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25편 (25/66)
그저 이꼴 저꼴 보지 않고 거지노릇이나 하는 게 나아.' 그는 다짐을 하듯 속으로 생각하고는 거리에 있는 육포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술로 우울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데 깜찍하게 생겨먹은 처녀가 맞은편에 와서 생긋 웃는 것이었다. "넌 누군데 날 쳐다보고 웃는 거지?" 그러자 계집애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전 미립이예요. 당신은 미립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소씨 거렁뱅이는 순간 혹시 미운산의 딸이 아닌가 했다. 미운산에게도 미립이라고 부르는 어여쁜 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취기가 어느정도 오른 것을 빌미로 미립에게 쉽게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그러나 미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전히 방글방글 웃음을 앞세우며 애교를 떨었다. "당신은 개방의 장로이신데 왜 이곳에서 술을 마시지요? 무슨 시름겨운 일이라도 있나보죠?" 소씨 거렁뱅이가 머리를 내저었다. "내게 무슨 시름이 있겠느냐.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니까 저리 물러가거라. 쬐끄만 계집이 뭘 안다고 참견이냐?" "호호호!" 갑자기 미립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깜짝 놀라 미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호, 아버지가 그러는데 당신이 녹옥죽봉을 잃어버렸다면서요?" 그러면서 녹옥죽봉을 다시 찾으러 나온 길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면 미립이 계속 비웃듯 조잘거렸다. "그러나 구양봉에게 죽을까봐 여기서 술이나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죠?" "씨끄럽다! 이 소씨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당장 그놈을 찾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술타령인가요?" "내가 어디가서 그놈을 찾아낸단 말이냐? 그놈은 신출귀몰하고 한번 지나가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는데 내가 어떻게......" 순간 소씨 거렁뱅이는 어린 계집 앞에서 별소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허나 그놈이라고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그놈의 키가 아주 크다는 걸 알고 있나요? 또 그놈은 짧은 적삼을 입었지 두루마리는 입지 않아요. 호복차림을 했고요."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귀가 솔깃했다. "그놈은 또 항상 독사장을 짚고 있어요. 그 독사장 자루에는 낯짝이 두개인 괴상한 몰골이 새겨져 있고 수시로 독사가 기어나오곤 하죠." 소씨 거렁뱅이는 순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그래, 술집과 객점만 찾아다니로라면 그놈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훌륭해요. 당신은 과연 비범한 분이시군요." 육포집을 빠져나온 소씨 거렁뱅이는 눈에 띄는 술집과 객점들을 샅샅이 훑으며 구양봉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써 여러날 곳곳을 뒤져보았지만 구양봉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를 못했다. 하루는 한 객점에 들려 구양봉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바로 전날 묵고는 아침 일찍 떠났다는 거였다. 그는 그 향방을 캐물어 곧 임안성을 나왔다. 한참을 뒤쫓자 농촌이 나왔다. 작은 촌락이었는데 몇집 살고 있지를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아직 상처도 치료되지 않았고 온종일 걸음에 시달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어느 집으로 찾아들어가 주인을 불렀다. 한참 만에 웬 노인이 나왔다. "손님은 뉘시요?" "사람을 좀 찾는데 혹 모르시나 해서요. 그 자는 남들과는 아주 다른 옷을 걸쳤지요. 옷은 왼쪽으로 여미게 되어있고 그리고 키가 아주 큰데 손에는 독사장을 들었습니다." "아, 누구인지 생각이 나는군요."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곧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소씨 거렁뱅이는 노인에게 절까지 하며 채근했다. "그래,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어쩌죠. 그 사람은 방금 떠났는데. 조금 전까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아직 멀리는 못갔을 거요." 소씨렁뱅이는 노인에게 다시 한 번 예를 올리고는 곧장 구양봉을 쫓았다. 곧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음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드넓은 황무지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와화화화!" 바로 구양봉의 웃음소리였다. "네 놈이 기어코 나를 쫓아왔구나. 