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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10편 (10/66)

2026-09-29 08:03:11 조회 36
미운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넌지시 소씨 거렁뱅이를 건너다보았다. "이거 듣고 보니 난 순전히 낚싯밥인 셈이구만? 그러니까 날더러 홍칠일 대신해서 죽으라는 거 아뇨?" 소씨 거렁뱅이가 펄쩍 뛰었다. "그렇네. 놈을 잡기 위한 수단인 셈이지. 그러면 개방을 구할 방법이 나서는 건데 자네가 죽기를 두려워 하니 이 일을 추진할 수가 없군 그래." 미운산의 말에 소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던 그가 드디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방주님 말씀대로 죽으라면 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난 방주님처럼 가만히 앉아서 독해를 당하고 있지마는 않을 겁니다." 소씨 거렁뱅이가 나가고 나자 미운산은 그의 의자에 앉아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곁에 있던 운낭과 여아도 말이 없었다. 미운산이 드디어 침통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여아와 운낭은 내 말을 잘 듣거라. 난 이제 늙고 병들어 너희들을 더는 만족시켜 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둘 다 내 곁에 있을 것 없이 가고 싶은 데로 떠나들 가거라." "방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운낭이 미운산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방주님이 아니시면 제가 지금까지 무슨 수로 살 수 있었겠습니까? 방주님은 저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런 방주님을 저버리고 떠나라니요? 전 못 떠납니다. 전 죽을 때까지 방주님 곁을 지킬 겁니다!" 이에 감동한 미운산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말은 고맙다만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고 죽지 않아도 같이 있어 봐야 고생밖에 더 하겠느냐?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방주님을 떠날 바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어요." 운낭은 결연히 칼자루를 뽑아 들었다. "운낭아!" 미운산이 버럭 소리질렀다. 운낭은 손을 멈추고 미운산을 애절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저보고 죽으라는 게 아니라면 절 내치지 말아 주세요. 끝까지 떠나가라 하신다면 전 방주님 앞에서 자결하고 말겠어요." "정말 어리석구나. 난 이제 하반신을 못쓰게 된 불구의 몸이라 남녀간의 정도 나눌 수 없어. 젊은 나이에 그 무슨 못할 짓이냐?" "전 상관없어요. 방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래도 좋아요." "어리석은 것……, 어리석은 것……." 운낭의 말에 미운산은 가슴이 미어져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미운산은 고개를 돌려 여아에게 말했다. "운낭은 그렇다 치고 여아 넌 어서 떠나거라." 세 사람이 한데 어울려 뒹굴 적이면 여아의 정욕이 가장 강하였음을 미운산과 운낭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미운산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가 앞으로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제하면서 언제까지 견딜 수 있겠는가. "방주님, 그동안 이 여아에게 베풀어 주신 방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여아는 미운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끝까지 미운산을 섬길 수 없음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아는 이곳을 나가면 개방에 있지 않는 것이 좋다. 내 여기 운낭에게 주어 보내려던 은자가 있으니 그것도 함께 가지고 가거라." 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은자를 받아 들고 미운산에게 절을 하였다. 그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 여아가 석실을 나가고 나자 미운산은 운낭을 보며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여아가 막상 떠나고 나니 섭섭하시죠?" 운낭이 물었다. 미운산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이제야 난 나를 독해한 놈이 누군지 알았어." "누군데요?" 운낭이 급히 물었다. "여아…… 여아였어." "여아라니요? 지금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운낭은 펄쩍 뛰었다. "여아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요. 그런 독한 짓을 한 놈은 분명 장로들 중에 있을 거예요. 여아를 의심한다는 건 뭔가 잘못 알고 그러시는 걸 거예요." "내 말이 틀릴 리가 없어." 미운산이 단호하게 말했다. 미운산은 자기가 앉아 있는 의자에 장착된 단추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그와 운낭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게 누구 없느냐?" 