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54편 (54/70)
한데 우리가 제 집안일도 모른다는 건 무얼 두고 하는 소린가, 엉?" "그럼 한 가지 물을게요. 선우순이 자기의 사형을 모해하고 화산파 장문 자리를 차지한 내막을 아시나요?" 등아가 정색하고 물으니 삼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등아는 빙긋 웃으며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여보세요, 어르신들. 저와 이이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 먼저 자기 사형를 모해한 선우순이나 잡아 족친 후에 저희들을 죽이든가 말든가 하세요. 화는 언제나 안으로부터 생기는 법이에요. 군자는 제 집안부터 다스린다는 말도 있잖아요?" 삼로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날렸다. "한숨을 내쉴 건 뭐예요?" 노래소는 열적게 웃으며 투덜거렸다. "선우순이 화산파 장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을 가지고 있으니 우린 어쩌는 수가 없단 말야." "참, 그러니. 제가 답답하다 그러지요! 그런 주제들이시니 저희들 일도 이제 그만 간섭하고 어서 저리 비켜요." 삼로는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 잠자코 선 채 말이 없었다. 등아는 앉은걸음으로 두어 발짝 비켜 앉았다. 곽명송도 따라왔다. 둘은 세 늙은이가 있거나 말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백사장에 누웠다. 등아가 곽명송의 가슴으로 파고드니 곽명송은 적이 난색을 지었다. 등아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점잔을 뺄 건 뭐예요? 여든 자신 늙은이들이 옆에 있다뿐인데요." 그러면서 등아는 더욱 곽명송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곽명송도 후끈 달아올라 아무 거리낌없이 등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자기들을 아랑곳하지도 않자 삼로는 포기한 듯 털퍼덕 주저앉아 그쪽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을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노래소가 먼저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말했다. "어이구, 난 피곤해서 먼저 눈 좀 붙여야겠네." "그래 한잠 자두세. 제 놈들이 뛰면 어디로 뛰겠나?" 노시락도 한마디 거들며 벌렁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넘어지자 노불락도 뒤따라 몸을 눕혔다. 그러더니 곧바로 드렁드렁 코를 곯아댔다. 노인들의 코고는 소리마저도 그들에게는 마치 음악 소리처럼 흘러 들었다. 두 젊은 남녀의 몸뚱어리는 시간을 더할수록 점점 불덩이처럼 달라올랐다. 곽명송의 뜨거운 입이 등아의 입술을 찾아 헤매고 등아는 스스럼없이 입을 주면서 두 팔로 곽명송의 목을 감고 늘어졌다. 곽명송은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아아…… 그날 밤도 이렇게 입을 맞추었지……." 곽명송에겐 그날 밤은 마치 까마득한 전설 같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흥분에 다시금 사로잡혀 그는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천상배필이란 말은 필시 이 두 남녀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중천에 걸려 백사장에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등아가 가만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서방님, 우리 도망칠까요?" "어떻게 도망을 친단 말이오, 저 삼로의 무공아 귀신 같다는데. 무공으로 삼로를 꺾을 만한 사람은 황약사와 구양봉밖에 없다고 하지 않소." "그럼 날샐녘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뭐." 등아는 애교를 떨며 한 눈을 꿈쩍여 보이더니 다시금 곽명송의 넓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무렵, 향녀들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북방으로 북방으로 가고 있었다. 강남에는 그간 적을 삼은 무리들이 너무나 많아 도무지 자리를 잡고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풍막을 씌운 마차 네대에 나누어 앉아 온종일 길을 다그쳤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그녀들은 해묵은 홰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 묵어 가기로 했다. 홍사가 향녀 셋을 불러 놓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이젠 등아 언니도 없고 하니 각별히 조심들을 해야겠어. 먼저 너희 셋이 보초를 서되 무슨 자그마한 동정이라도 있으면 지체 말고 우리를 깨워야 해." 셋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쪽으로 걸어갔다. 향녀들은 마차 옆에 나란히 누웠다. 하루종일 피곤했던 터라 그녀들은 이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동정의 백사장에서 곽명송과 등아가 기이한 첫날밤을 지내던 바로 그 밤이었다. 