결국 이곳이 네 놈의 무덤이 될텐데 어떠냐?"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소씨 거렁뱅이는 한참 만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양봉은 나무가지 위에 가볍게 걸터앉아 조금씩 간들거리고 있었다. 눈빛에는 조롱의 기운이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었다. "구양봉, 어서 녹옥죽봉을 내게 내놔라! 그럼 네 놈과의 일은 없었던 걸로 할테니 어서.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의 오장육부를 끄집어내어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 나눠주겠다." 그러나 구양봉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아래로 뿌리며 몸을 흔들었다. "한가지 너에게 알려줄 말이 있다. 나에게 너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는데 오늘 바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구나!" "누구냐?" "바로 너희네 방주다. 짐작을 했을텐데."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구양봉, 허튼소리 말고 어서 녹옥죽봉을 내놔라!" 구양봉이 날쌘 살쾡이처럼 나무가지에서 풀썩 뛰어 소씨 거렁뱅이 앞으로 내렸다. "그래 좋다. 네 놈이 날 죽이면 이 녹옥죽봉을 가져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넌 이곳에서 죽게돼." 구양봉이 손에 있던 독사장을 추켜들었다. 독사장 자루 구멍으로 작은 뱀들이 들락날락하는 게 보였다. 구양봉은 잔뜩 소씨 거렁뱅이를 노려보며 일격을 가하려고 빈틈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14장 가짜 미립의 음모 구양봉이 독사장을 내리치자 소씨 거렁뱅이가 살짝 피했다. 천근의 무게를 자랑하는 독사장을 정면으로 맞받아쳐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씨거렁뱅이는 오목지팡이로 구양봉과 대적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실력은 불꽃이 튈 정도로 격렬했다. "받아랏!" "오냐, 얼마든지 오너라!" 소씨 거렁뱅이는 오로지 녹옥죽봉을 빼앗으려는 마음이었기에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쳐났다. 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구양봉의 법수는 더욱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차츰 소씨 거렁뱅이가 몰리는 판국이었다. 이미 나이가 들어차 오래 싸우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씨 거렁뱅이는 일단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얼른 몸을 돌려 도망을 치려는데 구양봉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네 이놈! 어디를 도망치려 하느냐!" 소씨 거렁뱅이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바싹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잡히게 되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구양봉을 찾아나설 때는 오직 녹옥죽봉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심이 대단했는데 결국 대세가 불리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한참 쫓고 쫓기고 하는 판에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아는데 천자는 어이하여 하늘만 위하는가 천자여, 듣고도 못 들은 체 말고서 먹을 것이 첫째라는 말 해 보시라 뒤이어 또 한 사람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앞의 것보다 더욱 애절하고 구슬펐다. 한신은 굶주릴 때 한끼 대접 받은 걸 천금 주고 그 은혜 갚았다니 진후가 굶주린 현량을 연회에 청하니 제비가 흙을 문 듯이 음식을 삼키지 못했어라 인생에서 고배를 마시는 시간 짧아도 부귀는 드물게 얻어진단 말 말아야 하리 원하노니, 그대 하루 세끼 음식을 차 한잔 밥 한술이라도 남 권할 줄 알아야 하리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목소리가 매우 가늘었다. 여행길 돈 없다 걱정말아 목마르면 물 마시고 소금으로 끼니 떼우거늘 인생살이 편안할 날 없네 우물 파고 집짓고 일이 끝간데 없네 낭군께 한번이라도 더 좋은 음식 대접하니 나 죽으면 낭군께 누가 음식 권하랴 또 한 사람이 목탁을 두드리며 노래소리를 날려보내왔다. 같잖은 음식을 먹고 같잖은 옷을 입는데 하필 하루에 세끼씩이나 치르느냐 백성놈들의 생활이야 다른 재미란 없고 날마다 배 채울 일이 걱정이라네 마지막 노래 끝에는 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달려있었다.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는 뜻하지 않은 노래소리로 잠시 넋이 나간 상태였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는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윽고 다섯 명의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첫번째 사람은 얼굴에 약간 살이 붙었으며 배가 불거지고 걸음걸이가 매우 오만하였다. 