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37편 (37/66)
구양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하! 황약사 네놈은 지금 미운산이 막 독사에게 물려 늘어지는 꼴을 보았느니라." 미운산은 온몸을 심하게 떨어댔다. 독이 워낙 강한 탓에 곧 죽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운산이 소리를 쳤다. "황약사, 어서 나를 구해주게!" 황약사가 미운산이 쓰러져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소리도 남기지 않고 몸을 놀려 독사장을 그녀에게서 받아쥔 구양봉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휘릭- 휘릭- 그러자 미운산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있던 독사 두 마리가 빠져나와 구양봉에게로 쏜살같이 기어왔다. 곧 독사장을 기어오른 뱀들은 자루에 나있는 괴물의 머리를 닮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구멍은 마치 괴물의 콧구멍처럼 생겼다. 그러더니 이번엔 눈구멍으로 보이는 곳으로 머리를 내민 독사들이 황약사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황약사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구양봉은 독사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황약사, 네놈이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오늘 나의 독사장 맛을 보여주겠다!" 구양봉의 고함소리에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은 황약사가 미운산에게로 달려갔다. 미운산이 신음을 토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빨리!" 숨이 넘어갈 듯한 미운산의 말에 황약사는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다. 곧 도이 온몸에 퍼져 미운산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황약사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번개같이 몸을 날려 묘대야 앞으로 날아갔다. "이크!" 깜짝 놀란 묘대야가 얼떨결에 국자를 그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 틈을 이용한 황약사는 얼른 다른 손에 들려있던 칼을 빼앗았다. "악!" 순간 황약사가 올려친 칼에 맞은 국자가 휙 묘대야의 등쪽으로 날아가 일격을 가했다. 자기 손에 들려있던 국자에 맞은 묘대야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미운산 쪽으로 같은 동작으로 날아온 황약사는 왼손으로 미운산의 대혈 몇곳을 눌렀다. 그리곤 칼로 미운산의 오른쪽 다리를 내리쳤다. "아악! 으......" 미운산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운산의 오른쪽 다리는 황약사의 손에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칼에 잘려나가 그만큼 고통이 덜 했는지도 몰랐다. "아, 으......" 차츰 사그라드는 비명을 입에 문 채로 미운산이 혼절해버렸다. 미립과 미기가 발을 동동 구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직 요리사 형제들에게 잡혀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미기의 울부지는 소리만 넓은 뜨락 안을 일깨울 듯했다. 그런데 피를 흘리며 기절을 한 아버지를 부르다 그만 미기 역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황약사는 미운산을 부축한 채 연거푸 혈도를 눌러 지혈에 힘을 썼다. 그리곤 곧 도화도의 영약인 "구화옥노환(九花玉露丸)"을 몇알 으깨어 미운산의 절단된 다리 상처에 발랐다. 황약사의 손놀림은 매우 민첩했다. 구양봉과 요리사 형제 그리고 그녀까지도 그런 황약사를 주시하고 있을 뿐 누구도 섣불리 대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함부로 황약사에게 덤볐다가는 목숨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려나간 다리에 있던 바지조각을 벗겨내 미운산의 상처를 싸맨 황약사가 말했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잠시 기절을 했던 미운산이 황약사의 노력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미운산이 겨우 입을 떼었다. "동생, 정말 고맙네. 자네가 와주었기에 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네." 그러나 미운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미운산은 지칠대로 지쳐 그 말을 하는 데도 힘이 들어할 정도였다. 황약사가 말했다. "형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구해 도망치게 했는데 또 이렇게 붙잡히고 말았군요. 모두 제 탓입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시 구해드리겠습니다." 원래 성품이 강직한 미운산으로서는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좀 수치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황약사의 고마움과 눈물을 보니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황약사의 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미운산이 겨우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르켰다. "바로 저 요사스런 계집 때문에 싱긴 일이라네. 