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40편 (40/66)

2026-09-29 07:55:13 조회 30
그런데 찾아온 사람이 그 말을 곧이 듣고 양쪽 모두들 찌르게 되면 가차없이 절정곡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현종만을 찌르려고 하는 사람이면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오로지 양귀비만을 찔러야 이곳에 머물게 하고 대접을 융숭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완동이 당현종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결국 이곳 절정곡 사람들의 뜻과 맞아떨어졌다. 공손곡주가 다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노완동, 당신이 이 계곡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이 계곡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땐 힘을 아끼지 말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노완동은 기분이 흡족해졌다. 이 절정곡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치뤄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다. 그 사내가 아무리 존귀한 대리국의 황제라 해도 이곳 절정곡까지 찾아올 리는 없을 것이었다. 또한 그 여인 역시도 찾아내지를 못할 거라고 노완동은 믿었다. 한편 그 여인이 이곳까지 무사히 왔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코 양귀비를 찌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바로 그녀는 양귀비와도 흡사한 여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완벽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노완동은 한껏을 가슴을 폈다.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이 즐겁고 신나는 순간이 될 것 같아 노완동은 히죽히죽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청지기와 노완동은 공손곡주에게 예를 올리고 나왔다. 청지기가 노완동을 데리고 거처로 안내를 해주었다. 계곡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자그마한 가옥 한채가 보였다. 가옥 앞은 매우 정결했고 화초들로 장식이 돼 있었다. 노완동은 다시 한 번 기분이 흐뭇해졌다. 이곳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게 된 행운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청지기, 공손곡주란 사람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여인을 미워하는 것 같아. 그렇다면 그 사람도 이 노완동처럼 아직 부인이 없다는 말인가?" 노완동의 물음에 청지기의 얼굴빛이 사색으로 변하며 나즈막이 속삭였다. "쉿! 조용조용히 말하게." 필요 이상으로 주위를 살피며 청지기가 유난을 떨자 노완동도 덩달아 시선을 사방으로 돌렸다. 주위에 다행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손곡주는 부인이 있다네. 곡주님의 부인은 꽤나 절색이기도 하지." 그러자 노완동은 실망의 빛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 참 이해할 수 없군. 그 사람은 여인을 아주 싫어하는 것으로 예상했는데 장가를 들었다구?" 청지기가 소리 죽여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그렇게 총명하면서도 왜 이해를 못하는가? 여인은 아주 요상한 물건이라 손에서 놓아버리기 아깝고 또 그렇다고 꼭 잡고 있기도 꺼름칙한 거라고." 이 말에 두 사람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청지기의 말에 노완동은 뜻이 통하는 인물이라 생각하여 박장대소를 마다하지 않았다. 온갖 화초들로 둘러싸인 가옥 뒤에는 경사가 완만한 언덕이 있었다. 그곳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양한 꽃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또한 집 앞은 깨끗한 공터가 조성되어 있기도 했는데 잡초 한포기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공터에는 울타리가 쳐져있었다. 왼쪽에 있는 울타리는 그다지 모양새가 나지를 않았지만 중간쪽의 울타리는 화초로 이루어진 것으로 마치 봉황새를 연상하게 했다. 한편 오른쪽의 울타리는 용을 닮은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봉이 울고 용이 꿈틀거리는 듯 한 형상이어서 노완동은 한번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문앞에 이르자 청지기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봉고(鳳姑), 문을 열어라!" 곧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한 여인이 다소곳한 걸음으로 나왔다.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에 노완동은 또 한번 감탄하고 말았다. 흰눈과도 같은 새하얀 적삼 위로 치렁치렁 늘어진 긴 머리결이 눈부셨다. 여인이 정중하게 청지기에게 예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청지기가 가슴을 펴며 웃음기에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봉고, 이 사람은 널 찾아온 사람인데 이 집에 묵게 하려고 한다.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을 묵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다른 거처로 옮겨야할 것이다." 