아형은 도화도에서 나는 명물 고슴도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옷은 아무리 예리한 칼이라도 뚫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내는 내심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 순간 황약사가 퉁긴 돌멩이 하나가 그 사내의 뒤통수로 된통 내리꽂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황약사가 아형을 데리고 놈들의 주위를 건들건들 돌다가 슬쩍 멈춰 설 때마다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한놈씩 쓰러졌다. 십팔마는 벌써 여섯이 죽고 열둘이 남았다. 이젠 도저히 황약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놈이 용기를 내서 불쑥 물었다. "황약사, 우리가 당신한테 굴복한다면 당신은 우리들을 어떻게 조처할 셈이오?" "너희들의 죄로 봐선 백번 죽여 마땅하나 병장기를 놓고 손을 든다면야 목숨은 살려 주지. 하나 네 놈들은 내가 주는 독약을 먹고 스스로 혀를 잘라 버린 뒤 도화도로 가서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 이를 거역하는 놈은 그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에끼, 이 지독한 놈아! 내 칼이나 받아라!" 한 사내가 버럭 성을 내며 장검을 내질렀다. 황약사는 슬쩍 피하며 번개같이 칼등을 잡아 살짝 틀었다. 삽시에 시퍼런 칼날은 두동강이 났다. 십팔마 패거리들을 그만 돌처럼 굳어 버렸다. "네 놈은 살길을 틔워 줘도 굴복치 않으니 죽는 길밖에 없다!" 황약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점잖게 내쏘더니 칼자루 쥔 놈의 가슴팍에 번개같이 한 장을 날렸다. 놈은 입가로 왈칵 피거품을 빼물더니 휙 넘어갔다. 살아 남은 열한 명은 이제 완전히 기가 죽어 서로를 멍청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젠 운남 십팔마도 끝장이란 말인가……. 사내들은 어지러이 널려 있는 형제들의 시체를 보며 장탄식을 토해냈다. 하나 자기들이 죽은 형제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황약사에게 무릎을 꿇는다 한들 죽는 것보다 무엇이 낫겠는가.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약사의 도화도에는 혀 잘린 사내들이 피골이 상접해서 매일 무서운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지 않은가. "악귀 같은 놈! 말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노역에 시달리다가 도화도에서 무주고혼이 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다!" 한 사내가 한걸음 쓱 내닫더니 이내 칼을 부여잡고 배를 푹 찔렀다. 시퍼런 칼날이 번쩍였다. 잇따라 또 두 놈이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 받고는 악 소리를 지르며 칼날을 서로 상대방의 가슴에 깊숙이 박고는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이젠 여덟 놈밖에 남지 않았다. 개중에는 두 눈을 잃은 둘째 두령도 끼여 있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면서 넙죽 엎드려 애걸복걸했다. "황 도주님, 난 도화도에라도 쾌히 가겠소!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도화도에 양곡을 실어 가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너같이 앞 못 보는 병신은 밥이나 축내지 아무런 쓸모도 없어!"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한 장을 날렸다. "참, 서방님도!……." 아형은 민망스럽다는 듯 흘끔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황약사는 빙긋 웃어 보이며 잽싸게 주워섬겼다. "이 놈은 여간 심사가 고약한 놈이 아니라서 살려 두면 후환이 될걸세." 그리고는 살아 남은 일곱 놈에게 휙 약을 던져 주었다. "너희들은 어서 그 약을 먹어라. 그리고 이 길로 당장 동해 바닷가에 가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라. 반나절 정도 노를 저어 가노라면 쪽배 한 척이 나타나 너희들을 도화도로 인도해 갈 것이다. 섬에 오르면 자연히 독을 풀어 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나 만약 삼십일이 넘도록 도화도에 가지 않으면 필연코 죽게 될지어다." 일곱 사내는 넙죽 절을 하고는 서로들 눈치를 살피며 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꽁무니 빠지듯 숲 속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향녀들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황약사와 아형 앞으로 달려왔다. 아형은 측은하니 향녀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고생들을 하셨어요? 