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41편 (41/70)
그러자 등아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머리를 돌려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곽 대협께서는 무고하신가요?" 곽명송은 흠칫 놀라며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 한데 왜 내게 알은척을 하는 게요?"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겠나요? 곽 대협께선 이 시구를 기억하시겠죠?" 그러자 곽명송은 꺽꺽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당신은……." "곽 대협께선 분명 제 가슴을 보시겠다고 하면서……. 그리고 나서는 제가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여인이 아니라는 걸 아셨지요?" 곽명송은 낯색이 새파래지면서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난……." 그는 자기의 혼백을 빼앗아 간 그 여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뿐더러 그 여인의 가슴을 만져 보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른다. 그는 종래로 여인을 가까이해 본 적이 없었고 더욱이 그것이 처음이었으므로 결코 그때 그 여인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는 정작 이 여인을 대하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날 밤, 웬지 미치도록 정욕에 불타 올라 온밤 함께 정을 나눈 여인이 정녕 이 여인이란 말인가……. "좋소! 잘 왔소! 잘 왔어……." 곽명송은 의외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향녀, 난 그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소. 난 그날 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소." 등아는 곽명송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한껏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그런가요? 당신이 그날 밤 일을 그처럼 맘속에 새겨 두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러시다면 제가 다시 하룻밤 동무해 드릴까요? 저의 수하엔 숱한 향녀들이 있어요. 그녀들의 재간이란 곧 사내들에게 동무를 해 주고 즐겁게 해 주는 거예요. 그리하여 그 사내들이 제 나름으로는 아무리 건장하다고 여기더라도 그 정을 잊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지요." "나에 관한 한은 당신 맘대로 처리하시오. 당신이 날 죽일 생각이면 죽이시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은 그날 밤 내게 진심이었던가 말해야 하오. 자, 어서 말해 보오……. 그날 밤 여인이 참말로 당신이었던가……." 곽명송은 죽더라도 그 의문만은 정녕 풀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 여인이 진정 그 여인이었던가, 그는 정말 확신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날 밤 이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등아는 웃음을 날렸다. 그녀의 웃음은 싸늘하니 얼음장 같았다. "당신은 향녀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내의 품에 안기는 줄 알았나요? 내 이번에 확실히 알려드리지요. 향녀는 어느 사내의 품에 안기게 되면 그땐 기어이 그 사내를 죽여 버리게 돼요. 그 사내가……." 등아는 잠시 말을 끊고 단지흥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내가 참말로 죽이기 어려운 경우, 향녀가 그 사내를 죽일 수 없는 경우를 내놓고 말이에요……." 등아는 다시 말을 끊고 향녀들을 돌아보았다. "이리 오너라!" 등아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한 향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애티가 어려있었다. 그 향녀는 곽명송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곽명송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쳐 물었다. "전 향녀예요. 제가 바로 그날 밤의 그 여자예요." 그 여인은 말을 똑똑 끊어 가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곽명송은 격하게 고갯짓을 하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거짓말이오. 난 다만 한 여인과……." "그 여인이 바로 저예요." 여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더니 천천히 앞섶을 풀어헤쳤다. 이윽고 그녀의 앞가슴이 다 드러났다. 놀랍게도 아름다워야 할 그 여인의 앞가슴은 보기 흉하게 문드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아 하고 짧게 비명을 토해냈다. 단지흥이 좀전에 유방이 문드러진 여인들이 있다는 소리를 했을 땐 도무지 믿기지 않아 긴가민가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두 눈으로 그 모습을 직접 대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흥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저 여인은 굳이 저럴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는 몹시 안타까웠다. "좋소. 