여인의 눈이 갑자기 휘둥레졌지만 곧 고개를 들어 노완동의 행색을 유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살펴보던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과연 절정곡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속으로 가름해 보는 듯했다. 여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저 분이 소원한다면 이곳에 묵어도 좋아요." 노완동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받아쳤다. "소원이지. 암, 소원이구 말구." 갑자기 정색을 한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한가지 미리 말씀을 드릴 게 있어요. 전 사람을 죽인 후에 이 절정곡으로 온 여인이랍니다. 전 한 사내를 죽였어요." "뭣이라고!" 누군가 예리한 칼날을 자기 목에 들이대는 순간보다 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놀란 노완동이 두서없이 마구 물어댔다. "그대는 무엇 ㄸ문에 사람을 죽였나? 무엇 ㄸ문에 사내를 죽였는가 말이야? 사내가 그대를 먼저 죽이려고 덤벼들던가. 아니면 가만히 있는 사내를 그대가 슬쩍......" "아닙니다. 그 사내는 절 아주 좋아했어요. 하지만 전 그 사람이 싫었어요." 한번 불거진 노완동의 눈은 좀체 원상태로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봉고라는 여인이 잔뜩 굳어있는 노완동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당신이 저와 한 집에서 살려면 제 말을 들어야 해요. 만일 나를 건드렸다가는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불현 향기로운 꽃동산에 마음껏 뛰어놀던 봄나비가 뜻하지 않은 돌풍에 날개를 꺾이우는 광경이 보이는 듯했다. 노완동은 혹시 잘못 온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괜히 이곳 절정곡까지 기어들어와 고약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은 아닌지 차츰 열적은 마음으로 바뀌려 했다. 혹시 자신도 여인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기 ㄸ문에 더욱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여인은 죽였다는 사내와 자신을 결코 다른 인물로 여기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노완동은 어이도 없고 한편 오만가지 상념에 시달려 혼백을 빼앗긴 사람처럼 굳어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혼잣말을 계속 가슴에 채워넣었다. '이 여인을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겠군. 괜히 여인의 마음이 돌변해 나를 이 집에서 쫓아내거나 죽이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지......'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속으로 준비를 끝냈다고 믿은 노완동이 곧 얼굴을 폈다. 그리곤 봉고란 여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우리가 잘 지내면 문제는 없을텐데 괜한 걱정을 했군. 그대는 그대대로 난 나대로 지내면서 서로에게 지장을 주지 않으면 되겠지?" 단숨에 떠벌이고 난 노완동은 순간 여인의 반응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제20장 거듭되는 홍칠공의 위기 노완동은 여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얼른 그녀의 용모에 다시 한 번 끈끈한 눈길을 주었다. 가히 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백설같이 새하얀 옷에 어울리는 머리칼과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은근히 고요함도 엿보이는 표정...... 그 ㄸ문인지 노완동은 서서히 그녀에 대한 적의를 풀 수가 있었다. 그러나 노완동의 근본적인 마음가짐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이 여인이 아무리 절색이고 마음에 든다 해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저 서로가 간섭하지 않고 지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서 또 가슴 한쪽으로는 슬금슬금 장난기가 동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는 여인을 보자 노완동은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봉고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간 노완동은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집안은 겉에서 본 것과 다름없이 아주 청결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창문 곁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는 책궤와 집필묵들이 흰 종이들과 어울려 가지런히 정돈돼 있는 모습이었다. 노완동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봉고는 시구라도 짓는지 계속 붓을 놀려댔다. 노완동은 방안의 풍경들에 오래 시선을 ㅃ앗기고 있었다. 한쪽에는 촘촘히 미세한 구멍이 나있는 커다란 방충망이 달린 침상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또 참대로 엮은 것으로 보이는 간이침상도 눈에 띄었다. 노완동이 그 대나무로 엮은 침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호라, 내가 저 대나무 침상에서 자고 그대가 저쪽 침상에서 자면 되겠군." 