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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43편 (43/70)

2026-09-30 18:24:37 조회 17
이렇게 일양지를 피하느라 번번이 물러서다 보니 구양봉은 자연 자기 초수를 펼쳐 내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구양봉은 화가 나서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바람개비 돌리듯 사장을 휘둘러 댔으나 단지흥의 털끝 하나도 다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벌써 삼십여 합이나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당신 시위들도 못 돌아간다구!" 구양봉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단지흥은 내내 여유만만하니 동요가 없었다. "글쎄 날 이기기만 하면 난 퇴위해서 중이 될 거고 더는 강호에는 나가지 않겠다는데."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며 수림 속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강변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갔다. 단지흥이 일양지를 내칠 때마다 이는 바람소리와 구양봉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올 뿐이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승상님, 보아하니 당신네 황제는 승산이 없군요. 당신이라고 이 대환희 보살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보살은 구양봉과 단지흥의 일전을 보고 내심 겁이 더럭 나서 한층 더 허세를 부리는 것이었다. 농부는 보살을 보자 치가 떨려 두 주먹을 부르쥐고 불길이 뚝뚝 듣도록 보살을 쏘아보았다. 선비도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우리 사람 둘을 순순히 놓아줘!" "당신이 내 맘에만 든다면야 놓아줄 수도 있지만 보아하니 당신은 쓸데가 없겠군. 그렇게 섬약해서야 어디 이 나무꾼과 어부 못지않게 힘을 쓸 수 있겠소?" 보살은 한껏 빈정거렸다. "내 한 가지 말해 볼까? 당신 소굴은 대양산(大凉山)에 있는 석량동(石凉洞)이란 굴이지? 그 굴에 먹을 것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약탈해 온 물건들을 가득 쌓아 두었고? 어때?" 선비는 한마디 한마디 똑똑 부러지듯 내뱉었다. 대환희 보살은 대번에 낯색이 핼쑥해졌다. "그래서 어쩔 셈이오?" "대환희 보살, 내가 입만 벙긋하면 대리 백성들은 당신네 그 돼지 같은 여인이 하나라도 대리 성안에 나타났다 하면 떼거리로 몰려들어 붙잡으려 들 게야. 그러니 그렇게만 되면 하물며 어느 놈이 감히 당신들한테 먹고 쓸 것을 대주지? 내 그러는 놈들은 몽땅 옥에 집어 넣을 텐데! 난 또 대리국의 모든 병사들에게 뚱뚱보 여인이 나타났다 하면 보이는 족족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리고 당신의 그 석량동을 부숴 버리라고 할 테야!" 대환희 보살은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다. "그래서? 대리 단씨는 종래로 강호에 대해 황궁의 세력을 이용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관례를 깨겠다고? 그따위 속임수로 위협하다가는 된통 쓴맛을 보게 된다는 걸 모르는 게로군!" "내가 왜 당신을 속이겠나? 이번에 화산에 가서 난 당신 보살과 향녀들의 나쁜 행실을 낱낱이 알게 됐어. 난 절대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아!" 보살은 이제 낯빛이 흙빛이 되어서는 악을 써댔다. "이토록 대환희 보살을 업신여기고도 살아 남을 줄 아느냐?" 그러자 선비는 앙천대소를 했다. "당신은 알고 있나? 강호 무리가 아무리 무섭다 한들 종래로 조정과 맞서 본 적은 없어!" "아니, 아니야. 절대 그렇겐 못해!" "황제께선 듣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난 달라. 내 한마디면 전국의 병마가 들고일어나!" 대환희 보살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선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선비가 진심으로 그러는 것인지, 그저 엄포를 놓으려는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호 일에 대해 대리 황궁은 늘 강호의 규례를 따랐으며, 강호의 쟁집(爭執)을 대리국 병사를 동원해 탄압한 적은 없었다. 한갓 승상이 몇 백 년 래의 규례를 깰 수 있을 것인가. 하나 선비가 사뭇 추상같이 호령하는지라 보살은 한껏 풀이 죽어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 진정 어쩔 셈이에요?" "강호의 쟁집에 대해서는 강호 법도에 따라 처리하겠다. 하지만 당신이 나의 두 형제를 붙잡은 건 강호 규례에도 어긋나는 것인즉, 당신은 필시 구양봉의 힘을 빌렸지 당신 재간으로 한 게 아니니 우린 인정할 수 없다. 그 둘을 풀어 주고 나와 당신이 싸우는 게 강호 법도를 따르는 것이다." 대환희 보살은 생각을 더듬어 보고 나서 결연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 말대로 하겠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뒤에 대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 몇이 나무꾼과 어부를 풀어 놓았다. 