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4[남제단지홍편] - 39편 (39/70)
난 못해! 도저히 그럴 수 없어! 난 조만간 꼭 그 놈을 찾아갈 거야." 십 년은 아주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예를 닦는 사람에겐 십 년이란 순간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구양 장주님, 당신은 십 년 후엔 왕중양을 이길 수 있나요?" 그러자 구양봉은 이번엔 낯색이 대번에 우울해지더니 쌀쌀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오늘 그자를 이기지 못한 건 그자한테 《구음진경》이 있기 때문이야. 십 년 후에도 그자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하나 난 결단코 포기 못해!"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음흉한 눈빛을 빛내며 딱 잘라 말했다. "구양 장주님, 당신은 십 년 후에도 그 《구음진경》을 빼앗는 건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해요. 십 년 후라면 왕중양은 그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다 익힐 텐데 그럼 당신은 도저히 그 사람의 적수가 못 돼요." 구양봉은 그 말에 슬슬 화가 났다. 왕중양한테 졌다고 자기를 업신여기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봐 뚱뚱보! 내가 손안에 《구음진경》을 넣지 못했다고 해서 날 깔보는 모양인데 계속 그렇게 나갔다가는 내 독사장이 가만있지 않을 줄 알아랏!" 구양봉은 대뜸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구양 장주님, 잠시 노여움을 푸시고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장주님은 정말 총명한 사람이에요. 만일 장주님이 《구음진경》을 얻기만 하면 천하 무림에서 제일인자가 될 건 불을 보듯 뻔해요. 그러나 사실을 말해서 지금도 그렇고, 설사 십 년 동안 무예를 연마한다고 해도 구양 장주님이 왕중양의 손에서 《구음진경》을 앗아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제 말을 한번 들어 보세요. 들어 보신 후에 화를 내도 내시란 말이에요." 대환희 보살은 장광설을 늘어놓더니 힐끔 구양봉의 눈치를 살폈다. 구양봉은 다소 누그러져서 시뜻한 기색으로 보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보살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보기엔 장주님은 먼저 나와 함께 단지흥을 뒤쫓아가잔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 그의 일양지를 배우고 그 다음에 다시 홍칠공을 찾아가자구요. 장주님이 이 두 사람을 이긴 다음 다시 왕중양과 싸운다면 그땐 필시 《구음진경》을 차지하게 될 거예요." 그러자 구양봉은 그제야 얼굴이 환히 펴지는 것이었다. 보살의 말은 참말로 일리가 있었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즈음 왕중양은 황약사와 함께 화산을 내려왔다. 황약사는 오는 동안 내내 아형의 손을 꼭 그러쥐고 한 번도 놓는 법이 없었다. 왕중양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몹시도 울적하였다.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했건만 서로 애틋한 정 한 번 못 나눠 보고 그녀는 그만 세상을 떠나 버리고……. 그녀 생전에 자기와 그녀는 저렇듯 다정하게 지내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는 마음과 달리 그녀를 한 번도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으며, 둘 사이가 내내 그렇듯 서먹서먹했던 것도 모두 자기 탓이라고 자책이 되어 가슴 한구석이 아프도록 저며 왔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토록 애원하는데도 그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그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의 얼굴엔 사뭇 어두운 그늘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황약사 앞이라 조금도 내색을 않고 부러 쾌활한 기색으로 짐짓 아형을 놀려댔다. "아형, 무슨 일을 하든지 황 형의 손을 꼭 쥐고 있구먼요. 손을 놓았다가 깜빡 누구한테 잡혀 갈까 봐 그러시오?" 그러자 아형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활짝 웃었다. "잡혀 가 봤자 그 사람만 부담이 느는 거죠. 죽 한 그릇이라도 더 축나게 되지 않겠어요?" 아형은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다. 왕중양은 내심 더한층 부러움을 느꼈다. "아형, 너무 머리를 쓰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소. 당신과 황약사 두 사람이 천하에서 제일 총명하다고 소문이 나면 내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니." 황약사는 왕중양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조금도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있는지라 빙그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황약사는 갈림길이 나오자 왕중양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왕 형, 십 년 후에 다시 만납시다." 왕중양도 답례를 하였다. 황약사는 자존심이 대단하여 누구도 대단치 않게 보는 성미였다. 