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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13편 (13/66)

2026-09-29 08:03:11 조회 27
"홍칠이, 너도 참 안됐구나. 누구 손에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었으니 이런 딱한 노릇이 어디 있겠나? 어쨌거나 이 구천인을 원망 마라. 나도 다 시켜서 하는 짓이니까. 누가 너를 죽이라고 시켰는지를 알면 너는 아마 놀라 기절해 넘어질……." 이때였다. 누군가가 구천인의 말꼬리를 낚아채며 끼여들었다. "거 참, 말이 너무 많군 그래." 구천인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얼른 손을 거두고 부하들에게도 가만히 있으라는 눈치를 보냈다. 홍칠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가냘픈 몸매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써서 얼굴을 가린 그녀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홍칠에게 다가왔다. "홍칠이, 내 보기엔 개방 방주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개방 사람들은 천하를 집으로 삼고 동가숙 서가식하는 걸 운명으로 여기거늘 내 집이 어디 있다구 내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요?" "너희들 개방은 지금쯤 이미 풍비박산되어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네 사부 소씨 거렁뱅이가 개방 방주 자리에 오른다 해도 며칠 못 가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니,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개방 일에 상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홍칠은 이 여인이 개방의 일을 너무도 소상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생각을 숨기고 은근히 모르는 척 물었다. "미운산 방주님이 계신데 내 사부님이 무슨 방주 자리엘 앉는단 말이오?" 홍칠의 말에 여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미운산 방주야 독해를 당한 몸이니 자연 물러나지 않을 수 없지. 천하 영웅 중에 미운산 방주처럼 영민한 사람이 없지. 처사가 그러하면 자연 큰 탈은 안 생기는 법이야." 홍칠은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강호를 횡행하는 구천인마저 쩔쩔매는 것으로 보아 보통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내 일에 간섭하는 것이오?"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 뭐하려구? 아무튼 죽지만 않고 살아 있으면 조만간에 알게 될거야." 여인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웃더니 이번엔 구천인을 향해 말했다. "구 방주님, 이쯤 해 두고 저 사람을 놓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 놈은 한 마리 호랑이나 다름없습니다. 놓아주었다간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오." 구천인이 홍칠을 노려보며 말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볼 일이지요. 어쨌거나 저 사람은 이제 병신이 다 된 호랑이가 아닌가요?" 여인의 말에 구천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부하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떠나가면서도 구천인은 홍칠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홍칠이, 이번엔 살려 준다만 다음엔 날 만나지 않게끔 각별히 조심해!" 홍칠은 코웃음을 쳤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놈이다.' 여인이 홍칠에게 어서 돌아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홍칠은 몸을 돌리려다 말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러나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절을 나선 홍칠은 현기증을 느끼며 가까스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넘어지며 간신히 걸음을 옮긴 그는 한참 만에야 겨우 어느 집의 문앞에 이르렀다. 그는 벽에 기대어 숨을 돌린 뒤 기운을 내어 문을 밀쳤다. "아무도 없습니까?" 홍칠이 소리쳤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홍칠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집 안에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위에 금방 꺾어 온 듯한 생화가 꽂힌 화병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홍칠은 다시금 어지럼증을 느끼며 탁자 옆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주인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보자. 그래서 주인이 오면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그는 다시 구토증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주인이 오기 전에 쓰러지면 안 돼. 주인이 올 때까지만…….' 그가 혼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디선가 낭랑한 계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 서! 거기 서라니깐? 계속 그러면 같이 안 놀 테야?" 그러자 이번엔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 놀 테면 그만둬. 누가 겁난다나?" 그러더니 문이 열리며 아가씨 하나와 자그마한 사내애 하나가 들어왔다. 그림같이 이쁘게 생긴 아가씨였다. 홍칠은 놀란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누난 평소엔 자기 침대에 딴사람은 앉지도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왜 가만히 있어? 저 사람은 아예 누나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러자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며 홍칠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누군데 이 방에 들어와 있죠?" 기력이 쇠할대로 쇠한 홍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난 홍칠이란 사람이오……." 