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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29편 (29/66)

2026-09-29 07:55:13 조회 28
순간 마음이 하나로 통했다. 우선 녹옥죽봉을 ㅃ앗고 보자는 게 그들이 서둘러 모은 공통된 생각이었다. 미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방의 대사는 이전에는 나의 아버지가 장악하셨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관할하겠어요. 여러 장로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노명성이 침울한 표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미립을 주시했다. "개방 방주는 원래 덕이 있는 사람이 차지하였소. 소저는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덕이 있다고 개방의 방주에 앉겠다는 것이오? 또한 보잘것 없는 재간으로 어찌 삼십만에 달하는 거지들을 호령할 수 있겠소?" 그러자 미립이 깔깔 웃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노명성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저 한사람 힘만으로는 안되지만 일곱 장로들께서 도와주신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요. 개방은 반드시 흥성하게 될 겁니다. 제가 여러 장로들을 청해온 것도 바로 이 대사를 의논드리기 위해서였어요." 범장천이 가소롭다는 투로 물었다. "하하하, 소저의 나이가 올해 몇이오?" 그러나 미립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꺼릴 게 하나도 없다는 듯 범장천의 물음에 기꺼이 답하고 나섰다. "열여섯이지요." 범장로가 박장대소를 하며 다시 미립을 책망했다. "소저 나이엔 고운 옷 입고 훌륭한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소. 신부노릇을 하며 깨나 받으며 살아야지 어찌 우리 거지들과 한데 어울려 다닌단 말이요. 다른 건 그만 두더라도 소저가 방주로 오른다면 개방의 모든 사람들이 소저에게 침을 뱉어도 할말이 없을 거요. 아니 그 침에 맞아 소저는 죽고 말 것이요. 삼십만 개방사람들의 대소사를 어찌 소저가 맡아 처리할 수 있겠소? 이게 어디 장난인 줄 아오? 내 생각같아서는 소저는 그만 물러서는 게 좋 겠소이다." "범장로께서 하신 말씀을 저 역시 새겨보지 않은 건 아니랍니다. 아버지께선 누구의 모함을 받으셨는데 여러 장로들께서 알아내지 못하니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방주 노릇을 하지 않으신다면 저밖에는 달리 없다구요. 좀 난처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장로들은 미립의 말에 쓴웃음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계집이 감히 천하에서 제일 큰 개방의 방주가 되려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미립이 나장태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께선 제가 방주가 되는 걸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만일 나장태가 동의를 한다면 오의파의 몇몇 장로들은 더는 씨끄럽게 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장태는 미립에게 일침을 놓았다. "네가 개방의 방주가 된다니 꿈도 꾸지 말아라!" 이번엔 범장천에게 물었다. "아저씨 생각은 그럼 어떠세요?" 범장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미립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지 않음에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그렇테지요. 전 당신들이 제가 방주가 되는 걸 바라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당신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아도 할 수 없어요. 개방의 신물인 녹옥죽봉이 이미 제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범장천과 나장태는 미립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미립의 무예란 안중에도 없었기에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미립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더니 곧 의기투합을 했다. "얍!" 소리를 내지르며 공중으로 몸을 띄운 두 사람은 녹옥죽봉을 든 계집을 순식간에 덮쳤다. 나장태는 성난 사자가 발톱으로 먹이를 잡아채듯 두 손으로 미립을 내리쳤다. 범장천 역시 두루미가 두 날개를 펼치면서 땅에 내리듯 했다. 미립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지 멍하니 선 채로 두 사람의 공격에 꼼짝하지를 못했다. 순간 뒤로 주춤 물러선 미립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범장천과 나장로 사이에 뜻하지 않은 괴리가 생기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녹옥죽봉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대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수를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처음 미립을 덮치면서 어느정도의 힘을 분산시켜 상대를 겨냥했던 것이다. 