나무꾼과 어부는 얼른 이쪽으로 달려왔다. 선비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일 지혜롭게 이 두 사람을 빼내지 않았더라면 독살스런 대환희 보살은 이들 두 사람에게 필경 독을 썼을 것이었다. 선비는 그제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나 자신의 명예와 단황 나으리의 명예를 담보로 맹세하겠네. 절대로 대리의 권력을 이용해 그대를 업신여기지 않겠다고 말이야. 강호의 은원은 강호의 수단으로 해결할 뿐."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지척에 있는지라 더는 싸울 엄두도 못 내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가자! 훗날을 기약합시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나이가 교자를 들러멨다. 보살은 천천히 교자 위에 올라가 앉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마냥 선비를 돌아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잠깐! 나에게 예물이 하나 있어요. 단황께 전해 줘요." 그리고는 대환희 보살은 뚱뚱보 여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한 뚱뚱보 여인이 치주를 선비 앞으로 데려왔다. 선비는 머리를 숙여 자그마한 여인을 바투 들여다보았다. "이건 무슨 뜻인가?" "저 앨 단황 나으리께 드리기만 해요. 단황 나으리는 저 애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을 테니!" 대환희 보살은 더는 말을 않고 휭하니 떠나갔다. 보살은 선비에게서 얼굴을 돌리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치주를 단씨에게 줘 버리면 구양봉은 단씨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단씨 속도 긁어 놓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단씨는 이 여인을 다시 가진 뒤 나도 미워하게 되겠지만 더불어 구양봉도 증오하게 될 거야.' 단지흥과 구양봉은 서로 쫓고 쫓기면서 꽤 멀리까지 나갔다. 구양봉은 이 대리 부근에서는 단지흥과 오래 싸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지도록 팽팽히 맞섰으나 여전히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구양봉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단황 나으리, 내게 물건이 하나 있소. 워낙 당신 품 안의 물건이었지만 이젠 내 것이 되었단 말이오. 내 보기에도 그 여인은 정말 쓸 만해. 천하 절색이거든. 난 밤이면 밤마다 가지고 놀았지만 질리지 않더이다. 날 따라가서 그걸 한번 볼 생각이 없으신지?" 단지흥은 그저 웃어넘겼다. 이 구양봉이란 자는 궤계가 많으니만큼 말 그대로 듣다가는 속임수에 걸려들 수도 있었다. "구양봉, 난 이제 이만 하고 돌아가야겠소. 계속 싸울 생각이 있으면 훗날 대리으로 찾아오시오. 내 밤낮 사흘은 싸워 줄 테니!" 단지흥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등을 돌리고는 휘익 바람소리를 내며 경공을 써서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결코 우스개로 한 말이 아니었다. 몇 십 합을 겨뤄도 뜻대로 안 되니 그의 심사나 건드려 내력을 흩트려 놓자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단지흥이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사라져 버리니 멋쩍기 그지없었다. '난 그 여인을 얻은 다음에야 여인의 참 아름다움이 작고 깜찍한데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난 그 여인을 얻고 난 다음부터 매일 밤 아주 만족스럽단 말이야. 그런데도 저 놈은 코방귀도 안 끼고 돌아가는군. 쳇, 건방진 녀석! 사실을 알고 나면 날 죽이려 들겠지? 고소하다, 고소해!' 구양봉은 이제껏 신물이 나도록 여인을 겪어 봤지만 유독 치주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밤마다 그 짓을 하면 번번이 치주가 죽다 살아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치 천하의 여인들이 모두 자신에게 유린당해 신음하는 듯한 쾌감을 느꼈었다. 구양봉은 치주를 얻은 뒤부터 한껏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구양봉은 급히 대환희 보살 뒤를 쫓았다. 삼십여 리나 쉬지 않고 달려가서야 그는 대환희 보살을 따라잡았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치주부터 찾았다. "보살, 내 그 꼬마 미인은 어디에 있나?" 대환희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딴청을 부렸다. "뭐 말이에요, 구양 장주님?" "나의 그 꼬마 미인 말이야!" 구양봉은 몹시 다급했다. 그러나 보살은 대답을 늦잡고 뜸을 들였다. "미녀들은 저마다 장점이 있어요. 당신은 날마다 한 계집만 품에 안을 건가요? 내 오늘은 새로 훌륭한 제자 둘을 내드리지요." "여러 말 말고 당장 그 꼬마 미인을 내놓으란 말이야. 다른 여잔 필요 없어." 구양봉은 정색을 했다. 