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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9편 (9/66)

2026-09-29 08:03:11 조회 29
"홍칠 씨, 당신은 내가 데려온 분이고 또 내가 방주에게 추천하였으니 섣부르게 행동하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침대에 눕더니 금방 잠이 들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이 왜 안 가고 한 방에서 자려는 걸까? 방주님의 분부를 받아서 내가 여색에 범연한가 어떤가를 떠보려는 수작일까? 그렇다면 방주님도 부질없는 짓을 하는 거지. 아무려면 이 홍칠이 방주의 딸을 건드릴까?' 홍칠은 탁자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그 위에 벌렁 누웠다. 그도 곧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홍칠은 문득 미립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유, 목말라. 물…… 물 좀……." '목이 마르면 제 손으로 떠다 먹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나를 시켜 먹자는 건가 지금?' 홍칠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미립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짜증을 부렸다. "내 말 안 들려요? 목말라 죽겠다는데, 귀 먹었어요?" "아니 아가씬 개방 사람이 아니오?" 홍칠이 그녀의 말이 괘씸하여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미립은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개방 사람이 아니면 내가 왜 여기 있겠어요?" "개방 사람이라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빌어 먹고 입을 것도 자기 손으로 얻어 입어야 한다는 법을 왜 모르지? 목이 마르면 제 손으로 떠다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홍칠이 나무라듯 말했다. "난 여자잖아요. 남자가 돼서 이 야밤 삼경에 여자한테 물 한 그릇 떠다 주는 게 그렇게도 어려워요?" 미립이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홍칠은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물 한 사발을 떠다가 그녀에게 주었다. 무더운 밤이라 미립은 얇은 속옷만 입고 있었다. 홍칠은 머리는 풀어 늘어뜨리고 눈은 잠이 채 깨지 않아 게슴츠레한 미립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그녀에게선 사내들을 취하게 하는 젊은 여인의 채취가 물씬 풍겨 왔다. 그녀는 홍칠의 기색을 힐끗 살피며 애교를 부렸다. "여자를 어떻게 보살펴 주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나 봐? 내가 가르쳐 줄까요?" 홍칠은 그녀가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또 마시겠소?" 그러자 미립이 캐드득 웃었다. "제가 단순히 목만 말라서 일어난 줄 아세요?" "그럼 배도 고프단 말인가? 이거 또 어디 가서 먹을 걸 얻어 와야겠군." 홍칠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미립이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 바보인가 봐? 마시고 먹는 것 말고 남녀간에 더 좋은 일이 있다는 걸 정말 모르시나?" 미립은 실실 웃으며 홍칠에게 한들한들 다가왔다. 탄력 있는 허벅다리와 탄탄하게 솟은 횐 젖가슴이 여름 밤 얇게 걸친 여인의 옷 밖으로 선명하게 내비쳤다. 홍칠은 내심 당황했다. 그녀의 빠알간 젖꼭지가 달빛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칠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유돌대혈(乳突大穴)을 찔렀다. 순간 미립은 하나와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홍칠은 미립을 안아다가 침대에 눕혔다. "난 아가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 나 홍칠이는 배고프면 먹고 갈증나면 마시고 피곤하면 자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아가씨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다면 피곤해서 그런 모양인데, 피곤할 땐 푹 자 두는 게 제일이지."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미립은 마치 괴물이라도 대하듯 홍칠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아니라구……." 홍칠은 탁자에 누워 입을 꾹 다물고 자는 척했다. "사내 구실도 못하는 바보 같으니……. 여자를 곁에 두고도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위인이 무슨 사내야?" 그러나 홍칠은 끝까지 못 들은 척했다. 홍칠은 드디어 미운산에게 두 가지 절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운산이 홍칠에게 말했다. "이 강룡십팔장은 지강지양(至剛至陽)한 무공이니라. 다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보니 그 무공 본래의 강력한 부분이 다소나마 실전된 채 전해져 왔으나 어쨌든 강룡십팔장만큼 강력한 무공은 없으니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야 한다." 