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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30편 (30/66)

2026-09-29 07:55:13 조회 31
노명성과 노경 그리고 나장태에게도 명령이 내려졌다. "미방주께서 폐인이 된 일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으로 보지만 모두 방내의 대사에 속하오. 그러니 세 장로들께서는 전력을 다해 그 일을 밝혀내시오. 한가지 그 일에 대해 소홀히 하는 자가 있다면 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노명성이 뜻하지 않게 미립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미립방주님, 우리더러 그 일을 하라고 하는데 과연 가능하다고 봅니까?" 미립이 대답을 미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노명성의 물음을 무시하듯 뒷짐을 지고는 방안을 서성였다. "우리 아버지는 일찌기 두 사람에게 분부하여 그들을 방주에 앉히려고 했었소. 한 사람은 모두 알다시피 소씨 거렁뱅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홍칠공있었소. 아버지는 홍칠공에게 <강용팔장>을 전수해주기도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모자라 그에게 미처 <타구봉법>은 전수해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홍칠공을 찾아내어 그에게 타구봉법을 전수해주면 일을 좀더 수훨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다음 난 방주자리를 아예 홍칠공에게 넘겨주려고 해요." 장로들은 이제서야 미립이 녹옥죽봉을 탈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은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녀가 방주 자리를 노린 것은 그런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장로들은 미립에 대한 태도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장로들께 잠시 죄를 지은 점 사과를 드려요." 미립이 의외로 장로들에게 다가와 예까지 몰리며 허리를 숙였다. 장로들은 미립에게서 더욱 벗어날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간은 물론 위풍도 부릴 줄 아는 여인 앞에서 장로들은 설복이 되고만 셈이었다. 미립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신호를 보내자 여인 셋이 술단지를 들고 나왔다. 모두 세 개였는데 미립이 그것을 가르키며 한껏 웃어보였다. "이 단지 속에 든 술은 보통술이 아니랍니다. 장로들께서 술을 즐기신다기에 마련한 것이예요. 어느 장로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보실래요? 그런 다음 우리 함께 축배를 들어요." 그런데 한가지 술단지를 들고 있는 여인들은 누더기옷을 입고 나왔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부터 닳아 남루해진 옷이 아니라 일부로 천을 찢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니 자루를 뜯어 만든 옷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로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눈치들이었다. 여인들이 따르는 술냄새에 코를 갖다대고는 벌써 취한 듯 자세를 풀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술냄새를 맡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 얼굴로 풍겨오는 냄새에 범장천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 다른 사람과는 반응이 달랐던 것이다. "아니 이건! 강남의 여아홍(女兒紅)이란 술인데 담근 지 오십년이나 되는 것이로군!" 장로들이 매우 놀라워했다. 오십년이나 되었다면 술을 담근 사람이 소녀였다 해도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여인의 성숫미처럼 오랜 세월 발효되어왔을 실로 귀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여인이 이번엔 다른 단지의 덮개를 떼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냄새는 나지 않고 단지 속에서부터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미립이 여인을 시켜 술을 따른 다음 소검 오평에게 보이라고 했다. 소검 오평이 냄새를 맡고 김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건 황궁에 있는 화주(火酒)가 틀림없어!" 방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유는 화주라는 술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화주를 알아본 소검 오평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놀란 것은 미립도 마찬가지였다. 화주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소검 오평이 첫눈에 알아맞춘 것이었다. 미립은 이 소검 오평이 어떻게 화주를 알아본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굳어졌다. "난 이 술을 마신 적이 있지요." 하며 소검 오평이 미립에게 설명을 했다. 미립이 탄복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 이 술을 구하느냐 온갖 힘을 다 들였는데 장로께서는 벌써 마셔보기까지 했다니 정말 놀라워요." 