그러자 보살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당신이 싸우느라 자리를 뜬 사이에 그만 선비와 농부가 달려들어…… 다짜고짜 치주를 빼, 뺏어 갔어요. 우린 전력을 다했지만 그 놈들을 이겨 낼 수 없었지요. 치주는 워낙 자기들의 황비였다면서 큰소리를 탕탕 치면서……." 구양봉은 노발대발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괘씸한 놈, 괘씸한 놈! 내 결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복수를 하고야 말 테다. 단씨 이 노옴……." "구양 장주님, 제발 화를 가라앉히세요. 당신은 천하 으뜸가는 영웅이니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이에요. 그까짓 꼬마를 가지고 뭘 그리 펄펄 뛰시는 거예요. 조만간 내 장주님께 좋은 걸로 하나 선사할 테니, 자자, 그만 화를 삭여요, 화를!" 대환희 보살은 한껏 능청을 떨었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지흥은 밤이 이슥해서야 황궁으로 돌아왔다. 네 시위가 모두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흥은 나무꾼과 어부에게 그 동안의 정황을 캐물었다. 짐작했던 대로 황제를 찾느라 그들도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자, 자세한 얘기는 다음날 듣고 날이 어두웠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일찌감치 자리에 드시지요." 선비가 나섰다. 단지흥은 네 시위를 되찾은데다 주백통까지 함께 있으니 오랜만에 느긋하게 술잔이나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 시위는 한사코 만류하며 휴식을 권했다. 그리고는 더는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주백통을 데리고 황망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네 사람이 무슨 내막이 있는 듯한 눈치라 더는 잡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침소에 혼자 남았다. 황궁 안엔 밤이 깊어 고요히 정적이 깃들여 있었다. 향로에서는 그윽한 향내를 풍기며 용연향(龍涎香)이 타오르고 있었다. 방안 가득 기분 좋은 향내가 피어 올랐다. 단지흥은 자못 기분이 상쾌했다. 그는 화산에서 있었던 무예 시합과 왕중양, 황약사, 홍칠, 구양봉의 출중한 무예를 돌이켜 회상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가 광대하다 보니 별의별 기적과 능인(能人)들이 다 있고 단지흥 자신이 따라잡기 힘든 무예 초수도 허다했다. 그는 이번의 이 행차로 퍽이나 견식을 넓혔다고 생각하며 깊은 사색으로 빠져 들어 갔다. 한 순간, 문득 궁녀 하나가 들어와 조용히 아뢰었다. "황제 폐하, 목욕을 하시지요." 단지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궁녀들이 차례차례 들어와 조용히 손길을 놀리며 단지흥의 시중을 들었다. '제왕의 생활이란 이토록 편안하고 한가로운 것이거니 모두들 제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지당한 일이다. 나처럼 강호객 노릇을 하기 원하는 이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강호객이란 피를 자주 보고 때로는 목숨을 잃는 수도 있으니 어찌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으리.'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욕을 하고 나니 머리 속이 맑고 개운했다. 그는 후원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오랜 여독도 멎은 듯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후원 담장 곁에 서서 스러져 가는 달빛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차꽃을 바라보았다. 늦가을이라 곧 차꽃이 질 터였다. 막 침궁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궁녀 하나가 다가와 정중히 절을 했다. "황제 폐하, 승상께서 가지고 오신 예물을 바치오리까?" "승상이 예물을? 허, 언제 그랬던고? 그럼 가 보자꾸나." "저를 따라오십시오!" 궁녀는 허리를 꺾고 앞장서 길을 잡았다. 한데 후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실로 괴이한 일이로고. 무슨 예물이기에 후궁으로 데려가는 것인가?' 마침내 후궁에 이르자 궁녀는 발길을 멈추고 다시 아뢰었다. "황제 폐하, 침대로 가까이 가시오소서." 궁녀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그쯤 되자 단지흥은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의아한 생각을 떨쳐 내지 못하며 선뜻 방안으로 들어서서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별 색다른 것도 없이 그저 침대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선뜻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휘장 안쪽에서 누군가 가녀리게 우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여인의 소리였는데 아주 귀에 익었다. '실로 괴이하군……. 아니, 영고일까? 