홍칠은 미운산의 장법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강룡십팔장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미운산은 열며칠을 연이어 홍칠에게 강룡십팔장을 가르쳐 주었다. 홍칠은 그 이후 사람들로부터 홍칠공이란 칭호를 듣기에 이르러선 '항룡유회'로부터 '용비재천'에 이르는 십팔식(十八式) 장법을 완벽한 장법으로 집대성하였다. 홍칠은 보름이 걸려서야 이 강룡십팔장을 대강 배워냈다. 그러나 방주 미운산에 비하면 아무래도 무공이 떨어지기에 이 강룡십팔장을 하루아침에 능숙히 펼쳐 보이기는 어려웠다. 개방의 모임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미운산은 미리 홍칠에게 일러두었다. "홍칠이, 난 네가 여기 있는 걸 남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다. 개방의 모임이 있는 며칠 동안 너는 딴 데 가 있거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가 개방의 모임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그때 내가 타구봉법을 가르쳐 주겠다." 홍칠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딱히 갈 데가 없는 홍칠은 뭇 거렁뱅이들이 있는 동악산의 낡은 절로 갔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비렁뱅이질로 간신히 허기를 채우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의 거렁뱅이 두목이 말했다. "며칠 있으면 우리 개방에서 큰 모임을 갖게 되는데 우리 다 같이 가 보세. 적어도 밥 한끼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거든." 거렁뱅이들은 얼씨구 좋다, 하며 두목을 따라 나섰다. 홍칠도 따라갔다. 그들은 얼마를 걸어 한 수림에 이르렀다. 수림 속에는 한 무리의 거렁뱅이들이 조용히 모여 앉아 있었다. 홍칠네 무리들도 슬금슬금 다가가 곁에 앉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누군가가 나직이 소리쳤다. "온다!" 홍칠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멀리 교자 몇 개가 이리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교자가 수림에 닿자 여섯 사람이 각각 타고 온 교자에서 내려섰는데 모두 홍칠이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앞에 선 사람은 부귀산인 범장천이요,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로는 청한자자 노명성, 출수표(出手 ) 노경(盧敬), 운중연(雲中燕) 서불성(徐不成), 사개 정원, 옥면검객 호심이었다. 그들 여섯은 뭇 거렁뱅이들 앞으로 걸어왔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부귀산인 범장천이 먼저 인사를 하자 다른 다섯도 같이 읍하며 인사를 했다. 그 깍듯한 인사에 사람들은 감격한 듯 급히 답례들을 했다. 청한자자 노명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선 형제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마차에 가득 싣고 왔으니 그것부터 나누세. 며칠 모임에 참가하려면 염낭들이 궁색해질 테니 그것부터 해결해야지." 거렁뱅이들은 환성을 올리며 우르르 달려가서 마차에서 고기며 술을 내어 맨땅에 주저앉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원래 개방은 그 출범과 더불어 금의옥식을 피하고 은냥을 축적해서는 아니 되며 순 비렁뱅이질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율을 내세웠다. 그것이 한 대 한 대 전해 내려오는 동안 변질되어 금의옥식하는 자는 물론 은자를 축적하거나 교자 타고 마차 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금의파라는 파벌까지 나오게 되었다. 개방의 거렁뱅이들이 퍼지르고 앉아 먹고 마시며 한 절반쯤 취했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러분, 술만 마시지 말고 우리 장로님들 말 좀 들읍시다. 상론할 대사가 있으시답니다." 그러자 비렁뱅이들은 개방의 여섯 장로를 향해서 빙 둘러앉아 장로들의 말을 기다렸다. 부귀산인 범장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의 형제들은 그동안 모두 한집안 식솔로서, 입을 것 먹을 것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의좋게 지내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겨 왔소. 그런데 뜻밖에도 반년 전에 우리 개방에 반역자가 나타나서 우리 방주님을 독해하였소." 청중들은 놀라 술렁거렸다. "아니, 방주를 해친 놈이 누구요? 우리 방주가 어떻게 해를 입었단 말입니까?"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옥면검객 호심이 냉랭히 말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봤는데 방주님은 다리를 못쓰게 되었소. 걷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남과 싸우지도 못하게 되었소." "도대체 어느 놈이 한 짓이오? 장로님들은 모르시오?" 누군가 물었다. 그러자 청한자자 노명성이 입을 열었다. 노명성은 어느 장로보다도 거렁뱅이 무리들한테 신임을 받고 있었다. "형제들! 우리 여섯 장로들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 놈은 우리 개방에 있는 놈입니다. 우리 개방엔 장로가 모두 열한 명이 있는데 그 열한 명의 장로 가운데 바로 방주님을 해치려는 범인이 있단 말이오. 