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28편 (28/66)
미운산이 비단폭 위에 천천히 식지를 들어 흐르는 피로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노명성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미운산을 멸시하려는 행동이었다. 미운산은 왼쪽 손으로 덜덜 떨어가며 한참만에야 혈서를 모두 끝냈다. "이 아래에 서명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자 범장천이 고개를 까닥이며 빈정댔다. "그럼, 그럼. 암 그렇고 말구. 그래도 방주라 주도세밀하군." 미운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기의 이름을 마저 썼다. 그 비단폭을 범장천에게 넘겨주었다. 아주 만족스런 얼굴로 그것을 확인하던 범장천이 말했다. "방주, 우리 두 사람은 방주에게 한가지 더 빌릴 것이 있는데." 미운산이 다시 흠칫 놀라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또, 무, 무얼 빌린다는 거요?" "다른 게 아니요. 이건 꼭 필요한 것이니 들여주어야 하오." "꼭 필요한 것?" "하하, 그렇소. 너무 긴장하지를 마시오. 곧 괜찮아질테니. 그것을 우리에게 주고 나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를 못할 것이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린 바로 당신의 머리를 갖고 가서 소씨 거렁뱅이를 죽여야겠소!" "뭐라고! 그건 안돼!" 미운산이 대노하며 소리를 치자 그들이 갑자기 달겨들었다. 이때 잠시 다른 곳에 물러나 있던 사내 둘이 나타나 휘둥그러진 눈으로 이 광경을 목격했다. "노명성, 범장천! 당신들은 개방의 장로들인데 감히 누구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인가?" 두 사내가 곧 두 장로를 덮쳤다. 그중 금종조공(金鐘*功)을 익히 작고 단단한 사내가 주먹으로 노명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노명성이 손을 들어 순간 사내의 머리를 가리켰다. 사내가 그 자리에 굳어버릴 듯 멈춰섰다. 사내는 주먹을 앞으로 뻗은 모습 그대로 멍하니 서버린 것이었다. 바로 노명성의 장기였다. 이 법수는 상대의 헛점을 노리는 것으로써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가리키고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한쪽 손이었는데 이번에도 예외없이 다른 손이 바로 사내의 배꼽을 향하고 있었다. 이 배꼽은 대방이 기공을 일으키는 조문(*門)이므로 일단 적중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죽고마는 것이었다. 다른 한 사내는 범장천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사내가 익힌 것은 회남(淮南) 지구에서 널리 유행되고 있는 응조문(應爪門)의 대력응조공(大力應爪功)이었다. 독수리가 양을 덮치는 형상을 나타낸 법수였다(惡應*羊). 하지만 그 사내는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그의 앞에 버티고 서있는 범장천은 양이 아니라 맹호였던 것이다. "아니!" 어느새 범장천에게 손목을 잡히고 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괴성을 내지르며 다른 손으로 범장천을 가격하려 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낸 범장천이 꾸짖었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나를 넘보다니!" 하며 두 손에 힘을 주어 사내의 손목을 아래로 꺾었다. "뚜둑!" 사내의 손목은 순간 끊어져 간들거렸다. "생사는 명에 달렸다고 하는데 내가 한 주먹으로 너를 죽이지 못하면 넌 명이 긴 셈일 게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체 손목을 감싸쥐고 있던 사내의 얼굴로 범장천의 주먹이 꽂혔다. "캭!" 사내는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미운산이 의자에 앉은 채 수심어린 눈길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는 개방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 이제야 알겠다는 투로 탄식의 눈빛을 만들었다. "우리가 망해가는 이유를 알겠군!" 노명성이 천천히 쓰러진 사내의 옷자락을 부욱 하고 뜯더니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면서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왜 우리가 망해가는지 말해보시지?" "너같은 놈들이 늘 야심이 가득하여 방주의 자리를 엿보는데 어찌 망하지 않겠느냐?" 범장천이 손뼉을 철썩 치며 미운산의 말을 꺾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미방주의 말이 내게는 꼭 맞는 소리라구. 나와 노장로는 당신의 바로 그런 머리를 떼어내어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는데 쓰면 되겠군. 그럼 그 오의파 사람들이 나의 기묘한 계략을 의심하지 않을테니." "네 놈의 그 간사한 꾀를 알만하다. 네 놈은 날 죽인 다음 소씨 거렁뱅이가 죽였다고 꾸며댈 셈이지? 그리고 소씨 거렁뱅이를 찾아 죽여버리려는 게 아니더냐? 또한 내가 쓴 혈서를 가지고 개방사람들마저 속일테지. 그러나 네 놈들의 그 가면극에 개방의 형제들이 넘어갈 성싶으냐?" 범장천이 이죽거리며 미운산을 몰아세웠다. "개방의 사람들은 당신이 없으면 곧 나를 따를 게 분명하다. 그러니 개방의 형제들을 속이기는 쉽지. 