그녀가 왜 자기 처소도 아닌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내가 황궁을 비운 지 너무 오래 되어 이처럼 슬퍼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이 들자 단지흥은 영고가 가여워졌다. "울지 마오. 내가 왔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그러자 안에서는 이제 아예 흑흑 흐느끼는 것이었다. "울지 마오, 울지마! 울지 말라니까. 어디 봅시다." 그는 휘장을 확 거머쥐었다. 그러나 여인은 휘장 모서리를 더한층 세게 틀어 잡었다. 단지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영고, 너무 그렇게 성을 내지 마오. 내가 밖으로 나간 건 다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오? 난……." 그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닿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간 것은 단지 화산 무예 시합에 가기 위해서만 아니었다. 그는 가는 길에 몇 년 전 사라진 치주를 찾아볼 요량으로 일찌감치 황궁을 나서지 않았던가. 여인은 일순 울음을 뚝 그쳤다. "폐하께서는 제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단지흥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치주가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소?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하니 내 화산에 간 김에 치주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느라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오. 치주는 절대 예가 싫어서 도망갈 사람이 아니야. 그 여인은 필시 어느 파의 강호객이 납치해 갔을 게요. 난 그 여인을 찾아야 하오. 누가 감히 대리의 황비를 납치해 갔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리고는 단지흥은 다짜고짜 휘장을 확 열어제쳤다. 너무나 의외였다. 영고가 아니라 깜찍할 정도로 자그마한 여인이 침대 위에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단지흥은 깜짝 놀라 그 여인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 여인, 그 여인은 다름없는 치주였다. 얼굴 모습은 그대로인데 무슨 고초를 겪었음인지 기막힐 정도로 작아진, 틀림없는 치주였다. 그는 할말을 잃은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이윽고 큰소리로 외쳤다. "치주, 네가 치주이냐? 참말로 치주란 말이냐?" 치주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제 폐하, 제가 치주예요. 제가 치주……." 단지흥은 장탄식을 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치주를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단지흥은 더할 수 없이 격동되었다. 황제 노릇을 하면서 한 여인 때문에 이처럼 격동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무수한 여인들을 겪어 봤지만 그 어느 여인도 치주처럼 그를 격동시키지는 못했었다. 오늘 그는 치주로 하여 황제가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한 평범한 사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치주, 너는 어찌하여……." 그는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몰라 뚫어지게 치주를 바라보았다. 치주는 그저 뜨거운 눈물을 쏟아 낼 뿐이었다. "황제 폐하, 폐하는 치주를 잃고 대신 보잘것없는 계집애를 하나 얻으셨사옵니다." 단지흥이 생각해 보아도 치주는 사라지고 치주의 그림자만 남은 듯했다. 이 여인은 치주의 얼굴, 치주의 웃음, 치주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 치주는 아니었다. 예전의 그 성숙한 치주는 그곳에 없었다. 지금 앉아 있는 여인은 하나의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치주였다. "치주, 왜 이렇게 되었느냐?" 단지흥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통하게 말했다. 그러자 치주는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한동안 이렇게 울고만 있더니 이윽고 그녀는 그날 밤 후원에서 처음으로 단지흥을 만났던 일이며 원래부터 천애 고아 신세로 먹을 것이 없어서 창산을 헤매다가 대환희 보살 눈에 띄어 그녀의 동굴로 잡혀 간 일, 그날 밤 충피에게 납치된 일, 그리고 자기는 추호도 단지흥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도 거짓이 없이 솔직하게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단지흥은 치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작아서 마치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얘기하는 내내 가엽게도 덜덜 떨고 있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에게 뜨거운 정이 솟구침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측은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 동안이나 나직나직 이야기를 하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비장하게 말했다. "전 줄곧 고통을 당했지만 그 고통이 두렵지 않았사옵니다. 