방주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 아니고선 그런 방법으로 독해할 수가 없는 법이거든." 거렁뱅이들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개방 안에, 그것도 장로들 가운데 방주님을 해치려는 자가 있다니 이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방은 금의파(錦衣派)와 오의파(汚衣派)로 갈라지면서부터 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의파는 빈한한 수련과 청고한 계율을 반대했고 오의파는 금의파의 사치 향락을 거렁뱅이의 계율에 어긋난다고 비방했다. 이 두 파의 분쟁은 개방의 방주도 어쩌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의 방주 미운산은 금의파의 신분으로 방주 자리를 이어받았기에 오의파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니 방주를 독해한 것은 다름아닌 오의파일 가능성이 많다는 게 대부분 거렁뱅이들의 추측이 었다. "오의파 놈들이 한 짓이 틀림없어. 오의파 장로 넷이 자기네가 방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런 독한 짓을 한 게 틀림없다구!" 거렁뱅이들 속에 끼여 앉은 홍칠은 다른 거렁뱅이들과 같이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 금의파의 말도 일리가 있어. 오의파 장로들이 방주 자리를 차지할 희망이 없으니까 방주님을 독해하고 개방을 크게 혼란시키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대어 소란스러운 가운데 부귀산인 범장천이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오늘은 여기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내일 새벽 우리 함께 개방대회에 참가하러 갑시다. 가서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거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방주님을 옹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옳소!"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하루 일을 마친 소씨 거렁뱅이는 주방의 밀가루 반죽용 등상 위에 길게 누워 잠을 청했다. 이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처녀 한 명이 들어왔다. 두 눈이 초롱초롱하고 날렵하게 생긴 미모의 여인이 그를 보고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시죠?" 소씨 거렁뱅이는 적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만……. 넌 누구지? 누구길래 이 야밤 삼경에 날 찾아왔지?" "그렇게 놀라실 것 없어요."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누군가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는데 함께 가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날 찾는다고? 누가 나 같은 놈을 다 찾지? 거 참 고마운 일인데?" "개방의 대사에 관련된 일인데 가시겠어요, 안 가시겠어요?" 처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술병을 끌어다가 한 모금 꿀꺽 마시고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안 가!" "역시 짐작대로군요. 싫다면 하는 수 없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어요." 처녀는 더는 권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소씨는 술을 마시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날 찾는 사람이 누구지?" 막 문을 나서려던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개방 방주 미운산 어른이세요." 소씨 거렁뱅이는 술 마시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멀뚱하게 쳐다보다가 다시금 천천히 물었다. "뭣 땜에 날 찾지? 방주님은 날 제일 싫어하는데, 네가 날 속이는 게 아니냐?" "그야 가 보시면 알 일이죠." 소씨 거렁뱅이는 연신 웃고 있는 처녀를 눈여겨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넌 누구냐? 개방 사람 같지 않은데……." "전 미립이라고 해요. 미운산 어른의 딸이죠." "딸이라고? 젠장, 미운산 방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방주님의 아들이 아니면 딸이라고 하니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알 게 뭐야." 소씨 거렁뱅이의 말에 미립은 또 호호 웃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절 자세히 보세요. 제가 방주님의 친딸 같지 않아요?" "글쎄, 방주님의 친딸 같지 않고 오히려 내 딸 같은데?" "아버님 말씀이, 소씨는 실없는 말을 잘한다고 하시더니 과연 그렇군요. 어떻게 아내도 없는 사람이 딸이 있어요?" 미립이 깔깔거렸다.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도 기분이 좋아져서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구만. 방주님을 닮은 것 같기도 해." 소씨의 말에 미립은 더욱 자지러질 듯 웃어댔다. "정말이지 안목이 의심스럽군요. 