문득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에 뒤미처 성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보초를 서던 향녀들이 기겁을 하여 뛰어오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들 일어나요, 어서들!" 마차 옆에 누웠던 향녀들은 일제히 발딱발딱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방에 횃불이 번쩍이고 웬 사내들 한 무리가 그녀들을 에워싸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웬 사람들이오?" 홍사가 다그쳐 물었다. 횃불을 든 사내들 속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네 년들이 사람을 죽일 때도 그렇게 점잖게 묻고는 죽였더냐?" 향녀들은 저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향녀들과 원수진 놈들임에 틀림 없었으나 도대체 어느 패거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향녀들은 서로 등을 돌려대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단검을 빼 들었다. 놈들은 횃불을 치켜 들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점점 더 죄어 들었다. 하나같이 흉측하게 생긴 몰골이었다. "대관절 어쩔 셈이오?" 홍사가 다시금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볼따구니가 흉하게 축 처진 사내가 씩 웃으며 우쭐거렸다. "그래 네 년들은 운남 십팔마(十八馬)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운남 십팔마란 이름 그대로 열여덟 명으로, 운남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사나운 도적 떼였다. 이들은 돈과 재물을 빼앗는 짓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사람을 잡아죽이는 악귀와 진배없는 놈들이었다. 향녀들은 운남 십팔마라는 말에 저마다 오싹 소름이 돋아 서로 쳐다보며 마음을 다졌다. 향녀 하나가 짐짓 눈웃음을 치면서 나섰다. "아이 참, 이제 보니 운남 십팔마 형제들이로군요. 실례했어요. 여기서 만나 뵐 줄은 몰랐어요. 참말 뜻밖이군요! 늦었지만 저희 향녀들의 인사나 받으세요." 그러자 키가 껑충한 사내가 말을 받았다. "닥쳐! 입에 발린 인사나 받자고 온종일 뒤쫓아온 줄 아느냐? 우린 네 년들 몸뚱어리가 탐나서 일심으로 뒤쫓아온 게야. 듣자니 네 년들은 악양루에서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더군. 심지어 천하호걸들 앞에서 훌훌 앞가슴을 헤치고 탐스러운 젖가슴까지 자랑했다면서? 우리 운남 십팔마도 병신이 아닌 이상 네 년들 맛을 좀 봐야겠다. 세상일이란 늘 공평해야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여긴 황량한 들판이라, 남의 눈도 없으니 조금도 내숭떨 것 없다. 자, 걱정 말고 어서 옷 들이나 홀랑홀랑 벗으라구! 일이 끝난 다음에는 우리가 너희 서른 남짓을 모두 거두어 줄 테니! 너희들같이 굴러먹던 계집들에겐 꿩 먹고 알 먹기 아니냐, 으하하하……."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를 꺾어가며 박장대소했다. 향녀들은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 빼는 재주도 없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무공이 뛰어난 등아 향녀만 있다면 사생결단하고 싸워 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 사나운 도적 떼를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 구슬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향녀들은 웃는 얼굴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 향녀가 또 환히 웃으며 말했다. "십팔마 오라버님들, 저희 향녀들은 악양루 잔치가 파한 그날부터 강호의 주먹놀음이나 칼부림에서는 손을 씻고 나앉기로 했어요. 다시 그런 싸움판에 뛰어들면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비웃을 거예요. 그런즉 저희 향녀들 체면을 봐서 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그러자 키가 장대 같은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말구! 바로 네 년들이 피를 보는 싸움에서 손을 씻고 착한 계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여편네로 삼으려는 거야. 아직도 천방지축 날뛰는 계집들이라면 누가 주워 가겠니. 아무튼 네 년들은 스물여덟이고 우린 열여덟이야. 한 사내 앞에 두 계집씩은 좀 모자라니까 우리들끼리 제비를 뽑아야 하겠군. 제기랄, 그래도 반 이상은 둘씩 차지한단 말이야, 으하하하……." 향녀들은 서로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일장혈투는 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향녀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래도 오라버님들이 이 누이동생들을 사람 취급해 주는군요. 그럼 어디 한번 맞붙어 보십시다!" 향녀들은 단도를 움켜쥐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젱겅젱겅 칼날이 부딪치고 번쩍번쩍 밤 하늘에 불꽃이 튀었다. 