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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40편 (40/70)

2026-09-30 18:24:37 조회 16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입도 벙긋 못하고 서 있었다. "화산파는 종래로 강호에서 명문(名門)에 속하는 큰 파였느니라. 이번에 왕중양 진인께서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화산에서 고금에 없는 무예 시합을 열었도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화산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장문인의 말이 길어지자 안주인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자 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사설을 싹 빼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들에게 오늘 화산파의 형당(刑堂)에서 너희들의 과실에 대해 중벌을 내리려 하노라!" 보아하니 낄 자리가 아닌 터, 단지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화산파 장문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화산파에서 오늘 내무를 처리하시는데 외인인 우리가 방해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남이 화산파의 내부 일을 아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 안주인이 웃으면서 톡 끼여들었다. "화산파가 무슨 남이 알아서는 안 될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러자 장문인은 다소 불평스런 기색이면서도 더는 말을 안 했다. 그대로 있어도 좋다는 뜻이 분명하자 단지흥은 할 수 없이 읍을 하고는 도로 두어 걸음 물러나왔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장문인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명송이, 나오거라!" 대협 곽명송은 화산파의 수제자였다. 곽명송은 넙죽넙죽 걸어나와 노인들에게 머리를 깊이 숙였다. "사숙님,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요?" "명송아,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로 네가 화산파의 가장 큰 제자이니라. 그래서 나는 감히 너를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못했거늘, 요사이 넌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곽명송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중히 답했다. "사숙님, 저는 요사이 강호를 다니면서 선한 일을 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못 됩니다." 그러자 안주인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으래? 네가 하고 다닌 일이 모두 대단한 게 아니라구? 내 듣기로는 네가 놀라운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럼 그 말이 모두 거짓이더냐? 한치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아뢰거라!" 곽명송은 몹시 의아했다. 사숙모께서 무슨 일을 두고 저러시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명송은 다시 예를 갖추어 말했다. "사숙모님, 무슨 일을 지칭하시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허, 모른다? 네가 한 짓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자, 갖다 보거라! 이걸 보고도 딴소리를 하는지 내 두고 보리라!" 안주인이 종이 한 장을 곽명송에게 내던졌다. 곽명송은 날아오는 종이를 묘하게 받아 들었다. 단지흥은 내심 그 솜씨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곽명송은 묵묵히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대번에 핼쑥해져서는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이 일은……." "명송아, 화산파의 법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넌 법도를 어겼느니라. 네 죄를 알렷다?" 안주인이 추상같이 추궁하자 곽명송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숙을 바라보았다. "사숙님, 전 그때……." "또 변명을 하려는고? 네가 한 짓이렷다? 사실대로만 고해라!" 장문인도 호통을 내질렀다. 그의 눈에서는 마치 불이 뚝뚝 떨어지는 듯싶었다. 곽명송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했다. "저, 저는 다만……." "명송아, 사부님이 살아 계셨을 때 사부님은 너만 편애하시며 부러 너의 사매(師妹)도 홀대했었느니라. 오늘 넌 악한 일을 저질렀으니 네 스스로 후과를 처리하거라." 안주인은 적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쥐죽은듯이 숨을 죽이고 한옆에 서 있던 처녀가 울상이 되어서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조르르 달려 나와 대뜸 입을 열었다. 화산 아래 취선루에서 곽명송 곁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아버지, 어머니! 큰 사형께서는 종래로 의리를 중히 여기시고 재물을 분토같이 여기셨어요. 사형께선 화산파에 누가 될 짓을 저지를 분이 아니니 섦게 대하지 마세요." "명주(明珠)야, 넌 물러서거라. 여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안주인이 말을 막았다. 처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영감이 말을 이었다. "명송아, 네가 남의 여인을 간음한 일이 있으니 투서가 들어온 게 아니냐. 그 사람들은 조만간 화산파를 찾아와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 그래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게 제일 좋겠지요!" 곽명송은 가벼이 탄식을 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동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자들은 사뭇 예의를 갖춰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에게 검을 갖다 주었다. 그는 검을 받아 들더니 잠시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한 순간, 그는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칼을 힘껏 치켜 들었다. 자신의 목을 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처녀가 와락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형, 그따위 바보 짓은 하지 마세요!" 