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64편 (64/66)
"정히 그럴 생각이 없다면 관두라구." 간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장으로 쇠살창을 치는 것이었다. 쇠창살이 쾅 하고 울렸다. 노완동은 다시 간수에게 말했다. "좋아! 그런데 자네 조심해야 하네. 한 번이라도 내 팔을 격중시키면 시합은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치잔 말야. 어때?" "그래, 좋다!" 노완동은 과연 천천히 한쪽 팔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 팔은 보기가 구차할 지경으로 더러웠다. 그러자 간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단 한 장에 네 놈의 팔을 맞히지 못한다면 네 놈은 팔을 걷어들이겠지? 그러면 난 금덩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저 놈의 팔을 꽉 틀어잡고 부러뜨리자. 그러면 금덩이를 안 내놓고는 못 배길 거다.' 간수가 이런 꿍꿍이를 구미고 있는데 노완동은 안달이 나서 재촉했다. "자넨 왜 손을 안 쓰나? 한 번밖에 못 친다고 하니까 그러나? 한 장에 끊어 버리지 못하면 지게 되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부턴 그 무슨 철장방이라고 자랑이나 하지 말게." 노완동은 있는 대로 비꼬았다. 그러자 간수는 바싹 약이 올라 노완동의 팔을 잡아 비틀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순간 노완동의 팔이 미꾸라지처럼 미끌하더니 도리어 간수의 팔을 꼭 틀어쥐는 것이 아닌가. 노완동이 힘을 쓰자 간수의 팔은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노완동은 기뻐서 환호성을 울렸다. "자네가 내 팔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한테 팔이 부러졌단 말씀이야. 자네가 먼저 나쁜 마음을 먹었으니 날 탓하지 말게! 어서 열쇠를 내놔! 이곳에선 아무 재미도 없단 말이야." 50. 최후의 결전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여인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팔베개를 한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달콤한 꿈이라도 꾸는 듯 얼굴엔 미소가 어리고 이따금 입을 방싯거렸다. 아마도 황제를 만나 성은을 입는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나보고 꽃병 위에 올라가 춤을 추라 하시면 전 그 여인보다 훨씬 더 잘 출 것이와요……."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들릴 듯 말 듯 잠꼬대를 하였다. 시녀 몇이 문 앞에 지켜 서서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 오늘은 바로 그녀가 홍칠과 결사전을 벌이기로 약정한 날이다. 그녀가 홍칠을 이긴다면 이 여인들 역시 후일 살아 나갈 근심이라곤 하나도 없겠지만 만의 하나 패하는 날이면 실로 막막한 노릇이었다. 시녀들은 모두 적이 엄숙하게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한순간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는 방안을 휘둘러보고는 이 넓은 방안에 자기 혼자 누워 있음을 깨닫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뭔가 껴안고 있었는데 그건 고작 베개였다. "이따위가 다 뭐야. 이따위가……." 그녀의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를 내려서다가 자기 옷이 엉망으로 구겨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은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앉아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저만치에 내던져진 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옷을 다 불살라버려!" 시녀들은 영문을 몰라 어정쩡하니 서로 눈치만 살폈다.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저 옷을 다 불살라 버리란 말이야!" 여인은 노한 듯 고함을 내질렀다. 그제야 시녀들은 황급히 그 옷들을 거두어 밖으로 나가 불을 질렀다. 잠시 후 안에서 여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옷을 가져 와!" 몇몇 시녀가 장롱을 뒤져 옷을 찾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 시녀들을 멀거니 보고 있다가 또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시녀들은 멈칫하며 명을 기다렸다. "너희들은 모두 가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입고 있는 그 누더기 따윌랑 다 벗어 던지고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시녀들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인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희색이 만면하여 읍을 하고 총총히 나갔다. 