이젠 됐소. 어서 앞섶을 여미시오. 난 결코 그대가 그렇게까지 하기를 원하지 않소. 이젠 다 됐으니 어서 날 처치하시오." 곽명송은 장탄식을 하고는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는 눈을 감은 채 죽음을 기다렸다. 그것을 보고 단지흥이 대뜸 소리쳤다. "아니야, 난 이 여인들을 알고 있소. 이 여인들은…… 전부 이렇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이 말을 들었다. 단지흥은 그만 해서는 안 될 말, 숨겨진 향녀들의 비밀을 발설하고야 만 것이다. "단황 나으리, 당신은…… 당신은……. 내 분명히 말했었소, 향녀의 비밀을 아는 사내는 그 누구도 살아 남지 못한다는 것을! 여봐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단황 나으리만 내놓고 몽땅 죽여 버려라!" 등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단호하게 외쳤다. 향녀들은 저마다 칼을 빼 들었다. 단지흥은 화산파를 구하려던 것이 되레 그 한마디로 화산파에 큰 화가 닥치게 되자 급급히 외쳤다. "등아, 그따위 억지는 이제 제발 그만두시오! 내가 여기 있는 한 감히 한 사람도 죽이진 못해!" "단황 나으리, 내 보기엔 당신은 인정이 헤픈 사람이에요. 황제가 이런다는 건 참말 쉽지 않아요. 그래서 난 당신을 그냥 놔주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더는 날 건드리지 말아요!" 등아는 냉랭히 쏘아붙였다. 그러나 단지흥은 단념할 수 없었다. "등아, 제발 그만두시오! 당신이 그만둔다면 나도 당신을 더는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소." 그는 몸을 솟구쳐 향녀 등아 앞에 떨어져 내렸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하필 나한테 이럴 게 뭐예요? 기실 향녀들이 하는 일을 당신은 관계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걸 정녕 모르겠어요?" 등아는 있는 대로 목청을 높여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리고는 곽명송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향녀, 네 일을 마저 끝내거라!" 스스로 곽명송과 하룻밤 연정을 나누었다고 나선 그 향녀는 적이 비장하게 곽명송에게 외쳤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실 건가요?" 곽명송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참말로 자기가 이 처녀를 위하여 꼭 죽어야만 하는 것인지 선뜻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화산파의 일로 자결한다는 건 실로 광명정대한 일이나 이들 향녀들을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건 아무래도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 향녀가 원한이 사무쳐 자기를 죽여 버린다면 모를까……. 해서 그는 그대로 향녀가 자기를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은 날카롭게 곽명송을 쏘아보더니 대뜸 소리쳤다. "좋소, 곽명송. 당신이 죽고 싶지 않다면 내가 죽겠어요!" 향녀는 과연 비수를 꺼내더니 삽시에 자기의 가슴팍을 푹 찔렀다.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금 짤막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애처롭게 비명을 내지르며 힘없이 풀썩 쓰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누구도 어찌할 틈이 없었다. 단지흥은 장탄식을 했다. "등아, 왜 이러오? 도시 왜 이러는 거요?" 그러자 등아는 혼자말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린 향녀예요. 제 이름이 왜 등아인지 아세요? 당신은 부나방이 불에 날아드는 걸 보지 못하셨나요? 최후로 죽을 사람은 바로 우리 향녀 자신들인 거예요. 우린 언제나 최후의 죽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곤 하지요……." 등아는 머리를 푹 숙인 채 향녀들에게 손짓을 했다. 두 향녀가 나와서 죽은 향녀의 시체를 묵묵히 들어 내갔다. 단지흥은 멍하니 서서 그러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다.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그는 이제야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었다. 향녀는 결국 향녀일 뿐 결코 다른 여인들일 수는 없다. 그가 그토록 사람의 정과 사랑을 얘기해 주었건만 그녀들은 사내란 사내들은,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사내들만 골라 가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제 손으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이거 대체 무슨 장난이야? 그처럼 쉽사리 제 손으로 목숨을 끊다니? 재미없다, 재미없어! 재미없는 노릇이다." 