그러나 곽명송은 아랑곳 않고 자기 목을 향해 검을 힘껏 내리찍었다. 화산파 제자들도 발을 동당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일순 한옆에 비켜서 있던 단지흥이 가볍게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쨍 하는 소리가 일며 검날이 옆으로 살짝 비켜 갔다. 그 틈에 화산파 제자들은 용기를 내어 우르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장문인은 아무 말 없이 쏘아보고 있더니 단지흥에게 눈길을 돌리며 한마디 내쏘았다. "이보시오, 손님! 당신이 이렇게 하는 건 우리 화산파의 내부 일을 참섭하는 것이오!"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중히 말했다. "난 화산파 일을 참섭한 게 아니오. 다만 당신들 화산파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걸 막았을 따름이오." "그건 살인이 아니라 화산파 법도요. 난 진작부터 당신이 대리의 황제라는 걸 알고 있은즉,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이 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묵과한 것이오. 그런데 항차 황제라고 해서 우리 화산파 일에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이오?" 단지흥은 웃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단황 나으리, 듣건대는 당신은 화산 무예 시합에서 솜씨를 보였다더군요. 천하에 다섯 고수가 있는데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이 다섯 사람을 이르는 것 아니오? 그래, 당신이 다섯 고수에 꼽히는 남제이니 만큼 우리 화산파를 무너뜨리기야 누워서 떡먹기겠지!" 장문인은 한사코 목청을 돋웠다. 단지흥은 그저 생각 없이 곽명송을 구해 낸 걸 가지고 그가 이처럼 걸고 넘어지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전 다만 이 곽 대협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걸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저 사람이 참말로 화산파를 대신하여 죽을 만한 죄를 지었는가, 저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명송아, 저분 뜻이 정히 그러시다니 네가 직접 네가 한 짓을 말씀드려라." 장문인은 호기롭게 내쏘았다. 그러자 곽명송은 단지흥을 향해 깍듯이 예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단황 나으리, 사려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제가 지은 죄는 너무도 크므로 황제께서 저를 대신하여 죄를 사해 달라고 청을 드려도 전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곽명송은 말을 마치더니 그 종이 한 장을 단지흥에게 넘겨주었다. 단지흥은 급히 받아 들어 펼쳐 보았다. 하나 그 종이에는 기이하게도 열 몇 자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창 앞이 밝고 땅속이 밝은데 정의도 몰라봐서야 되겠나요. 단지흥은 곽명송이 어떤 여인과 남모르게 무슨 정사를 치렀는가 하는 것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지라 그 열 몇 자 되는 글을 아무리 새겨 보아 봤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기실 설사 곽명송이 남의 소녀를 간음했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도무지 그 소녀가 편지로 곽명송의 죄를 공소하고 화산파의 처사에 증오를 느껴 복수하려는 내용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또한 이 편지만 보고서는 곽명송을 그리는 것인지, 찾아서 복수하겠다는 것인지 그 심사조차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문인은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했다. "명송아, 네가 간음 죄를 지었은즉, 의당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느리라. 그렇게 해야 우리 화산파의 기개가 손상받지 않는 거다." 그리고는 그는 뒤미처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남제께서는 고명한 분이기는 하지만 명송이를 한평생 건사할 순 없지 않겠소이까? 당신이 일단 떠나가면 저 명송이는 결국 죽어야만 하오." 단지흥은 그 편지도 기이할 뿐더러 다소 의외의 일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 순간 주백통이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면서 대뜸 내뱉었다. "이봐요, 노인장! 당신은 저 사람이 죽어선 안 된다는 걸 왜 모르시오? 사람들은 저 사람을 대협이라 부르며 그가 큰일을 해내리라고 믿고 있소. 당신이 저 사람을 죽이는 건 음덕(陰德)이 없는 짓 아니오?" 주백통은 그제야 그가 화산 아래 취선루에서 만난 그 청수 검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주백통의 이 한마디에 처녀가 반색을 하며 그때껏 곽 대협이 한 선행을 쭉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큰 사형께선 하남에 있는 열일곱 가족을 구해 주었고 약탈당한 보물들도 다 찾아 주었지요. 또 사형께서는 호위표국(虎威 局)의 열여섯 사람도……." 장문인이 버럭 성을 내며 그 말을 가로챘다. "주둥아리 놀리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그러나 처녀는 순순히 굽어 들지 않고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는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참말이에요. 큰 사형은 우리 화산파를 위해 적지 않게 힘을 썼다구요." 단지흥은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자못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남녀간의 일로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었다. "화산파는 천하의 명문대파(名門大派)인데 함부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걸 천하 무림에서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없을 텐데요?" 단지흥이 다시 나서자 안주인이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 화산파 일에 참섭하겠단 말이오?" 단지흥이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데 그 틈을 비집고 주백통이 냅다 윽박질렀다. "허 참,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소? 화산파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화산파, 화산파, 그러시오? 우리가 참견하고 싶으면 참견하는 게지, 그게 뭐 어떻단 말이오?" 그러자 곽명송이 대뜸 나섰다. 