네가 죽거든 장례를 극진하게 모시고 한바탕 울어주면 그뿐일 것이다. 하하하!" 범장천의 웃음 뒤에는 분명 악한의 얼굴이 숨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지금 권모술수로 얻어낼 승리를 앞두고 스스로가 감탄을 하고 있는 증이었다. 미운산은 그를 죽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두고 보자하니까 더는 못 참겠구나! 네 놈들은 나의 두 다리가 정말로 못 쓰게 된 줄 알고 있겠지?" 그 말에 범장천과 노명성은 어리둥절하여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순간 혹시 미운산의 다리에 어떤 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그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미운산이 일어서기만 하면 그들의 목숨은 온전하지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들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미운산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직 미운산은 어떠한 동작도 취하지 않은 채 앉아있기만 했다. 그들은 차마 미운산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기에 바빴다. 범장천이 슬그머니 미운산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겁을 내어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하고 약간 거리를 두고는 손가락으로 미운산의 혈도를 겨냥했다. 미운산이 한눈을 파는 사이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미운산의 어깨에 있는 혈도가 명중되고 말았다. 미운산이 움찔 옆으로 쓰러질 듯 하더니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졌다. 노명성이 나섰다. "범장로, 내 보기엔 미방주가 다리를 못 쓴다는 게 거짓은 아닌 것 같소.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방중의 형제들이 알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 전이요. 만일 꾸민 것이라면 그동안 들통이 나도 났을 것이요. 그러니 어서 죽이시오." 두 사람은 더는 두고 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살기를 띤 두 사람이 미운산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막 손바닥을 펴 미운산에게 가격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미운산이 천천히 몸을 펴고 앉았는데 얼굴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미운산의 의연한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주춤했다. 감히 손을 댈 수 없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때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들이 만일 사람을 죽였다가는 네 놈들 목부터 달아날 줄 알아라!" 미운산의 머리속에는 일순간 복잡한 생각이 파고 들었다. 사실 자신이 끝까지 다리를 쓰지 않고 있는 것도 혹시 주변에 그 여인이 와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까지 미운산은 끝내 여인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비로소 여인의 목소리를 듣자 한시름 놓았다. 오히려 여인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미운산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네가 돌아오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와 주었구나!" 그러자 여인의 야릇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후후후,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시오?" 순간 미운산은 아차 싶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기다리던 목소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은 미립이 아니였다. 여인이 비로소 모습을 보이자 그 사실은 분명해졌다. 여인은 도가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먼지털이개를 든 채 조용히 미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장천이 소리쳤다. "넌 누구냐?" 여인이 오만한 자태로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고는 외면해버렸다. 오로지 미운산과 상대를 하겠다는 투였다. "당신은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고생을 하시오? 처신을 그렇게 해서 어디 사내라고나 하겠소?" 미운산을 책망하듯 여인은 제법 호기스런 눈빛을 만들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미운산이 속으로 다시 한 번 아차 했다. 이제서야 여인의 정체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누구인지 알겠구나.' 미운산이 광채를 띤 눈길로 여인을 주시했다. 여인은 그러나 사태를 더 즐겨보자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노명성과 범장천을 다시 노려보았다. "너희들 두 놈은 그 못된 궁리를 집어치우고 어서 도망을 치는 게 좋을 것이다! 