자네가 어서 개방을 구해주게나." 황약사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황약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구양봉을 주시했다. "노독물, 내가 미운산 형님을 돕는 걸 막아서지 말아라!" 그러자 구양봉이 미웃었다. "도화주는 과연 천하의 큰 영웅답군. 임자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한가지 저 여인을 다치게 해서는 안돼. 만일 그대가 저 여인을 죽인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역시 쓴웃음으로 맞선 황약사가 이번엔 요리사들 쪽으로 매서운 눈길을 쏘아댔다. 그러더니 국자를 맞고 쓰러졌던 겨우 정신을 차린 묘대야를 불렀다. "묘가놈아, 네놈이 덤벼든다면 아주 대환영이겠다. 네놈을 머리끝에서부터 다리까지 공평하게 정확히 두쪽으로 갈라줄테니 어서 오너라." 이들부터 없앨 계산이었다. 그러나 묘대야는 이미 꼬리를 감춰버린 뒤였다. 황약사가 가까이 다가서자 역시 엉겹결에 국자를 휘두를 뿐이었다. 미소를 짓던 황약사가 들고있던 칼로 이번엔 국자를 내리쳤다. 그러자 국자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자기가 아끼던 국자가 작신 부러진 것을 본 묘대야는 그만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황약사의 위력에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가짜 미립이 데리고 온 한무리의 여인들은 황약사의 기막힌 무예에 저마다 탄성까지 내질렀다. 이번엔 둘째에게로 다가선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둘째 이놈아, 네놈이 덤빈다면 쇠솔에 숨겨진 서른여섯개의 살들을 뽑아 혈도에 쑤셔넣어줄 것이다. 어떠냐? 그렇게 되면 네놈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텐데." 겁을 먹고 벌벌 떠는 것은 둘째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약사가 부리는 엄청나고도 지독한 법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것은 황약사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금침을 척추뼈에 꽂아넣는 법수인데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략돼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바로 "부골독침(附骨毒針)"이라고 불리우는 법수였다. 그런데 더 심하게 자신의 무기인 쇠솔에 숨겨놓은 살들로 막는다니...... 둘째는 온몸을 떨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둘째는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허둥대기 시작했다. 미립을 잡고 있는 세째에게로 온 황약사가 역시 으름장을 놓았다. "그 여인을 놓아준다면 용서는 하마." 황약사는 요리사 중 이 세째가 가장 간교한 자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은근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보다 간교한 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째가 말없이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 틈을 이용해 미립이 얼른 미운산 쪽으로 달려갔다. "하하하, 너 역시 총명한 놈이로구나!" 말도 붙이기 전에 슬슬 뒷걸음치는 네째를 본 황약사가 크게 웃었다. 이번엔 미기를 잡고 있는 다섯째였다. 어느새 그는 미기의 목에 다시 저울추를 감아놓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시달렸던지 미기는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섯째는 저울추를 풀지 않고 있었다. "네가 아이를 놓아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가벼운 어조로 황약사가 말했다. 기절을 해 쓰러져 있는 미기를 슬쩍 살펴본 다섯째가 갑자기 소리쳤다. "황약사, 네놈이 날 건드리면 내가 이 아일 먼저 요절내겠다!" 그러면서 미기의 목을 감고 있는 저울추에 힘을 주려고 들었다.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황약사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뒷걸음질 치며 계속 미기의 목을 조르려는 다섯째를 향해 황약사가 놈을 날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야압!" 순간 다섯째는 자신의 해(海)와 담중(膽中) 대혈에 이상한 느낌이 와 닿는 것을 감지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온몸의 힘이 그 담중혈로 빠져 달아나는 것이었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황약사가 다가서더니 다섯째의 팔을 잡아 당겼다. 황약사가 당기는 대로 다섯째의 몸이 돌더니 저울추가 풀렸다. 그리곤 다시 휙 하고 다섯째를 돌렸더니 이번엔 저울추가 그의 목에 칭칭 감기고 말았다. "어서 나를 좀 구해주우!" 당황한 다섯째가 소리쳤다. 그러나 모두들 그 자리에서 한발짝도 내딛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 죽어요!" 