이 여인들은 모두 미색이 뛰어난데 평소 그런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자니 정말 한숨만 나올 지경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침대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는 자기가 늑장을 부려도 홍칠은 기다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홍칠이 그녀를 오래도록 기다리게 하리라고 작심하였다. 자기를 오래 기다리게 한다고 해서 그에겐 그리 안타까운 일도 아닐 테지만……." 시녀들은 저마다 향수내를 물씬 풍기고,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나는 듯이 달려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침대 곁에 다소곳이 서서 여인의 분부를 기다렸다. 이 여인은 그녀들에게 늘 잘 대해 주었다. 개중 몇몇은 바로 이 여인의 도움으로 기생 소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 중 더러는 오늘 일진을 보아 여차하면 이 여인을 위해 한목숨 바치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기도 했다. "의복을 가져 오너라!" 이윽고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녀들은 차례차례로 의복을 가져와 여인에게 선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번번이 살래살래 머리를 내저었다. 시녀들은 어느 정도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다음 새하얀 소복을 가져다 여인에게 보였다. 그제야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을 했다. "좋아! 하지만 그이의 맘에 들지 모르겠구나!" 시녀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여인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나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홍칠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생사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판인데,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렇담, 홍칠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일까? 여인은 천천히 목욕을 하고 옷을 입었다. 시녀들은 정성껏 여인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처음에 트레머리를 올려 주었더니 여인은 거울을 보고는 불만스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이가 어찌 이런 모습을 좋아하시겠느냐?" 시녀들은 도대체 그 사내가 누군지 몰라 애가 달았다. 이 여인이 사내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것은 본 적이 없는지라 그녀들은 기이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여인은 이 머리, 저 머리 다 마음에 안들어 했다. 그래 그저 등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귀 밑에 꽃물 한 송이 꽂았다. 그제야 여인은 흡족해했다. "좋다! 이제 마음에 드는구나!" 여인의 눈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그 모습은 방주다운 위풍은 조금도 없고 천진하고 순결한 시골 처녀 그대로였다. 여인의 얼굴에선 그 어떤 집념과 갈망이 내비쳤다. "어때, 이게 좋지?" 여인은 시녀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녀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하면서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개중 하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안…… 좋아요." "어디가 안 좋아 보이느냐?" "꼭 시골 처녀 같아요." "그러니까 좋은 거지." 여인은 뜻밖에도 활짝 웃었다. 구양봉은 아침 햇살 속으로 나왔다. 잠도 실컷 자고 배불리 먹어서 각별히 몸이 거뜬했다. 그는 사장을 손에 잡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심장도 고르게 뛰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자기가 일단 문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리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죄의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그 무슨 감각도 없이 그는 늘 태연자약했다. 구양봉은 문 앞에서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마주쳤다. 구천인이 그를 보고 굽실 읍을 하였다. "오늘은 구양 선생께서 수고가 많으시겠소!" 구양봉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었다. "그 여인이 홍칠과 싸우게 되면 승산이 있겠나?" 구양봉이 물었다. 구천인은 쌀쌀한 어조로 맞받았다. "승산은 무슨 승산……. 목숨이나마 건지겠소?" 구양봉은 구천인을 흘낏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심사가 사악한 걸로 치자면 이 놈이 당연 으뜸이다. 이 노독물이 강호에서 악명을 날리기는 했지만 이 구천인보다 악독하달 수는 없지. 오늘의 결전에서 이자의 공력이 어떤지 내 지켜 보리라.' 구양봉은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짐짓 속내를 드러냈다. "내 보기엔 나장태도 오늘 결전에서 홍칠의 손에 죽고 말 것 같아. 