고개도 들지 말고 어서 사라져라! 네 놈들이 만일 여기서 죽게 되면 누명만 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두 사람도 여인이 분명 도고(道姑)인 것을 알아차렸다. 강호에서 이름난 여걸인 도고. 강호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종남산 왕중양대협에게는 임조영(林朝英)이라 부르는 애인이 있었는데 바로 이 여인이었다. 노명성이 머리를 돌려 범장천을 슬쩍 살폈다.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두려운 기색이 드리워져 있고 온몸이 차츰 굳어가고 있는 듯했다. 범장천은 속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 여인이 분명 임조영일텐데 그렇다면 큰 낭패가 아닌가. 강호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천하의 왕중양의 무예가 제일인데 바로 임조영만이 그와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임조영이 왕중양을 찾아 싸웠는데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싸우고도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는 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강호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조차도 그것을 노래처럼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위기를 느낀 범장천이 그녀에게 예를 올리며 공손히 물었다. "여협께서는 종남산의 임조영이 아니십니까?" 임조영은 범장천의 행동을 바라보며 코방귀를 뀌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아주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만약 이대로 미운산을 놔두었다가는 큰 후환이 따를 것이었다. 훗날 미운산이 장로들 앞에서 오늘 있은 일을 발설한다면 그들 두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 날 게 분명했다. 미운산을 죽여야만 하는데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더군다나 임조영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더욱 곤혹스런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개방에서 가장 모략이 뛰어난 자들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타산이 분명했다. 이 시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꾸미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재빨리 궁지를 벗어날 계략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임조영이 먼지털이개 끝으로 그들을 지적하며 말했다. "네 놈들이 꿍꿍이 수작을 꾸미고 있다는 걸 난 다 보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허튼수작 그만하고 썩 물러가기 바란다." 그러면서 손에 들린 먼지털이개로 탁자를 내치쳤다. 순간 탁자 한쪽 모서리가 썩은 이빨 부러지듯 툭 하고 떨어져나갔다. 새 탁자였는데 일순 빗물에 오래 씻겨 너덜너덜해진 나무처럼 힘없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노명성과 범장천이 뒤로 주춤 물러서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옆에 있던 미운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임조영의 무예를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한마디로 대단한 무공이었다. 간단히 힘도 안들이고 저토록 단단한 탁자를 자를 수 있다니. 미운산을 비롯한 장로들은 자기들의 무예는 그녀의 발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범장천과 노명성이 임조영에게로 와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곤 한마디도 못하고는 몸을 돌려 황급히 꽁무니를 빼며 물러났다. 미운산이 임조영을 바라보자 그녀는 화가 덜 풀린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운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임여협께서 훈시할 말씀이 계시면 하시오." "당신이 목숨이 아까우면 무예를 배워 무엇하며 문제가 일어나는 걸 두려워 하면 개방의 방주노릇은 해 무엇하리오. 내 보기엔 당신은 아주 허약한 사내일 뿐이요." 하며 몸을 돌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미운산은 다시 하늘을 우러르며 불편한 심기를 달래려고 했다. 여전히 밤하늘에는 뭇별들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운산은 그 별 중 어느것이 더 밝고 어느 것이 사위어가는지 가려내기가 힘들었다. 모두 자신의 심정처럼 꺼질듯 나약하게만 보였다. 하늘의 별도 똑똑히 보이지 않는데 땅 위에 있는 사람이야...... 그 심사를 어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속으로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미운산의 신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내는 이미 장로들의 발밑에 깔려 죽은 지 오래였다. 