계속 다섯째가 발버둥을 치며 괴로워하자 모두들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당장 황약사에게로 달겨들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구양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약사, 이 다섯 요리사들 역시 고수라는 것을 명심하라구!" 잠시 도망을 갔던 묘대야를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이 한꺼번에 황약사에게로 덤벼들었다. 황약사가 쥐고 있던 저울추를 흔들자 다섯째의 비명이 더 크게 울려퍼졌다. "악! 나 죽는다!" 다섯째의 눈알은 자기 코보다 더 높이 튀어나오고 피가 흘렀다. 곧 바닥에 축 널부러진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서 덤비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황약사의 외침에 모두들 다시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큰형의 책임이 컸던지 묘대야가 나서며 소리쳤다. "네놈이 우리 다섯째를 죽였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체면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결사적으로 싸워 꼭 다섯째의 원수를 갚을 것을 밝힌다." 묘대야가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는 막 나머지 형제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멈춰라!" 이때까지 한쪽으로 물러나 구경만 하고 있던 가짜 미립이 나섰다. 그녀는 황약사 앞으로 가더니 생글생글 웃기부터 했다. "호호호, 당신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군요. 천하의 다섯째를 누가 쓰러뜨릴 수 있을까 평소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고민이 풀렸네요. 역시 도화도주로군요. 당신은 구양선생 다음으로 대단한 분이세요." 그러자 옆에 있던 구양봉이 흡족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허허, 옳으신 말씀. 하지만 그대도 조심을 하라구."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긴 말 하지 않겠네. 내가 미방주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해준다면 난 싸움을 멈추겠네." 그녀가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엉뚱하게도 황약사에게로 보내는 음모를 담은 추파가 담겨져 있었으나 그는 단박에 눈치채지 못했다. "황약사, 당신이 나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의 말을 들을지도 모르는데, 어떠세요?" 하며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황약사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제19장 절곡정으로 간 노완동 황약사는 그녀가 뿌리는 웃음과 짓거리에 분노가 들끓었다. 금방이라도 가슴을 치며 날뛸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사람들은 황약사를 가르켜 고약한 병이 있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황약사가 남녀간의 일에 아주 괴상망측하고 병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믿고 있었지만 오히려 점잖은 사람에 속했다. 그는 자신의 처자에 대해 아주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도화도에서 떠나온 몸이지만 하루라도 아형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아무리 미색이 출중하다고 해도 황약사의 안중에는 아예 담겨져 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아양을 부리려고 하자 황약사는 화가 났던 것이다. "닥치거라!" 의외로 화를 버럭 내자 가짜 미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상대가 꼿꼿하게 나온다고 선선히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황약사, 당신은 정말 멋이 없는 사내군요. 천하의 고수라도 여인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법은 없다구요. 그러지 말고 저와 잠깐 얘기를 좀 해요 네?" "네년이 정 정신을 못 차린다면 별 수 없군. 우선 네년부터 죽여야겠다!" 그녀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황약사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항상 오만과 무례함으로 상대를 농락한다는 그녀의 행동이 황약사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기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황약사를 따르는 여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자기에게만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확신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온갖 자태를 부리며 황약사의 노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다. "호호호, 전 당신같은 사내를 좋아한답니다. 용모도 준수하고 인정미도 있는 당신을 좋아한다구요." 그러자 황약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황약사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을 살기라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자기에게로 빠져드는 줄로만 알고 있는 그녀는 황약사를 맞기 위해 한껏 가슴을 부풀렸다. 