양손에는 식칼과 국자를 각각 들었는데 짧고 투박한 식칼이나 가늘고 긴 국자는 보기에도 어설픈 데가 있었다. 그런데 국자 속에는 밥공기가 담겨져 있는 게 아닌가. 두번째 사람은 큰 솔을 들고 있었는데 크고 아주 무거워 보였다. 서른 여섯개의 가늘고 까만 털이 솟아있기도 했다. 세번째는 아무런 병장기도 들지 않고 오로지 두 주먹만을 틀어쥐고 있는 상태였다. 네번째는 눈을 지긋이 감고 팔장을 낀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섯번째는 손에 쇠갈쿠리를 들고 저울대와 저울추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바로 이들 다섯명은 명성을 드높히고 있는 황궁의 다섯 요리사들이었다. 그중 맏이인 묘수인주(妙手人廚) 묘대야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소씨 거렁뱅이, 그동안 무고한가?" 소씨 거렁뱅이가 멀찌감치 자기 뒤쪽에 서 있는 구양봉의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운수가 보다시피 썩 좋은 편이 아니오. 그런 다섯분의 요리사들께선 아주 좋아보이는데요." 묘대야가 손을 내저었다. "황궁의 오주(五廚)들도 운수가 그저 그렇지. 보다시피 묵을 곳도 없게 되었소. 결국 예까지 와 그대들과 한데 섞이게 되었으니 부끄럽기까지 하다오." 둘째인 천도만과 과이야가 구양봉을 힐끔 바라보며 소리쳤다. "구양봉 선생은 서역의 제일 고수라고들 하던데 우리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시지요?" 구양봉은 자기를 에워싸듯 나타난 그들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차였다. "일단 물러나시오! 내 저 자를 죽인 다음 당신들과 한판 붙을 것이니." 다섯째 일지평 평오야가 거들었다. "당신은 우리 다섯 황궁 요리사들과 싸우지 않고서는 몸을 빼기가 어려울텐데." 황궁 요리사들은 곧 구양봉과 대결한 자세를 취했다. 소씨 거렁뱅이를 죽일 절호의 기회에 나타난 그들 때문에 일이 번거롭게 되어 구양봉은 내심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기왕 일이 뒤틀린 바에야 그들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구양봉은 독사장을 쳐들어 그중 묘대야를 향해 내리쳤다. "쨔앙-" 독사장이 묘대야의 국자에 막혀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묘대야는 이 국자를 사용하는데 물을 두 근이나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평소 묘대야는 국자로 기름을 담아 가마솥에 붓곤 하는데 그 솜씨가 일품이어서 기름을 한방울도 흘리는 법이 없었다. 구양봉이 선수를 치자 묘대야가 한발 물러서며 화를 버럭 냈다. "구양봉아, 네 놈은 서역에 가서나 행패를 부리는 게 어때?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의 명성도 너덜너덜해진다는 걸 왜 모르느냐? 자, 간다!" 묘대야는 식칼을 휘두르고 국자로는 구양봉의 헛점을 노렸다. 묘대야는 국자로 적수의 귀를 긁어내는 장기를 가졌는데 이번에도 구양봉의 오른쪽 귀를 계속 노리고 있었다. 그 국자에 얻어맞기만 하면 구양봉의 귀는 물론이고 머리마저 절반이나 잘려나갈 형편이었다. "쨔앙-" 구양봉이 몸을 피하는 순간 묘대야의 식칼이 독사장에 부딪쳤다. 그런데 묘대야는 한가지 노린 것이 있었다. 그 순간 독사장 자루의 구멍으로 기어나오려는 독사의 대가리를 찍어버린 것이었다. 그 일격에 뱀의 대가리는 두쪽이 났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되면 승리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은 독사는 칼에 찍힌 채로 여전히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리곤 오히려 묘대야를 향해 공격해올 태세를 갖추었다. "아니!" 묘대야는 황급히 칼과 국자를 거두고는 몸을 피해 다시 기회를 엿보려고 했다. 묘대야가 칼과 국자를 쓸 때마다 짤캉 짤캉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구양봉이 물었다. "도체 무슨 소리더냐?" "하하하, 네 놈은 술청에 가 음식을 먹어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국자로 요리를 하노라면 당연히 이런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묘대야의 술수 중 하나였는데 그 소리로 상대의 집중력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다른 법수를 써 상대를 눕히는 게 묘대야의 특기였다. 짤캉 짤캉...... 묘대야가 또다시 칼과 국자를 맞부딪치며 구양봉에게로 달겨들었다. 구양봉이 그것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일순 머리 위로 저울대가 날아들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울대는 구양봉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머리칼 몇올을 뽑아가버렸다. "이럴 수가!" 다행히 얼른 숙여 피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일격에 머리를 날려버릴 뻔 했었다. 저울대를 휘둘렀던 일지평 평오야가 소리쳤다. "구양봉아, 운이 아주 좋구나!" 이 다섯째인 평오야가 지닌 무기도 아주 요상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저울대였다. 때론 저울대와 사슬이 달린 쇠갈쿠리를 교차적으로 휘두르며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그 법수와 법식 역시 만만하지 않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했다. 