범장천은 미립의 정수리로부터 내리 꽂아 두 어깨를 끌어잡으려고 했다. 반면에 나장태 역시 그녀의 앞가슴 쪽을 노리면서 녹옥죽봉을 잡으려 했다. 여러 장로들은 그들이 덮치면 미립이 몸을 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립이 위기에 몰렸는데도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꼼짝 않고 있는 것이었다. "멋지군요! 무예들이 정말 대단한데요? 개방의 장로로서 손색이 없어요." 하는 조롱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만 할 뿐이었다. 순간 미립이 말을 하는 사이를 틈타 두 사람은 녹옥죽봉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두 사람을 노려보는 게 아닌가? 그는 바로 구양봉이었다. 나장로와 범장로는 구양봉을 알아보자 급히 손을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은 황급히 몸을 추스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나머지 장로들 역시 놀란 눈으로 구양봉을 주시하면서 파르르 떨고들 있었다. 천하의 악독하기로 소문난 구양봉의 출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뒤에 그를 숨겨두고 있었기에 미립이 그토록 거만하게 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립의 요망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든 녹옥죽봉을 가져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보시라구! 아니면 모두 내 말을 따라야 해!"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외팔이 소검 오평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난 절대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곤 천천히 구양봉에게로 다가가 부드럽게 청했다. "구양선생, 개방 내부의 대사는 선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잖소? 그러니 당신은 이만 물러나는 게 좋을 듯 싶은데요." 구양봉이 곁눈으로 소검 오평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하하하, 알고 있기로는 임자의 한쪽 팔은 남의 검에 잘려나갔다고 하던데 나머지 팔마저 잃어버리고 싶은가?" 소검 오평은 더이상 말이 통할 위인이 못될 것 같다고 깨달았는지 약간 뒤로 물러서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장로들이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구양봉을 향해 돌진해들어갔다. 그가 있는 힘을 다 모아 구양봉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런데 구양봉은 거의 검끝이 눈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번개보다 빠르게 손을 놀렸다. 어느새 양손바닥으로 검날을 덥썩 잡았던 것이다. 힘을 주자 그의 검은 땅을 향해 차츰 내려갔다 . 한손으로 검을 쓰다보니 구양봉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대가 이까짓 재간을 믿고 내게 덤비다니? 실로 가소로운 일이로구나." 그리곤 곧 양손에 힘을 주어 소검 오평의 장검을 작신 부러뜨렸다. 이때 하늘을 찌를 듯한 미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구양선생, 소검 오평은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인데 용서해주시지요?" 구양봉이 손을 거두고는 그를 뒤로 떠밀어버렸다. 범장천과 나장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불처럼 환하게 밝혀진 뒤였다. 장로들이 구양봉을 공격한다 해도 참혹한 살상만이 일어날 뿐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범장천이 천천히 미립에게로 걸어나왔다. "내가 듣건대 구양선생은 서역의 백타산군인데 소저는 무슨 연유로 그를 청해왔는지 모르겠구먼." 범장천이 구양봉을 돌아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구양선생이 소저를 부추겨준다면 녹옥죽봉을 포기하겠소. 하지만 구양선생은 날마다 소저를 따라다닐 수는 없는 일이오. 결국 소저의 운명은 비참하게 맞이할 것이오." 그러자 미립이 화를 내며 범장천을 호되게 몰아부쳤다. "이 범장로께선 꽤나 속을 썩이는군요. 전 다만 당신들 일곱 장로들 중에서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 한 자인가를 알아내려는 것 뿐이요. 그 자를 색출해서 내친 다음 나에게도 생각이 따로 있소." 미립이 갑자기 말을 끊더니 상체를 돌려 여인의 손에서 녹옥죽봉을 받들었다. 그리고 높이 쳐들며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녹옥죽봉이 내 손에 있는데 개방의 장로들 중 누가 명을 거역하겠는가!" 장로들은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구양봉이 미립을 부추겼다. "그대가 저 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디 놈이 복종하려 하겠는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양봉이 출수표 노경에게로 몸을 날렸다. 