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45편 (45/70)
다음 순간, 절 안으로 난쟁이 하나가 톡 뛰어들어왔다. 선비는 그 난쟁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 난쟁이는 바로 운남 구구십팔동의 동주 충피였다. 충피는 흑의 사내들을 쭉 둘러보더니 느물느물 외쳤다. "노형들, 그래, 가져 오시었소?" 그러자 모두들 자기 곁에 놓아둔 자루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모두 여기 있소이다. 다행히 명을 어기지 않았소." 한 사람이 대답했다. "좋소, 그럼 내 끌고 가지." 그리고는 충피는 휘파람을 훽 불었다. 그러자 뒤미처 뚱뚱보 여인 다섯이 어기적어기적 들어와 말없이 자루 하나씩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 보살님께 말씀드려 주지. 보살님께선 무척 기뻐하실 거요. 그리고 보살님 명령만 떨어지면 내 즉각 독을 해독시켜 주지." 충피는 자못 거들먹거렸다. 그러자 모두들 일어나 일제히 충피에게 읍을 했다. 선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충피가 언제 보살의 수하로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대리에서 어린애들이 없어지는 게 어느 놈의 소행인가는 확연해지는 듯싶었다. 대환희 보살의 짓임에 틀림없었다. 이 악독한 대환희 보살이 앞으로 또 무슨 사단을 빚어낼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선비는 사뿐 몸을 날려 잽싸게 절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절 뒤로 돌아가 순식간에 포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화포(火砲)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마침 뚱뚱보 여인 하나가 절문 밖으로 나오다가 그것을 보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절 안에 있던 사람들도 고함소리를 듣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층피는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선비가 그 앞을 떡 가로막았다. 충피는 대번에 선비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또 네 놈이로구나? 네 놈은 대리에서 벼슬살이는 하지 않고 뭣하러 예까지 와서 귀찮게 구는 게냐?" "충피야, 지난번에 구구십팔동에서 네 놈은 요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나 늘 운수가 좋을 줄 알았더냐? 넌 오늘 밤 잘못 걸려들었어!" 선비는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붓 한 쌍을 꺼내 들었다. 그는 붓 쓰는 솜씨가 대단하여 이 한 쌍의 붓으로 대여섯은 너끈히 대적할 수 있었다. 충피는 파리하게 질려 얼른 옆으로 비켜 나면서 소리쳤다. "빨리 저 놈을 죽여 버려. 그 단황이란 놈이 알게 되면 우린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없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의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똑바로 선비를 찔러 들어왔다. 선비는 급히 물러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쌍의 붓을 귀신같이 휘둘러대며 급급히 공격을 들이댔다. 그는 붓을 휘두르면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만일 그들이 신호를 보았다면 즉시 달려올 것이다. 이들의 무예로 보아 얼마간은 지탱해 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늦게 당도해도 난 오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비는 한 쌍의 붓을 거침없이 연신 휘둘러댔다. 충피는 몇 사람이 나서도 선비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자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밥통들, 어서 저 놈을 죽이지 못하고 뭣 하는 게냐! 저 놈을 죽이지 못하면 너희들은 모두 독벌레한테 죽고 말 줄 알아라!" 흑의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 더욱 더 가열차게 검을 휘둘러댔다. 그들의 검세가 사뭇 날카로워지자 선비는 더는 공격을 하지 못하고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그러자 자연 틈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선비는 그만 팔을 찔리고 말았다. 중상은 아니었지만 선비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자 그들은 사기가 부쩍 올랐다. "저 놈이 상했다. 빨리 죽이자!" 한 자가 고함을 지르며 득달같이 검을 찔러 왔다. 선비는 눈앞이 아찔해지며 세 시위들이 어서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형제들이 오지 않으면 난 죽고 말 것이다.' 그때였다. 불현듯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공력이 아주 대단한 사람 같았다. 선비는 그가 바로 네 시위 중 내력이 가장 출중한 농부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선비는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대리의 사대 시위가 왔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손을 거두어라!" 