그러자 봉고는 노완동을 한번 힐금 쳐다보고는 그만이었다. 다시 시선을 가져가며 자기 하던 일에 몰두했다. 머쓱해진 노완동이 혼잣말처럼 흘렸다. "이거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며 노완동이 짐짓 큰소리를 뒤에 달자 봉고가 고개를 들었다. "배가 고프면 직접 밥을 지어 드시죠. 여기엔 당신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은 없으니까요." 노완동이 고개를 조용히 내저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 이 절정곡에 오면 농사도 안짓고 일도 안하고 밥도 짓지 않는다고 들었소. 놀기만 해도 하루가 모자라다고 하던데, 뭐 밥을 직접 지어먹으라구?" 무표정으로 노완동의 말을 듣고 있던 봉고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모두가 밥을 짓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굶어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노완동이 얼굴색을 바꾸며 헤죽거리기 시작했다. 봉고에게로 고개를 길게 내민 노완동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대는 그럼 배가 안 고프나?" 봉고가 다시 미소지었다. "전 배 고프지 않아요." "허허,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밥은 먹어야 해. 밤에 배가 고파 뱃속에서 쪼르륵 쪼륵 하고 소리를 내지르면 어쩔려고?" 불현 노완동이 실소를 터뜨린 것은 봉고가 밤에 자면서 연신 그런 소리를 낼까봐서였다. "좋아. 그대가 굶기를 소원으로 한다면 그렇게 하라구." 한편 노완동은 혹시 자기만을 골탕먹이려는 수작이 아닌지 의심했다. 모두들 가만히 앉아서 배를 채우는데 자기만 봉고의 말만 믿고 밥을 직접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괜히 심술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 머리에 박혔다. 아무리 사람을 죽인 여인이지만 왜 하필이면 이곳에 와서 혼자 살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얼마든지 자신의 미모로 한평생 숱한 사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 수도 있을텐데...... 봉고가 천천히 일어섰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꽃 명송이를 따려고 했다. 바로 처음 계곡을 들어서며 보았던 정화(情花)였다. 결코 만져서는 안된다고 청지기가 알려준 바로 그 꽃이었다. 그런데 봉고는 서슴없이 손을 뻗어 그 정화를 따고 있는지를 않은가. 혹시 그 말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봉고가 꽃을 땄는데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을까? 봉고는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꽃을 따는데 열중했다. 잠시후 쟁반 위에 그 정화를 소복하게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노완동을 보자 미소를 보였다. "정 배가 고프시다면 이 꽃 몇송이로 시장기나 꺼두세요." 이 말에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이꽃을 먹는단 말이요?" 곧 봉고가 꽃을 내밀자 구렁이라도 본듯 뒤로 한발 물러서며 노완동이 말했다. "왜 싫으세요? 전 매일 이꽃을 먹고 있는데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차츰 깊은 혼란의 골짜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꽃은 정화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절정곡에 온 이상 다시는 정을 품어서도 또 받아서도 안된답니다. 이꽃 몇송이를 먹으면 당신에겐 새로운 세계가 밝아올 거예요." 그러나 꽃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노완동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청지기가 하는 말이 이 정화를 만지면 큰일이 난다고 하던데? 특히 칠정육욕(七情六欲)을 가진 사람이 이 꽃을 만지면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어. 혹은 마음 속으로 남녀간의 정사(情事)를 생각하기만 하면 곧 가슴이 터질듯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다는 말도 들었지." "당신은 이미 정절곡에 들어와 있는데 정을 품어선 무엇하고 또 남녀간의 정사에 대해 생각해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신은 앞으로 한평생 그런 따위의 감정과는 인연이 없게 될 거예요." 갑자기 노완동는 태도를 달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비록 영고를 만나선 안 될 것이지만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ㄸ로는 꿈에서도 언뜻 보게 되는 영고였기에 봉고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만약 정화를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만지기라도 하는 날엔 금방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영고를 기억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봉고가 입을 열었다. "이 정화엔 독이 없고 아주 맛이 있어요. 당신이 싫다면 저 혼자 먹겠어요." 그러더니 곧 한송이를 집어든 봉고가 아주 맛있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노완동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봉고의 아작아작 소리내며 움직이는 입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봉고는 쟁반에 담겨있던 정화를 모두 먹어치웠다. 