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편 (5/66)
처녀처럼 수줍어하는 미립을 보자 묘대야는 더욱 안달이 났다. '내가 그간 수많은 사내 놈들을 데리고 자 봤지만 이 애한테 비하면 모두 아무것도 아니야. 내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애를 집에 데리고 가서 흠뻑 취하게 만들어 놓고 단단히 재미를 봐야겠다.' 미립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묘대야의 눈길에 그만 고개를 푹 숙였다. "이봐, 아우. 이만하면 구경도 할 만큼 했고 이야기도 실컷 들었으니 이젠 나하고 같이 우리 집에나 가 보지 않겠나?" 묘대야가 속삭이듯 말했다. "묘대 형님,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댁에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볼일이 있어 그럽니다. 볼일을 마치고 나면 형님을 찾아가겠습니다." 그 말에 묘수인주 묘대야가 빙그레 웃었다. "아우, 이렇게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렇게 만난 날이 좋은 날인 줄 알게. 이렇게 반갑게 만나서 어떻게 말 몇 마디만 나누고 헤어지겠는가? 그러면 이 형 되는 사람이 얼마나 서운해 할지 자낸 모를 거야.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 하게. 우리 며칠 마음놓고 푹 쉬며 함께 놀자구, 응?" 미립은 한참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대답했다. 미립이 자기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묘수인주 묘대야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서사를 나갔다. 두 사람은 마차를 불러 타고 묘대야네 집으로 향했다. 경성의 한낱 요리사에 불과한 묘대야이지만 그는 다른 요리사와는 달랐다. 황제에게 어선을 대접하는 요리사일 뿐만 아니라 또 공로가 적지 않아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황궁 대내(大內) 어선방에서 첫손 꼽히는 요리사였다. 마차가 대저택 앞에 멎자 미립은 그 엄청난 규모에 내심 놀라지 앉을 수 없었다. 묘대야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문 어귀에 서 있던 하인들이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굽실거렸다. "이제 오십니까, 나으리?" 문지기 둘이 앞으로 나섰다. 하나는 뚱보이고 하나는 늙은이인데, 뚱보가 웃으며 아뢰었다. "나으리, 얼마 전에 한 사람이 청첩장 하나를 들고 왔는뎁쇼, 꼭 나으리께 전해 드리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사오나 나으리가 보시면 자연 아신다고 하며 가 버렸습니다요." "으흠, 그래?" 묘대야는 청첩장을 받아 펼쳐 보았다. 미립은 한편으로 비켜섰다. 강호문파(江湖門派)들은 자기들의 일을 남이 아는 것을 제일 꺼려 한다. 내막을 남이 알면 큰 화를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잘 알고 있는 미립은 한편으로 비켜서서 창문에 아로새긴 무늬를 훑어보는 척했다. 묘대야는 보내 온 청첩장을 훑어보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소매 속에 찔러 넣고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누가 이 편지를 받았지?" "여럿이 있는 데서 받았는뎁쇼. 그 사내는 그저 자기는 철장방 사람이란 말만 하더군요. 자기는 방주의 영을 받들고 왔으니 부디 묘대야 나으리께서 와 달라고, 오시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만 했습니다요." 뚱보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알았다. 내 한번 가 보지. 그만 물러들 가게." 묘대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자 묘대야는 창문께에 서 있는 미립을 불렀다. "미렵 아우, 우린 친구고 형제지. 비록 오늘에야 만났지만 일면이 여구하여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었으니까. 그런데 참 아쉽게 됐군. 오늘 밤 난 극히 위험한 데를 가 봐야 하네. 상대방은 강호에서 이름이 대단히 높은 자이지. 내가 그자를 이길 수는 없을 성 싶어. 그러니 자네는 이 물건을 가지고 어서 여기를 뜨게나." 묘대야는 궤짝 안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겉만 보아도 보통 물건이 아닌 금은수식 따위의 재물인 것 같았다. 은자로 하면 10만 냥이 될지 20만 냥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묘대 형님, 이러지 마십시오. 난 형님 대신 은자를 보관하긴 싫습니다. 형님네 은자는 형님이 갖고 계십시오." 미립은 탐탁치 않은 듯 묘대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우, 수고스럽지만 좀 보관해 갖고 있게. 앞으로 내가 무사하면 우리들이 다시 만날 일이 꼭 있을걸세. 