위층으로 올라온 미운산이 소리쳤다. 곧 아랫사람 넷이 달려 들어왔다. "너희들은 어서 가서 사개 정원과 소미타(笑彌陀) 추우(鄒雨)를 불러오너라." 넷은 미운산의 명을 받고 나갔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미운산 앞에 나타났다. "방주님,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드디어 나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았다. 너희 둘은 어서 가서 그 년을 붙잡아 누가 시켜 한 짓인지 조사해 오너라. 서둘러라!" 미운산이 명하였다. "그 년이 누굽니까?" 사개 정원이 사나운 기세로 물었다. 그는 금의파 장로로서 잔인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몸에는 비단옷을 둘렀으나 뱀을 가지고 놀기를 즐겼는데 그 뱀은 몸 전체에 독이 있는 뱀이었다. 미운산은 한숨을 짓고 두 눈을 내리감더니 머리를 숙였다. 그는 차마 말하기가 싫은 듯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직이 내뱉었다. "여아다. 어서 가서 찾아보아라." 사개와 소미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주를 독해한 사람이 방주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아라니……. 그들은 방주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방주님께서는 여아를 다시 보시겠습니까?" 사개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것은 여아를 죽여도 좋은지 아니면 생포해 와야 하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런데 미운산은 차마 죽일 수는 없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듯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다." 품에 은자 몇십 냥과 은표 몇십 장을 지니고 석실을 나온 여아는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그녀가 대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데 저만치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양삼우(楊三牛)였다. 양삼우는 여아를 보자 소리쳤다. "아씨, 여기서 뭐하십니까?" 여아는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한동안 머물 만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인데 좀 주선해 주시겠어요?" 양삼우는 의심이 버럭 났다. 여아는 방주의 여인인데 왜 갑작스레 밖에 나와 머물 곳을 찾는다는 건가? 방주와 다투고 성이 나서 뛰쳐나온 것이 아닐까? "아씨, 숙소는 소인이 주선해 올릴 수가 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됐어요. 날 데리고 여기를 떠나 좀 먼 데로 잡아 줘요. 조용하고 깨끗한 집으로요." 여아가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삼우는 이 일은 급히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적당한 집 하나를 찾아서 그녀를 데려다 놓고 윗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주와 싸우고 뛰쳐나왔으면 지금쯤 방주가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여아 아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내 어디 가서 수레 하나를 구해 오겠습니다." 잠시 후 양삼우는 수레 한 대를 얻어 왔다. 두 사람은 꼬박 반나절이 걸려 저녁 무렵에야 20리 밖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에 당도했다. 인가가 몇 안 되는 마을 어귀에 객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객점에는 모자 둘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아네 일행을 반겨 맞으며 말을 들여 매 주고 밥을 지어 주었다. 여아네 일행이 밥을 다 먹자 노파가 말했다. "아씨, 아씨가 이런 데서 지내자면 불편한 점이 많을 거외다. 이 늙은 걸 꺼리지 않으면 아씨는 나와 한 방에서 자고 저 남정네들은 내 아들과 같이 자게 함이 어떻겠소?" 여아는 노파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잠자리에 들자 노파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씨를 보면 처녀는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듯 홀로 길을 떠나셨수? 남편 되시는 분이 걱정도 안 하든가 봐?" 그 바람에 여아는 자신의 신세가 새삼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일들을 노파에게 자초지종 얘기해 주었다. 노파가 혀를 끌끌 차며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아씨 남편도 대단한 사나이요. 이렇게 사랑스런 아낙을 어떻게 무 자르듯 정을 뚝 끊고 내보낼 수 있었을까? 하긴, 그것도 아씨에 대한 정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여아는 더욱 슬피 눈물을 흘렸다. 끝까지 미운산 곁에 남는 건데, 괜히 떠나 왔다는 후회가 밀려 왔다. 여아가 슬퍼하자 노파가 그녀를 달래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분이 아씨를 떠나 보낸 것도 어쩌면 아씨를 위함이 아니겠소? 너무 슬퍼 말아요. 