소검 오평이 웃었다. "하하, 사실은 내게도 분에 넘치는 복이 있었지요. 어느날 홍칠공이 한 단지를 얻어와 함께 마셨는데 벌써 삼년도 더 넘은 일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소." 소검 오평이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성미가 깐깐하고 강직한 사람이라 술을 맛본 내력을 말하고는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장로들은 소검 오평이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성미를 가진 소검 오평이 이처럼 감탄의 말을 이어가자 틀림없는 훌륭한 술이라 생각되었다. 미립이 다시 신호를 보내자 마지막 여인이 술단지를 내밀었다. 그 여인이 내민 술단지를 이번엔 노명성이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른 장로들은 그 술이 어떤 술인지 알지 못했다. 그 술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안의 술은 그리 맑지도 않고 모래 같은 알갱이가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그러나 향기만은 독특했는데 꼭 배향기 같았다. 소미타 추우가 대신 물었다. "이건 무슨 술이요?" 그러자 미립이 기꺼이 물음에 답해주었다. "이건 천하에서 아주 진귀한 장백산 곰술이지요. 이 술은 보기에는 이래 보여도 아주 독하답니다." 곰술이라면 아주 기이한 술이었다. 황금계절인 가을에 과원의 배나무에 배가 무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처럼 향기만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술이었다. 가을에 곰이 땅에 떨어진 과일들을 보고 게걸스럽게 씹지도 않고 삼키는데 그중 들배가 곰의 위속에서 발효되면 그 곰은 취해 쓰러져 잠이 든다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달겨들어 곰을 묶어놓고 산채로 배를 가른다. 그리곤 곰이 방금 삼킨 것들을 꺼내어 술에 담가 만들었다는 게 바로 이 곰술이었다. 그러니 이런 술이 진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장로들의 얼굴에 흡족한 기운이 만연했다. 강남의 여야홍이란 술은 담근 지 오십년이나 된다니까 보기조차 힘든 술이요, 화주는 임금의 궁전에만 있는 술이니 역시 얻기 힘든 술이며, 이 곰술이란 것도 살아있는 야생곰의 배를 갈라 얻은 술이니 진귀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남북 각지를 돌아다녀 견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술들은 아직 마셔보지 못했던 처지였다. 미립이 다시 신호를 보내자 여인들이 의자들을 날라왔다. 미립은 장로들을 좌석에 청해 앉힌 다음 말했다. "술은 마땅히 도수가 낮은 것부터 시작해야 점점 취흥이 더해가는 법이지요. 마치 겨울로부터 시작하여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절기를 겪는 것처럼 차츰 뜨거워져야 하지 않겠어요." 먼저 강남의 여아홍이란 술부터 마시기 시작하였다. 단지에 있는 향기로운 술을 사발에 따라놓으니 더욱 진하게 향이 퍼졌다. 그 향기만으로도 취할 것만 같았다. 장로들은 제각기 술을 음미하고는 부드럽고 시원한 맛에 탐복을 했다. 차츰 그 향기는 뜨거운 열기로 변해 가슴속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 다음이 화주였다. 화주는 궁전의 술로 황제가 마시는 귀한 것이었다. 적당한 열기로 가슴을 데우고 있는 여아홍에 가미된 화주는 겉잡을 수 없는 흥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라올랐지만 나른하다거나 정신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눈앞으로 맑은 기운이 자리하는 듯했다. 술을 마시며 시중을 드는 여인을 바라보니 더없이 미인으로 비쳤다. 그 옆에서 줄곤 미소를 띠우고 있는 미립 역시도 천하에 둘도 없는 절색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다음이 곰술 차례였다. 미립이 웃음을 가득 얼굴에 그리며 말했다. "이 술을 마시려면 한가지 지켜야할 게 있어요." "그게 뭐요?" 범장천이 거나하게 취한 눈빛을 미립에게로 옮겼다. "단숨에 비워야 하지요. 그래야만 흥이 나는 법이거든요." 장로들은 미립의 말대로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 술은 어찌나 독한지 예리한 칼로 뱃속을 후벼파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짜릿하고도 가벼운 통증을 동반한 맛에 장로들은 또 한번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흥분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소검 오평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정말 훌륭한 술이군, 훌륭해!" 장로들도 하나같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세워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주고 받았다. 묘대야는 방안에서 자화(字畵)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서묵(書墨)에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어 고서와 자화를 대하기만 하면 빠짐없이 사들이기도 했다. 또한 때때로 그것들을 집에서 감상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겼다. 그의 장서에는 옛날 무명씨의 작품으로부터 창힐(蒼*)의 귀곡도(鬼哭圖)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장품들이 보관돼 있었다. 