그러자 한 자가 주춤하더니 주위를 흘끔흘끔 살피고는 삽시에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충피는 대로하여 소리소리 질러댔다. "도망친다 해서 내 손아귀를 벗어날 줄 아느냐! 네 놈은 독에 중독된 것도 잊었단 말이냐? 빨리 저 놈을 죽여 버리지 않으면 독이 퍼져 죽게 될 줄 알아랏!" 그러나 그 사내는 막무가내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놈들만이 충피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여전히 검을 휘둘러댔지만 그 검세는 사뭇 약해져 있었다. 농부는 나는 듯이 달려왔다. 그는 아까 화포가 공중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즉시 자기도 한 방 터뜨려 어부와 나무꾼에게 신호를 하고는 급히 달려온 터였다. 그가 막 절에 다가섰을 때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자세히 보니 뚱뚱보 여인들이었다. 농부는 그 여인들을 보자 몸서리를 치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 뚱뚱보 년들아,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가소롭다는 듯 이죽거렸다. "물러가라고? 원래 우리가 여기에 와 있었고 네 녀석이 우리 자리에 뛰어든 건데 누구더러 물러가라는 게냐? 굴러가라면야 우리도 누군 못지않게 잘할 수 있다만!" 농부는 선비의 안위가 몹시 근심이 되었다. 저쪽에서 왁자하니 시끄러운 것을 보면 선비가 놈들과 생사결투를 벌이고 있음에 분명하였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큰소리로 호통쳤다. "그따위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썩 비키지 못할까! 네 년들과 말동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농부는 몸을 솟구치려고 잽싸게 사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뚱뚱보 여인들은 대번에 눈치를 채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주위를 둘러싸는 것이 아닌가. "농부, 네 놈은 지난번에 요행히 우리 손을 벗어났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결코 벗어날 수 없어." 뚱뚱보 여인들은 소리를 치면서 일제히 덤벼들었다. 평소에는 숨마저 헐떡거리며 퇴물같이 굼뜨더니 일단 싸움을 시작하니 그럴 수 없이 몸놀림이 민첩했다. 그녀들은 각기 병장기 하나씩을 들고서 농부의 주위를 정신 산란하게 뛰어다니며 공격을 들이댔다. 한 여인은 커다란 국자를 들고 농부의 머리를 겨냥해 똑바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한 여인은 길다란 젓가락 한 쌍을 한 손에 하나씩 갈라 쥐고는 번갈아 가며 찌르려 들었다. 그 여인이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속도는 쌍검을 쓰는 것에 비할 만큼 빨랐다. 그 여인은 이 젓가락으로 계속 농부의 눈만 겨누었는데 초수가 대단히 지독했다. 다른 한 여인은 사발 한 개를 움켜쥐고 그 사발로 농부의 머리를 덮어 버리려고 악을 썼다. 농부가 이 세 여인들을 막아내기 란 실로 어려웠다. "대리국의 승상과 장군이 다 왔는데 누가 또 오냐?" 뚱뚱보 여인 하나가 농부를 놀려대자 다른 한 여인이 깔깔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그 시위대장(侍衛大將)과 당조어사(堂朝御史)가 오겠지. 뻔한 걸 뭘 물어 봐?" 농부는 들은 척도 않고 일심으로 세 여인을 막아냈다. 한편 선비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 흑의 사내들은 비록 무예가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었지만 대여섯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의 검은 무시로 선비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충피는 한옆에 서서 손뼉을 쳐 가며 부추겼다. "잘한다, 잘해! 선비를 제일 먼저 죽이는 사람을 제일 먼저 해독시켜 주겠다!" 그러자 흑의 사내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선비를 죽여 없애려고 발악을 했다. 뚱뚱보 여인 셋은 제각각 병장기를 휘둘러대면서 입으로는 연신 농부를 구슬렸다. "농부, 내 보기엔 네 놈은 우리 보살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주겠다. 지난번에도 그랬잖니? 그러니 내 말만 듣고 어서 보살님 수하가 되라니까." "잡소리 집어치워! 대환희 보살 년이라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 네 년들도 그 뒤를 따르다간 비참하게 죽고 말걸!" 농부는 있는 대로 악을 썼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도 맞고함을 쳤다. "네 놈의 대리국은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불과한데 무슨 그리 잘난 척이 대단하냐! 너희가 하는 짓은 아무리 극악해도 악모가 아니고 우리만 악모를 꾸민다더냐! 대환희 보살님께선 너희네 대리국 군신들을 잡아다가 모두 독벌레한테 죽게 하고 말 게다!" 뚱뚱보 여인들과 농부는 입씨름에서도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농부, 썩 물러가지 못햇! 중뿔나게 버텨 봤자 너희 두 놈은 독약에 중독되어 비명횡사하고 말아!" 뚱뚱보 여인 하나가 소리쳤다. 