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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62편 (62/66)

2026-09-29 07:52:03 조회 28
범 공자는 그 사람이 두 여인의 혈도를 누르는 것을 보고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벌벌 떨며 외쳤다. "네 놈은 기어코 우리 범씨 가문 가솔들을 다 죽이려 드는구나. 네 놈이 나를 죽인다면 네 놈도 참살을 면치 못하리라."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없이 한 장으로 한 시녀의 사혈(死穴)을 들이치고 다른 한 장으로 다른 시녀도 처치했다. 범 공자는 그자가 지독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성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독한 놈이구나, 죽이겠으면 죽여라. 난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침대에서 범 공자의 의복을 주워 들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어서 옷을 입으라는 뜻이었다. 범 공자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범 공자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철장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범 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의외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심 아주 격동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천천히 뜨락으로 내려섰다. 개방 사람들을 만날까 봐 두려워 그 사람은 범 공자의 손을 잡고 벽 쪽으로 바싹 다가가 범 공자를 안고 담벽 위로 훌쩍 뛰어올라 바깥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범 공자를 데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뛰었는지 모른다. 사내는 한 자그마한 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바로 일점지 나장태의 구역이었다. 밤이었으나 거리엔 등불이 환히 밝혀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주정뱅이와 도박꾼들이 여기저기서 주사위를 던지거나 환담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점지 나장태를 찾아 주시오." 술에 취한 사람은 그 말에 취기가 말끔히 가셨다. 주사위를 던지던 도박꾼도 천천히 주사위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두 사람이 앞뒤로 둘러쌌다. "그댄 철장방 사람인데, 우리 맏형님을 왜 찾나?" 그러자 그 사람은 매우 다급하게 말했다. "알릴 일이 있어 그러우! 빨리 찾아 줘요!" "여섯째, 가서 큰형님한테 알리게. 철장방 사람이 만나잔다고." 한 사람은 먼저 뛰어가고, 한 사람은 이 사내와 잔뜩 겁을 집어먹어 초주검이 된 어린 소년을 데리고 뒤따라갔다. 잠시 후 그 사람은 범 공자를 데리고 일점지 나장태 앞에 섰다. 일정지 나장태는 그들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그댄 철장방 사람인가?" 그러자 그 사람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장태는 또다시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군가?" 그러자 흑의의 사내는 말했다. "이 소년은 범 공자입니다." "알 만하군. 그대의 철장방에서는 이 아이를 죽여 버리고 싶지만 감히 죽이지 못하겠으니 나더러 죽이라고 데려온 게로군!" 그러자 흑의 사내는 고개를 내흔들었다. "누가 이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범씨 가문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은 게 불쌍하여 당신에게 구해 달라고 데려온 겁니다." "그댄 나를 퍽 신임하는구먼." 흑의 사내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범 공자를 그곳에 남겨 둔 채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가 문 어귀에 이르렀을 때 홀연 일점지 나장태가 소리쳤다. "범장천, 그래 이렇게 왔다가 그냥 갈 참이오?" 흑의 사내는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일점지 나장태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가 범장천인 걸 어떻게 아셨소?" 일점지 나장태는 껄껄 웃었다. "당신은 남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날 속일 수야 없지. 당신은 손자를 나한테 맡기면서 두렵지도 않소? 내가 이 애를 미 방주한테 보내면 어떻게 할 참이오?" 그러자 흑의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장태, 그대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알고 있소." 범장천은 나장태와 더 얘기하려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범장천의 손자는 얼이 빠져 있다가 이 흑의 사내가 바로 자기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냉큼 뒤돌아서 쫓아가려 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나 일점지 나장태가 가로막았다. 