귀곡도에는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 귀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창힐의 주위를 숱한 귀신들이 둘러싼 채 그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밖에도 당조 때의 몇몇 대가들 그림도 보관돼 있기도 했다. 이런 명화들은 아주 진귀하여 쉽게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묘대야는 그 그림들을 어루만질듯 감상을 하면서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묘대야님 계시오?" 묘대야는 그림들을 얼른 간수하며 대답했다. "누구요?" 묘대야가 문발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니 그곳엔 선비가 서 있었다. 그런데 선비의 행색이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묘대야는 곧 그가 미립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묘대야와 미립 간에는 지난날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미립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었는데 알고보니 묘령의 여인이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묘대야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를 다시 찾아온 미립을 보자 묘대야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미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묘하군, 과연 묘해." 미립의 남복 차림에서 묘대야는 공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고 눈매가 곱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또한 귀도 공자보다는 작았다. 미립을 바라보는 묘대야는 저도 모르게 옛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이전에 저 여인이 사내인 줄 알고 애써 잘 보이려고 했었지. 그런데 여인인 것을 알게 되어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그런데 묘대야는 다시 남장을 하고 나타난 미립을 보자 마음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비록 여인이라고 해도 겉으로는 사내였다. 언제 자신이 저런 수려한 용모를 가진 사내와 접촉해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라도 정답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 잘 왔네. 내가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함께 유희라도 즐기세." 미립이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대해주려는 묘대야의 태도에 약간 놀라는 듯했다. "형님께서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지요." 그들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문을 나서 큰거리에 이르렀다. 그들은 먼저 호수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유람객들로 너무 붐벼 그들은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로 소근댔다. 그들은 호수를 지나 낙사거(*士居)란 곳에 이르렀다. 이 낙사거는 아주 아늑한 곳이었다. 비록 그저 그런 술집이긴 했지만 이곳에 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체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풍류재자(風流才子), 묵객소인(墨客騷人)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의 유난히 새하얀 바람벽에는 온통 시구절들로 얼룩져 있었는데 운치가 있고 글씨체도 멋졌다. 또한 금속공구로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어서 그 멋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묘대야와 미립은 이층으로 올라가 정갈하게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주인이 곧 달려왔다. 이 낙사거의 사람들은 다른 술집의 시중꾼들과는 달리 모두 소매를 졸라맨 짧은 적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자를 썼으며 그 모자 뒤에는 이삭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있는 게 특색이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며 술시중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곳의 시중꾼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었다. 한 부류는 글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그러나 이해할 수 없지만 시중꾼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곳의 시중꾼들의 절반은 성품이 곧은 선비출신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한 부류는 용모가 깔끔하게 생긴 계집들이었다. 하지만 아두(*頭)의 옷차림과는 달리 당조 때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이들은 일솜씨가 일품이었고 손님들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으로 유 명했다. 