하지만 이번에 화산에 와서 왕중양의 기공(奇功)을 보고는 그만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의 무공을 보고서야 아직 《구음진경》은 그의 손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정중히 읍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황약사는 얼마쯤 걸어 가다가 아형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아형, 난 이전에 나 자신을 이인(異人)으로 자부하면서 나보다 강한 자는 천하에 드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소. 그래서 난 내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여겼었지. 하지만 왕중양을 보고 나니 이 세상엔 나보다 더 기이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소." 아형은 딱 손뼉을 쳤다. "황약사, 전 당신이 누구를 두고 탄복하는 소리를 종래로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오늘에야 비로소 당신을 탄복시킬 만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군요. 참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황약사는 감개무량한 듯 아형의 손을 꼭 틀어쥐었다. "아형, 당신은 날 원망 말아요. 내가 언제나 진짜로 탄복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니까."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방긋 웃었다. 꽤 멀리 걸어왔을 때 별안간 등뒤에서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사람이 멀리서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황약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의외로 그는 왕중양이었다. 그는 황약사와 아형 앞으로 곧장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황 형, 난 당신한테 가르침을 받을 일이 하나 있소!" 황약사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거렸다. "중양 진인,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나 좌우간 말씀해 보오." "난 이전에 어떤 사람한테 진 적이 있소. 그런데 지금까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 가지 있소. 그 의문을 좀 풀어 달란 말이오. 당신이 날 도와줄 테지? 난 실로 그때 어떻게 되어 지게 됐는지도 몰랐었소." 왕중양은 참말로 번뇌를 느끼고 있는 기색이었다. "당신의 공력으로 알아내지 못한 걸 내가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참 이상하더란 말이오. 황 형은 견식이 넓으니까 내 의문을 꼭 풀어 줄 수 있으리라 믿소. 아직도 그 자리가 남아 있으니, 자 어서 갑시다." 그러더니 왕중양은 다짜고짜 잡아 끄는 것이었다. 그는 임조영이 이승을 하직한 뒤에는 더 더욱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약사의 도움을 받아 그때 그 일을 알아내고자 이렇듯 되돌아온 터였다. 황약사와 아형은 할 수 없이 왕중양을 따라 종남산으로 갔다. 왕중양은 산비탈에 이르러 돌비석 앞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그 돌비석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임조영과 왕중양이 다툴 때 임조영이 새겨 놓은 것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그 획이 아주 멋지고 힘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건 사람 손가락으로 새긴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이 왕중양은 천하에서 백여 년 내에는 볼 수 없던 뛰어난 무학기재인데 그렇담 왕중양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이 글씨는 임조영이 새긴 것이오. 글쎄 그 여인이 이 비석에다 손가락으로 이렇게 글자를 새겨 넣으니 내가 지지 않을 수 있었겠소? 난 그렇게 할 수 없다니까." 왕중양은 그때 일을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때 임조영한테 지는 바람에 그 활사인묘를 내주어 임조영이 그 석굴에 들게 했고 그 뒤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지척에 두고 있었건만 천애지각이 가로놓인 듯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바로 그 석굴이 그녀의 무덤이 돼 버린 것이었다. 황약사는 놀라서 선뜻 대답을 못했다. 아형도 그것이 적이 괴이하게 여겨졌다. 진흙에 글자를 쓰듯이 사람 손으로 이처럼 굳은 청석에다 글자를 새기다니, 이 정도 공력이면 가히 천신(天神)의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아형은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보고 또 보았다. 황약사도 손가락으로 획을 따라 더듬어 보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해도 확실히 손가락으로 새긴 것이었다. 