일장 악전(惡戰)이 이제 막 밤 공기를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맞붙어 보니 난다 긴다 하던 소문은 다 헛소문인 듯 운남 십팔마도 그다지 무예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힘이 장사요, 병장기 또한 가지각색이라 장검이 번쩍이고 철퇴가 윙윙 울어대고 쇠채찍이 가로세로 기승을 부렸다. 향녀들은 고작 손에 잡은 것이 단검밖에 없는지라 자연 지탱해 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향녀들은 공격을 들이대지는 못하고 가벼운 경공으로 요리 조리 몸을 피하면서 허점을 노릴 뿐이었다. 아까 그 장대 같은 사내가 서넛 되는 향녀들을 맡아 싸우며 큰소리로 지껄여댔다. "여보게 아낙네들, 괜히 칼부림에 힘 다 쓰고 나면 이따가 무슨 힘으로 우릴 받아 주겠나. 힘은 두었다 그때 쓰라구!" 그 말에 여기저기 널려 있던 십팔마 패거리들이 낄낄 웃으며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일순 향녀 하나가 칼을 맞고 찢어지듯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걸 보고 가까이 있던 향녀 하나가 다급히 달려갔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그녀를 바짝 뒤쫓아 삽시에 낚아채 옆구리에 끼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힘들 내. 난 벌써 여편네 감을 하나 골라 잡았어! "잘했어! 누구든 잡으면 임자지!" 놈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더욱 기세 좋게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장대 같은 사내도 덥석 향녀 하나를 낚아챘다. 그러자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악을 쓰더니 대뜸 사내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향녀를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를 틈타 향녀는 땅에 떨어진 단검을 거머쥐고 번개같이 자기 가슴을 콱 찔렀다. 짐승 같은 놈들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모질게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에 꽂힌 칼자루를 부여잡은 채 힘 없이 풀썩 쓰러졌다. "멍청이 같은 자식, 다 잡은 년을 놓치고 난리야, 병신같이!" 사내들은 하나같이 핀잔을 주었다. 마차 옆에서는 한 놈이 향녀 하나를 땅에 쓰러뜨린 채 깔고 앉아 마구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이걸 놔라, 이걸 놔!" 그녀는 두 손으로 옷고름을 거머쥐고 악을 써댔다. 그러자 사내는 향녀의 손을 비틀면서 저고리를 확 잡아 찢고는 능청을 떨었다. "예전에는 말이야, 향녀들이 아양을 떨고 끝내 주게 교태를 부려 사내를 녹여 놓았지만 젖통만은 꼴불견이었다구. 그런데 이거 어이구…… 아무래도 황약사란 양반한테 감사를 드려야겠어. 글쎄 그대들의 젖통을 진짜 이팔청춘 아가씨들 모양으로 곱게 치료해 주었으니깐. 어이구 탐스러워라, 요것아!" 사내는 향녀의 도도록한 젖꼭지를 잡아 살짝 비틀었다. 향녀는 고개를 모로 꺾은 채 눈가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다른 사내들은 향녀를 깔고 앉은 사내가 부러워 침을 질질 흘리며 더욱 사납게 향녀들에게 달려들었다. 향녀들은 이제 기진맥진 해서 날아드는 검이며 철퇴를 가까스로 피하며 홰나무까지 바투 물러섰다. 향녀 하나가 다른 향녀들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외쳤다. "우리 내세에서 다시 만나자!"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순식간에 가슴에 단검을 푹 박았다. 또 향녀 하나가 죽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하나 둘 가슴에 칼을 박고 연달아 푹푹 쓰러졌다. 잠깐 사이에 홰나무 주위에는 예닐곱 향녀의 시체가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그러자 운남 십팔마의 두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등신 같은 자식들아, 다 죽기 전에 어서 사로잡지 못햇! 그래, 죽은 귀신을 가져다가 여편네로 삼을 셈이냐?" 놈들은 두령의 호령이 떨어지자 더욱 바짝 다가들면서 칼을 휘두르다가 틈만 생기면 향녀들에게서 단검을 빼앗아 휙 던져 버리고는 그녀들을 깔아뭉갰다. 얼마나 흘렀을까, 더러는 죽고 더러는 크게 상처를 입은 채 향녀들은 모두 놈들에게 사로잡혔다. 사내들은 삭정이를 주워다 화톳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앉더니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술을 마셨다. 두목이 도끼눈을 해 가지고 좌중을 둘러보더니 운을 뗐다. "몇 년 죽어 넘어졌어도 아직 우리보단 많아. 하니 맏이인 내가 일단 계집 둘은 가져야겠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내가 대뜸 나섰다. "나는 셋을 잡았어. 그러니까 최소한 둘은 가져야 해. 그래도 하나는 양보하는 셈이라구." "이 놈들, 장유유서도 모르냐? 나이에 따라 순서가 있는 법이야. 맏형이 끝났으면 내 차례지 네 녀석이 왜 나서!" 늙수그레한 염소 수염 사내가 발딱 일어서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다른 한 놈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빈정댔다. "둘째형님은 계집 하나 잡지 못한 주제에 침대 위에서 어떻게 둘씩이나 다루겠다구 욕심을 부리는 게요.