두 사람 앞으로 곧 술과 요리가 날라왔다. 묘대야가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동생과 오랜 만에 한 자리에 앉아보는군." 미립이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의 나이는 사실 차이가 많아 형제라는 말이 어울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묘대야는 궁궐 속에 오래 거처하면서 근심걱정 없는 나날들을 보낸 사람이라 겉보기에 조금도 늙지가 않았다. 비록 몸이 좀 불기는 했지만 아직도 용모가 우아하고 젊어보이기까지 했다. 미립은 반면에 단정하고 수려한 선비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올라오자 시중을 드는 계집애들이 자꾸 미립에게 눈길을 주기도 했었다. 미립도 술잔을 들었다. "시귀를 짓지 않고서야 어디 낙서거에 왔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형님께서 한수 지어보시는 게." 그러자 가까이 있던 계집이 얼른 웃음을 머금으며 지필묵을 받쳐들고 왔다. 그 계집은 옷소매를 걷고는 먹을 갈았다. 그러면서 자꾸 미립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 낙사거에서 시를 짓는 일을 놓고 떠도는 말이 있었다. 새하얀 벽에다 장방형의 공간이 생기도록 금을 그어놓았다. 이 장방형 속에 글을 남기려면 은자를 좀 내야했다. 이 낙사0거는 풍류인사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때로는 당조(當朝)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들도 가끔 찾아올 때도 있었다.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명부에 기록하는 것 말고도 이 벽에다 시와 이름을 함께 남기기도 했다. 미립이 제법 묵직한 은덩어리를 꺼냈는데 얼추 보아도 쉰냥짜리는 될 성싶었다. 미립이 그 은덩어리를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이것을 받게." 그러자 계집이 은덩어리를 집어 살펴보지도 않고 옷소매 속에 얼른 감추는 것이었다. 벽에 시를 써도 좋다는 뜻이었다. 묘대야는 왼손에 잔을 든 채로 오른손으로 붓을 집었다. 여유있는 자세로 벽 쪽으로 다가가는 묘대야는 속으로 말했다. '동생이 내게 시를 지으라 했는데 실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벽 앞에 선 묘대야는 계집이 내민 벼루에 붓을 담갔다 천천히 들고는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목은 "국화를 읊노라(*菊)"였다. 꽃송이 고개 숙이니 금빛 뿔용이 깃드는 듯 밝고 어두움이 모두 그대에게 달렸어라 빛과 색깔 취하지 않고 그대로도 절색이니 너의 집에 가지 말고 내 집으로 오소서 묘대야는 시를 다 지어놓고 웃음 띤 얼굴로 미립을 주시했다. 묘대야는 방금 전 지은 시에 대해 다시 한번 속으로 음미해 보았다. 바로 미립을 향해 쓴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시를 미립이 읽고나면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미립이 시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해요. 참 멋진 시예요. 형님이 이처럼 글재간이 대단한 줄 정말 미처 몰랐는데요. 형님이 진작 이런 글재주를 보였더라면 장원급제하여 조종을 더욱 빛낼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예요." "너무 추켜세우지 말게. 되는대로 뇌까린건데 어디 쓴 만한 구석이라도 있는가? 이 낙사거의 명사(名士)들께 웃음거리나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미립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겸손의 말씀이세요. 큰형님의 재질에 전 아주 탄복을 했어요." 그러나 시중을 드는 자 중 몇몇은 매우 마뜩찮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까짓 시구를 가지고 저 야단이라니 하는 낯빛이었다. 사실 이곳에서는 아무나 돈만 내면 시를 지을수 있으니 그들의 눈에는 달리 비칠 수 없었다. 반면에 이름을 오래 남길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왼쪽 벽을 보면 대거사 구양수(歐陽修)가 국화를 읊은 부(賦)가 씌여져 있었다. 또한 문 옆에도 대학사 소식(蘇軾)이 남긴 주사(酒*)가 펼쳐져 있기도 했다. 비록 일시의 취흥에 의해 씌여진 것이긴 하지만 그 농후한 기백과 운치는 속인들이 따를 수 없는 경지의 것들이었다. 이번엔 묘대야가 품속에서 은덩어리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동생 차례요." "저는 관두겠어요." 그러나 묘대야가 재차 권하자 미립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립이 벽에 쓴 것은 한수의 소령(小令)이었다. 하도 권하기에 사양타 못해 나섰노라 동쪽 기슭 낙사거에서 술김에 부(賦)를 지으려나 뜻대로 안되네 구양수가 이곳에서 시를 읊었고 소식이 이곳에서 문재를 떨치었거니 전인들의 그 재질에 어이 미치리 묘대야가 그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미립의 문재가 자기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한수의 소령을 짓는데도 이처럼 사나이의 기백이 넘쳐흐르지 않는가. 자기는 날마다 식칼과 국자나 주무르다 보니 사나이의 기백이란 무뎌졌다는 것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묘대야는 미립을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묘대야가 한껏 웃으며 말했다. "동생, 내 쉰냥짜리 은자를 모처럼 값지게 썼네. 