바로 이때 구양봉이 소리쳤다. "물러서!" 그녀에게 하는 소리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몇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순간 그녀는 거의 동시에 황약사가 내민 중지 끝을 볼 수 있었다. 황약사는 중지로 암기를 튕겨 그녀에게로 쏘았던 것이다.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곧 머리에 암기를 맞고 쓰러졌다. 때를 같이하여 구양봉의 독사장이 황약사의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황약사는 손을 돌려 도화도에서 자기가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낙영신장(落英神掌)" 법수로 맞섰다. 독사장 자루 구멍으로 두 마리의 독사가 몸둥이를 내밀며 황약사에게로 달겨들었다.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훅 돋을 지경이었다. 황약사가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구양봉은 더 쫓아가지 않고 쓰러진 그녀를 살피기에 바빴다. 그녀는 곧 깨어났다. 두 여인이 달려와 부축하자 정신을 가다듬던 그녀가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구양봉이 중간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넘어지면서 다쳤는지 그녀의 머리에서는 빨간 피가 흘렀다.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황약사를 노려보는 그녀는 아랫입술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아마도 자기의 미모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사내 앞에서 보일 수 있는 행동일 것이었다. 그녀가 구양봉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양선생,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하며 고개를 숙이자 구양봉이 검손한 척 손을 들어 잠시 흔들었다. "구양선생, 당신과 이 황약사 두 사람 중 어느 사람의 무예가 뛰어난가요?" 그녀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질문 속에 담겨진 것은 단순히 누구의 실력이 우월하냐는 것을 알고 싶은 뜻만은 아닐 것이다. 구양봉이 잠시 대답을 못하고 눈동자를 굴리자 그녀가 대신 나섰다. "제가 듣기로는 선생은 천하에 드문 분이시고 무림에서 제일인자라고들 하던데, 이 황약사와는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군요?" "황약사 따위가 다 뭐야?" 구양봉이 그 말에 눈에 쌍불을 켜며 소리쳤다. 그녀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놈은 동사(東邪)지만 이 서독(西毒)을 당해내지는 못해!" 계속 자기 가슴을 칠 듯 분노하고 있는 구양봉을 주시하는 그녀의 입술 끝은 한층 묘하게 변해갔다. 그런데 황약사가 어느 때부터인가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혼자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차츰 그녀의 교묘한 술책을 간파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구양봉의 자존심을 건드려 황약사와 맞서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태를 직감한 황약사가 은근슬쩍 구양봉을 떠보기로 했다. "구양형, 우린 후일에 다시 만나 실력을 겨뤄보기로 합시다. 그때가서 서독인 당신이 강한가 아니면 동사인 내가 나은가를 가름해보는 게 어떴소?" 구양봉이 생각한 것이 있는지 묵인을 하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애가 타듯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그녀였다. "내가 듣기에는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사람이 서독이고 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이 서독 구양봉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당신도 결국 두려움이란 또 하나의 가슴을 지닌 사내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 그대가 한 말의 뜻이 무언가?" 듣고 있던 구양봉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제가 보건대 구양선생께서는 화산의 무예시합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듣자하니 얼마전 종남산 중양궁 뒤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화산에서 벌어질 시합 날짜를 정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 장소에 소씨 거렁뱅이, 왕중양 그리고 이 황약사와 홍칠공 또한 남제 단황나으리까지 있었다던데요? 그런데 서독 구양봉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 뭐예요. 천하의 으뜸가는 고수들 중에 아마도 구양선생은 이름이 들어있지를 않나보죠?" 구양봉은 그녀의 말에 아픈 상처가 쑤시듯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는 원래 보통의 선비였으며 무예는 훨씬 후에 익힌 몸이었다. 