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좀 체면을 차릴 줄도 알아야지, 나 원……." 그러자 사내들은 배를 그러안고 박장대소를 했다. 염소 수염은 발끈하며 칼을 휙 뽑아들고 으르렁거렸다. "이 놈, 다시 한 번 그따위 잡소리를 하면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앗!" 허장성세로 저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들은 누구 하나 대거리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녀를 차지하는 일에서 만큼은 누구도 양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이나 옥신각신 다투며 내남없이 언성을 높여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한 순간 모두를 제압하며 두목이 꽥 소리를 질렀다. "주둥이 닥치지 못햇! 내 칼 맛을 보아야 닥치겠느냐?" 이 두목이란 자는 성미가 불 같은지라 모두들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는 두목의 눈치만 살폈다. 두목은 진작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계집은 무슨 일에서든 늘 불화의 화근인 법이다. 그러니 만약 이 계집들을 공평하게 나누지 못하면 앞으로 형제들의 의가 벌어지게 되고 말 것임에 틀림없었다. 두목은 짐짓 점잖게 훈계를 했다. "향녀들을 계집으로만 봤다간 큰코다친다! 저 년들은 겉은 계집이지만 속은 여느 사내보다 더 독해! 아무때든 복수하려고 날칠 날이 있을 테니 단단히 조심들 하란 말이야. 행여 끼고 살다가 행실이 석연치 않은 구석만 보이면 가차없이 죽여 버려야 한다구." 장대 같은 사내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참 형님도, 계집이면 그냥 계집이지 뭘 그러시우? 이제 사내맛을 한번 보면 집고양이처럼 온순해질 거외다." "맏형, 꺽다리 말이 옳지요, 계집이야 분명 계집이겠지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어요. 다들 싫으면 나한테 둘도 좋고 셋도 좋고 몽땅 주시라요. 나 한번 진시황처럼 살아 보게시리." 다른 한 놈이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 사내들은 또 한 번 웃음보를 터뜨렸다. 향녀들은 결박당한 채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초췌하기 이를 데 없고 저마다의 눈빛엔 애잔하고 처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등아 향녀가 부럽기도 할 뿐더러 원망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등아 향녀는 곽명송 같은 순박하고 듬직한 낭군을 만나 일평생 행복하게 살 터이나 남아 있는 이 향녀들은 이게 무슨 꼴인가? 애초에 세상을 쉽게 보고 등아를 시집보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여인들을 욕심내고 괴롭히는 색마들이 있는 한 향녀들은 똘똘 뭉쳐서 싸워야 했다. 한데 지금에 와서야 도로 물릴 수도 없는 터, 이를 어쩐단 말인가? 향녀들은 실로 후회막급이었다. 그녀들은 얼핏 맥을 놓고 앉아 있는 듯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한 채 틈만 노리고 있었다. 틈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결하리라. 운남 십팔마는 그제야 간신히 합의를 보았다. 맏이로부터 차례로 둘씩 갖고 그 다음엔 하나씩 가지기로 했다. 둘째는 아무런 재주도, 공로도 없었지만 항렬이 높은 까닭에 향녀 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맏이에게 공손히 권했다. "형님, 먼저 고르시죠!" 그러자 십팔마는 일제히 일어나 향녀들에게로 다가왔다. 맏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으쓱거리며 향녀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는 손끝으로 향녀들의 턱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보더니 난색을 지었다. "제기랄, 다 한 어미 구녕으로 나온 딸년들인지 모두 신통하게도 닮았군. 하나같이 예쁜데 어느 년을 고른단 말인가?" 사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더니 복판에 있는 두 향녀를 끌고 나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고분고분하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그러자 사내들은 잇따라 향녀들을 하나 둘씩 꿰차고 저마다 희희낙락거리며 어둠이 내려앉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가련한 향녀들은 마치 거친 사냥꾼에게 끌려가는 꽃사슴 같았다. 향녀들은 그 당장 자결을 못할 바에야 덮어놓고 악을 쓴다고 소용이 없을 게 뻔하므로 갖은 교태와 아양을 부려 이 우악스러운 사내들을 꺼꾸러뜨리자고 나직이 입을 모았었다. 키다리 사내에게 끌려간 향녀는 사내가 포승을 풀어 주자마자 사내의 목에 냉큼 감기면서 아양을 떨었다. "당신들은 참 무지막지한 양반들이에요. 