출수표 노경은 구양봉이 자기에게로 손을 뻗자 몹시 당황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무예가 뛰어난 구양봉이지만 겁을 먹고 싸워보지도 못했다면 어찌 사람구실을 다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다짐을 순간 가슴에 새겼다. 구양봉이 다시 한발을 땅에 짚고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ㄸ를 맞춰 출수표 노경은 손에 들고 있던 열두개의 표창을 날렸다. 피릭- 열두개의 표창은 구양봉의 전신을 향해 날아갔다. 표창 끝에는 한결같이 독이 묻어있어 맞기만 하면 끝장이었다. "얏!" 구양봉이 허공에서 옷소매를 휘저었다. 표창들이 구양봉을 비켜날아갔다. 또한 그중 몇개는 노경에게로 되돌아갔다. "읍!"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처 되돌아온 표창을 피하지 못한 노경이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한쪽 어깨에 표창이 꽂혔던 것이다. 구양봉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노경 앞으로 다가왔다. 쓰러진 노경을 바라보며 구양봉이 웃었다. "네 놈이 감히...... 흐흐흐." 하며 쓰러진 노경을 한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노경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두발을 버둥대기 시작했다. 개방의 나머지 장로들은 더이상 구경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구양봉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한손으로 노경을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네 놈들이 다가오면 이 놈은 곧 내장이 튀어나가 죽고 말 것이다! 내가 이 놈을 무작정 돌리면 내장 뿐만 아니라 뼈까지 너희에게로 쏟아져나갈 것이다!" 구양봉은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장로들을 주시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 없지. 자, 그럼 잘 보도록 해라!" 하며 휘파람을 계속 불었다. 순간 한쪽 손으로 들고 있던 독사장에서 두 마리의 작은 뱀이 기어나왔다. 슉슉- 삽시간에 뱀은 출수표 노경의 머리로 건너가 그의 두 귀에 매달렸다. 혀를 낼름거리던 뱀이 노경을 몸으로 싸고 돌았다. "아악!" 노경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떠냐? 이 장로의 목숨은 네 놈들에게 달려있다." 구양봉은 곧 출수표 노경을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그는 땅바닥에 내리꽂힌 채로 버둥대기 시작했다. 아직 귀에 매달려 있는 독사들 ㄸ문에 마치 불통에라 빠진 사람처럼 열심히 몸부림을 쳤다. 범장천이 노경을 바라보던 눈길을 구양봉에게로 돌렸다. 구양봉의 손엔 독사장이 위풍스럽게 들려있었다. 그는 오만한 눈으로 장로들을 내려보며 호기스런 웃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하하, 보아하니 내가 손을 써 이 개방의 장로놈들을 모조리 죽여야 할 것 같다. 개방엔 제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끌어모을 수 있지 않겠느냐?" 개방의 일곱 장로들은 구양봉의 말에 수습책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만약 구양봉이 자신들을 모두 없앤다면 개방은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었다. 녹옥죽봉을 빼앗기도 전에 죽음을 당해선 안될 것이었다. "구양선생, 그리 급히 드셔서는 체하지요. 개방의 장로들도 대략은 알고 있으니 그들이 어찌 쉽사리 목숨을 내놓겠어요. 제가 저 사람들과 말을 한번 해보지요." 하며 나선 것은 미립이었다. 미립이 범장천에게로 다가가 눈치를 살피려하자 범장천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네 년이 아무리 입이 닳도록 떠벌여도 난 듣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미립의 입술이 움찔움찔대더니 나긋한 소리를 뱉어냈다. "아저씨, 당신이 재산을 탕진해가면서 개방에 들어와 지금에 이르렀는데 어렵게 되었네요. 참 유감스러운 일이죠?" "네가 차라리 날 죽여라. 하지만 날 죽일 수는 있어도 개방을 얻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저씨, 내가 아저씨를 죽여 무엇을 얻겠어요? 난 그저 한가지 일을 아저씨에게 알려드리려는 것 뿐이예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범장천은 미립의 말에 귀를 세웠다. "임안성 동사조(東斜조) 골목에는 자그마한 돌다리가 있고 다리 뒤에는 작은 뜨락이 있죠. 그 뜨락에 식구가 다섯이 되는 한식구가 살고 있잖아요? 그 집에 중년의 사내와 한 여인이 있고 어린아이도 셋이나 되죠. 둘은 사내고 하나가 계집애죠. 그 애들은 아주 사랑스럽게 생겼어요. 안그래요?" "네, 네가 가,감히......" 바로 범장천의 집이었다.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호호호! 범장로, 당신이 절 방주로 받들지 않는다면 그 집 안의 사람들은 죽고 말텐데요. 그집 뜨락엔 작은 우물이 있는데 아마 모두 죽고나면 그 우물 탓이라고 사람들은 말할테죠." 