울지들 말고 어서 여기 앉아요." 그러자 향녀들은 더한층 서럽게 울어댔다. 실로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그녀들은 의연하게 앉아 있는 황약사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형을 쳐다보면서 등아를 사무치게 그리고 있었다. 등아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황약사는 조용히 옥퉁소를 꺼내 입으로 가져 갔다. 이윽고 유연한 퉁소 소리가 은은한 달빛에 실려 멀리멀리 울려 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향녀들도 마음이 잠차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희뿌여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곽명송과 등아는 여전히 부둥켜안고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삼로는 진작부터 잠이 깨어 눈동자를 말똥말똥 굴리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세 늙은이는 서로 앞다투어 선 하품들을 해댔다. 등아가 조용히 속살거렸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이젠 정말 죽어도 원이 없어요!" 곽명송은 뜨거운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그녀의 달아오른 입술이며 능금알 같은 두 볼에 미친 듯이 입을 맞췄다. 세 늙은이는 짐짓 헛기침을 해 가며 서로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저렇게도 뻔뻔스러운 연놈이 있단 말인가. 세 늙은이는 낮간지러워서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어 제각각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노래소가 선뜻 나서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곽명송, 날이 훤히 밝았다. 어서 우리 삼로의 칼을 받아라!" 곽명송은 애잔한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았다. "당신, 후회하지 않겠지?" 등아는 담담하니 말을 받았다. "후회하기는요? 저는 일생에 서방님과 같은 사내를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한걸요. 정말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됐어, 됐어! 우리 세 늙은이들 코앞에서 온밤 내내 물고 빨고 했으면 지칠 때도 됐다. 이제 어서 발딱 일어서거라!" 노불락은 귀찮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리고 투덜댔다. 노시락이 말을 이었다. "명송이,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없나?" 곽명송은 등아의 손을 가만히 떼놓고는 천천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는 다만 세 분 사숙조님께서 기울어지고 있는 화산파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못 쓸쓸한 기색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꿇어앉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칼 받을 채비를 했다. 노래소는 곽명송을 그윽이 내려다보더니 등아를 건너다보며 이죽거렸다. "너는 꽤나 총명하게 생겼는데 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지?" "도망요? 저도 겪을 건 다 겪었어요. 이런 곤경도 여러 번 당했고 또 여러 번 도망을 쳤었지요. 하지만 이번만은 다 늙어빠진 영감태기들 손에서 도망을 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등아는 생글거리며 비꼬았다. 그러자 노불락이 버럭 화를 냈다. "뭐야? 이 앙큼한 년이 늙은이들을 데리고 놀려 들어? 어디 한번 다시 지쩔여 봐! 주둥이를 찢어 놓을 테니!" "좋아요, 얼마든지 다시 지껄이죠! 당신들은 젊었을 적에도 계집 하나 낚을 줄 모르는 밥통들이었고 수염이 허옇게 된 지금도 눈치코치 모르는 등신들이라구요! 남의 장단에 춤만 추지 말고 늙을수록 제정신으로 살아야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겠어요?" 등아는 연주포 쏘아대듯이 쏘아붙이고는 까르르 웃어젖혔다. 삼로는 머리 끝까지 분이 치밀어 올라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네 년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니, 저런 년 봤나? 우리보고 등신이라네!" "아니, 이 년은 입이 개차반이군그래, 감히 제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삼로는 일제히 장검을 빼 들고 곧바로 등아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찌를 염은 못 냈다. 칼끝이 바르르 떨렸다. "왜 찌르지는 못하고 그렇게 떨기만 하나? 