미안하지만 전 방주님의 딸이 아니에요. 그저 개방의 한 사람으로서 방주님을 도와드리고 있을 뿐이에요." 소씨 거렁뱅이는 머쓱해졌다. 미립은 소씨 거렁뱅이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떤 놈이 미운산 방주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방주님께서 독해를 입으신 걸 알고나 있으세요?" "방주님께서?" "방주님은 지금 누구도 믿지 않아요. 어쨌든 방주님께서 소 장로를 급히 만났으면 하세요." "이봐, 네가 방주님의 딸이라면 방주님은 바보가 아니지만 딸이 아니라면 방주님은 정말 바보야. 그러니 당하고서도 누구한테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지." "방주님을 도와주시겠어요?" 미립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었다. "난 싫어!" 소씨 거렁뱅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립은 더는 말하지 않고 두 눈 가득 눈물을 담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소씨가 소리쳤다. "싫어도 가긴 가야겠다. 내가 방주를 해코지하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해야겠고, 방주님을 해치려는 놈이 도대체 누군지도 궁금하고 말야." 소씨 거렁뱅이가 나타나자 미운산은 그를 바라볼 뿐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의 눈길에서 영웅 말로의 절망같은 것을 읽었다. 미운산은 눈을 부릅뜨더니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말했다. "자네가 나를 만나기 싫어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와 주리라 믿었네." "미립에게 들었습니다만, 방주님께서 독해를 입었다니 잘 믿어지질 않습니다." 소씨 거렁뱅이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미운산은 처연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자네는 일종의 반독(半毒)이란 독약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소씨 거렁뱅이는 물끄러미 미운산을 쳐다보았다. "가령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독약이 되어 사람을 꺼꾸러뜨리는 경우가 있지. 이렇게 생기는 독을 반독이라고 하네." 미운산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가 물었다. "절 부르신 이유가 뭔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방주님을 독해한 그 죽일 놈을 잡으라고 절 부르신 겁니까?" 소씨 거렁뱅이의 물음에 미운산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이봐, 자넨 왜 그렇게 눈치가 무디나? 나를 해친 놈을 잡으라고 자네를 야밤 삼경에 여기로 불러 올까?" "그러시다면 저를 술동무하자고 부르셨습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헤헤 웃으며 곁에 있는 술항아리를 끌어다가 술을 마시려고 했다. 워낙 성격이 제멋대로인 소씨 거렁뱅이는 방주 앞이라고 해서 그 행동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불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소씨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운산은 웃기만 할 뿐 탓하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술단지의 마개를 떼고, 단숨에 반 단지 가량 들이키더니 천연스레 미운산을 쳐다보았다. "제게 할말이 있으시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미운산은 연신 한숨을 짓더니 자기 다리 위에 덮었던 가죽 담요를 들어 보였다. "무릎과 다리가 성하지 못하니 걸을 수가 없고 걸을 수가 없으니 개방의 방주 일을 어떻게 보겠는가? 거렁뱅이 일생은 사처로 돌아다니는 게 업인데 이젠 한 발짝도 내딛기가 어렵게 되었네. 이 몰골을 하고서 내가 어떻게 계속 개방 방주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소씨 거렁뱅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미운산은 날카로운 눈길로 소씨 거렁뱅이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봐, 자네가 개방의 율을 어겨 일대 제자로 떨어지긴 하였으나 난 내 대신 자네를 개방 방주로 앉힐 작정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대경실색한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과 곁에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기색에서 미운산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안 소씨 거렁뱅이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됩니다, 아니 됩니다. 개방의 일대 제자에 불과한 제가 방주일을 보다니요? 천만 부당한 일이옵니다." 미운산은 고갯짓으로 운낭을 시켜 녹옥죽봉을 가져오게 했다. 운낭은 곧 그 유명한 녹옥죽봉을 가져왔다. "소씨, 개방 총부의 십만이 넘는 인종과 대강 남북에 있는 모든 분타(分舵)를 이젠 자네한테 모두 맡기네." 