주백통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자 단지흥은 비감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백통 형, 당신의 그 말은 틀렸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오. 무림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디흔하지만 스스로 자결하는 일은 별로 없소. 남을 죽이기보다 제 목숨을 제가 끊는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오." 등아는 뚫어지게 단지흥을 바라보고 있더니 불쑥 말했다. "단황 나으리, 우린 오늘 서른일곱이 왔어요. 당신이 절 방해하면 이곳에 서른일곱 개의 주검이 널리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향녀란 최후로 불에 뛰어드는 법이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결국 천하에 더는 향녀 등아란 이름이 남아 있지 않게 될 거예요." '보아하니 오늘 일은 참 시끄럽게 됐구나. 내가 저 여인들을 간섭하면 여인들이 자결할 것이고, 관계하지 않으면 화산파 사람들이 몽땅 죽게 됐으니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단지흥은 통탄을 금치 못했다. "향녀, 향녀!" 곽명송이 연해 울부짖으면서 눈물을 쏟아 냈다. 한켠에 서 있던 화산파의 처녀는 곽명송이 이처럼 진심으로 향녀의 죽음을 애달파 하는 것을 보자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흐느끼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명주, 명주야!" 노파가 소리를 지르면서 뒤쫓아 나갔다. 곽명송은 명주라는 처녀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이제 막 문 밖으로 들려 나가는 향녀의 시체를 눈길로 좇으며 비탄에 잠겨 넋두리를 했다. "향녀, 당신은 왜 이처럼 지독하오, 왜 이처럼 지독해……." 등아가 냉혹하게 외쳤다. "곽 대협, 당신이 만일 자각하지 못하고 계속 그러고만 있는다면 당신네 화산파 제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돼요!" 곽명송이 일어서면서 단호히 말했다. "화산파는 그대들과 아무런 원수진 일이 없다! 다만 이 곽명송이 그대들의 인명 하나를 빚졌으니 어서 이 곽모를 가져가거라!" 그리고는 곽명송은 눈을 질끈 감고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등아는 강고하게 말했다. "향녀의 비밀을 안 이상, 화산파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야 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향녀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화산파 제자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삽시에 고함소리와 비명 소리, 검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무했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鮮于淳)은 몸을 솟구쳐 등아 앞에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네 년이 아무리 우리 화산파를 망치려 들어도 어림도 없다! 향녀, 내 오늘은 결코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등아를 향해 똑바로 장을 내뻗쳤다. 그러나 등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받아 검을 휘둘러댔다. 단지흥은 어떻게 해야 등아를 설복할 수 있을지 몰라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한편으로 어떻게 해야 이 화산파 사람들을 돕게 되는 건지도 몰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어 그는 무작정 큰소리를 지르며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선비와 농부도 뒤따랐다. 그러자 한 향녀가 눈을 부릅뜨고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황제 폐하, 우리 향녀들은 폐하한테 한 번도 불경스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건 맞는 말이다. 하나 난 도저히 살생을 묵과할 순 없다. 양쪽이 다 손을 털고 물러서기 전에는……." 단지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향녀가 소리소리 질렀다. "어서 물러나요!" 그때 그 향녀 바로 옆에 있던 화산파 제자 하나가 그 틈을 타 잽싸게 그 향녀의 앞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향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만 똑바로 일 검을 맞고는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녀는 희멀건 눈길로 단지흥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내뱉었다. "단황 나으리, 결국 당신은 절 해쳤어……." 단지흥은 난감하여 두 손을 떨군 채 말이 없었다. 그 사이 주백통이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향녀들을 도와 화산파 제자들의 공격을 막아 주고 화산파 제자들을 도와 향녀들의 공격을 막아 주면서 사람들 속을 벌이 제 집 드나들듯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등아는 한켠에서 선우 장문인과 초식을 주고받으면서 단지흥에게 소리쳤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그토록 우리 향녀들이 이곳에서 몽땅 죽어 버리는 걸 소원하신다면 화산파 편을 들어도 좋아요!" 