방금 자네들에게 밥통이라고 욕을 했는데도!" 노래소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노불락이 울상이 되어 노시락을 돌아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저 년은 노형보고 등신이라고 한 거야! 저 년은 노형 손으로 죽여야 해!" 노시락도 질세라 느물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이것아, 네 년이 날보고 욕했단 말이냐, 아니면 이 두 양반을 욕했단 말이냐? 날 보고 욕했다면 내가 널 죽이겠지만……." 삼로는 실없이 티격태격하면서 좀체로 누구도 선뜻 칼을 쓰려 하지 않았다. 등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 다들 찌르지 못하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말뚝처럼 서 있기만 할 거면 저희 둘은 그만 가보겠어요! 자 서방님, 그만 가요!" 등아는 등을 돌리며 곽명송에게 말을 건넸다. 노래소가 안달을 하며 대뜸 소리쳤다. "멍청히 서서 뭣들 하고 있나? 이 연놈들이 슬쩍 꽁무니를 빼려고 하는데!" 그러자 노불락은 기막힌 꾀가 있다는 듯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럼 이렇게 하세나. 셋이 함께 일시에 찌르는 거야, 먼저 사내놈을!" "그, 그러세!" 다른 두 늙은이도 마지못해 응수를 했다. 셋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입술을 깨물고는 고함을 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화산병풍!" 검 세 개는 일제히 곽명송의 가슴으로 똑바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곽명송의 가슴팍과 단 일 촌을 사이에 두고 검 세 개는 아교로 딱 붙인 것같이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음 순간, 세 늙은이는 너나없이 맥빠진 한숨을 날렸다. 노래소가 제일 먼저 검을 푹 모래사장에 박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이구 맥빠라지네. 자네들 둘도 어쩌면 그렇게 나와 똑같나! 무정키로 이름 높던 우리 화산삼경(華山三劍)도 이젠 인정에 울고 인정에 떨리는구먼. 난 도무지 이 새파란 놈들의 가슴팍에 칼을 댈 수가 없으어. 자네들도 그런가 보이, 그런가 보아!" 그러자 노불락과 노시락도 제가끔 게두덜거렸다. "어린 양처럼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놈한테 어떻게 칼을 댄단 말이여?" "밉든 곱든 우리 후배가 아닌가? 젖비린내 나는 놈한테 칼을 댈 수야 없지." 삼로는 연해 한숨만 날릴 따름이었다. 곽명송과 등아는 서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세 늙은이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에 빠지더니 이윽고 노래소가 입을 열었다. "이 놈아, 너는 화산파의 후배가 아니냐? 선배님들 모두가 난감해하고 있으니 네 스스로 목숨을 끊거라. 그래야 후배 된 도리를 하는 거다." 그 말에 곽명송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숙조님, 저는 스스로 자결할 수는 없소이다. 사숙조님들은 저의 죄를 논하고 계시지만 저로서는 제가 도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러니 지그시 눈을 감고 검을 받을 수는 있사오나 스스로 자결할 까닭은 없는 줄로 아옵니다!" 노래소가 대번에 펄쩍 뛰었다. "어이구, 이 놈이 그래도 바락바락 대드네, 바락바락 대들어! 그래 네 놈이 죄가 없단 말이냐?" 그러자 노시락이 노래소를 제치며 능글맞게 눈웃음을 쳤다. "명송이, 그렇다면 좋아! 이젠 이 늙은 것들을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말고 독주나 한잔 마시게. 그게 아마도 제일 점잖은 방책일 듯싶네, 이히히……." 그러나 곽명송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노래소는 그의 정수리를 얄밉게 쏘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내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아마 이 방법이 제격일 게야!" 다른 두 늙은이가 다그쳐 물었다. "무슨 방법이게?" "이 검을 계집에게 주어 먼저 사내를 찌르게 하잔 말야. 그러면 사내도 화가 나서 계집을 찔러 눕힐걸세. 이렇게 하면 우리도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얼마나 좋은가 말이여!" "그 방법도 좋긴 한데 누가 저 계집에게 권고한단 말인가?" 셋은 아뿔싸 하며 또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저마다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노형이 권고해 보세나, 노형이!" "에끼, 이 사람! 내가 어떻게……." 삼로는 또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더니 그래도 말을 꺼낸 노래소가 나서기로 입을 모았다. 