그때 선비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전력을 다해 박투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농부는 한시 바삐 달려가 선비를 구하고 싶었으나 뚱뚱보 여인들은 의외로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녀들은 각일각 바싹 달려들며 사발, 젓가락, 국자를 휘둘러댔다. 선비가 몸을 날리며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라, 무슨 할 짓이 없어 어린애들까지 해치려 하는 게냐? 그건 절대 안 된다!" 농부는 선비가 자기한테 알려 주느라고 일부러 고함을 쳐대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린애들을 붙잡아 가는 것이 바로 대환희 보살 짓이니 어서 단지흥에게 전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선비가 위험에 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그는 목청껏 나무꾼과 어부를 불러댔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어부와 나무꾼은 나타나지 않았다. 뚱뚱보 여인이 징글맞게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농부, 그따위로 바보처럼 소리를 질러대지 말고 순순히 우릴 따라가! 후회하지 말고!" 농부는 암담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단지흥은 이날 국사를 처리하자마자 급히 치주에게 달려갔다. 치주는 쪼그리고 앉아 새를 구경하고 있었다. 짹짹거리는 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비껴 있었다. 치주는 언뜻 고개를 들다가 단지흥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폐하, 폐하께서 오셨군요!" 단지흥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치주, 요 며칠 사이에 별일 없었는고?" 그러자 치주는 단박에 고개를 숙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힘없이 대답했다. "폐하, 전 요 며칠 사이 무척 괴로웠사옵니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전 견디기가 어려워서……." 단지흥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치주의 손을 쓸어 만질 뿐이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저를 더러운 여인이라고 하시겠죠? 전 순결하지 못한……." 치주는 언뜻 고개를 들고 단지흥을 보더니 말끝을 흐려 버렸다. "치주,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난 너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오래 살기를 원하노라. 나의 마음속에 네가 자리잡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치주는 금세 눈물을 뚝뚝 떨궜다. "폐하, 옛날에 전 한갓 쓸모없는 계집에 불과했고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내의 애정인지도 몰랐사와요. 그러나 폐하의 총애를 받고 나서부터는 전 달라졌사옵니다. 여인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알게 된 것이옵니다. 전 진심으로 폐하 신변에 있는 여인이고 싶었사와요. 하지만…… 전 날마다 대환희 보살이 나를 뒤쫓고 독약으로 죽이려 드는 꿈을 꿨사옵니다. 하나 저는 그걸 폐하께 감히 말씀드릴 수 없었사와요. 저는 다만 언젠가 폐하 곁을 떠나야 할 날이 오면 죽 고 말려고 했었는데……. 이 치주 일찍이 운명이 이처럼 각박하여 그토록 많은 악인들을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단지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얼었다. 그는 다만 그녀의 손을 꼭 감싸쥐고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치주는 일순 눈물을 흘리며 단지흥을 잡아 끌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라. "폐하. 저는 사내들이 왜 그토록 여인을 찾는지 잘 알고 있사와요. 만일 황제께서 저를 거두지 않으시고 더는 저를 여인으로 대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이어 가겠사옵니까?" 단지흥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잘 알고 있었으나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단지흥을 재촉하면서 손을 가볍게 잡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페하, 저는 약재를 얻었는데 그것을 쓰면 더는 아프지 않다 하옵니다. 그럼 피도 흘리지 않을 거고……. 피만 흘리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도 기꺼이 즐기실 수 있을 테죠, 그렇죠?" 치주는 살짝 미소를 띠면서 속삭였다. 단지흥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흡사 어린애 같았지만 그녀 자신은 극구 어린애이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여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주가 능히 여인다운 여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단지흥은 치주의 기색을 보고는 적이 긴장했다. 