범장로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어떠한 고통도 참아낼 수 있는 자신이었지만 가족들을 미끼로 위협을 하는 미립 앞에서는 더이상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하며 외친 것은 노명성이었다. 미립이 노명성을 할끔거리다가 입술을 옆으로 찢어 웃었다. "호호호, 노장로가 아닌가요? 강호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존경하고 있다지요? 당신이 협의(俠義)있는 사람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기에 청한자자(淸閒慈者)라는 별호까지 생겨난 게 아니겠어요. 전 이 별호를 들을 때마다 십팔나한(十八羅漢)의 이름을 들을 때처럼 경모의 정을 품게 되지 뭐예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맞는가봐요. 하지만 전 당신에게도 몇가지의 일을 알려줘야겠어요. 그럼 당신의 생각도 달라질지 모 르니까요." "허튼수작 말아라!" 노명성이 어림없다는 투로 미립의 말을 흘려넘겼다. "좋아요. 그럼 당신께는 몇글자만 알려드리지요." "몇글자라니?" 노명성이 어리둥절해하자 곧 미립이 정면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청평채(淸平寨), 운가교(雲家校), 녹보(鹿堡)......" "아니!" 노명성의 얼굴은 갑자기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뒤덮히고 말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 노명성의 표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졌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미립에 대해 노명성은 또한번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립의 방자함은 그것으로 끝나지를 않았다. 그밖의 다섯 장로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섯분의 장로님들도 저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만일 할 말씀이 없다면 개방의 방주가 될 수 있겠지요?" "집어치워!" 하며 소리친 것은 바닥에 쓰러졌던 소검 오평이었다. 어느새 뱀들을 물리친 그는 비칠비칠 미립에게로 다가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쓰러지면서 해독제를 급히 삼킨 탓에 위기를 넘긴 듯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는 표창에 맞은 상처로 피가 짙게 배어 있었다. "넌 나를 마음대로 부리진 못해! 난 두렵지 않단 말이다. 내게도 전해 줄 말이 있다면 어디 해보렴?" "아저씬 사람됨됨이가 과연 광명정대하군요. 하지만 무릇 사람이란 누구나 헛점은 있기 마련이죠. 당신은 비록 절개가 높고 청념한 분이시지만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초는 있겠죠. 그걸 제가 밝힌다면 어떨까요?" "뭐라구! 네가 그따위 심보를 가지고 개방의 방주가 된다면 사람들은 원망의 소리만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난 절대로 네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것을 구경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저씨, 당신은 저를 가장 훌륭하게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어때요? 후회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는 것이?" "소저가 후회를 한다고 했는데 궁금하구나? 도대체 무엇을 놓고 나를 비웃겠다는 건지 어서 말해보거라?" 그러자 미립이 전혀 새롭고도 군침이 돌만한 사실을 꺼내놓았다. "아저씨에게 한권의 훌륭한 검보(劍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은 한평생 그런 책을 얻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가 그 검보를 드린다면 어떨까요?" 정말 뜻밖이었다. 황소보다 더 커진 눈으로 미립을 보던 소검 오평은 입술이 탔다. "뭐라고 했더냐? 정말 네게 그런 검보가, 그렇게 훌륭한 검보가 있더란 말이냐? 혹시 나를 기만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목소리를 떨리고 있었다. 정말 사실이라면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그 검보는 다만 당신과 나만 아는 것으로 해요. 그건 양가죽으로 덮개를 씌운 책인데 모두 백한장이었지만 지금은 한장이 모자란 백장이지요." 미립의 말을 옆에서 ㄷ고 있던 개방의 장로들은 이미 면밀한 계획이 서 있음에 경악했다. 결국 자기들은 이미 그녀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미립이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전 분명 개방의 방주가 될 거예요. 어디 한번 말해보세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러나 모두들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대신 대답을 하듯 나선 것은 구양봉이었다. "훌륭하군, 과연 훌륭해! 이 노독물도 그대가 은근히 무서운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네. 당신은 실로 멋진 여인이야!" 미립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구양선생의 칭찬에 감사를 드려요. 제가 보기엔 여러분 장로님들도 반대를 하지 않으시는 눈치 같군요." 