황약사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연신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한 순간 아형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임조영 그녀한테 무슨 방법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천신도 아닌데 어찌 이렇듯 손가락으로 돌에다 글을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황약사는 갑자기 찌푸려졌던 이맛살이 펴지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중양 진인, 당신은 참말 이 일의 영문을 알고 싶소?" 왕중양은 성마르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내겐 아주 중요한 일이니 난 꼭 알고 싶소." "좋소. 다음번에 내가 다시 중원에 오면 그때 가서 이런 방법으로 똑같이 비석에 글을 새겨 보겠소!" 왕중양은 황약사의 의중을 찬찬히 음미해 보았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임조영이 참말로 나보다 공력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무슨 계책을 쓴 것이로구나. 황약사는 공력이 필경 나보다 못한데도 손으로 글씨를 새길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보아하니 여기엔 무슨 계책이 있는 거다.' "중양 진인, 그때를 기약하고 이제 난 여기서 당신과 작별해야겠소." 황약사는 왕중양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아형을 데리고 표연히 걸어갔다. 왕중양은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임조영에게는 무슨 말이든 물어 볼 수도 없고, 그 스스로 그때껏 하고 싶던 말들도 모두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만 한다. 새삼스레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는 도무지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이번의 이 화산 싸움을 통해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왕중양은 통탄에 젖어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 있었다. 제21장 향녀와 정을 나눈 사내 단지흥은 화산 아래 객점에서 주백통을 만났다. 주백통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를 만날 것 같아 농부와 함께 객점에 들어 있었다. 단지흥은 주백통을 보자 정중히 읍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주 형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이렇듯 뜻밖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허허허……." "단황 나으리, 그만 해 두시우, 그만요, 헤헤헤……." 주백통은 손사래를 쳐 가며 사양을 했다. 단지흥은 왕중양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은즉, 이 사람이 왕중양의 사제인지라 각별히 예를 갖추었다. 농부는 대환희 보살에게 잡혀 끌려 다닐 때 이미 단지흥이 화산으로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황제의 안위를 확인하고는 자기 한 몸이야 어찌 되든 염두에 두지 않고 매우 기뻐했었다. 하나 이제 주백통의 도움으로 그 역시 보살의 손에서 놓여나 단지흥과 이렇듯 마주앉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단지흥과 선비를 번갈아 보며 연신 입을 벙싯거렸다. "폐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소인들은 폐하의 안위가 염려되어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는데 이렇듯 폐하를 마주 대하니 죽다 살아난 듯하옵니다. 그래 도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농부가 묻자 단지흥과 선비는 약속이나 한 것마냥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드는 것이었다. 단지흥이 그 일을 더는 입에 올릴 눈치가 아니자 선비가 얼른 나섰다. "아이고 말도 말게나. 내 천천히 얘기해 줌세. 그건 그렇고 나무꾼과 어부 소식은 못 들었나?" "아직 못 들었네." 농부는 시무룩하니 대꾸했다. 그러자 단지흥이 나섰다. "내 이 사람 선비에게 자네들 얘기는 들었네. 나무꾼과 어부도 화산 주변을 벗어나진 않았을 테니 조만간 만나게 되겠지." 농부와 선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흥은 다시 주백통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한데 주 진인께선 앞으로 어디로 가시려오?" 주백통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얼버무렸다. "글쎄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갈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주 진인께선 나와 함께 대리로 가십시다. 그곳은 실로 아름다운 곳이라오. 창산도 푸르고 이해도 푸르니 그 좋은 경치를 안 보시면 후회막급이오. 주 진인께서는 나만 따라가십시다." 주백통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단황 나으리께서 날 데리고만 가 주신다면 난 폐하의 친구가 되는 셈인데, 그렇담 나도 단황 나으리처럼 즐겨도 되는지……." "그야 여부가 있겠소. 그대가 황제처럼 나날을 보내고 싶어해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소." 주백통은 어린아이마냥 펄쩍펄쩍 뛰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난 폐하를 따라가겠습니다." "주 진인께서 대리에 가시는데 중양 진인께 알리지 않아도 되겠소?" 