전 언젠가는 꼭 폐하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사옵니다. 폐하를 만나기만 하면 전 제 진심을 모두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단지흥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치주, 난 그 몇 해 동안 줄곧 너를 찾았었노라……." 날은 진작에 저물었고 점점 더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영고는 눈이 빠지게 단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단지흥이 자기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단지흥과 같이 있게만 된다면 더는 옥신각신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정성을 다해 즐겁게 해 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단지흥과 꿈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여인은 물과 같고 사내는 불과 같다는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도 물 속에 들어가면 꺼지고 만다. 그러니 자기 아닌 다른 여인에게 몸과 마음이 뺏겨 버리면 자기를 향해 타오르던 그의 불길은 꺼져 버리지 않겠는가. 그가 떠나간 이후 그녀는 골똘히 이 생각만을 하면서 앞으로 더는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고 여인의 매력을 다해 그를 사로잡아 그가 더는 다른 여인한테 마음이 끌리지 않도 록 하리라고 작심했다. 사내가 떠나간 지 여러 날이 되었으니 그 동안 여인을 가까이하지 못한 욕정이 불같을 것임은 뻔한 일이다. 그가 만일 자기를 찾아온다면 그의 가슴속 불을 모두 사르고 그 자리에 잔잔한 물결이 찰랑이게 해 줄 터였다. 영고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뭇 정성 들여 요염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는, 그녀는 온밤을 꼬박 새우며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경이 되도록 그는 올 줄을 몰랐다. 단지흥은 치주를 안고 있다가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치주, 그 놈들에게 그런 곤혹을 당하면서 너는 내 생각을 했겠지?" 치주는 몹시 지쳐 있었지만 성심껏 대답했다. "전 언제나 폐하 생각을 했사와요……. 한 순간도 폐하를 잊은 적이 없었사와요……. 늘 폐하 생각을 하면서 고통을 잊으려 했었사옵니다……." 단지흥은 몸서리 쳐지도록 격분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치주에 대한 연민이 강해지고, 그녀의 육체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치주가 아니었다. 다시 옛날의 그 치주가 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욕정을 더는 받아 낼 수 없는 몸, 그녀는 꽃떨기가 아니라 꽃봉오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치주는 일순 육감적으로 단지흥이 자기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 폐하, 폐하는 저를 원하고 계시는군요?" 단지흥 역시 사내였다. 아무리 지위가 높더라도 사내라는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누구나 여인 앞에서 일종의 미친 듯한 갈구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는 불타는 눈길로 뚫어지게 치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내흔들었다. "자, 그런 소린 말고 이제 그만 잠을 자 둬, 피곤할 테니……. 나도 그만 가서 쉬어야겠다." 이제 치주에게서 여인의 성숙미를 원해서는 안 된다. 그는 몹시 착잡했지만 내색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치주는 그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는 뜨거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절 불쌍히…… 여겨 주시와요. 제발, 제발 가지 마시와요……." 단지흥은 못내 서글펐다. 그는 힘없이 주저앉아 와락 치주를 끌어안았다. 말은 안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있다는 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그만한 치주를 어떻게…… 단지흥은 마음속으로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폐하는 제가 싫어지셨나요? 제발 절 버리지 마시와요. 제발, 폐하……." 치주는 가냘프게 어깨를 들썩였다. 단지흥은 더욱 힘껏 치주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있노라니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