그는 자기 하나 때문에 사숙과 사숙모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단황 나으리, 이 곽명송은 일찍이 당신을 모르고 지낸 것이 실로 유감입니다. 그 후더운 사랑에 대해서는 내세에서 보답하렵니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잘끈 혀를 깨물려고 했다. 주백통은 단박에 그것을 눈치채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등허리에 있는 세 개의 대혈을 눌러 놓았다. "당신은 죽으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신은 여러 사람 앞에 왜 죽어야만 하는가를 똑똑히 얘기해야 해. 그래야만 죽도록 내버려둘 테야." 주백통이 냅다 고함을 질러대자 곽명송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곳에 사매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었지요. 하지만 이젠 고려할 여지가 없군요.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곽명송은 강호를 다니다가 우연히 한 여협을 알게 되었다. 그 처녀는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아주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통해 함께 강호를 돌아다녔다. 그는 처녀의 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만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함께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원한다는 것만 알 따름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한 객점에 묵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십여 일 동안이나 큰 비가 내렸다. 하는 수 없이 객점에 계속 머물면서 처녀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 정이 통하여 그 처녀와……. 곽명송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갑자기 처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 사형은 참말로……." 그 처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매, 이건 참말이야. 나도 그날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곽명송은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말았다. 그러자 장문인이 끼여들었다. "네가 맘을 옳게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된 거야……." "넌 여자가 꽃같이 생겼으니까 갑자기 짐승 같은 짓을 할 마음을 품게 된 게야. 거기에 무슨 영문 모를 일이 있단 말이냐?" 안주인이 호통을 쳤다. 이제 처녀는 목놓아 울어댔다. 그녀는 마음 깊이 이 큰 사형을 사모하고 있었다. 단지흥 일행도 단박에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처녀는 곽명송을 사모하므로 죽더라도 곽명송 편을 들 것이었지만 그 사형이 참말로 이런 짓을 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넨 그 여인이 누군지 아는가?" 단지흥이 물었다. '보아하니 단황 나으리도 방법이 없는 모양이로군. 어리석게 그 여자가 누구냐 하는 걸 물어 어디다 쓴단 말인가? 곽명송이 남의 처녀를 간음한 것만 해도 작은 죄가 아닌데.' 주백통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곽명송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누군지는 전 모릅니다. 기이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얼굴도 기억할 수 없구요." 곽명송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단지흥이 웃으면서 또 물었다. "곽 대협, 자넨 그 여인과 처음이었나?" 곽명송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단지흥이 계속 엉뚱하게 물어대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예." "그렇담, 곽 대협! 자넨 그 여인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네.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게야." "단황 나으리, 당신의 호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옵니다. 그러니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도와주어도 이제 와선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보아하니 사내가 계집과 함께 있으면 시끄러운 점이 아주 많구나. 난 절대로 계집과 함께 있지 않을 테야.' 주백통은 여전히 혼자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질기게 다시 말했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광명정대하게 처신해야 하네. 자네가 그 일을 인정했으면 됐지 한평생 죄를 짊어질 필요가 있나? 그리하여 그것 때문에 자결을 하고?" 곽명송은 잠시 묵묵부답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간신히 한마디했다. "전 정녕 그 여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여인…… 그 여인의…… 가슴이……." 곽명송이 거기까지 말하자 단지흥의 가슴은 대번에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성마르게 곽명송을 재촉했다. "그 여인의 가슴이 어쨌다는 말인가? 속이지 말고 어서 사실대로 말하게!" 곽명송은 이를 악물었다. "그 여인은 가슴이, 젖가슴이…… 문드러지고 없었습니다……." 그 말에 단지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산파의 사숙과 사숙모,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문제의 여인이 이런 여인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곽명송은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마냥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 "그 여인은 유방이 문드러져 없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그 여인은 계속 '다치지 말아요. 그랬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하고 말하더란 말입니다. 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참말로 후회했지요." 곽명송은 비분에 잠겨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를 질렀다. 단지흥은 선비와 농부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곽명송을 보고 활짝 웃었다. "내 자네한테 알려 주지. 난 얼마 전에 아주 오랫동안 꿈을 꾼 적이 있었지. 꿈속에서 숱한 여인들을 만났다네. 