그는 조용히 의자에 앉은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날 제남부(濟南部)에 모이라는 통지를 받은 몇몇 장로들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십리취(十里翠)라는 기생집이 모임의 장소로 돼있기 ㄸ문이었다. 그 통지를 전하러 온 사람이 장로들에게 고했다. "영을 내리신 분은 바로 방주님이시며 그 증표로 방주의 신물인 녹옥죽봉을 보았습니다." 그 말 ㄸ문에 장로들은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녹옥죽봉은 구양봉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을 전달하러 온 사람이 녹옥죽봉을 보았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영을 내린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개방의 장로들은 결국 오의파이니 금의파이니 하는 차별을 두지 않고 곧 제남으로 향하기로 결정을 했다. 모이라는 날자는 칠월 칠석이었다. 바로 하늘에서는 견우직녀가 만나는 날이었다. 이날은 또한 여인들이 하늘에 바느질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날이기도 했다. 아마도 여인들이 날때부터 생각이 우둔하거나 공상이 많기 때문에 하늘에 그같은 지혜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날 여인들은 밤에 잠을 자서는 안되며 누대(樓坮) 아래에 앉아 일제히 자기들이 더욱 총명해질 수 있도록 비는 것이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한결같이 마음 속에 들어찬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제남으로 향했다. 왜 하필이면 제남부에서 회의를 열며 더군다나 기생집으로 정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구양봉의 손에 있다는 녹옥죽봉을 보았다니...... 이날 날이 저물 무렵 개방의 금의파 장로들인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 사개 정원, 출수표(出手*) 노경(노敬)과 오의파의 장로들인 일점지 나장태, 소검 오평, 소미타 추우 등이 십리취 기생집에 당도하였다. 이름은 십리취라고 하지만 사실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맞은편에 자그마한 다락집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묵객(墨客)이 허울좋게 그같이 큼지막하게 써놓았고 좌우에도 주련을 써 붙여두었다. 왼쪽 주련에는 "돈을 물쓰듯이 하면서도 떠나기 아쉬워라(埇金* 翠夜野不去)" 라고 씌어져 있고 오른쪽 주련에는 "이쁜 얼굴 고운 목소리 날마다 오게 하누나(五面**聲天天都來)"라고 각각 씌어져 있었다. 그 주련만 봐도 보통의 기생집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이한 점도 없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방의 장로들이 당도하니 기생어미가 반기며 간사한 목소리를 흘렸다. "얘들아, 어서 손님들을 맞아들여라. 손님들이 많이 오셨구나. 어서들 와!" 그러자 안에서 얼굴에 분과 연지를 바른 몇몇 여인들이 자태를 뽐내며 걸어나왔다. 그 여인들은 장로들을 에워싸고 아양을 부리며 난리를 쳐댔다. 아마도 장로들을 대단한 부자들로 안 모양이었다. 소검 오평이 부릅 뜬 눈으로 흘겨보자 기생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나장태 역시 의외로 차가운 기색을 보이자 기생들은 그에게 수작을 걸지 못하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눈길만 주었다. 먼저 수작을 걸어오기를 바라는 태도였다. 범장천과 노명성 두 사람만이 기생들과 수작을 주고 받으며 한껏 흥을 돋구고 있었다. 노명성이 한 기생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기생집에 웬 괴상한 사람이 있더냐?" 그러나 기생이 말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초롱초롱한 눈만 요리조리 굴렸다. "무슨 괴상한 사람이겠어요. 아리따운 여인을 찾으실텐데." 하며 입술을 내밀고는 삐죽거렸다. "그런 거라면 그대들 어미가 다 알아서 처리해줄텐데 신경을 쓰겠나?" 기생어미가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뿌렸다. "호호, 손님들은 뭘 알고 싶으신 거죠?" 노명성이 근엄한 표정을 만들며 한손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우린 개방의 십대 장로들인데 누군가 보낸 통지를 받고 오는 길일세. 우리들에게 이곳으로 모이라고 했는데 그 통지를 보낸 사람을 혹시 아는가?" 기생어미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참, 후원에 한 사람이 있긴한데...... 그런데 여인이지요. 그 여인이 사람들을 시켜 손님들을 부른 게 틀림없어요." 범장천이 품속에 안겼던 기생을 밀어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범장천의 뒤를 따랐다. 뒤뜨락에 이르자 삼엄한 경비를 만나게 되었다. 몇십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말없이 서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손에 무기를 들었다. 그것을 본 장로들은 어정쩡한 기분에 싸여 과연 여인의 정체가 무얼까 고심했다. 여인이 자신들을 찾은 이유에 대해 얼른 캐어낼 수가 없었다. 