내가 살아만 있으면야 천애지각을 가서라도 자네를 찾을 거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이 재물은 내가 아우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게." "내 짐작이 틀리는지 모르겠지만, 형님이 아마 철장방과 무슨 척진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글쎄 시말을 다 말하려면 길어지네만, 옛날에 나와 몇이 강호를 떠돌아다닐 적에, 어느 하루 여럿이 싸우는 걸 보고 끼여들었다가 그만 철장방과 척을 지게 되었지. 그런데 철장방의 새로운 방주인 구천인( 千 )이 올라와서 과거에 철장방과 척진 사람을 하나하나 해치운다는구만. 그러니 나도 그 놈들의 손아귀를 벗어나긴 어려울 성싶네." 그 말에 미립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 참, 형님은 강호에서 그렇게 굴러 먹었다면서 철장방이 어떤지 모르고, 구천인이 어떤지도 모르고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척을 졌단 말이시오? 구천인과 원수를 졌으니 이젠 구천인 손에 죽게 된 것 같소." 묘대야는 지금 미립과 긴말하고 있을 경황이 아니었다. "아우, 아우와 재미나게 많은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오늘은 다 글렀네. 오늘 밤으로 아우는 속히 이곳을 떠나게. 공연히 있다가 봉변당하지 말고." "형님은 벌써 구천인을 만나기도 전에 혼백이 다 달아난 사람 같습니다. 구천인이 그렇게 겁납니까? 손가락 한 번 튕기면 형님이 죽는답디까? 나 원." 미립이 껄껄 웃었다. 묘대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구천인을 누가 당해 낼 수 있다던가? 듣기에 몇몇 무학대사들은 구천인을 누를 수 있다고 하더라만 난 이 무학대사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어. 그러니 내가 구천인을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형님, 나도 여기 남겠습니다. 형님을 만나겠다는 자가 도대체 어떤 자인지 나도 한번 봐야겠습니다." 미립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제3장 묘수인주의 위기 경성 임안에는 엄청나게 큰 연꽃 늪이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연꽃의 그윽한 향기가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연꽃밭 사이로 오고가는 원근의 고깃배들로 그 풍경이 기가 막혔다. 이따끔 어부들의 노랫소리도 은은히 들려 오는 평화롭고 고요한 고장이었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탄 쪽배가 연꽃 늪을 아무리 저어 가도 철장(鐵掌)을 크게 그린 큰 깃대를 이물에 꽂았다는 철장방의 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철장방이 오지 않은 모양인데? 무슨 다른 일이 생긴 건가? 동생, 우리 돌아가는 게 어떤가?" 묘대야의 말에 미립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쪽배 하나가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들 코앞까지 달려왔다. 배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노를 젓고 한 사람은 이물에 서서 이쪽을 향해 읍을 하고는 말을 건넸다. "댁이 대내오주 중의 묘씨 나으리십니까?" "그렇소. 내가 묘대요." 묘대야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저희 방주께서 묘씨 나으리를 늪 서편으로 모셔 들이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두 개의 쪽배는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달려 어느새 늪 가에 당도했다. 미립이 닻줄을 매려고 하자 묘대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텐데 닻줄을 감아 둘 필요가 뭐 있겠냐는 태도였다. 미립도 그 뜻을 알고 한번. 히죽 웃고는 닻줄을 배 안에 집어 던지고 묘대야의 뒤를 따랐다. 둘은 길잡이의 안내를 받으며 아늑한 수림 속 돌길을 따라 여러 굽이를 돌고 돌아서야 어느 큰 장원에 이르렀다. "누구냐!" 문지기가 소리쳤다. "철장은 무적이다." 길잡이가 암호로 대답하니, 장원 대문이 쫙 열리며 사나이 열 몇이 뛰쳐나왔다. 묘대야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미립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아우, 보아하니 이곳이 철장방 소굴인 모양인데 나를 따라 들어갔다간 생사를 가량하기 어려우니 아우는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겠어. 여기서 기다리게. 한 시간쯤 기다리다 내가 나오지 않으면 아우는 더 기다리지 말고 혼자서 돌아가게나." 미립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묘대야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백여 명이 무예를 조련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 정면에는 대청이 있었다. 대청에는 30명이 넘는 사나이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중간에 있는 큰 의자 위엔 기껏해야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사나이 하나가 위엄을 부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낭하에는 활활 타는 불 위에 큰 가마를 걸어 놓았는데 그 가마 안에서는 기름이 펄펄 끓고 있었다. 