주백통은 머리를 쓱 늘여 빼고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 기색은 얼핏 괴이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내 한 가지 알려드리지요. 종래로 사형께서는 절 상관하지 않아요. 그분은 다만 장래에 제가 전진교의 구성(救星)이 될 거라고만 말씀하셨지요. 그러시면서 전진교 일에 대해서는 저더러 되도록 관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 또 무슨 진인도 아닙니다. 그러니 폐하께선 저더러 진인 진인 하지 마시고 그냥 백통이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됩니다." 단지흥은 일국의 황제이나 공명심이 없는 사람이라 주백통의 말을 듣고도 달리 생각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대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2, 3일씩 걷고는 하루씩 휴식했다. 아직 어부와 나무꾼은 만나지 못했으나 황제가 자리를 비웠으니 시각을 다투어 대리로 먼저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네 사람은 발길을 다그쳤다. 그날도 발에 땀이 나도록 걷고 있는데 멀리 득의루(得意樓)란 객점이 눈에 띄었다. 단지흥이 선뜻 운을 뗐다. "인생에서 뜻을 이루려면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느니, 우리도 잠시 즐기다 갑시다!" 그러자 주백통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좋아요, 좋아요!" 농부와 선비는 한시 바삐 대리로 돌아갔으면 했지만 단지흥이 먼저 운을 뗐는지라 묵묵히 따랐다. 네 사람은 함께 누각 위로 올라갔다. 누각 위에선 이미 몇몇 호객들이 한담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자리를 잡고 앉아 술과 요리를 주문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지고 그들은 피로도 풀 겸 느긋하게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일각쯤 지났을까, 얼핏 옆 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들려 왔다. 들어 보니 그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은 중년의 청수 검객을 한껏 치켜 세우고 있었다. 그 청수 검객은 기색은 담담했으나 어딘가 심정이 개운치 못한 듯 보였다. "곽 대협께선 너무 그렇게 불쾌해하실 것 없소이다. 아, 대협께서 화산에서 그 향녀들과 실랑이를 하지 않은 건 다 대협의 도량이 넓기 때문인 게요. 향녀들이 아무리 성가시게 군다 해도 곽 대협께서야 어디 여인들과 똑같이 나가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 누가 곽 대협을 뭐라 하지도 않으니 자, 어서 술이나 드시지요!" 그 중년의 청수 검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향녀란 소리에 단지흥과 선비는 귀가 번쩍 뜨였다. 주백통도 청수 검객을 유심히 바라보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필시 어디서 본 듯한데 아리송하니 도무지 어디서 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 대협, 듣자니 그 왕중양이란 분이 화산에서 영웅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합디다. 네 사람이 일시에 손을 썼는데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왕중양이란 분의 기공은 단연 천하 으뜸이지요. 그리고 뭐라더라, 서역에서 왔다는 구양봉이란 사람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그 사람의 합마공만 해도 당해 낼 자가 없다더군요. 그런데도 그 사람도 중양 진인 손에 패하고 말았다지요?" 저쪽 자리에서 한 사람이 입에 침을 튀겼다. 주백통은 그 사람들이 자기 사형의 무공이 천하 으뜸이라고 하자 으쓱해져서 앞뒤 분간 없이 떠들어댔다. "맞네, 맞아. 바로 서독, 동사, 그 밖에 북개에다가 여기 계신 단황 나으리까지 네 사람이 일제히 덤벼들었어도 우리 사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단 말이야." 단지흥은 솔직한 사람이라 사심 없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렇습니다. 백통 형, 당신의 무공도 당신 사형인 중양 진인과 마찬가지일 게요. 그날 당신도 나와 한판 겨뤘어야 하는데, 정말 아쉽군요." 그러자 주백통은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저쪽에서 또 누군가가 말했다. "됐네. 우린 곽 사형과는 남도 아닌데 체면 차릴 필요 있나? 내 보기엔 일찌감치 일을 끝내야 할 것 같아. 함께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하는 게 중요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쪽에 앉았던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대면서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필시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사뭇 호기심이 일어 채근했다. "백통 형, 우리도 뒤따라가 봅시다, 저 사람들이 뭘 하는가!" 주백통이 마다할 리 없었다. 일행은 황급히 앞서 나간 사람들을 쫓아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가을 바람에 정신이 번쩍번쩍 났다. 