노명성이 사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개방의 장로들이 배알하러 왔소이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작은집에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묵묵히 서 있었다. 한참 만에야 누군가 목소리만 내보냈다. "개방의 장로들이 오셨으면 들어오시죠." 목소리만 듣고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꽤나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소리라 모두들 마음이 끌렸다. 분명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장로들은 사위를 둘러보며 끌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깨끗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그 안에는 묘령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지었다. "금의파, 오의파 장로들이 다 오셨군요." 범장천이 살펴보니 여인은 전임 방주 미운산의 딸 미립임이 분명한 듯했다. 범장천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네가 바로 우리를 부른 장본인이란 말이지?" 그러자 미립이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제가 불렀어요." 미립은 웃음을 가득 칠한 눈으로 장로들에게 하나하나 눈인사를 주었다. 일곱이나 되는 장로들은 선 채로 미립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좀체 미립의 입은 열리지가 않았다. 범장천이 양미간을 오무리며 물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개방에 첩자를 돌려 칠대 장로들을 불러들였단 말이냐?" "제가 여러분들을 청해온 것은 개방의 방주가 또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죠." "개방의 방주가 바뀌었다는 일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더냐?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범장천이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자 미립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설명했다. "원래 개방의 방주는 아버지였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하실 수 없게 되자 방주의 자리를 소씨 거렁뱅이에게 넘져주었지요. 그런데 그가 지키지 못할 줄 어찌 알았겠어요." 일점지 나장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잠깐! 넌 개방의 장로도 아니고 개방문중의 믿음직한 제자도 아니다!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누가 방주에 오르느냐 하는 대사를 논하는 것이냐?" 그러나 미립이 눈썹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자세로 답했다. "전 개방에서 태어나 개방에서 자란 사람인데 왜 자격이 없겠어요. 전 오늘 여러 장로들을 소집하여 이번의 방주는 바로 제가 맡는다는 사실을 선포할 생각이니 그리들 아세요." "뭐라고!" 일곱 장로들은 모두 아연실색해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말을 잃어버렸던 범장천이 비웃으며 말했다. "첩자의 말로는 통지를 받을 때 분명 진방(鎭幇)의 보물인 녹옥죽봉을 보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우리들 앞에서 그것을 보이거라?" 개방의 보물이자 방주의 수신신물(隨身信物)인 녹옥죽봉은 이미 구양봉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의 계집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말에 범장천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범장천의 호기를 노려보던 미립이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몇몇 여인들이 허리를 숙이며 들어섰다. 개방에는 원래 지위가 높은 사람의 일부 가족만이 여제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여제자로 보이는 여인들이 부름에 맞춰 들어오자 개방의 장로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들은 살결이 백설같이 눈부셨지만 거지로 분장을 하다보니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저마다 아름답고 교태가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 전혀 거지다운 맛이 없었다. 교태있는 걸음걸이를 뽐내며 걸어와서는 두 줄로 서는 여인들을 장로들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의 손에 바로 녹옥죽봉이 들려있는 것이었다. 미립이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며 범장천을 바라보았다. "자, 이 녹옥죽봉을 잘 보세요. 이건 개방의 보물이니까 자세히 보라고요." 일곱 장로들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녹옥죽봉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한 녹옥죽봉이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서로 마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