그런 분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같으면 평생 원이 없겠네." 이때였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얘야, 어서 가 문을 열어라. 손님이 오셨나 부다." 노파가 아들 방에 대고 소리쳤다. 아들은 급히 일어나 옷을 주워 입으며 투덜댔다. "야밤 삼경에 웬 손님이야?" 문을 여니 바깥엔 사나이 둘이 서 있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비단옷을 입은 선비 타입의 사나이가 정중히 말했다. 객점의 아들은 그의 손에 작은 뱀이 한 마리 들려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선비 타입의 사나이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이 집에 아가씨 하나가 투숙하고 있지 않나?" 객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게." 아들은 바짝 긴장하여 두 사나이를 안방으로 안내해 갔다. 문을 여니 여아와 노파가 침대 위에 일어나 앉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여기 있었구만." 사개가 차갑게 말했다. 뒤이어 들어온 소미타도 여아를 보고는 실실 웃었다. "아씨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따라오느라고 땀깨나 흘렸소이다." 여아는 이상한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두 장로가 여기까지 왜 왔을까? 내일모레 개방의 큰 모임이 있는데 무슨 여가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여아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두 놈이 바로 미운산을 독해한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여아는 더욱 긴장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이때였다. 바깥 쪽에서 양삼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추 장로님과 정 장로님이 오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글쎄 저 여아 아씨가 저더러 집을 하나 잡아 달라는데 방주님 생각을 알 수가 있어야죠. 그래 안 그래도 내일 아침에 달려가서 의논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양삼우, 자넨 정말 꾀가 많은 친구야. 평소에도 일 처리를 이렇게만 하게. 그럼 방주님께서 자네한테 분타의 타주 자리 하나 내줄지 어찌 알겠는가?" 소미타가 치하를 했다. "추 장로님, 장로님의 길언(吉言)대로 내가 분타 타주가 되면 장로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때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귀청을 찢는 듯한 양삼우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소미타, 양삼우는 왜 죽이지?" 사개 정원이 놀라 물었다. "자네, 철부지 애들도 아닌데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저런 놈을 살려 둔다면 개방 총부의 비밀이 유지되겠나?" 소미타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노파는 혼비백산하여 덜덜덜 떨며 여아를 쳐다보았다. 여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죽이려면 나를 죽여요! 개방도 율이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아무 짓이나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방주님이 아시면 가만 놔둘 줄 아세요?" 소미타가 쓴웃음을 웃었다. "아씨는 아씨 일이나 걱정하시오. 아씨는 방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방주님께선 아씨를 우리 손에 맡겼소!" "당신들 손에 맡겼다고? 그렇다면 날……." 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운낭처럼 끝까지 미운산 곁에 있을 생각을 안 하고 혼자 떠나왔다고 이러는 건가? 이것이 미운산의 심보로구나. 그가 이토록 무정하고 잔인한 인간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 오지 말고 미운산이 보는 앞에서 죽어 버리는 건데…….' 여아는 눈물을 훔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바보야. 날 죽이려는 줄도 모르고 난 여태까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여아는 결심한 듯 칼을 꺼내 제 가슴을 겨냥했다. "좋아요. 방주님께서 날 죽이려 한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어요." 여아의 칼 쥔 손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제6장 개방의 방주 "이러지 마시오!" 사개 정원이 여아의 손목을 번개같이 텁석 잡으며 꽥 소리쳤다. "왜 이래요? 방주님이 내가 죽기를 바란다니 그 뜻에 따르려는데 왜 이래요?" 여아가 흐느끼며 말했다. "아씨, 아씨를 시켜 방주를 독해한 사람이 누구요? 그것만 밝히시오." 소미타가 물었다. 여아는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미운산이 날 의심하고 있구나…….' 여아는 기가 막혔다. 방주의 생각이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명명백백 죽음밖에 없을 것이었다. 사개는 다가와서 여아의 머리칼을 몇 가닥 거머쥐었다. "참 탐스러운 머리칼이로군. 