말을 마친 미립의 눈에서는 예사스럽지 않은 빛이 흘러나왔다. 곧 의자에 앉은 미립이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곧추 세우고는 소리쳤다. "방주가 예 있으니 그대들 장로들은 방주를 정식으로 배알하시오!" 그 소리는 장로들의 귓전을 후벼파듯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제16장 남장여인의 정체 여러 장로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모두 앞으로 나가 미립에게 예를 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아주 큰 치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억지로 예를 올리고는 있지만 모두들 마음 속으로는 그 반대가 되는 심지들을 하나씩 심었다. 미립이 눈치챈듯 만족하지 못한 얼굴로 그들을 비웃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원래 불같이 뜨거운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요? 오늘 이 새 방주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같은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소?" 장로들은 미립의 말을 귀넘어듣고자 했다. 이미 예를 행하여 비록 겉으로나마 충성을 다짐한 것인데 더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속에서는 미립이 원한 불보다도 더 뜨겁고 강렬한 것이 활활 용솟음치고 있었다. 바로 미립에 대한 원망의 불꽃이었다. 범장로가 안되겠다는 듯 미립에게 다짐을 하며 나섰다. "방주가 구양봉을 자기의 신변보호자로 삼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이오. 방주도 해는 내일도 뜬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게요." 범장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존심조차 누르며 내보이는 쉽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미립에게는 지나는 날벌레의 날개짓소리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범장천, 내일이 있으면 어찌하겠소? 당신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요? 아니면 나의 아버지에게 했듯이 독으로 두 다리를 못쓰게 만들기라도 할 건가요?" 미립의 말에 범장천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의 머리속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아직 자신들을 그 범인으로 일축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범장천은 이 개방에서 누가 과연 미운산을 폐인으로 만들었을까 고심했다. 그토록 훌륭한 인물을 망가뜨렸으니 실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립은 방주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려는 듯 다시 장로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여러 장로들이 나의 명령에 따르기로 원하였으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미 철저한 계략에 의해 꾸며왔던 일이기에 미립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아주 매끈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는 미립을 보는 장로들은 그저 화가 치밀어오르는 가슴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먼저 범장천에게 명령했다. "범장로. 그대는 소씨 거렁뱅이를 즉시 찾아내어 내게로 오라 전하시오!" 그녀는 이어서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발 빠른 첩자를 돌려 구구 중양절 날 개방 분타(分舵)의 타주(舵主)들은 모두 건강(建康)으로 모여달라고 하시오. 내가 선포할 말이 있어요." 범장로는 그녀의 말에 빈틈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비록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결국 묵인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대답을 했다. 미립이 고개를 돌려 소검 오평에게도 말했다. "그대의 기개는 내가 탄복하는 바이요. 그러나 당신은 끝내 나를 따르지 않을 건가요?" 소검 오평은 미립이 개방의 방주의 자리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이리저리 묘안을 모색해보았지만 선뜻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일단 그녀를 인정해놓고 보자는 마음 쪽으로 머리가 기우는 것에 자신도 놀라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좋수다." 하고 머리를 숙여 대답하고야 말았다. 나머지 장로들은 소검 오평의 행실을 보며 속으로 개탄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가장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이런 몰골을 보이다니 눈앞에 시커먼 먹장구름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