바로 그 여인들이 모둔 유방이 없더란 말일세. 그 여인들은 자기의 젖가슴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전심전력으로 사내들을 미워하지 않겠나? 그 여인들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사내들을 못살게 굴고 천하의 훌륭한 사내들을 자기들 손으로 죽여 버리는 것이었네……. 알고 보니 난 몽약이 든 미향에 중독되어……." 처녀는 어느새 울음을 멈추었다. 그 여인은 단지흥을 똑바로 바라다보았다. 여인의 두 눈에서 얼핏 따스한 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단지흥이 자기의 남부끄러운 경험까지 들춰 내면서까지 사형의 고충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것으로 사형에게 품게 된 한 가닥 의심도 말끔히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지흥에게 각별히 따스한 마음을 보냈다. 그러나 장문인은 싸늘히 냉소를 머금고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곽명송은 눈을 반짝 빛내며 단지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황 나으리,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꿈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단지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명송이 다시 재우쳐 물었다. "그럼 왜 조사해 보지 않았습니까?" 제22장 일장춘몽 그때였다. 문 밖에서 여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화산파 사람들은 들으세요. 뵙기를 청하옵니다." 한둘이 아니라 많은 여인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집 안의 사람들은 모두들 동시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누가 손을 대는 기척도 없었는데 스르르 문이 열렸다. 문 밖에 많은 여인들이 서 있었다. 일순 이 여인들이 질서 정연하게 양 옆으로 늘어서자 한 여인이 그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절세 미인이었다. 단지흥은 그녀를 쳐다보고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는 향녀, 다름 아닌 향녀 등아였던 것이다 등아는 천천히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양 옆으로 늘어섰던 여인들은 둘씩 둘씩 손을 잡고 등아 뒤를 따랐다. 등아는 단지흥을 본 척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화산파의 장문인 앞으로 곧장 나아갔다. 그리고는 여유만만하게 웃음을 지으며 대뜸 물었다. "선우(鮮于) 영감, 당신은 화산파 장문인 노릇을 한 지 7년 6개월 되셨지요?" 장문인은 단박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오?" 등아는 그 말엔 아무 대답도 않고 노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물었다. "당신이 남편에게 화산파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라고 권고했죠? 그리고 계략을 꾸며 사형을 해쳤죠?" 일순 화산파 제자들의 얼굴에 적이 경악스런 빛이 떠돌며 나직이 술렁거림이 일었다. 노파는 즉시로 얼굴이 험상스럽게 굳어지며 노발대발 소리쳤다. "그렇게 사실처럼 꾸민다고 화산파 사람들이 네 년 말을 믿을 줄 아느냐?" 등아는 호기롭게 웃어젖혔다. "이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본인들한테 달린 문제고 당신 자신이야 안 믿을 리 있겠소?" 그러자 노파는 발악을 하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난 믿지 않아. 그건 허튼소리야!" 등아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크게 외쳐댔다. "화산파 제자들은 들어 보세요. 당신들의 화산파가 날로 약해지고 있는 건 전적으로 당신들 장문인 탓이에요. 저기 있는 저 선우 장문인이 이전에 화산 검법의 일흔두 번째 초수 이후에 나온 여섯가지 초수를 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 거예요. 저 사람이 이 일흔두 가지 초수 이후에 나온 여섯 가지 초식을 왜 배우지 못했을까요? 저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보면 모든 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을까요?" 선우 장문인은 창백하게 질려서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파는 기세등등하게 외쳐댔다. "네 년은 누구냐? 누군데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는 게냐?" "나를 모르고 계셨군요. 난 향녀, 향녀 등아예요. 당신은 필시 향녀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예요. 사내들만이 세상에 향녀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등아는 노파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똑바로 장문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 있는 사내들을 차례로 하나씩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단지흥에게 이르자 얼핏 부끄러운 기색이 어른거렸다. "제가 이 화산파에 온 건 심심해서가 아니에요. 내 보기엔 오늘부터 이 세상에서 화산파가 더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돼요. 안 그래요?" 그러자 영감은 벌떡 일어서며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무례하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렷!" "화산파에는 워낙 의사(義士)가 몇 사람 있었지요. 하나 그 나용의(羅龍義)가 돌아가신 후로는 정인(正人)은 더는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 차제에 화산파를 없애 버리면 천하에 화근 하나를 뿌리뽑는 셈이지요." 단지흥은 그윽이 등아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살기가 번득였다. '난 저 여인이 지독하기 짝이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저 여인은 남이 아무리 권고해도 소용이 없어. 기어코 화산파를 없애 버릴 작정인 게야. 어떻게 해서든지 이 화산파를 구해 주어야겠다.' 단지흥은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등아가 마치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말했다. "단황 나으리, 당신은 화산파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향녀들의 일에도 더는 참견하지 마세요!" "글쎄, 난 딱 부러지게 안 그러겠다고 약조할 수 없소! 난 당신과 화산파 사이에 어떤 곡절이 있는지 알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