그러나 그의 말은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아가씨가 물끄러미 홍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홍칠은 다시금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누나, 저 사람은 죽을 것 같애. 저 사람이 누나 침대 위에서 죽으면 무서워서 어떡해? 어떡해, 누나?" 사내아이가 떠들어댔다. 아가씨가 듣기 싫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따위 소리 말고 무서우면 밖으로 나가." 그녀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자 사내아이가 자그마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턱 치며 소리쳤다. "무섭긴! 산 사람도 무섭지 않은데 죽는 사람이 왜 무서워?" "얘, 네가 가서 저 사람이 어디가 안 좋은가 살펴봐라." "내가 보면 아나, 뭐? 누나가 직접 살펴보지 왜 나한테 시켜?" 사내애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아가씨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동생에게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너는 같은 사내끼리잖아. 사내들끼린 괜찮단 말이야. 어서 가서 어디가 안 좋은지 좀 살펴봐." "저 꼴을 보면 몰라? 온몸이 피투성이인데 상하지 않은 데가 어디 있겠어? 자기는 가만있고 뭐든 나만 시키려구 들어." 사내애는 툴툴거리며 다가오더니 홍칠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홍칠의 옷은 그가 토한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낯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한 게 흡사 산송장 같았다. 아가씨는 동생이 홍칠의 옷을 벗기는 것을 바라보다가 홍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사내애는 홍칠의 옷을 벗겨 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야. 몇 대 얻어맞았을 뿐인데, 뭐. 그런데 말도 한마디 못하고 다 죽어 가는 몰골이라니, 이상한데?" "어딜 상한 것 같으니?" 아가씨가 먼발치에서 물었다. "뭐 그렇게 크게 상한 것 같진 않아. 앞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좀 다쳤을 뿐이야. 이런 정도 맞아서는 나도 견뎌 내겠는데 이런 어른이 꼼짝을 못하고 죽어 가다니, 좀 이상해……." "다른 데 또 상처가 없나 자세히 살펴봐." "다른 데? 다른 데가 어디야? 그런 데를 어떻게 살펴보란 말이야?" 사내아이는 계속 툴툴댔다. "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고 살펴보란 말이야." 사내애는 성가시다는 듯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급기야 홍칠의 사타구니에서 심각한 상처를 발견해 냈다. 철장에 할퀸 상처였다. "그러면 그렇지. 큰일났어, 누나!" 사내애가 놀라서 소리쳤다. "왜 그러니?" "글쎄 이 바보 같은 사람 좀 봐. 철장방네 철장환혼술(鐵掌還魂術)도 못 피했어." "아니 어디를 철장환혼에 상처를 입었다는 거니?" "글쎄 사타구니를 형편없이 할퀴었어." 사내애의 말에 처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사내애는 홍칠을 흘낏 보고는 누나에게 소리쳤다. "왜 그러구 서 있기만 해?" "네가 어떻게 손을 써 봐."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난 약도 바를 줄 모르는데, 어서 누나가 와 봐." 처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애는 아직 어려서 누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처녀는 홍칠이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면서도 벌거벗은 남자에게 접근할 입장이 아니라서 몹시 애가 탔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난…… 난 곤란해. 내가 여기서 가르쳐 줄 테니 네가 약을 붙여주는 게 어떻겠니?" "싫어. 난 못해. 이걸 보란 말야. 살이 다 찢어져 뼈가 다 내보이는데, 어떻게 해……?" 사내애가 끔찍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처녀는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굴렀다. "이것 봐, 누나. 숨이 넘어가려고 해. 어떡할 거야? 그냥 쳐다만 보고 있을 거야?" 사내애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처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홍칠에게 다가갔다. 홍칠은 백지장 같은 얼굴로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처녀를 바라보았다. '남녀유별이고 뭐고, 구해 놓고 봐야지 어쩌겠어?' 처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사내애를 향해 말했다. "어서 가서 약이나 가져와." 사내애도 정황이 급하다는 것을 아는지라 군말없이 뛰쳐나갔다. 잠시 후 그는 참대 광주리 하나를 안고 왔다. 처녀는 약 광주리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더니 먼저 홍칠의 상처를 씻고는 그 약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약을 다 바르자 그녀는 사내애와 더불어 홍칠을 엎드리게 하고는 등이며 어깻죽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장방의 철장 자국이 세 곳이나 찍힌 등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이 사람은 아무래도 바보가 아니면 등신이야." 사내애가 소리쳤다.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이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처녀가 나무랐다. "왜 몰라? 등신이 아니면 왜 멍청하게 남한테 맞고만 있었겠어? 당할 수 없으면 달아나기라도 했어야지. 그랬으면 이 지경이 되도록 얻어맞진 않았을 거 아냐?" "도망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처녀는 홍칠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헛고생 하지 마. 내가 보기에 살려내긴 틀렸어. 어차피 죽을 바에야 지금 죽는 게 낫지. 공연히 시간만 끌어 봐야 고생밖에 더하겠어?" 처녀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사위가 잠잠해졌다. 처녀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넌 그만 가 자거라. 이 사람은 내가 보살필 테니." "뭐라구?" 사내애가 되물었다. "평소에 누나가 뭐라고 했어? 누나는 여자고 나는 남자니까 한 방에서 자는 게 아니라구 했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 남자와 한 방에서 잔다는 거야?" "무슨 허튼소리야? 