동생의 글을 보니 이 형은 아주 부끄럽기 짝이 없다오." 이들의 웃음과 행동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하나 있었는데 서생같은 차림의 인물이었다. 정확히 미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미립의 재능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립이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마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립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형(年兄)께 인사드립니다." 연형이라 부른 것은 미립을 향해 존대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연형이라고 하면 같이 과거를 본 선비들 사이에서 진사가 된 상대를 향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미립이 바삐 예를 갖추며 자신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연형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자리에 앉은 서생차림의 사내가 잔을 들며 말했다. "저는 연형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연형께서는 이처럼 풍채가 좋으신데 필시 저보다는 선배일 듯싶군요. 제가 연형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하신지요?" "벌써 말문을 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미립도 점잖은 태도로 응수했다. 한편 묘대야의 기분은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침 술도 어지간히 마셨고 시를 놓고 한껏 즐거운 시간을 가졌기에 그만 미립과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물이 불쑥 끼어들어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묘대야의 이런 심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내는 미립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전 장성(章誠)이라 부르고 호는 자거(子居)라 하죠. 그리고 정도(定都)사람으로 삼방이갑(三榜二甲) 진사이기도 합니다. 연형께서는 어디서 오신 뉘신지 알고 싶습니다만." 불현 미립은 상대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상대가 싱거운 사람으로 비쳐졌기 ㄸ문이었다. 그러면서 미립은 마지못해 응수를 해주었다. "부끄럽습니다. 저는 향시에는 참가해보았으나 아직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사람이니 부디 비웃지 마십시오." 그러자 장성이라 자칭한 사내가 느닷없이 탁자를 치며 화를 냈다. "공정하지 못하군. 정말 불공평해! 이처럼 재기와 식견이 있는 인물이라면 장원급제라도 문제가 없는데."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묘대야가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만 물러가시오!" 장성이 묘대야의 반응에 당황하며 미립을 바라보았다. "이 연형께서는 지금 뭐라 하시는 건지요?" 묘대야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어서 물러가란 말이다!" 그런데 장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대야의 태도를 책망하려고 했다. "이 동생은 이토록 얌전한데 저 연형께선......" 말끝을 얼버무리는 것이 묘대야를 업신 여기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마저 설레설레 흔들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묘대야가 장성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정말 물러가지 안겠어!"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장성은 꼼짝없이 아가미를 잡혀 끌어올려진 잉어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멱살을 잡힌 탓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보였다. 겨우 묘대야의 억센 팔을 물리치고 입을 열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사문(師門)을 욕보이다니?" 그러자 묘대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그에게 날렸다. "어쿠!" 장성은 주먹을 맞고는 벽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묘대야가 미립의 손을 이끌고는 술집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길을 막았다. "네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기에 까닭없이 우리 선비를 때리느냐?" "저 놈을 관청에 일러바쳐! 일러바치라구!" "누가 이 낙사거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려!" 여기저기서 묘대야를 가로막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묘대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립의 팔을 잡고는 술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들은 계속 쫓아왔는데 그러나 선뜻 달겨드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