계집에게 이렇듯 포승을 지워 죄인 다루듯 하다니,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자고로 계집이란 햇병아리 다루듯 품어 주고 쓰다듬어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러자 키다리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숨을 헐떡거리며 서둘러 향녀의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그와 동시에 향녀의 오른손은 슬그머니 사내의 허리춤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묵직한 물건을 텁석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으악!"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향녀를 콱 떠밀었다. 그녀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도 간드러지게 깔깔 웃어댔다. 사내는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두어 바퀴 뱅뱅 돌더니 장검을 쓱 뽑아들었다. "요 앙큼한 년, 이 어른을 병신으로 만들려고 수작을 부린! 내 네 년을 당장 죽여 버리고 말 테다!" 키다리는 장검을 높이 쳐들고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온몸의 힘을 다 두 팔에 모았는데도 어인 영문인지 장검은 얼어붙은 듯 허공에 멈춘 채 꼼짝도 안 했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키다리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다 허사였다. 필시 누군가 허공에서 장검을 붙잡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ㄴ!" 키다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호탕한 웃음 소리가 어둠을 뚫고 휙 내리꽂혔다. "누구냐고? 난 황약사란 사람이다. 네 놈들도 귀가 있다면 똑똑히 들었을 것인즉, 내 악양루 잔치 때 분명히 말해 둔 바 있다. 이제부터 착한 여인들로 환생한 이 향녀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내가 친히 나서서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그 소린 마치 고요한 밤 하늘에 울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한창 몸이 달아올라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쓱쓱 팔소매를 걷어붙이던 사내들은 너나없이 눈들이 떼꾼해졌다. 황약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졌다더니 과연 또 나타났구나! 사내들은 갈팡질팡 종을 못 잡다가 얼른 향녀들을 붙잡았다. 향녀들을 방패로 삼아 대적할 심산이었다. 십팔마 두목은 양손에 두 향녀의 팔을 비틀어 잡아 쥐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뜻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그 곁에 그림자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달빛에 기대어 자세히 살펴보니 나중에 떠오른 그림자는 여인이었다. 미목이 수려한 것이 향녀들보다도 훨씬 아리따웠다. 천하 미인으로 이름 높은 황약사의 아내 아형이 분명했다. 두목은 그녀를 보자 얼른 약은 꾀가 하나 떠올랐다. 듣자니 저 여자는 무공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저 여자를 사로잡 아 방패로 삼는다면 난다 긴다 하는 황약사도 쩔쩔매지 않겠는가. 두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여덟째까지는 나하고 저 놈의 여편네를 빼앗자!"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여덟 놈이 일시에 황약사와 아형에게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머지 놈들은 잽싸게 향녀들을 한곳에 몰아붙였다. "신난다, 많이 덤빌수록 좋다! 거기 놈들도 어서 덤비거라!" 황약사는 호기롭게 외쳐대며 번개같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쌩 바람소리가 일면서 계란만한 돌멩이 하나가 휙 날아가더니 허공에서 짝 갈라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칼을 비껴 들고 앞장서 달려들던 세 놈이 으악, 으악 비명을 지르며 칼을 팽개치고는 두 눈을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금세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물컹물컹 흘러 나왔다. 세 놈은 선 자리에서 뱅뱅 돌며 아우성을 쳤다. "어이구, 이를 어쩌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중 한 놈은 혼비백산하여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갈지자로 뛰어가다가 일순 향녀들의 다리에 걸려 기우뚱 나자빠졌다. 향녀 하나가 슬쩍 단검을 뽑아 그 놈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았다. 두목은 가슴이 철렁했다. 황약사의 탄지신법이 이토록 무서울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두목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공중제비를 돌며 껑충 솟구쳐 올랐다가 대번에 황약사에게 덮쳐 들었다. 황약사는 피식 웃으며 또다시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목은 뒤로 넉 장이나 밀려가 벌렁 나자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