그러니 그대가 개방을 삼키려는 계략도 물거품이 되고 말걸!" 구천인은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내가 쌓아 온 공로는 어떻게 되고?" 구양봉은 냉소를 쳤다. "대사를 이루려면 사소한 일은 따지지 말아야 하는 법, 그녀가 홍칠과 싸우려 들 때 그댄 가만있어서는 안 되네. 그녀가 손을 쓰기 전에 자네가 먼저 나서야 한단 말이야. 다만……." 구천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양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톡 뛰어들어 따져 물었다. "다만 어쨌단 말이오? 구양 선생, 똑똑히 말해 주시오!" "다만 자네가 홍칠이 놈을 두려워해서 그 놈을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기기는 해야 한단 말이야." 구천인은 대답이 없었다. 기실 구양봉의 말은 사리에 맞았다. 그는 홍칠과 싸우게 되면 대체로 이길 승산이 없었다. 구천인은 손을 모아 쥐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니 구양 선생께서 저를 좀 도와주석야지요! 구양 선생만 도와주시면 내가 개방을 먹어치우고 천하 무림에서 가장 크게 위력을 떨칠 수 있을 터인데……. 구양 선생의 명이라면 기필코 전심전력을 다하겠소." 구양봉은 껄껄 웃어제쳤다. "내가 손을 쓰면야 홍칠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지!" 구양봉은 사뭇 득의 양양했다. 그는 자기가 소씨 거렁뱅이와 싸우고 미운산을 죽일 때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 능히 해치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는 단황이나, 황약사 같은 고수들과도 겨뤄 보았으니 홍칠을 죽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구천인만 내 명을 받든다면 화산 무예 시합 때 나한테 조력군이 생기는 셈이다. 저 놈만 날 도와준다면 남제, 동사 등을 일거에 쓰러 눕힐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만 되면 천하에 무림의 으뜸은 내가 되는 건데……." 구양봉은 호기롭게 내뱉었다. "좋아, 내가 그대를 따라가 홍칠이란 놈을 죽여 주지.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일점지 나장태는 여전히 방안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밖은 사뭇 조용했다. 2, 3백 명 되는 사람들이 장속을 갖추고 손에 병장기를 든 채 일점지 나장태가 문을 나서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장태는 방안에 그대로 처박힌 채 오래도록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가 쓰던 그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어루만지면서 나직하게 뭐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문이 가볍게 열리며 일곱째와 아홉째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켠에 조용히 서서 나장태의 분부를 기다렸다. 일점지 나장태는 서두르지 않고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일곱째가 기다리다 지쳐 입을 열었다. "큰형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준비는 어제 벌써 다 되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은자도 다 나눠주고 잠자리도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모두들 결사전을 벌이고자 각오가 대단합니다." 아홉째가 읍을 하면서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나장태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의자 등받이에 지그시 몸을 기댔다. "일곱째, 이 의자, 좋아 보이는가?" 일곱째는 큰형이 뚱딴지같이 왜 자꾸 그런 말만 하는지 알 수 없어 얼떨떨했다.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도 아니었다. 나장태는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 일곱째가 손에 들고 있던 보검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나장태는 보검을 받아 들더니 천천히 일어나 의자를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는 보검을 번쩍 휘둘러 의자를 두동강이를 내버렸다. 그리고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가세!" 밖에서는 2, 3백 명이 엄숙하게 서서 저마다 흥분된 가슴을 누르며 나장태가 나오는 것을 똑바로 지켜 보았다. 맏형이 와신상담으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는 것을 그들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맏형을 따라 생사 고비를 수차 넘나든 것도 바로 이날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형제들, 이번 싸움은 이전의 어떤 싸움과도 다르다. 내가 만약 이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난 스스로 목을 자를 것이다!" 나장태는 자못 위엄 있게 소리쳤다. 