노래소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가씨,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자네는 총명해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서도 사람이란 백 살을 살다가 죽을 수도 있고 여남은 살 꽃 같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어. 하나 내 칠십 평생을 보면 스무 살 먹기 전이 그래도 제일 재미가 있었지, 그 뒤의 생활은 통 재미가 없더라구. 그런즉 아가씨도 부득부득 오래 살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한창 나이일 때 껌뻑 속세를 떠나란 말야. 한마디로 인생은 살수록 괴롭고 귀찮은 법이니까. 내 말 알아듣겠어?" "알겠어요." 등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소는 뛸 듯이 좋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 참, 정말 똑똑한 아가씨로군, 흐흐흐……." 그때껏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던 곽명송이 한숨을 내쉬고는 울적하니 말했다. "사숙조님들, 세 분의 딱한 사정도 알 만하외다. 저희를 죽이고 돌아가야 화산파 형제들에게 큰소릴 칠 수 있다 이거겠지요. 그럼 세 분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제 스스로 자결 하겠으니 어서 검을 주십시오!" 그러자 삼로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서로 마주보았다. 두 늙은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노래소가 곽명송에게 검을 건네 주었다. 시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미욱한 사람들이 예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삼로는 깜짝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운고 노파 아닌가?" "글쎄……." "맞아, 분명 그 할망구야!" 세 늙은이가 한마디씩 중얼거리는데 휘익 바람소리가 일며 순식간에 학발계안의 깡마른 노파가 삼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복색으로 보아하니 꼭 여승 같은데 기상은 흉맹하기 짝이 없었다. 노파는 독수리같이 사나운 눈매로 삼로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삼로는 횡설수설 잘도 지껄여 대더니 이 깡마른 노파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얼굴들이 벌개져서는 눈치만 살폈다. 노파는 곽명송에게 선뜻 눈길을 던지며 매섭게 캐물었다. "네가 이 낭자의 남정인가?" "네, 그렇소이다. 등아의 남편이지요." 노파는 얄미운 눈초리로 등아를 흘겨보았다. "반반하게. 생긴 계집이 바보 같은 남편을 섬기고 있군! 덮어놓고 죽여 주십사 하고 설설 기는 사내는 당장에 차 버리란 말야!" 노파는 벽력같이 꾸짖고 나서 다시 곽명송을 쏘아보았다. "이 미련퉁이 같은 자식아, 물건을 달았으면 여편네 거느릴 줄도 알고 배짱도 있어야지, 그래 남이 죽으란다고 그렇게 순순히 죽는단 말이냐! 여기 이 세 영감태기는 말라 비틀어진 여편네 하나 없는 홀아비들이지만 너는 꽃 같은 새색시를 맞은 새신랑이 아니냐? 새색시를 두고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서방님이 죽으면 저도 죽을래요." 등아는 얼른 끼여들어 짐짓 울상을 하고 중얼거렸다. 노파는 장탄식을 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런 미친 것들 봤나!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방정맞게 죽겠다는 소리밖에 안 하는군. 여기 이 세 영감태기들을 보란 말야. 호두알같이 쭈글쭈글 늙어빠진 주제에 그래도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버둥거리질 않나 말이야? 나 원 기가 막혀서……." 노파는 대놓고 삼로에게 욕을 퍼부었으나 그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노파는 다시 곽명송을 보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도 화산파냐?" "그렇소이다." 곽명송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하마터면 앗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노파가 바로 그 옛날 삼로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여인이 아닐까? 만약 그 여인이 아니라면 우악스럽고 괴팍한 삼로가 이처럼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노파는 곽명송과 등아를 번갈아 보더니 불쑥 말했다. "너희 둘은 어서 가보거라. 이 세 영감태기가 다시 너희들을 못살게 군다면 내 정녕코 용서치 않으리라, 기어이 죽여 버리고 나도 자진하고 말 것이야!" 그제야 비로소 화산파세 노인은 서로 흘끔흘끔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운고! 