누가 잔댔어? 곁에서 보살펴 준다고 했지. 그냥 지켜 본다구!" 처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미 내력도 쓰고 약도 발라 주었는데 뭘 더 어쩌겠다구?" 사내애도 입을 삐죽거리며 비양댔다. 처녀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쨌든 넌 가서 자도록 해. 아무래도 내가 곁에 있어야지, 만일 사람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겠니?" 사내애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정신이 좀 드세요?" 혼미한 의식 속에 웬 처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홍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상처는 아까처럼 그렇게 찢어지듯 아프지는 않은데 눈 앞에 웬 처녀가 앉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여기가 어디요? 내가 왜 여기에……?" 홍칠은 모기만한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여긴 저희 집이에요." 홍칠은 도무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천인과 싸우고 절 문을 나섰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좀처럼 생각나질 않았다. 그는 몇 마디 더 묻고 싶었으나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점잖고 예절 바르게 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들려 왔다. 홍칠은 사뭇 긴장한 눈빛으로 처녀를 쳐다보았다. "누굴까? 올 사람이 없는데……?" 처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멎어다간 다시 들려 오고 멎었다간 다시 들려 오고 한동안 계속되더니 이번엔 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하룻밤 여기서 묵어갈 수 없겠습니까? 대가는 섭섭치 않게 치러 드리겠습니다." 처녀는 홍칠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자신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홍칠에게 약을 발라 주느라고 그녀의 옷은 부분부분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이런 몰골로 밖에 나갔다간 공연히 남의 의심을 사기 십상이라는 생각에 문 열어 주는 것을 단념해 버렸다. "보아하니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것 같사온데 문을 떼고 들어가 하룻밤 묵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극히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무례한 일을 할 수가 있나? 만일 그랬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꼴이 뭐가 되겠느냐?" "저희야 문전 노숙을 하여도 무방하지만 어르신께서 이 황량한 야지에서 노숙을 하시다니 그게 될 말씀입니까요?" 또 다른 음성이 말했다. "아니, 하룻밤 노숙을 한다고 큰 변이 난다던가? 내 염려는 말게나." "그러시다면 분부대로 시행하리다." 서넛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은 이내 조용해졌다. 문앞을 떠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처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홍칠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처녀도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처녀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이어 사납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누구세요?" 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홍칠도 놀라서 깨어났다. 처녀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무례하게 문을 마구 두들겨 대는 불청객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문을 열어라! 우린 개방 사람들이다!" 처녀는 흠칫 놀라는 태도를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개방 사람들이 여긴 왜 왔나요?" 사람들이 문을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개방을 떠났다고 이젠 개방 사람을 모르는 체할 작정이냐?" 처녀는 입술을 깨물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개방이라니? 내게 또 무슨 볼일이 남아서……." 그녀가 뼈아픈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서 문 못 열겠나?" 누군가가 문을 때려부술 듯 소리쳤다. "개방 사람들이면 돌아들 가세요. 난 이미 개방을 떠난 몸이니 개방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개방에서 날 찾을 일이 뭐예요?" 처녀가 맞받아 소리쳤다. "좋다! 문을 안 열면 문을 떼고라고 들어가는 수밖에 별수없지." 처녀가 놀란 표정으로 홍칠을 돌아보았다. 곧이어 무엇인가 둔중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지끈하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이어서 험상궂게 생긴 세 사내가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흥, 문을 안 열어 주면 못 들어올 줄 알았더냐?" 놈들은 처녀를 둘러싸더니 위협적인 눈초리로 처녀를 노려보았다. 그중 한 놈이 말했다. "아가씰 찾는 사람이 있으니 함께 가야겠어." "날 뭣 때문에 찾죠? 난 개방과 인연을 끊은 지가 오래니 누가 찾는다고 해서 갈 이유도 없어요." 처녀는 담담한 기색으로 조용히 말했다. 놈이 차디찬 웃음을 히죽 웃었다. "글쎄,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어쨌든 개방에서 아가씨를 데려오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우린 아가씨를 데려가기만 하면 돼." 처녀는 말없이 홍칠을 돌아보았다. 홍칠은 처녀를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 이었다. 처녀는 다시 그 세 사람에게도 눈길을 던지더니 갑자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좋아요. 방주님의 분부가 있었다니 일단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겠죠." 이때였다. 한 녀석이 갑작스레 소리쳤다. "가만? 거(巨) 형, 침대에 누운 놈을 좀 봐요. 그 어린 놈 같지가 않은데요?" 그러자 거씨라 불린 사내가 침대 위를 힐끗 보고는 앙천대소를 하였다. "이 아가씨가 보통내기가 아닌데? 