그러자 사나이들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만약 지게 된다면 스스로 목을 자르겠습니다!" "개방은 대방(大 )이지만 종래로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다. 난 좋은 옷을 입은 자식들만 보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조만간 내가 개방을 장악하게 되면 형제들을 각 분타의 타주로 임명하겠노라. 하지만 형제들 중에는 호의호식하려는 자가 없을 것으로 믿는다! 또 한 가지 우린 미 방주 수하 명의로 출전하지만 그 여인을 도와서는 안 된다." 나장태의 위엄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섰다. "큰형님, 우린 큰형님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이번에 홍칠공을 도와야 합니까?" '허튼소리! 우리는 아무도 안 돕는다. 우리는 홍칠공과 그 여인이 싸워 둘 다 상해 나자빠진 다음에 나선다." 나장태는 고함치듯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비로소 일점지 나장태가 미 방주 편도 홍칠 편도 아니요, 그가 직접 개방 방주가 되려 한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일점지 나장태는 머리를 돌려 뜨락 안의 작은 집을 바라보았다. 그는 개방의 장로 노릇을 하고 이 사람들의 맏형 노릇을 하면서 이 작은 집에서 몇 년 동안이나 기거해 왔다. 그날따라 그 집은 유달리 작고 볼품없어 보였다. 나장태는 손에 검을 치켜 든 채 일곱째와 아 홉째를 향해 외쳤다. "불을 지르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은 삽시에 불타 올랐다. 2, 3백 명 되는 사람은 작은 잡이 불타는 것을 엄숙히 바라보았다. 대들보가 불에 타서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장태는 이곳이 온통 폐허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짐하듯 뇌까렸다. "성공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나장태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일제히 열을 맞춰 수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집 안에 조용히 앉아 오늘의 싸움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그 여인이 말한 게 있네. 난 최후의 순간 그걸 홍칠공에게 알려 드리려 하네. 그래, 자넨 오늘 싸움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개 정원의 말에 소미타 추우는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의 싸움이 개방의 운명에 관계되는데 한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 하나 그 여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홍칠공한테 미리 알려 드리는 게 좋겠네." 사개 정원은 급히 일어나 소미타 추우와 함께 홍칠을 찾아갔다. 홍칠은 자리에 얕은 채로 정신을 집중해 기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감히 방해할 수 없어서 한쪽에 숨죽이고 앉아 있다가 홍칠이 모았던 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방주님, 우리는 한 가지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사개 정원이 입을 뗐다. 홍칠은 정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 장로, 무슨 일인지 사양 말고 이야기하오." "그 여인은 최후의 시각에 이르거든 저더러 이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나장태란 사람이 꿍꿍이가 있을 테니 조심 하라고요." 홍칠은 생각을 더듬고 나서 말했다. "나는 워낙 이번 결전에 우리 몇 사람만 가려고 했었소. 하나 사정이 그러하다면 노유각, 나대통에게 개방의 이백 용사들을 소집하도록 하시오!" 홍칠은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나대통, 노유각을 위시해 이백 용사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아주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비장한 각오로 남다르게 가슴이 설렌다. 오늘부터 개방은 새로 방주를 옹립하여 또다시 강호의 큰 무리로 발돋움 하는 것이며 다시는 사분오열되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이전에 미운산 방주 휘하에서 개방은 10대 장로를 중심으로 천지를 진동하는 대업을 여러 차례 이룬 바 있었다. 오늘의 싸움을 거쳐 개방이 또다시 우뚝 서게 되는데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홍칠이 진두에 서서 대오를 이끌고 나갔다. 대오는 드디어 임안 성 밖 나무 숲에 당도했다. 이곳은 줄곧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이 모이는 장소로 되어 있었는데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어 아주 쓸쓸해 보였다.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홍칠은 뚫어지게 한곳을 응시하면서 그 여인과 처음 만나던 정경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미립을 떠올려 보았다. '미립, 그대의 죽음은 전적으로 그 여인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구려. 