정화를 맛있게 먹고 난 봉고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꽃향기가 노완동의 얼굴로 물씬 풍겨왔다. 봉고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노완동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만약 이 정화를 먹는다면 입에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올 거예요." 노완동은 꽃향기고 뭐고 정말 낭패한 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은 봉고처럼 모두 정화를 먹고 산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노릇을 어떡해 해야할지 노완동은 암담하기만 했다. 날은 어느새 저물고 주위엔 그윽한 꽃향기만이 넘실댔다.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온통 그 향기로운 냄새만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노완동은 대나무 침상에 누운 채로 깊은 상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옆 다른 침상에 누워 자고 있는 봉고를 힐금 쳐다보며 노완동이 중얼거렸다. '저 봉고라는 여인은 참 기이한 여인이로구나. 남녀가 한방에서 그것도 가까이 침상을 대고 누웠는데도 전혀 휘장조차 내리지 않고 있다. 아무리 이 노완동이 여인에게 흥미를 잃었다지만 어디까지나 사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 봉고라는 여인은 나를 사내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다짐했던 말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무례한 행동이라도 보인다면 저 여인은 당장 나를......" 정말 봉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상에서 자는 모습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마치 노완동이 무례한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싶었다. 봉고가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완동은 다시금 희미한 기억을 붙잡기 시작했다. 노완동의 유일한 소원은 날마다 무예를 닦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대리에서 영고란 여인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노완동은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 옥구슬 구르는 말솜씨에 반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영고는 그때 노완동에게 무예를 함께 연마하자며 접근을 해왔다. 노완동은 그렇게 나오는 영고에게 오히려 깊은 존경심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곧 영고에게 몇가지 멋진 법수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영고는 매우 즐거워했다. 그녀의 남편인 단지흥은 노완동보다 무예가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고는 그 앞에서 단 한번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무릇 무예란 배우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기쁜 마음이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희미한 기억이 차츰 선명하게 바뀌어갈 때 노완동은 애써 머리를 저어댔다. 미인이란 역시 우환만을 몰고 다니는 항아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불쑥 파고들었다. 깊은 계곡의 밤은 천리밖에서 들려오는 여인네 한숨소리조차 잡아낼 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때 잠에서 깬 봉고가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탁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곧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언뜻 떠오른 것이 있어 노완동이 그쪽에 대고 나즈막이 말했다. "그대는 정말 배가 안 고픈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뱃속에서 나는 쪼르륵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완동의 갑작스런 말에 봉고가 놀라 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물잔이 보기 좋게 박살이 나면서 고요했던 적막에 잠시 금이 북 그어졌다. 잠시 가슴을 어루만지던 봉고가 말했다. "아이, 놀랐잖아요?" 노완동이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밝힌 다음 봉고에게 다가갔다. "난 배가 고파 죽을 판이요. 먹을 게 정말 그 정화 말고는 없소?" "예, 그거라도 드시겠다면 제가 갖다드리지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인 창자부터 구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또한 저 여인도 먹었는데...... 하는 마음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간의 정이고 뭐고는 나중에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좋아. 정화라도 가져오슈. 내 기꺼이 먹을테니." 