앞서 나간 사람들은 뭐라고 떠들어대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밖에 있는 큰 뜨락에 다다라서야 발길을 멈췄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얼른 대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하나 나와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대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그러자 선비가 단지흥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제가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단지흥은 웃음을 지으며 선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곳엔 오로지 단지흥이 있을 뿐 그 무슨 황제는 없네. 자네는 나에게 뜨락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할 참이었지?" 선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은 자못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당신은 엄연히 황제인데 어찌하여 그러시오?" "강호엔 험난한 풍파가 있고, 황제에게는 지난한 근심이 있네." 단지흥은 마치 시 한 구절을 읖조리듯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기실 자기는 비록 황제 노릇을 하고는 있으나 강호 무객의 처지가 부럽고, 뿐더러 갖가지 위험을 견뎌 내는 것이 진짜 사내대장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백통 역시 무림호걸인지라 그 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훌륭하십니다. 단황 나으리는 황제 노릇은 걷어치우고 아예 강호 무객 노릇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농부와 선비는 그제야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간 사람들은 뜨락을 지나 곧추 대청으로 나아갔다. 단지흥 일행은 모두 집 밖에 서 있었다. 단지흥이 눈짓을 하자 선비가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운남 대리의 단씨가 뵙고자 합니다!" 그러자 주백통이 단박에 면박을 주었다. "바보 같으니, 그렇게 소리쳐 부르면 무슨 재미가 있어? 모두들 듣고 숨어 버리면 어떻게 찾아내려고?"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이내 삐꺽 하며 문이 열리더니 문틈으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었다. "모두 사내들이네?" 여인은 단지흥 일행을 보고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머리를 도로 문 안으로 쓱 집어 넣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다시 불러 보지요." 선비는 주백통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또다시 외쳤다. "운남 대리의 단씨가 뵙고자 합니다!" 그러자 집 안에서 누군가 대꾸를 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이니 어서 들어오시오!" 또다시 삐꺽 하고 문이 열리고 좀전의 그 여인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오시지요!" 일행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한복판에 팔걸이 의자가 놓여 있고 거기에 두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영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집 안주인인 듯싶었다. 그 두 노인은 단지흥네들이 들어가도 일어나지 않고, 고개 한번 까딱하는 법도 없었다. "늙은 몸이라 인사를 올릴 수 없으니 용서하세요." 안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알아차리고 얼른 예의를 차렸다. "문득 뛰어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주백통은 예의고 뭐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먼저 들어왔던 청수 검객네들은 모두 대청 아래에 줄지어 서서 허리를 낮추 굽히고 잠잠히 서 있었다. 그 곁에 처녀도 하나 서 있었다. 이윽고 영감이 자기 소개를 했다. "이 늙은 것은 화산파의 장문(掌門)이고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문하입니다. 오늘 이 노구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건 우리 화산파의 문풍 (門風)을 바로잡기 위해서지요." 장문인의 말이 떨어지자 화산파의 제자들은 저마다 두려운 기색으로 더욱 허리를 낮추었다. 두 노인은 만면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는데 보아하니 무슨 일로 무척 속이 상해 있는 듯싶었다. 아마도 이 화산파 제자들 중 누가 밖에서 무슨 과오를 저지른 것임에 틀림없었다. "화산검을 가져 오너라!" 장문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를 뒤로 동여맨 동자 둘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한 자루 검을 받쳐들고 나왔다. 단지흥과 주백통 두 사람은 이것이 예전 화산파의 장문인 풍청자(風淸子)가 쓰던 집법검 (執法劍)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화산파에서 일단 이 검을 내오게 되면 대대적인 처벌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