단지흥은 주백통을 빤히 바라볼 뿐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그는 결코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화산파 제자들이 죽어 넘어가는 것 역시 원치 않는 터, 어찌 됐든 두 측에서 한데 엉켜 생사박투를 벌이는 것은 도저히 그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도처에 핏자국이 질벅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장탄식을 했다. "무림의 쟁단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인가? 한번 맞붙으면 온 땅에 주검이 널리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우순의 장법은 자못 능란하여 그는 등아를 계속 뒤로 밀어붙였다. 등아는 비록 초수는 원만했으나 내력이 약해 그녀가 선우순을 당해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향녀, 이쯤에서 물러가거라! 말을 듣지 않으면 너 향녀란 이름이 강호에 더는 남아 있지 못하게 된다!" 선우순은 연거푸 장을 내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향녀는 코웃음만 쳤다. "네 놈은 향녀들이 불에 뛰어든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더냐? 우린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너희들 화산파 손에 죽으나 천하에서 으뜸가는 왕중양 손에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야. 네 놈이 목숨을 내놓기가 소원이면 어디 나하고 맞바꿔 보자!" 그러더니 초수를 다하여 선우순에게 더욱 바싹 공격을 들이댔다. 선우순은 잔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슬쩍 몸을 피하고는 눈방울을 데굴거리며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그는 진작에 단지흥과 이 향녀가 보통 사이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는 터, 만의 하나라도 단지흥이 향녀와 한편에 서는 날이면 화산파는 오늘부로 끝장이 나고야 말리라는 걸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일심으로 향녀에게 권고만 할 따름이고 그녀들을 도와줄 의향이 없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확신이 서자 선우순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화산파 제자들아, 화산파의 존망은 바로 이 싸움에 달렸다! 추호도 사정을 두지 말아라!" 화산파 제자들 중에는 애시당초 이 향녀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꽃같이 아름다운 이 여인들에게 살수를 써서 죽이기는 못내 꺼려졌었다. 하지만 이 향녀들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박도(薄刀)를 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판에 장문인의 호령을 듣자 모두들 소리를 지르면서 결사적으로 향녀들을 찔러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이 늘어났다. 주백통을 수두룩이 널린 시체를 보며 안타까이 소리를 질렀다. "재미없어, 참말 재미가 없단 말이야. 그저 놀면 되는 거지, 사람은 왜 죽여? 난 안 놀겠다, 안 놀겠어!" 그리고는 두 팔을 내려뜨린 채 성큼성큼 한켠으로 비켜섰다. "향녀, 나의 화산파는 네 년들과 끝까지 해 볼 테다!" 선우순은 동자의 손에 들려 있던 화산파의 진산보검(鎭山寶劍)을 낚아채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등아도 얼른 수격자(手擊子)를 들고 버티고 섰다. 등아는 이제까지 여지없이 몰렸으면서도 여전히 태연자약하니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선우 장문, 화산파가 평정되면 당신은 더는 그 무슨 장문 노릇을 못하게 될 게다. 만일 강호에서 누가 화산파를 언급하게 된다면 그것은 과거사를 두고 하는 말이 되겠지." "발칙한 계집이로군. 정히 그렇다면 내 네 년에게 화산파의 검술 맛을 보여 줄 테다." 평소 사람들은 권법(拳法)은 소림(少林)에서 나오고 검법(劍法)은 화산(華山)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그토록 화산파의 검술은 풍부하고 심오한 것이었다. 화산파 장문인 선우순의 검술은 실로 경지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었다. 선우순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등아를 향해 똑바로 검을 찔러 갔다. 다음 순간, 등아의 눈앞에서 선우순의 검이 빗발치듯 춤을 추었다. 등아는 눈앞이 아물거려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그녀는 온 힘을 모아 날아드는 검을 연거푸 수격자 로 걷어 냈다. 쌩쌩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채 몇 합 받아내지도 못하여 그녀는 군데군데 검날에 할퀴어 피가 낭자해졌다. 등아는 분기탱천하여 큰소리를 내질렀다. "선우순, 네 놈 검술은 과연 대단하군. 오늘 이 자리에서 난 네 놈과 함께 죽고 말 테다!" 선우순은 냉소를 날리면서 더욱 힘껏 검을 찔러 갔다. 다시 채 십여 합도 못 돼 등아는 십여 군데나 더 상처를 입었다. 