맏이와 다섯째가 공격을 하자 나머지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맹공격이었다. 구양봉은 수세로 몰리면서도 정신을 바싹 차렸다. 이들을 모두 없애 다시는 황궁 안의 다섯 요리사 어쩌구 하는 우쭐거림을 뿌리뽑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구양봉은 일찌기 악한 중의 악한이라 사람 죽이는 일이 대수롭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꾼으로 나선 이들은 가차없이 없애버렸다. 그러니 어찌 이들 다섯 요리사라고 봐줄 수 있겠는가. 지난날 홍칠과 함께 황궁의 어선방에 가서 음식을 훔쳐먹다가 이들에게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어 구양봉의 다짐은 더욱 강했다. 한편 홍칠은 미립과 마주한 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난 미운산 방주가 있는 곳에서도 미립이라는 계집을 본 적이 있는......" 하며 홍칠이 말하자 미립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별 수가 없군요." 눈물까지 내보이는 미립을 본 미기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아버지 곁에 또 미기라는 애는 없던가요?" 홍칠은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미기도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립을 보며 말했다. "누나, 우린 무서워할 것 없어요. 아버지에게 가서 함께 죽자고 하면 그만이거든요." 그러자 미립이 단호한 말투로 만류했다. "안돼! 그 일은 나도 벌써 생각해봤어. 아버지를 위협하면서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가 가면 결국 범의 소굴에 갇히는 꼴밖에는 되지 않아." 홍칠에게 얼굴을 돌린 미립이 공손하게 청했다. "당신에게 부탁을 하면 도와줄 수 있겠나요?" "내가 왜 돕지 않겠소. 어서 말해보시오." 홍칠이 반색을 하며 쾌히 승낙을 하자 미립은 약간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께서 이렇게 하신 건 황궁에서 파견된 사람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철장방에게 본 방이 모두 죽게 된대요.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버지께서 저에게 도망치게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미립이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곧 뒤를 이었다. "전 당신이 가서 아버지를 구해주시길 바래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나 이 홍칠이 있는 한 그런 악한 무리들의 음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두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개방총부에 가서 미운산을 구해낼 것을 다짐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강용팔장'을 전수한 걸 보면 다 뜻이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구원하시게 되면 더는 강호에 몸을 두지 말고 평온한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미립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홍칠은 사내로 어른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인과 한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미립과 같은 어여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슴이 몹시 뛰는 것이었다. 인간이란 오래 같이 있으면 정이 생기게 되는 법이었다. 이 미립이란 여인은 특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면이 많았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문벌도 보잘 것 없고 부모조차 없으니 어찌 이런 처자와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사랑? 아니다. 주제넘은 짓을 하여 그녀를 난처함에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홍칠은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미립 앞에 아주 예의롭게 처신하면서 영웅남아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는 것만이 자신의 참모습이라고 여겼다. 홍칠은 미립, 미기 남매와 함께 개방으로 향했다. 그들 세 사람은 한마음으로 오로지 미운산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하루종일 걸어서 겨우 개방총부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보니 겉모습은 여전하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른 분위기에 싸여있는 듯했다. "아버지께서 건강하셨을 때는 이 집 앞은 아주 활기가 넘쳤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황량해 보여요." 