봉고가 정화를 따러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봉고의 자태는 실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이라고들 했다. 한번은 여인이 방금 목욕을 하고 났을 때이다. 방금 물에서 몸을 씻고 나온 여인은 햇살에 반짝이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을 낸다. 여인의 모습은 매끄러운 허리와 다리선 그리고 머리칼에 이르기까지 청초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머금은 듯하다. 또 다른 한번은 바로 잠이 들었을 때이다. 나비가 마음에 드는 꽃술에 앉듯 슬 며시 감은 눈매며 산수유빛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백옥같은 이빨...... 비록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자태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과 멋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잠을 자다가 방금 깨어난 봉고의 모습은 그 두가지를 모두 합해놓은 듯 황홀할 정도였다. 봉고의 아름다움에 눈길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노완동은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아, 이 여인의 모습은 영고보다도 훌륭하고 아름답구나! 영고의 미모도 빠지지는 않지만 어딘가 싸늘한 기운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여인은 너무도 눈이 부시듯 아름다워!' 자신도 모르게 자꾸 뛰고 있는 가슴에 노완동은 몹시 당황했다. 밖으로 나갔던 봉고가 쟁반에 정화를 가득 담아 들어왔다. "당신이 세 송이만 잡수시면 날이 밝는대로 하루 세끼 음식을 지어 드리리다." 봉고의 말에 노완동은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일도 않고 무예에만 열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끼니 걱정까지 해가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봉고의 이같은 제의는 아주 달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정화를 먹고 난 뒤의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여인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기에 별다른 변화는 없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노완동이 천천히 정화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처음에는 약간 쓴맛이 돌던 것이 점차 달콤하고 향기롭게 혀를 자극해 노완동은 안심이 되었다. 세 송이가 아니라 생각 같아서는 쟁반에 담긴 전부라도 먹을 것 같았다. 노완동이 약속대로 세 송이를 모두 먹고 나서 봉고에게 말했다. "오늘 보니까 당신도 정화만을 먹었던 것 같은데 혹시 더 먹을 생각은 없소?" 그러자 봉고가 웃었다. "그러죠." 봉고는 두 손가락 끝으로 꽃송이를 하나하나씩 집어서는 입에 넣고 조용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아니 그 모양이 하도 조용하고 예뻐 마치 녹여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봉고가 혀 끝으로 윗입술을 살짝 스치면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차꽃 향기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않지요. 하지만 이 정화도 그 향기에 뒤지지 않아요. 맛도 또한 향기도 차꽃과 매우 흡사하지요." 노완동은 속으로 어쩌면 정화 역시도 차꽃에 가까운 종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쟁반에 담겼던 정화꽃을 모두 먹고 난 봉고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좋아요. 이젠 제가 음식을 만들어 드릴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노완동은 그녀가 음식을 만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열길도 넘을 듯 뱃속이 텅 비어있었던 터라 노완동은 몹시 배가 고팠다. 정화꽃 세 송이로는 어림도 없었다. 잠시후 봉고가 음식을 가져왔다. 눈이 번쩍 뜨인 노완동은 음식을 보자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봉고는 맞은 편에 다소곳이 앉아 노완동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엔 안도의 기운이 맴도는 듯했다. 노완동이 배불리 먹고나서 시원하게 트름까지 해댔다. 그런데 순간 노완동은 아직도 자기 입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랬다. 사내의 입에서 이같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다니 노완동은 속으로 우습기도 했다. 만일 사형인 왕중양이나 전진교의 구처기가 알면 얼마나 웃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약간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아무튼 고맙소. 이제 난 잠을 자야겠소." 그런데 느닷없이 봉고가 손을 노완동의 어깨에 얹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슬며시 감으면서 속삭였다. "저와 함께 주무시지 않을래요?" 노완동은 순간 뒷머리를 치고 달아나는 강한 충격에 아찔했다. '이게 무슨 엉청난 음모란 말인가? 난 바보가 아니다. 네가 영고처럼 또 날 속이려고 하는 걸 다 안다. 어림도 없지.' 수세에 몰린듯 노완동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돼. 난 원래 남과 함께 자는 습관이 없어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