비록 중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피가 낭자하여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선우순은 사기충천하여 고함을 질러댔다. "화산파 제자들아, 저 년들을 몽땅 죽여 없애 강호의 큰 화근을 뽑아 버려라!" 그러면서도 선우순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한 순간, 등아는 그의 검을 막아내다가 비틀 쓰러지고 말았다. 선우순은 잽싸게 달려들어 검 끝으로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건방진 계집, 어디 죽어 보아라!" 등아는 체념한 표정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선우순은 언뜻 사위를 살폈다. 화산파 제자들은 여전히 향녀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는데 오히려 향녀들 쪽보다 더 많이 죽어 있었다. 이 향녀들 역시 누구 하나 무예가 약하지 않아 선우순 같은 고수를 대적하기는 어려워도 화산파 제자들쯤은 너끈히 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우순은 등아를 제압해 사뭇 득의양양했으나 화산파 제자들이 연신 밀리는 것을 旦고는 속이 타서 고함을 쳤다. "등아가 죽고 사는 건 이미 내 손에 달렸거늘 너희 향녀들은 계속 싸울 셈이냐?" 화산파 제자들은 그 말을 듣자 삽시에 사기가 부쩍 올랐다. 그러나 향녀들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됨이 없이 여전히 결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댔다. 등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냉소를 날렸다. "네 놈은 뭘 모르는군. 향녀는 스스로 등불에 덮쳐 든다. 한 번 죽으면 그뿐, 우리 향녀들은 결코 싸움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러자 선우순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는 타산이 밝은 사람이었다. 이 향녀 등아를 죽인다고 해도 저쪽의 형세를 변화시키기에는 별 소용이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 화산파 제자들이 몽땅 죽어 버린다면 이제 장문인 노릇이고 뭐고 없지 않은가. 자기가 등아를 붙잡았는데도 향녀들이 끄떡도 않고 계속 싸우니 선우순 내심 흠칫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단지흥이 길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한데 엉켜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훌쩍훌쩍 날아오르며 삽시에 향녀들을 제압했다. 화산파 제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 틈을 타 향녀들을 죽여 버리려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한 사내가 즉시 손을 쓰려고 하다가 불이 번쩍 나도록 뺨따귀를 몇 대 얻어맞았다. 주백통이 손을 거두며 눈알을 부라리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어부지리를 얻으려고는 생각도 마라!" 주백통이 손을 쓰자 화산파 제자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화산 무예 시합 이후 단지흥과 주백통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해 이 두 사람이 나서자 화산파 제자들은 더는 손을 쓰지 못했다. 선우순은 단지흥의 처사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 놈이 황제 노릇을 할 거면 대리에서나 할 것이지 이곳 일까지 간섭할 게 무언가? 어쨌든 난 우리 화산파에 유리할 대로 해야겠다. 네 놈이 화산파에 불리한 짓을 하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 테다.' "모두 싸움을 그만두고 내 말을 들으라." 단지흥이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모두들 떨떠름하니 두 팔을 내려뜨렸다. "등아, 그대는 왜 화산파를 없애 버리려고 하오?" 단지흥은 등아와 선우순 쪽으로 내달아 등아를 내려다보며 꾸짖 듯 소리쳤다. 등아는 두 눈을 감은 채 나직이 읖조렸다. "등아가 불에 뛰어드는 건 타 죽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더는 다른 말을 말고 어서 죽이기나 하세요. 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선우순은 그녀의 목을 겨눈 검을 내지르지도, 걷어들이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그따위 소린 집어치워! 네 년이 화산에 와서 나를 밀어내고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네 년 말대로 내 오늘 네 년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단지흥은 훌쩍 내달아 선우순을 등아에게서 한 걸음 떼어놓고 다시 물었다. "등아, 왜 화산파를 없애 버리려고 하오! 어서 말하시오!" "단랑(段郎), 더 묻지 말고 자기 일이나 관계하세요." 등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소곳이 말했다. 단랑이라니, '랑'이라고 함은 연인에게 붙이는 칭호가 아니던가. 단지흥은 그 소릴 듣고는 그만 가슴이 찡하니 저려왔다. '저 여인은 내게 은혜를 베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