범 공자는 겁먹은 얼굴로 눈망울을 굴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점지 나장태 역시 범 공자를 바라보면서 그저 되뇌기만 했다. "범장천, 범장천……." 그는 범 공자에게 범장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즉시 일곱째와 아홉째를 불렀다. "일곱째, 아홉째, 지난번 그 일로 셋째가 죽었다. 오늘 이 일도 그때처럼 위험한 일이야. 오늘은 자네들이 그 일을 맡아 줘야겠다. 잘못하면 죽게 될지도 몰라.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그들 두 사람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확연하였다. "이 소년은 범 장로의 손자인데 자네들이 홍칠공한테 데려다 맡겨야겠네. 그저 맡기고만 오면 되네." 그들 두 사람은 두말없이 범 공자를 데리고 떠났다. 세 사람은 거리에 나서서 발걸음을 다그쳤다. 이곳에서 홍칠이 있는 곳까지는 아주 멀었다. 세 사람이 한참 걸어가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뒤에서 쓴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어딜 그리 급히 가나. 밤이 어두운데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유감스럽군. 범장천이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그 여인의 눈길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거야." 일곱째와 아홉째는 범 공자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네 놈은 누구냐?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어서 나오지 못할까?" 일곱째가 한마디 외치자 아홉째도 연이어 소리쳤다. 그러자 과연 눈앞에 네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걸친 철장방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모두 일점지 나장태의 수하이지? 너희들은 순순히 놓아주겠다만, 그 어린 놈은 죽여 버려야겠어! 너희들 두 놈은 알아차리고 어서 썩 꺼져!" 일곱째와 아홉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맏형님이 예측하던 일이 과연 틀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두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철장방 네 놈들의 거동만 주시했다. 철장방 놈들 중에서 또 한 자가 외쳤다. "네 놈들이 물러가지 않겠다면 어디 이곳에서 한번 죽어 봐라!" 그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일곱째한테 장을 날렸다. 일곱째는 그자가 덤벼드는 것을 보자 급히 맞받아 싸웠다. 그 철장방 놈의 무예는 일곱째보다 좀 못했다. 다른 쪽에서 또 한 놈이 덤벼들었다. 두 놈이 일곱째와 싸우는 것을 보고 아홉째가 노하여 소리쳤다. "철장방 놈들아, 주먹을 받아라!" 네 사람이 한데 엉켜 결사전을 발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다른 한켠에 있던 두 놈이 징그럽게 웃으며 범 공자한테 다가들었다. "요 쌍놈의 새끼야, 먼젓번엔 널 놓아주었는데 내가 무예가 모자라서 놓아준 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그때는 나으리의 명을 받들어 일부러 네 놈 목숨을 건져 준 것이었다. 범장천이란 녀석이 개방을 위해 일을 더 잘하게끔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렇지 않았던들 네놈도 이미 네 놈 일가와 함께 저승에 가 있을 몸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팍 하며 장을 내밀었다. 범 공자의 무예로는 개방 중의 보통 거렁뱅이와 싸운다면 그래도 이길 가망이 좀 있지만 이런 고수들과 맞선다면 채 한 합도 겨루기 전에 나가떨어지고야 말 것이었다. 그자가 장을 휘두르면 그대로 얻어맞을 수 밖에 없게 된 형편인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냉큼 그 손 놓지 못할까!" 두 사람이 머리를 돌려 보니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온통 철장방의 흑의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오용 철장을 틀어쥐고 있었다. 철장방 놈들이 대뜸 외쳤다. "범장천, 네 놈이 감히 나왔으면 다시는 숨어 다닐 필요가 없다!" 그들 두 사람은 눈길을 주고받더니 한 놈은 범장천에게 달려들고 한 놈은 범 공자한테 달려들었다. 철장방 놈들은 악독한 놈들이었다. 그들 두 놈은 일단 범장천이 나타난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먼저 이 범 공자를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후에 다시 기회를 얻기가 어렵겠다고 타산하여 한 놈은 범장천을 막고 한 놈은 범 공자를 죽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달려들기도 전에 범장천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들었던 암기를 뿌렸다. 암기는 윙윙 소리를 내면서 개중 한 사내의 등허리로 날아갔다. 그자는 멈칫하며 얼른 암기를 피했다. 바로 그 순간에 범장천은 철장으로 놈의 등허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그는 땅바닥에 털버덕 쓰러져 버렸다. 범장천은 손자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도망치거라!" 