그는 치주가 다시 피를 흘리지 않을까 몹시 저어되어 넌지시 말을 돌렸다. "치주, 침대에 앉아 내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줘! 난 얘기를 듣고 싶노라!" 그러자 치주는 살짝 웃으며 몸을 안겨 왔다. "황제 폐하, 폐하께선 여인과 함께 있을 때 단지 그녀와 이야기만 나누시옵니까?" 단지흥은 가만히 치주를 끌어안았다. 그는 가슴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치주는 조금도 서글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 이미 궁녀들에게도 밖으로 나가라고 분부해 놓았사와요. 제가 설혹 소리를 지르더라도 방해하지 말라고……." 치주는 자기가 죽고 사는 문제도 뒷전으로 여기고 있었다. 단지흥은 진심으로 감동되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몸을 빼더니 침대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폐하, 올라오세요." 단지흥은 사람 할 짓이 아니라고 도리질을 치면서도 치주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데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어 엉거주춤하니 침대로 올라갔다. 치주는 단지흥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긴장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단지흥은 차츰차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여인의 육체를 갈구하게 되어 일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치주에게 파고들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녀가 지금의 이 어린애 같은 치주가 아니라 성숙하고 정열적이던 예전의 그 치주로만 보였다. 그의 눈앞에는 오로지 지난날의 성숙한 치주가 어른거릴 뿐이었다. 일순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었다. 치주는 황홀하게 웃으면서 속살거렸다. "폐하, 제가 떠난 후 폐하께서는 제 생각을 얼마나 하셨사옵니까? 폐하께서는 조금도 제 생각을 하지 않으셨지요, 그렇지요? 맞사와요. 폐하는 제 생각을 안 하셨을 것이옵니다. 폐하한테는 여인이 한둘이 아닌데 그녀들이 폐하가 제 생각을 하실 틈도 없게 만들었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러 중원으로 가시지 않았던들 어찌 저를 생각하게 되셨겠사옵니까?" 치주는 웃고 있었지만 진작부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곁에 있던 비단 수건을 움켜쥐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게 되면 틀어막으려고 미리부터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치주는 이를 악물었다. 점점 더 고통이 밀려 왔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를 향해 한껏 아름답게 미소를 지을 뿐 눈살 한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일심으로 단지흥이 오매불망 바라는 그런 성숙한 여인이고 싶었다. 이 사내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달가울 것 같았 다. 단지흥은 꿈속을 헤맸다. 그는 그 옛날의 그 치주를 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꿈같은 날로 돌아가서……. 그는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달아 갔다. 치주는 이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급히 그 비단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단지흥은 황홀경에 빠져 눈을 감고 꿈속을 헤매느라 도저히 치주의 기색을 알아챌 수가 없었다. 한 순간 찢어지듯 한 비명 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치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한쪽으로 몸을 틀면서 그예 기진맥진해 버리고 말았다. 단지흥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치주, 치주, 내가 무슨 짓을……." "아니에요, 폐하. 제가 원했던 것이옵니다! 제가 원했사와요! 폐하, 저를 버리지 말아 주소서, 폐하!" 치주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단지흥은 침통하니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폐하, 죄송하옵니다." 치주는 비칠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에 꿇어 엎드려 단지흥에게 세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치주, 그럴 필요 없노라. 내 잘못이야. 난 꿈을 꾼 게야. 옛날로 돌아간 꿈을……. 난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내 한번 천룡사 고승들한테 너를 보여 필히 고쳐 주겠노라. 내 필히 너를 고쳐 주겠노라!" 치주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샘솟듯 흘러 나왔다. "폐하, 폐하께서 이처럼 저를 돌봐 주시니 전 한평생 이 은정을 다 보답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단지흥은 치주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너는 실로 옥인(玉人) 같도다. 