그 사이에 곡절도 많이 겪었던 터라 무예에 대한 말만 나오면 썩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부리는 개구리공은 어렵게 나중에서야 터득하게 된 것이고 지금의 성격 역시도 최근에서야 기르게 된 게 사실이었다. 그는 무슨 일에서든지 양보할 줄 모르고 본의와는 다르게 화를 잘 내게 되었는데 그게 버릇으로 굳어 져 현재는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사악한 짓을 잘하는 인물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청하기를 노독물이라 자부해왔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곡절을 가슴에 묻어두려고 하던 구양봉의 심기를 그녀가 건드리고 말았다. '네년이 황약사가 나타나니 나를 안중에도 넣으려 하지 않는구나! 네년의 그 심보를 내 모를 줄 아느냐? 이 구양봉의 재간을 업신여기고 있다만은 곧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구양봉은 겉잡을 수 없는 분노로 두 손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내가 중양궁 뒤 그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걸 그댄 어떻게 아나?" 그러면서 구양봉은 그 당시 어떤 논쟁이 일어났었는가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지금 대협 왕중양은 이미 은거하여 그 활사인묘로 들어갔고, 여협 임조영(林朝英)은 병들어 죽었다. 그 연유는 일일이 캐어물을 필요는 없는 것이며 단지 그 후 최근 몇달 동안 허다한 변고들이 속출했었다. 구양봉은 이곳에 묵으면서 그녀와 개방의 은원(恩怨)에 발목이 잡혀 미처 종남산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록 몇달이 지났다 해도 그때의 일 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 구양봉이 그런 사실을 밝히자 놀란 것은 황약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약사는 그때 남제, 소씨 거렁뱅이, 홍칠공 등과 함께 중양궁 뒤에 있는 산 위에서 화산의 무예시합을 앞두고 '구음진경'을 쟁탈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신을 펼쳤던 바있었다. 그는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명예와 '구음진경'의 소유권을 무예시합의 승패로써 결정짓자고 주장했었다. 지금은 그 날짜가 임박해져서 그곳으로 가려던 판국이었다. 그런데 말을 듣고보니 결국 구양봉도 그곳 어디선가 숨어 있 었다는 게 아닌가. 황약사는 구양봉의 속을 알 수 없으니 좀더 지켜보며 사태에 태처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황약사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구양봉이란 인물에 대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오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그 단황나으리, 소씨 거렁뱅이, 왕중양만을 자기의 적수로 자리매김을 해두고 있었다. 구양봉은 훨씬 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인데 황약사도 그가 차츰 풍운아로 변해가고 있다는 말만 들었을 따름이었다. 구양봉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황약사, 그대가 화산의 무예시합에 가는 건 내 상관할 바가 아니야. 허나 그대는 화산에 가기 전에 나와 먼저 싸워야겠네. 또한 그대가 나하고 싸워 이긴다 해도 화산에는 갈 수 있겠지만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걸세. 한편 만일 그대가 날 이기지 못하면 이곳에서 죽어 처량한 원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명심해두게. 그렇게 되면 그대는 한평생 '구음진경'과는 연분이 닿지 않는 인생으로 끝을 내고 마는 것이지." 황약사는 비웃고 말았다. 그의 실력을 아주 형편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왕중양이나 단황 나으리 등과 같은 인물과 비교될 수 있는 실력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황약사가 매우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구양봉, 당신이 나와 싸우게 되면 화산 무예시합에 참가할 고수 중 하나가 줄어들게 돼 시합의 위신이 떨어질까 걱정이네." "슬슬 비꼬듯 나를 깎아내리자는 속셈인데 당장 집어치우고 어서 한판 붙어보는 게 어떤가?" 갑자기 구양봉이 자세를 추스리며 나섰다. 이 순간을 가장 기다렸던 것은 바로 가짜 미립인 그녀였다. 구양봉이 곧 혈전을 벌이려 자세를 가다듬자 그녀는 한쪽에서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숨겼다. 이들 두 사람이 싸우는 틈을 타 미운산과 그의 자식들을 해칠 수 있으리라는 꿍심도 가슴 속으로 꾹꾹 채워넣는 눈초리였다. 곧 독사장을 치켜올린 구양봉이 황약사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 두 사람의 혈전을 지켜보는 요리사 형제들의 눈초리도 평범하지가 않았다. 이들은 고수 두 사람이 보여줄 엄청난 힘과 다양한 법수에 대한 기대 때문에 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그런데 혈전은 그다지 심각한 상태로 변하지 않을 조짐을 보였다. 구양봉이 독사장으로 맹공격을 했으나 황약사는 그저 간단히 옥피리로 가볍게 방어할 뿐이었다. 옥피리로 구양봉의 독사장을 가르키며 교묘하게 방어를 하자 구양봉의 공격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곧 진전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