대청에 앉아 있는 장한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그래, 그대가 묘대야인가?" 구천인이 엄하게 물었다. "그렇소." 묘대야가 대답했다. 구천인은 나이는 많지 않았으나 기색이 하도 엄격하여 일견 무척 겉늙어 보였다. 구천인이 냉랭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철장방 방주 자리를 이어받은 후로 천하의 영웅들이 우리 철장방을 갈수록 공경하고 있다네. 그나저나 자네는 일찍이 우리 사숙한테 죄 지은 바가 있었지? 그걸 청산해 보자고 자네를 불렀네만, 어째 대내오주들이 모두 오지를 않았는가?" "나 개인의 일인데 우리 형제들이 모두 올 필요가 뭐 있겠소? 나도 철장방과의 여태까지 일을 이번에 마무리 지으러 왔소." 묘대야의 말에 구천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좋네, 좋아. 과연 대내오주의 맏이답군. 내 오늘 그럴 기회를 주지." 구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서더니 뒷짐을 지고 가슴을 내밀며 묘대야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무학 종사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묘대, 자네가 사나이라면 어디 우리 철장방과 무공을 겨루어 보세. 만일 내 장(掌) 세 번을 못 견딘다면 자네는 저 기름 가마에 던져져 기름에 튀겨질 걸세."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목을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한참 웃어대던 구천인은 갑자기 미립을 향해 물었다. "너는 또 누구지?" 미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묘대야가 말했다. "새로 사귄 내 아우요. 당신네와는 무관한 사람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내가 싸우다가 죽으면 그 소식을 우리 대내오주 아우들에게 전하려고 날 따라온 것뿐이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군." 구천인이 말했다. 여러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길이 묘대야에게 던져졌다. 구천인이 묘대야 앞으로 걸어왔다. 묘대야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코웃음을 쳤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구천인이 물었다. "구 방주, 듣자니 구 방주는 서역에서 사숙, 사조와 방주 자리를 다투어 이겨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더군. 물론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사숙과 사조들을 서역에서 몽땅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묘대야가 비양거렸다. "모두들 제 입을 가졌은즉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나? 이 구천인을 죽이지 못해 날뛰는 놈들이 하는 중상과 모략에 난 신경 끊은지 오래야. 난 우리 철장방을 흥하게 하고 철장방의 원수들을 보는 족족 죽여 버리는 것이 이미 고인이 된 그분들에 대한 추모라고 생각하여 내 도리를 다할 뿐이지." 그러더니 구천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꽥 소리쳤다. "묘대야! 잔말 말고 내 철장이나 받아라!" 묘대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당당히 앞으로 나서려 했다. 미립이 얼른 막아 섰다. "형님, 저 구천인의 별명이 철장수상표라는 걸 아시는지요? 철장공이 대단히 센 사람이지요. 주먹질이나 병장기술을 겨루면 몰라도 절대 구천인의 철장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경공도 겨루지 말고." 묘대야도 이때는 성이 날대로 나 있어서 미립의 그런 권고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미립에게 눈을 흘기고는 구천인에게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서서 자세들을 낮추면서 기를 모았다. 그러다가 구천인이 먼저 한쪽 손바닥을 천천히 내밀었다. "묘대, 내 장풍에 지옥 구경 갈라, 조심해!" 그는 손바닥 하나를 마저 내밀었다. 묘대야는 구천인의 검지도 그렇다고 희지도 않은 아주 괴이한 색깔의 손바닥을 보고 은근히 불안해졌다. '저 철장엔 필시 극독이 있다. 장력을 겨루다가 자칫하여 중독이 되면 큰일나겠어. 무공도 겨루기 전에 구천인의 손바닥에 맞아 중독이 되어 쓰러진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딨겠나?' 구천인은 묘대야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독수를 펼쳐 들고 천천히 내리쳤다. 묘대야는 머뭇거릴 경황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딱 감으며 하는 수 없이 구천인의 손바닥을 향해 장력을 내보냈다. 구천인의 장은 소리도 없고 힘도 얼마 들이지 않은 것 같았으나 묘대야의 장과 마주치자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묘대야로서는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묘대야는 자세를 낮추며 운기하여 새로운 행동을 취하려고 해 보았으나 오히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다가 미립에게 부딪쳐 안긴 채 몇 걸음 더 물러나다가 겨우 멈춰 섰다. 