홍칠은 그녀의 슬픈 목소리를 들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마당 안으로 들어선 후 회랑(回廊)을 지나 높은 담장 안쪽의 다른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중당(中堂)을 지나 다시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에 이르렀다. 방은 비어있었다. "이 방은 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방이었어요. 아버지께선 날마다 이곳에서 개방의 대사들을 처리하셨어요. 이 의자는 아버지께서 늘 즐겨 앉으시던......" 추억에 잠긴 얼굴로 미립은 그 의자를 어루만졌다. 홍칠은 그녀가 쓸쓸한 얼굴에 파묻히는 걸 보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홍칠은 단순한 면이 많은 사내라 이처럼 복잡한 감정에는 도움조차 줄 수 없었다. 미립의 슬픈 표정을 보면서 홍칠은 여인의 정서란 사내들과는 달리 참으로 섬세하구나 할 뿐이었다. 연민의 정으로 미립을 바라보는 홍칠의 얼굴에도 침울함이 자리했다. 세 사람은 그곳을 나와 내실로 갔다. 자그마한 석실이었는데 왠지 허전해 보였다. 미립이 홍칠에게 얼굴을 주었다. "당신이 지난번에 오셨을 때 이 곳으로 내려가지 않았던가요?" 홍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땐 다른 방으로 들어갔었던 것이다. 미립이 지금 안내하는 길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미기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미립이 걸음을 세웠다. "조심하세요." 하며 한쪽 벽을 발로 찼다. 그러자 발밑의 옥석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그들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바닥에 이르자 미립이 말했다. "이곳이 바로 아버지가 몸을 숨기는 곳이예요." 이곳 역시 석실이었는데 한복판에 긴 의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 침상이 놓여져 있는 게 보였다. 몸을 돌리면 문발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너머에는 후실(后室)이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두 방 안에는 모두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립의 얼굴색이 차츰 상기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떠나셨을까? 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런데 다시 침상이 있는 쪽으로 왔을 때 미립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몸서리쳤다.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보니 한 여인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것이었다. 온몸엔 피칠갑을 한 상태로 이미 죽은 뒤였다. 얼굴에도 예리한 것으로 여러 군데나 긁힌 자국이 있어 끔찍한 형상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던 미립의 눈이 커졌다. "아니!" 미립은 그때서야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운낭이예요! 아버지의 시중을 들던 여인." 미립은 거의 실신을 할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홍칠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미기도 양손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운낭! 운낭! 저 여잔 분명 운낭이 맞아요." 미기가 엉엉 울면서 운낭의 어깨를 잡고는 흔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낭의 보살핌을 받았던 미기라 더없이 슬퍼하는 게 당연했다. 미립은 정신을 수습하고는 어린 동생이 더 충격을 받을까봐 얼른 안아주었다. 홍칠은 죽은 운낭을 바라보면서 복잡해지는 상념들을 정리했다. '미운산이 운낭과 함께 있었는지 아니면 그 미립과 같이 있었는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구나! 만일 가짜 미립과 함께 있었다면 그 여인이 필시 다른 사람과 결탁하여 미운산을 해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여인을 죽인 다음 미운산도 어디론가 끌고 갔을 것인가?' 그러나 쉽게 추리해낼 수가 없었다. 홍칠은 두 사람을 데리고 후실로 일단 들어갔다. 후실에는 주방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쌀부대와 말린 살코기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또 더 안쪽으로 걸어가니 제법 커다란 석실 한칸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미운산이 무예를 닦던 곳이었다. 석실 내부에는 켜켜이 먼지가 덮여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미운산이 오랫동안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더이상 나가는 길은 없었다. 세 사람은 다시 승강장치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 집은 참 괴상하단 말이야.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봅시다." 홍칠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