그는 고함을 지르는 한편 법 공자한테 달려들려 하는 철장방 놈에게 덮쳐 들었다. 철장방 놈들은 워낙 넷이었는데 뜻밖에도 그중 한 놈이 범장천의 철장에 맞아 상하자 셋이서 법장천, 일곱째, 아홉째를 대적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힘이 부쳤다. 한편 범장천과 싸우게 된 이자들은 바로 그의 가족을 죽인 놈들이었다. 범장천은 방금 이 사내들이 손자에게 그 말을 하는 걸 들었는지라 목숨을 내놓고 결사적으로 덤비고 있었다. 그는 이 세 놈을 마저 죽여 버리고 자기도 함께 죽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범 공자는 범장천의 외침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도망을 치다가 급히 생각했다. '내가 이 집에 숨으면 저 놈들이 날 찾지 못할 것이다.' 범 공자는 담장 위로 기어올랐다. 그 담장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가 오르기엔 버거웠다. 그는 그만 담장에서 발을 헛디뎌 쿵 소리를 내며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누구냐?" 집 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범 공자는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살금살금 뒤꼍으로 기어가 까딱 않고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범장천과 아홉째, 일곱째 세 사람은 철장방 세 놈과 백여 합이나 싸웠다. 그쯤 되자 철장방 쪽이 밀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내놓아라!" 범장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맞서 있는 철장방 놈의 어깨를 와락 끌어당겼다. 이 오용 철장은 신축성이 대단하여 일단 그 끝에 그 놈의 어깨가 틀어 잡히자 철장 끝이 안으로 모아지면서 어깨 살속 깊숙이 박혀 버렸다. 범장천은 철장을 잡아당겨 그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 오는 동시에 다른 한 장을 들어 그자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어찌나 심하게 내리쳤던지 오용 철장은 그 놈의 어깨에 더욱 깊숙이 박혔다. 범장천은 눈에 불꽃이 튀었다. 눈앞에 동사조항 돌다 리 옆 집이 번갯불 번쩍이듯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연거푸 장을 내밀어 그자의 가슴을 가격했다. 놈은 울컥울컥 피를 토하더니 고꾸라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범장천은 바드득 이빨을 갈며 혼신의 힘으로 그자의 등판을 내리찍었다.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사지를 뻗어 버렸다. 범장천은 뻗어 버린 놈에게 침을 퉤 뱉고는 또 한 놈에게 덤벼들었다. 철장방에서 남은 두 사람은 일곱째, 아홉째와 싸우는 것만 해도 힘이 부치는데 범장 천까지 달려드니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도망하려 했으나 도망할 틈이 없었다. 범장천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마구 덮쳐 들었다. 그는 자기가 얻어맞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들어 갔다. 그러자 철장방 놈들은 당황해서 연거푸 실수를 하였다. 이 두 놈은 그대로 장을 얻어맞아 내력이 상하고 말았다. 뒤이어 일곱째와 아홉째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얻어맞아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범장천이 외쳤다. "저 놈들을 죽여 버릴 테다!" 두 사람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그는 그대로 달려나가 두 놈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들이댔다. 그 두 놈은 그 자리에서 널브러졌다. 범장천의 심상찮은 기색에 일곱째와 아홉째는 놀라서 서로 마주보았다. 범장천의 모양새로 봐선 그는 영락없이 실성한 사람이었다. 그즈음, 가짜 미립은 오두마니 등불을 켜 놓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황궁에서 성은을 담뿍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때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황궁에서 황제가 한창 여아와 놀아나고 있는 장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인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이를 두지도 않은 채 점점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자 여인은 퉁명스레 외쳤다. "들어와욧!"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그 사람, 그 사람은 뜻밖에도 실성해서 반병신이 다 되었던 범장천이었다. 그는 흑의를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여인을 노려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동쪽 비탈진 골목길, 골목 옆에 돌다리 있고, 돌다리 곁에……." 그는 비틀거리며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거동을 보니 완전히 실성한 상태였다. 