묘대야는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더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토해 내고 말았다. 얼핏 보기에 구천인의 이 장법은 별스럽지 않은 듯하나 사실 대단히 독한 것이었다. 이 장법은 역도(力道)가 단계적으로 늘어나는 장법인데 출장이 절반에 이르면 역도가 배로 커지고 상대방의 손과 마주치는 순간에는 역도가 여섯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정묘로운 장법을 가리켜 '일파삼질(一波三迭)'이라고 하는데 더러 이 '일파삼질'을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구천인처럼 제대로 쓰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이걸 어쩌나?" 미립이 소리쳤다. 이를 사려물고 있는 묘대야의 입귀에선 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이봐 묘대, 자네는 오직 황제 밥이나 해 주면 제격이야. 나하고 겨뤄 보려다간 죽는 길밖에 없다는 걸 몰라? 차라리 네 무공을 없애 버리고 다리를 분질러 내 밥이나 하는 주방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나한테나 자네한테 모두 좋을 성싶은데, 어떤가?" 구천인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묘대야가 다가서며 천천히 말했다. "아직 두 번 남았소. 이제 두 번 다 내가 지면 그때 가선 나와 철장방 간의 은원을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으시오." 묘대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구천인과의 마지막 대결을 결심했다. 구천인은 크게 웃으며 묘대야에게 다가섰다. "난 쉽게 끝낼 생각은 없어. 내가 세 번 출장해서도 네 목숨이 얼마간 남아 있어야 너를 저 기름 가마에 집어 넣어 튀기지.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테니까." "묘대 형님! 저 철장방의 철장을 이기지 못하겠으면 맞서지 말고 피하래두요!" 미립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묘대야가 구천인을 이기지 못할 바엔 그 장에 맞지 않도록 피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 미립의 생각이었다. 구천인은 빙긋 웃더니 또 한 장 내밀었다. 이번은 좀 전과 아주 다른 장법으로 손을 내미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묘대야는 구천인이 공격하는 방향을 미처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묘대야는 구천인 같은 고수들의 고명한 장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손을 써서 구천인의 철장을 막아 보려 했으나 어느새 구천인의 철장이 어깨를 탁 내리쳤다. 묘대야는 종잇장처럼 떠밀려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형님!" 미립이 소리치며 달려와 묘대야를 부축해 일으켰다. 묘대야는 어깨를 상했음은 물론이고 입으로 피까지 토했다. 그는 구천인을 보며 말했다. "구 방주, 방주의 철장은 과연 절세무공이오. 탄복하오." 구천인이 빙글거렸다. "이봐 묘대! 이제 마지막 철장만 받아 낸다면 내 자네를 살려 주겠네. 그렇지 못하면 죽어도 원망 말라구." 미립은 안타까워 싸움을 말리고 싶었으나 그저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을 지켜 보고 있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묘대야에게 마지막 철장을 내밀었다. 곁에서 구경하던 철장방 무리들이 갈채를 보냈다. 구천인의 철장이 가슴팍에 다가오는 순간 묘대야는 한숨을 지으며 출장(出掌)하여 구천인의 철장을 막았다. 그들 둘은 모두 오른손을 썼는데 두 손바닥이 마주치자 이번엔 웬일인지 떨어지질 않았다. "이번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아라!" 구천인이 소리쳤다. 묘대야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며 필사적으로 버렸다. 자기의 힘으론 구천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었다. "네가 내 사숙을 죽였은즉 그 핏값을 받아 내야겠다." 구천인은 잔인하게 웃으며 팔에 한껏 힘을 주었다.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묘대야의 견골이 부러지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쫙 흘렀다. '끝내 구천인의 손에 죽고야 마는구나…….' 묘대야는 속으로 탄식했다. 구천인의 손바닥에서는 여전히 거센 힘이 용솟음쳐 나오며 묘대야를 내리눌렀다. 묘대야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이제 구천인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였다. 뜻밖에도 구천인이 손을 떼며 말했다. "어떤가, 묘대! 이제는 졌지? 항복하는 거지?" "죽이려거든 어서 죽이시오. 