이 좋은 머리칼이 다 뽑히면 그야말로 볼 만하겠는걸?" 그는 여아의 머리칼을 홱 잡아채어 한줌 뽑아 버렸다. "악―!" 여아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자, 계속 버텨 봤자 아씨만 힘들어져. 누가 아씨를 시켰는가만 솔직히 말하시오." "난 모르는 일이에요. 나더러 뭘 말하라는 거예요?" 여아가 울부짖었다. "암만해도 된맛을 좀 보여 줘야겠구만." 소미타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더니 여아의 옷을 다짜고짜 쫙쫙 찢어발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알몸뚱이가 된 여아는 희고 탄탄한 젖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오돌오돌 떨었다. "이래도 말 못하겠나?" 소미타가 손톱 끝으로 여아의 아랫배를 한 줄 죽 내리그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소미타의 손톱에 긁힌 여아의 아랫배에선 금세 피가 흘러 나왔다. 여아는 뱃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 "난 방주님을 독해한 일이 절대 없어요. 날더러 뭘 말하라는 거예요?" "방주님께선 그렇게 알고 계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방주님은 속일 수 없을걸?" "날 방주님께 데려가 줘요. 방주님 앞에서 내 진실을 밝혀 보이겠어요." 여아의 말에 사개가 차갑게 웃었다. "방주님이 만나려고 해야 만나지. 방주님이 뭐 널 다시 보겠대?" 그는 뱀 한 마리를 여아에게 바짝 들이댔다. 여아는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여아의 젖꼭지를 탐욕스레 핥았다. 대혈이 눌려 꼼짝할 수 없게 된 여아는 진저리를 치며 악을 썼다. "난 아니야, 난 아니야―!" 그러나 그녀의 피맺힌 절규는 허공에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보름달이 밝았다. 개방의 사람들은 멀리 10리 밖까지 보초들을 세워 개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해 놓고 서호 호숫가에 모여 앉았다. 서호 십경이 멀리 어렴풋이 바라보였다. 이윽고 수레 위에 앉은 개방 방주 미운산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밤 여러분을 이렇게 모이게 한 것은 한 가지 상론할 문제가 있어서요. 우리 개방은 백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영웅 호걸들을 배출해 냈소. 그런데 이 미운산 대에 그 기상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형제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나 미운산이 무능하여 개방을 중흥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런데다 부실하게도 이 몸에 독해를 입어 난 이제 더는 방주 자리를 지키기가 어렵게 됐소. 때문에 오늘 개방의 여러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방주를 새로 천거함이 어떠 할지 여러 형제들의 고견을 들어 보고자 이렇게 모이라 했소." 미운산의 양옆에는 개방의 11대 장로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왼편에는 개방 금의파 6대 장로인 부귀관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 출수표 노경, 운중연 서불성, 사개 정원, 옥면검객 호심 등이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오의파 4대 장로인 일점지(一點 ) 나장태(羅長太), 소검(少創) 오평(伍平), 소미타 추우, 과천청(過天靑) 제갈옥생(諸葛玉笙) 등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앉아 있는 장로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금의파도 아니요 오의파도 아닌 강호의 기인 소씨 거렁뱅이였다. 이 11대 장로들은 방주의 말에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미운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방주로 있으면서 우리 개방을 흥성 발달은 못 시켰지만 우리 개방의 명예를 손상시키지도 않았소. 그러나 오늘 현명한 방주를 새롭게 내세운다면 개방 여러 형제들을 이끌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테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사람들은 미운산의 말이 옳다고는 여기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미운산만큼 공정하고 정직한 방주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금의파 장로를 방주로 내세우면 오의파에서 불만을 품을 것이고 오의파 장로를 방주로 내세우면 금의파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방주로 내세울 수 있겠는가? 미운산이 다시 천천히 말했다. "우리 개방에 인재들이 많으니 방주 하나 뽑기는 어려울 것 같지 않소. 내 소견에는 개방의 풍속대로 무공을 겨루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방주로 뽑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형제들 생각은 어떠시오?" 