여인은 아무 방비도 않고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녀는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범 장로, 절 죽이고 싶으면 그냥 죽일 거지 하필 미친 척할 건 뭔가요?" 그 말에 범장천은 멈칫했다. 그리고는 금세 눈빛을 바꿔 사납게 여인을 쏘아보았다. "그래 맞아, 난 미치지 않았다. 난 네 년을 죽일 생각으로 매일 밤잠을 설쳤다. 네 년은 오늘 내 손에 죽어 줘야겠다!" 여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범장천을 바라보았다. "범 장로, 당신이 날 죽이고 싶다 해서 죽일 수 있을 것 같나요? 참말 불쌍하군요. 그대는 이 길로 당장 도망가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죽음은 면할 수 있지요." 범장천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네 년은 우리 온 가족을 죽이고서 그걸 홍칠공에게 덮어씌우고, 일점지 나장태에게 덮어씌웠다. 내가 네 년의 껍질을 벗기고 고기를 씹어 먹겠다." 여인은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그를 건너다 보았다. "역시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코대답도 않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 오용 철장을 치켜 들고 여인의 동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 갔다. 그는 이 여인을 죽일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속에선 증오심이 활활 불타 올랐다. 바람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그 여인도 훌쩍 몸을 피하고는 맞서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예로는 결코 범장천을 따를 수 없으니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만 쳤다. 범장천은 미친 듯이 공격만 하였다. 그는 숨돌릴 사이 없이 삼십여 합이나 공격을 들이댔다. 여인은 벽 모서리로 밀려갔다. 이제 철장을 한 번만 휘두르면 그녀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범 장로, 이제 그만두세요. 만일 계속 싸우게 되면 당신은 필시 이곳에서 죽게 돼요." 여인은 갑자기 탄식하듯 소리쳤다. 범장천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철장을 높이 치켜 들었다. "범 장로, 전 당신이 꼭 오리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구 방주님더러 절 돕도록 청해 놓았어요. 그분은 지금 당신 뒤에 서 있어요. 믿어지지 않으면 뒤를 돌아다보세요!" '이 년은 참말 요사스럽구나. 내가 네 말을 들을 줄 아느냐?' 하지만 범장천은 아주 세밀한 사람으로 일거일동도 신중히 타산하고 행하는 사람이었다. 세밀한 사람들이란 의심이 많은 법이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닌게아니라 정말로 구천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등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건 너의 미 방주가 너를 처치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개방에 장로가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네가 죽으면 나장태 홀로 남게 되겠군!" 구천인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이죽거렸다. 범장천은 삽시에 남색이 창백해졌다. '보아하니 복수하기도 어렵게 되었구나.' 구천인이 이곳에 있는 이상 이 여인이 자기 손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범장천은 탄식을 하면서 구천인 쪽으로 돌아서서 웃는 낯으로 말했다. "구 방주님이 오셨으니 내가 그대로 포박을 당하리다." "암, 그래야지." 구천인은 오만하게 말했다. 범장천은 오용 철장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천천히 구천인 쪽으로 다가갔다. 구천인을 대적해 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소곳이 구천인 쪽으로 걸어가던 범장천은 일순 뒷발질로 오용 철장을 공중으로 퉁겨 올렸다. 오용 철장은 곧바로 범장천의 손으로 떨어졌다. 철장이 손에 잡히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구천인의 머리를 내리깠다. "범장천, 네 놈이 나와 싸우려 드니 허튼 짓이 아니고 뭐냐?" 구천인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으나 부릅뜬 눈으로 범장천을 쏘아보기만 할 뿐 팔짱을 긴 손도 풀지 않았다. 범장천이 오용 철장으로 연거푸 예닐곱 번이나 공격했는데도 구천인은 미동도 안 했다. 뿐더러 그의 몸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자니 범장천은 그만 투지가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외쳤다. "구천인, 네 놈을 죽이지 못하고서야 어찌 한을 풀겠느냐?" 그러자 구천인은 웃음을 질질 흘리며 한쪽 손만 내밀어 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저 살짝 장을 날렸을 뿐인데도 그의 장법은 아주 교묘하여 상대방한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범장천은 내밀었던 장을 끌어 당겼다가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을 이동시키는 속도가 늦어 구천인한테 철장을 잡히고 말았다. "손을 놓아라!" 