내가 죽으면 철장방과의 은원도 끝이 날테니." 묘대야가 창백한 낮으로 간신히 말했다. 구천인이 소리내어 웃었다. "대내오주들한테도 이런 용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걸? 자네 뜻이 그렇다면 좋다. 여봐라!" 구천인의 부름에 장한들 몇이 달려오더니 묘대야를 붙잡았다. "묘대의 소원이라니 소원 성취를 시켜 줘라. 어서 기름 가마에 처넣어라!" "예!" 장한들은 얼른 묘대야를 이끌고 기름 가마로 향한다. '황궁에서 매일 기름을 만지며 살더니 종내는 이렇게 기름에 튀겨져 죽게 되는구나. 물항아리는 우물 옆에서 깨지고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는다더니 내가 그 짝이로구나.' 묘대야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미립이 애가 타서 소리쳤다. "구천인! 우리 형님을 죽이지 마시오!" "묘대는 내 원수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내 맘이야. 너도 죽고 싶지 않거든 입 다물고 있어!" 구천인은 다시 한 번 불호령을 했다. "뭘 꾸물대느냐! 어서 그 놈을 기름솥에 처넣지 않구!" 장한들은 서둘러 묘대야를 기름 가마에 던져 넣기 위해 번쩍 들어올렸다. 미립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문득 잠에서 깨어난 미립은 믿기지 않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어느 집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놀랍게도 묘대야가 웃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가 저승은 아니겠지요?" 미립이 간신히 물었다. "저승은 무슨 저승? 여긴 임안일세. 이승의 삶도 아직 채 못 살았는데 저승 소리는 왜 하는가?" "전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는 묘대야가 기름솥에 처넣어지는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어 다음 일은 도통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차근차근 얘기해 주지." 묘대야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나를 기름 가마에 처넣으려고 번쩍 드는 순간 아우가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지. 그런데 그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던지 철장방 사람들이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어. 그러자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동생 입을 막기 위해 급히 혈도를 눌러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버린 거야. 그리고 나는 놈들이 놀라 가마 너머로 내던진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거고……." 미립은 묘대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질 않았다. 그는 잠자코 있다가 다시 물었다. "형님, 여기가 어디라고요?" "여기는 객점이야. 내가 아우를 배에 태워 여기까지 데려왔지." 묘대야는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우, 아우가 날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아우가 정말 사랑스럽네. 철장방에 잡혀갔을 때도 아우는 목숨을 내걸고 나를 구해 주려고 하였은즉 이런 고분을 생사지고라고 하지 않겠나?" "형님은 황궁 대내오주의 우두머리시고 무예도 비범하며 그 몇 형제들과 친형제처럼 지내시잖습니까. 형님과 그 사람들 간의 자별한 사이는 저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저와 형님의 사이도 그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미립을 처음 만났을 때 묘대야가 거짓말을 한 탓으로 미립은 묘대야가 황궁 안의 일품 관리인 줄만 알았었다. 철장방 소굴에 가서야 그는 묘대야가 사실은 황궁 안 대내오주의 우두머리임을 알았다. 그러나 미립은 그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오로지 묘대야와 형제처럼 지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편 미립의 입에서 대내오주라는 말이 나오자 묘대야는 내심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우, 그건 모르는 소리네. 그 형제들도 평소엔 그만하면 친하게들 지내지만 생사관두에 이르러야 그 본심들을 알 수 있지 않겠나? 나와 아우는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진짜 형제일세. 아우는 나를 따라 생사를 가량키 어려운 철장방 소굴에까지 자청해서 갔으니 그 정을 내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미립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 미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묘대야가 불쑥 물었다. "아우, 나하고 형제 결의를 맺지 않겠나?" 미립은 그 말에 얼굴 가득 웃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