사람들은 미운산의 의견이 썩 탐탁치는 않았지만 지금 이 정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번 개방대회를 소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방주를 새로 뽑으려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터라 그 문제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여 금의파 사람들은 자기네 금의파 여섯 장로들 중에 한 사람을 방주로 뽑으려 하였고, 오의파는 오의파대로 자기네 네 장로들 중 한 사람이 새 방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로의 세력만 봐서는 금의파가 우세였지만 수하에 거느린 거렁뱅이 수로 따지면 오의파 쪽이 훨씬 우세하여 두 파 간의 강약을 가량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미운산의 제의는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내 실력으로 방주 자리를 차지하는 데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고 은근히 기대를 품으며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였다. 이때였다. 부귀산인 범장천이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불고는 입을 열었다. "방주님의 뜻을 안 지는 우리도 오래 되었으나 우리 여섯 장로들은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개방을 아주 잘 다스려 오시던 방주님께서 뜻밖에도 암해를 당했으니 그 악독한 놈을 잡아내어 능지처참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방주님께서 개방대회를 열어 방주 자리를 내놓겠다 하시니 마음이 여간 착잡하지를 않습니다." 범장천은 사뭇 심각하게 둘러앉은 개방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방주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우리는 그 뜻을 따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개방의 한 식구들이니 무공을 겨룰 때 너무 지나치지 않게 그저 혈도나 찔러 이기면 끝나는 것으로 합시다. 오의파에는 장로가 넷뿐인데 우린 여섯이니 우리 편에서도 넷만 나가 각각 네 번씩 겨루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방주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오의파 장로들 중 성미가 급한 일점지 나장태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우고 싸울 테면 어서 싸워 보자. 자네 범장천이 녹옥죽봉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벌써부터 호시탐탐 수작을 꾸민 줄 누가 모르는 줄 아나?" "나 장로, 방주가 되고 싶으면 말부터 점잖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그러지 않고서야 개방 삼십만 형제를 어떻게 올바로 이끌겠는가?" 부귀산인이 빈정거렸다. "내가 방주가 되고 안 되고는 우리 둘이 겨루어 보면 알게 될 터인즉, 개방을 이끌어 가는 문제는 자네가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지!" "그럼 입방아만 찧을 것 없이 방주님 의견대로 한번 겨루어 볼까?" 범장천의 말에 뭇 거렁뱅이들은 어서 시작하자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자 미운산이 길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우리 개방이 강호에서 이렇듯 큰 방이 되어 누구라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우리 형제들이 서로 혈육 같은 정으로 의좋게 도와 가며 살아왔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번에 방주를 새로 뽑는 일로 파벌간에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심히 우려 되는구려. 그래, 내 생각엔 무공을 겨루어 방주를 뽑는 이 짓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는 심기가 좋지 않아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11대 장로들을 하나하나 쳐다본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11대 장로 중의 하나인 소씨 거렁뱅이를 다음 대 방주로 세웠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오. 금의파도 오의파도 아닌 그가 방주가 되면 개방이 더는 분열되는 일이 없을 것 아니오?" 금의파 사람들도 말이 없었고 오의파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평소 허랑방탕한 세월만 보내며 자기 단속도 잘 못하는 소씨 거렁뱅이를 어떻게 방주로 내세운단 말인가? 사람들은 제각각 수군거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태도에 소씨 거렁뱅이는 은근히 오기가 났다. '이러리라고 짐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다들 이 소씨 거렁뱅이를 그렇게 만만하게 본단 말이지?' 이렇게 생각한 소씨 거렁뱅이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는 여유 있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 소씨 거렁뱅이는 솔직히 내 몫이 아니라 생각하여 방주 자리는 꿈도 꾼 적이 없소.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를 방주로 추대했다면 나는 한사코 거절했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