집에 사내까지 숨겨 놓고 산다?" 처녀가 두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느냐? 한 번만 더 함부로 지껄이면 내 손에 요절날 줄 알아라!" 사내들이 가소롭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사내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제법 호기 있게 말을 이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너희들 셋은 어서 썩 물러가거라. 그러지 않았다간 내 손에 너희 세 놈의 숨통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놈들은 지붕이 날아갈 듯 일제히 웃음을 웃어댔다. "이거, 가만히 들어 주자니 소 웃다 뱃고래 터지겠구나!" 처녀는 세 놈을 쏘아보기만 할 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누나, 누가 왔어?" 사내애가 선잠이 깬 듯 눈을 비비며 들어섰다. 그는 세 괴한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날 잡으러 온 사람들이야. 잘못하면 너도 죽일지 몰라." 처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누나를 데려가겠다고? 그 따위 개꿈은 꾸지도 마!" 사내애가 겁없이 소리쳤다. 이때였다. 놈들 중 하나가 와락 달려들어 사내애의 머리칼을 텁석 움켜쥐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내 손에 죽지 못해 야단이냐? 죽으면 그 혓바닥 못 놀리겠지?" 놈은 당장 사내애의 정수리를 내리칠 듯 손을 치켜 올렸다. 처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 애를 내려놔요. 할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요!" 처녀의 말에 놈이 푸와하―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엔 그렇게 잔꾀가 많더니 이젠 빌 줄도 아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이젠 소용없다고!" 놈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금 손을 치켜 올렸다. "얏!" 처녀가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며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욱!" 놈이 앞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처녀가 날렵하게 놈의 가슴에 장을 날린 것이다. "왜 여길 찾아왔나 사실대로 말해요. 개방 방주가 날 보자던가요?" 처녀가 놈들을 노려오며 물었다. 놈들이 일제히 앙천대소를 했다. "그런 꿈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방주는 다시는 널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 방주가 원하는 건 네 년의 송장이다. 네 년의 송장을 가져다 바치는 게 우리 셋의 의무라구!" 거씨라는 사내가 지껄여 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세 놈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처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어올랐다.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그럴 리가……." 홍칠은 이 처녀와 개방 방주 미운산과의 사이에 알지 못할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저 세 놈의 말에 이렇듯 상심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겠는가. "방주가 우릴 죽이겠다구? 죽이려면 죽이라지. 난 겁나지 않아!" 사내애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곧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세요? 어디 이름이나 들어 봅시다." 처녀가 거씨에게 물었다. "모두들 나를 거수(巨手)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아둬." 처녀는 눈물을 닦아 내고 조용히 말했다. "저 애를 놔줘요. 저 애는 아직 어린아이예요. 저 애를 놓아주면 나는 당신들이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그 말이 정말이겠다?" "정말이에요. 그저 저 애만 놔주면 돼요. 그런 다음엔 마음대로 하세요." "누나, 저 놈들 말을 믿지 말어! 저 놈들은 나쁜 놈들이야! 개방에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구 저것들 말을 믿어. 저것들 말을 믿다간 우리 둘 다 죽어!" 사내애가 여전히 거수의 손아귀에 잡힌 채 몸부림치며 외쳐 댔다. "어서 저 년의 혈도를 눌러 놔라!" 거수가 곁의 놈에게 명했다. 그리고는 처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꿈쩍 말고 서 있어. 여차하면 네 동생부터 죽일 테니까!" 발버둥치며 악을 쓰는 동생을 바라보던 처녀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놈이 자기의 구도대혈(九道大穴)들을 다 눌러 놓을 때까지 꼼짝도 안 했다. "좋다. 그럼 약속대로 이 조그만 자식은 놓아주지." 거수는 큰 인심이라도 배풀 듯 사내애를 놓아주었다. "누나!" 사내아이는 달아나지 않고 제 누이를 부둥켜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누나……." "이러지 말고 지금부터 누나 말을 잘 들어라. 예전에 누나가 한 말 기억하고 있지? 개방 중의 그 두 사람을 꼭 찾아가야 한다. 한 사람은 홍칠이고 다른 한 사람은 홍안루에서 요리사로 있는 소씨 거렁뱅이란 사람이다. 그 두 사람을 찾아가 무예를 배워야 한다." 처녀는 눈물을 삼키며 애써 웃어 보였다. "어서 가 그 사람들을 찾거라.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하기에 달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홍칠은 처녀의 입에서 자기와 사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눈을 크게 떴다. 이 처녀는 개방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으나 불시에 뛰어든 세 놈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옷차림은 개방 차림을 했지만 놈들의 손만 봐도 개방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거수라는 놈의 그 큰 손은 희멀건한 게 고생한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홍칠은 옴쭉달싹 못한 채 멍청히 두 남매의 수난을 지켜보고만 있자니 속이 끓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서 가!" 처녀가 사내애를 밀어냈다. "누나……."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