내 날마다 꿈에서 널 만나 볼 것 같아." 단지흥은 치주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행복에 겨워 살며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부둥켜안고 살포시 잠에 빠져 들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이 두 남녀는 달콤하게 잠에 취했다. 나무꾼과 어부 두 사람은 황궁을 나가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밤중이 되도록 무슨 이상한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처 걸어 가다가 어부가 언뜻 말을 꺼냈다.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세." "폐하께서는 이 일을 강호 놈들이 한 짓으로 여기고 있네. 그 놈들이 한 짓이라면 관아에서는 본시 조사할 수 없는 터……." 그 순간 갑자기 멀리 하늘에서 별 같은 것이 번쩍 하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저건 저쪽 사람들의 화포로군!" 나무꾼이 외쳤다. 두 사람은 더는 아무 말도 않고 급히 그쪽으로 줄달음쳐 갔다. 얼마쯤 달려갔을 때 그들은 또다시 화포 불빛을 보았다. 그들은 그 불빛을 길잡이삼아 방향을 가늠하면서 내처 달려갔다. 한참이나 달려서야 그들은 그 낡은 절에 당도했다. 그러나 절 안팎을 샅샅이 뒤져도 땅바닥엔 낭자한 핏자국만이 선명할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이곳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싸웠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퍼뜩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적이 심각한 어조였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방금까지 싸움이 있었고 누군가 심하게 부상을 당한 모양이군." 여기에서 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들 중 선비나 농부가 끼여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선비와 농부는 과연 이곳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필시 어떤 놈들과 맞닥뜨려 혈전을 치렀음에 틀림없는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선비와 농부일까. 만일 그들이 부상을 입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황급히 황궁으로 돌아왔다. 대리는 소국이었지만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들은 태평 성대를 누렸다. 큰 사건이 일어나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꼽는다면 보정 황제 때 겪은 대가뭄이나 역시 보정제 재위시 어느 해인가 엽이랑이 어린애를 잡아가 민심을 흉흉하게 했던 것 정도였다. 하나 지금은 연거푸 어린아이들이 없어질 뿐 아니라 대리국에서 가장 지략이 뛰어난 승상까지 종적이 묘연한 판이었다. 단지흥은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고 잠시 묵묵히 말이 없더니 언뜻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경들이 보기엔 어떤 놈들 짓 같은고?" 어부가 대뜸 아뢰었다. "대리국 경내에는 강호객들이 허다하고 강호 문파들도 많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나라의 법도를 어기지 않았고 다른 이상한 조짐도 보이지 않았나이다. 다만 대환희 보살만이 줄곧 폐하와 맞서고 있사온즉, 폐하, 이번 일은 그 여인 소행이 아닐는지요?" 그러자 농부도 읍을 하며 말했다. "소신이 보건대 그 여인이 한 짓이 아니라 하더라도 따져야 할 일이 있사옵니다. 지난번 화산의 무예 시합 때에도 그 여인은 폐하에게 맞섰습니다. 이번에는 결코 가만 놔두어서는 안 되옵니다." "대환희 보살은 강호의 한 파벌이네. 정파(正派)든 사파(邪派)든 어쨌든 강호 사람인 만큼 우리가 대리국의 병력을 움직여 대처한다는 건 타당치 않아." "우린 종래로 대리국의 병력으로 그 여인을 대처하지 않았기에 그 여인이 갈수록 기염이 사나워지게 된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종당에는 우리 대리국 경내에서 독약을 쓰고 어린애를 훔쳐 가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여인이 어린애들을 훔쳐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옵니다. 하물며 이 일로 말미암아 선량한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사온즉,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더욱이 소신이 보건대 주(朱) 승상과 무(武) 형도 필시 이 여인한테 잡혀 간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단지흥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내 친히 경들과 함께 가리로다. 이번 일이 그 여인의 짓인지 밝혀 내 사리를 분명히 하겠노라!" 대리국의 황제들은 무예가 뛰어나 늘 출궁하여 강호객 노릇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다른 황제들처럼 숱한 군사들을 호위병으로 대동하지 않고 홀홀 단신으로 나다니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행차에 무슨 격식 같은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