미운산은 녹옥죽봉을 소씨 거렁뱅이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렇게 결정할 수가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제 생각엔 이 녹옥죽봉을 범장천 장로에게 넘겨주고 그분에게 개방 방주 일을 맡아보게 하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이 사람아, 자네도 우리 개방 안의 일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금의파 장로가 여섯이고 오의파 장로가 넷인데 이들 두 파가 서로 조금도 양보 없이 티격태격 분쟁이 끊일 날이 없는데 나더러 방주 자리를 금의파에게 넘겨주라고?" 소씨 거렁뱅이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금의파에게 넘겨주는 게 마땅찮으면 오의파 나장태 장로한테 넘겨도 될 일 아닙니까?" 그 말에 미운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개방 방주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어디 그렇듯 간단한 줄 아는가? 내가 금의파 범장천에게 넘겨주면 오의파들은 내가 금의파 출신이니 금의파 편에 선다고 불복일 것이고 반대로 오의파에게 넘겨주면 금의파 사람들이 나를 죽일 놈이라고 욕할 걸세. 심성이 비뚤어져 다른 파 사람들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준 나쁜 놈이라고. 그러니 이처럼 난처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제야 소씨 거렁뱅이도 방주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생각처럼 수월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심각한 것을 질색으로 여기는 그는 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괜히 일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 없이 방주님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거야 어디……." 미운산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바라보았다. 열한 장로들 중에는 그래도 금의파도 아니고 오의파도 아닌 소씨 거렁뱅이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는데 소씨 거렁뱅이가 이렇듯 펄쩍 뛰니 앞일이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전 방주 일을 못 봐요. 다른 사람을 시키시오." 소씨 거렁뱅이는 한사코 거절했다. 미운산은 소씨 거렁뱅이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면 자네 대신 금의파나 오의파가 아닌 사람 중에 누구를 시키면 좋겠나?" 미운산의 물음에 소씨는 퍼뜩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기뻐 소리쳤다. "홍칠이, 홍칠이가 있잖습니까! 홍칠이를 시키시오. 제일 적임자죠. 비록 내 제자이긴 하지만 무공은 저와 별반 다를 게 없고 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우직한 성미라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러자 미운산이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역시 소씨답군. 난 이미 홍칠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주기로 하고 답변을 받았네."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은근히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술단지를 들어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방주님께선 지금까지 나를 떠보고 있었군요? 이 소씨 거렁뱅이가 자기 제자와 방주 자리를 다투나 어쩌나 보자고 말입니다." "이봐, 자네도 개방에서 어른인데 개방에서 이때까지 헛살았구만. 이 미운산이 이런 일엔 얼마나 꾀가 많고 빈틈없는 사람인지는 자네도 모르지 않을텐데?"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미운산은 나와 같이 장로를 지낼 때도 꾀가 많아 난 언제나 그를 따르지 못했지. 매사에 그는 앞뒤를 재어 빈틈없이 처리하면서 자기는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 대단히 영악한 인간이었어. 그렇다면 이번 일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소씨 거렁뱅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눈치를 챈 미운산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띄웠다. "이봐, 내가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겠네. 그럼 자네는 꼭 방주 자릴 맡아 줄 게야." 사실 개방의 열한 명 장로들 중에 누군가 방주를 해치려 했다면 일단 방주를 해치려 한 이상 홍칠이 방주가 되면 더 위험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홍칠을 그냥 방주로 올려 놓는 데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생각을 해 보게. 홍칠이가 죽으면 누가 개방의 방주 자릴 이어 가겠나? 개방을 지키려면 홍칠이만한 인물이 필요하고, 때문에 홍칠이가 방주 자리에 앉기 전에 자네나 나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어야 하네. 그런데 나 같은 건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놈이 더 이상 나를 표적으로 삼지 않을 테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