난 오늘 결전을 치러 그대의 원한을 갚을 것이오.' 드디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뒤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오늘 결전에서 죽든 살든 모든 은원은 여기에서 끝내야 한다.' 홍칠은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뒤쪽을 향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정 장로, 추 장로, 오늘 싸움에선 경각심을 높여야겠소." 홍칠은 저쪽 무리에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두 놈을 대적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싸움의 승부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경도 임안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공기도 맑고 기분도 퍽이나 유쾌했다. 그는 한 난전 앞에 다다랐다. 호떡을 굽는 영감이 그를 보고 말을 건넸다. "아유, 대단하더구먼. 수많은 사람들이 성밖에 있는 나무 숲으로 몰려갔다우. 아마도 무슨 큰일이 벌어질 모양인가 본데, 아유 소름 끼쳐……. 모두 거지 행색인데 하나같이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게 정말 무시무시하더구먼." 소씨 거렁뱅이는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개방에 또 무슨 일이 났기에 이런 북새판을 벌이는 거지.' 그는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모르는 척하자고 생각하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단지흥의 구원을 받고서야 겨우 뱀 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력은 이전의 오륙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아 남과 싸우기란 매우 힘들었다. 그는 단황의 거처를 나온 후부터 혼자 제멋대로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누구 하나 상관하는 사람도 없어 마음은 몹시 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개방의 일에 상관해서 뭘 한단 말인가? 게다가 모두들 그가 구양봉한테 맞아 죽어 강호엔 그 뼈다귀 조차 남아 있지 않은 줄로 알 터인데 다시 나타나 사단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호떡 굽는 영감은 계속 주절거렸다. "참말로 무섭다니까. 워낙 개방의 노 장로란 사람은 인품이 좋고 수더분한데 어느 놈이 그 사람 두 손을 그래 놨는지 몰라. 뼈가 다 으스러지고 귀까지 하나 뜯겨 나갔다니까. 그런데도 그런 사람까지도 가만 놔두지 않고 흑부(黑府) 골목에서 죽여 버렸거든." 소씨 거렁뱅이는 또다시 흠칫 놀랐다. '지금 공력으로 구양봉이나 구천인과 싸운다면 난 결코 당해 내지 못할 거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보니 개방에 무슨 큰 사단이 났는지 안 가 볼 수 없겠군!' 예까지 생각하고 난 소씨 거렁뱅이는 노인에게 물었다. "영감, 그 거지들이 어디로 갑디까?" "보아하니 당신도 거지 같구먼. 나이도 적잖이 자신 것 같은데 제발 거기로는 가지 마시우. 그 거지들이 저마다 살기 등등해 가지고 손에 검들을 들었더란 말이오." 소씨 거렁뱅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저 구경만 하려고 그러오. 좀 알려 주시오." 노인은 그가 악한 같아 보이는지 않는지라 그 거지들이 달려간 나무 숲 쪽을 가리켰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나무 숲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몇 무더기로 나뉘어 서 있었다. 한쪽에 홍칠공이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나대통, 노유각과 개방의 용사 2백 명을 데리고 서 있고 그 바로 앞쪽으로 가짜 미립이 구천인, 구양봉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 개방 장로 나장태가 일곱째, 아홉째와 2, 3백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형세를 보니 일점지 나장태는 마치도 그 여인의 원군으로 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방관자 같기도 하였다. 그 여인은 온몸에 새하얀 소복을 걸치고 얼굴에 분화장도 하지 않은 채 머리는 청사(靑絲)로 졸라맸다. 그녀 주위의 십여 명 시녀들은 모두 다 화려하고 울긋불긋한 차림을 하고 있어 평소의 개방 여인다운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홍칠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홍칠공, 전 제가 늦게 나와 당신을 기다리게 했는가 하였더니 당신도 그리 일찍 나온 건 아닌 것 같군요." 홍칠은 냉소를 쳤다. "그대나 나나 늦지 않았소. 오늘 싸움은 어떻게 할 참이오?" 여인은 나장태를 바라보았다. "나 장로, 제가 보기엔 당신이 개방 장로들과 먼저 싸워 보는 게 어때요?" 나장태는 달리 방법이 없어 선뜻 나섰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동시에 뛰어나와 나장태와 접전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사개 정원이 소미타 추우를 말렸다. "저자는 내가 맡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