구천인이 소리를 질렀다. 범장천도 맞받아 외쳤다. "구천인, 내 네 놈과 생사 판가름을 하리라!" "범장천, 네 놈은 당장 죽게 되었는데도 이다지도 완고하냐? 그럼 어디 죽어 보아라!" 구천인은 한마디 내뱉고는 장을 들어 범장천의 머리를 가격하려 했다. 이 한 장에 범장천의 목숨은 없어지게 될 판이었다. 그때였다. 여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잠깐만! 손을 멈추시오!" 구천인은 머리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범장천을 죽일 생각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구천인은 범장천의 혈도를 눌러 놓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여인은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구 방주님, 당신이 절 구해 준 걸 아주 감사히 생각해요. 제가 범장천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어요." 구천인은 웃으면서 가 버렸다. 여인은 자리에 앉아 범장천에게 말했다. "범 장로, 당신이 절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걸 전 나무라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하필 구 방주와 싸울 게 뭐예요? 당신이 그와 싸우게 되면 죽음밖에 없잖아요? 당신이 동사조항 골목 돌다리 옆집의 가족들이 비명에 죽은 일이 다 내가 한 짓으로 알고 절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 보기엔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해요. 가서 홍칠공을 찾으세요. 모레 전 홍칠공과 결사전을 하게 돼요. 그때 누가 이기든 간에 승부가 날 테니 더는 범 장로 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범장천은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여인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이곳까지 찾아 들어 올 때엔 저 여인을 꼭 죽여 버리려고 온 것인데 그런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순순히 놓아 보낼 수 있단 말일가. 여인은 범장천이 자기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벼운 웃음을 띄우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시녀 둘이 달려왔다. 여인은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이 범 장로를 홍칠공에게 모셔다 드려라. 그리고 홍칠공에게 나는 이 범 장로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전해라." 그 두 시녀들은 명을 받고 범장천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범장천은 혈도가 눌려 꼼짝도 못하고 그저 시녀들이 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답답하여 터질 지경이었다. 두 시녀들은 문 어귀에서 범장천을 마차에 부축해 앉히고는 자기들 둘은 나란히 앞머리에 앉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어둠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차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땅으로 떨어져내려 반대편을 향해 사라져 갔다. 한순간 마차가 덜컹했으나 시녀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녀들은 마차를 몰고 곧장 홍칠의 거처에까지 당도하였다. 홍칠의 거처에 이르자 개중 한 시녀가 말했다. "뜨락 안에 있는 분들은 들으세요. 미 방주께서는 범장천을 이곳으로 보내셨어요. 그분은 범 장로를 해칠 생각이 없으시대요." 이 두 시녀들은 마차에서 내려 나는 듯이 도망을 갔다.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 봐 몹시 겁이 났다. 나대통과 노유각이 앞장서서 뛰쳐나왔다. 사람은 간데없고 마차만 하나 달랑 서 있었다. 무슨 계략일지도 몰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나대통은 마차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범장천이 마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대통은 놀라는 한편 의심되어 크게 소리질렀다. "마차를 뜨락으로 끌어들여라!" 마차를 뜨락 안으로 끌어들이자 홍칠과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세 사람이 달려 나왔다. 나대통이 홍칠에게 사정을 고했다. "범 장로께서 오셨구먼. 어서 마차에서 내리시도록 하게." 홍칠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나대통, 노유각은 마차 문을 열고 범장천에게 말했다. "범 장로, 내리십시오." 하지만 범장천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홍칠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범 장로는 미쳤으니 지금 정신이 똑똑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을걸.' 홍칠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범장천의 손을 잡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