장문이 보검을 잡고 분부한 일이니 우린들 어쩔 도리가 있겠소." 노파의 쭈글쭈글한 양 볼에 한 가득 홍조가 어리더니 삽시에 사그라졌다. 운고라니, 몇 십 년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인가. 노파는 일순 마음이 두근거려 숨을 크게 한번 꿀꺽 삼키고는 다시금 호되게 삼로를 닦아세웠다. "선우순이 자기 사형을 암해하고 장문 자리에 오른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이 젊은이들한테 듣기는 들었소만……." "그런 배은망덕한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들은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얼뜨기들이군요! 속된 말로 만약 검둥개가 장문의 보검을 차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들은 그 검둥개를 따라 멍멍 짖어댈 위인들이라구요! 제발 좀 치신머리 있게 사시라구요!" 세 늙은이는 톡톡히 무안을 당해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젠 선우순의 됨됨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그가 장문의 보검을 가지고 있는 이상 새삼스레 등을 돌려 대기도 뭣한 노릇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두 남녀를 처치하려던 터였다. 삼로는 명분을 지키는 데 이미 머리가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노불락은 울상을 해 가지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운고, 이제부터 선우순 놈과 담을 쌓고 지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소만 우리가 평생 지켜 온 명분과 절의는 어떡하란 말이오?" 노파는 허탈하게 웃었다. "참 답답한 양반들이군요! 아무튼 화산 삼로 노릇을 그만둘 생각이 있는 사람은 저의 암자에 와서 문지기 노릇이나 해 줘요." 화산 삼로 노릇을 집어치우고 운고의 말동무나 하면서 문지기 노룻을 한다……, 이보다 더 멋들어진 소임이 어디 있겠는가. 세 늙은이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앞다투어 청을 넣었다. "좋았어, 좋아! 이 지긋지긋한 삼로 노릇은 그만두고 내가 문지기 노릇을 하겠어!" "좋아요, 세 분 다 원하신다면 지금 즉시 암자에 가 계세요!" 그러자 세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곽명송을 힐끔 돌아보았다. 노래소가 정색을 하고 곽명송에게 신신당부했다. "명송이, 자낸 솔직히 화산파에서 제일 듬직한 사나일세. 화산파는 앞으로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선우순 놈이 화산파를 말아 먹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 해. 알겠나? 부탁일세!" 곽명송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선우순을 다스릴 사람은 이 삼로밖에 없는데 그런 중임을 다 팽개치고 자기한테만 미뤄 버리다니, 곽명송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노래소는 다시 등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히죽거렸다. "참 복성스러운 계집이야! 미안하지만 저 노파가 젊었을 때보다도 더 예쁘단 말이여……." 세 늙은이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흐물흐물 물러갔다. 제30장 원앙새 수놓은 비단 수건 호젓한 궁궐에 밤기운이 창망하다. 단지흥은 깊은 수심에 잠겨 홀로 섬돌 위를 오락가락했다. 그의 손에는 비단 손수건 하나가 꼭 쥐여 있었다. 이 비단 손수건은 주백통이 왕중양에게 이끌려 왔을 때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알고 본즉슨 영고가 주백통에게 준 은근한 정표였다. 단지흥은 다시금 손수건을 펼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원앙 한 쌍이 호수에서 노닐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시가 한 수 씌어 있었다. 눈물같이 맑고 푸른 호수 위에 원앙새 한 쌍 시름 없이 노니네 어인 일인고 임 만나기도 전에 까만 머리 속절없이 백발이 되네 아, 궁궐 깊은 곳에 밤이 깃들이면 임 그려 옷자락에 방울방울 눈물 짓네. 단지흥은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영고, 영고…….' 실로 영고가 자기를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모든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영고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이상하게도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측은한 마음이 기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