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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61편 (61/66)

2026-09-29 07:52:03 조회 26
노경은 급히 장으로 막았고 그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한데 맞붙어 장법으로 승부를 가르는 판국이 되었다. 일순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출수표 노경이 장으로 소미타 추우의 어깨를 가격했다. 개방에서는 대체로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과 일점지 나장태를 내놓고는 집법장로들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의 장법이 대단하다고들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이 어울려 채 몇 합도 싸우지 못했는데 소미타 추우가 맞아 상하게 되니 노경의 장력이 보통이 아니라고들 내심 바싹 긴장을 했다. 추우는 넘어졌다가 얼른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잠깐, 가만있게!" 홍칠이 소미타 추우를 막아 서며 노경을 쏘아보았다. 그의 두 눈에선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홍칠은 미립과 미기를 떠올리고 미운산을 생각하였다. 또 소씨 거렁뱅이를 생각하였다. '개방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죄는 모두 이 놈한테 있는 것이다. 네 놈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지 않고서야 가슴속의 원한을 어찌 풀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한달음에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출수표 노경에게 천천히 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 가닥 대력이 파도처럼 밀려가 출수표 노경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는 자기가 홍칠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피할 도리가 없어 엉겁결에 쌍장을 내밀었다. 날렵한 표엽십삼장(飄葉十三掌) 법수였다. 홍칠의 장력만 피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홍칠은 그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자 다시금 한 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장에는 힘을 제대로 넣지 않고 다시 전신의 힘을 모아 쌍장을 곧추 노경의 가슴팍으로 내밀었다. 노경은 급급히 장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방장이 서로 맞붙었다. 하지만 장법을 겨룸에 있어 두 사람의 장이 서로 마주 닿기만 하면 다만 서로 내력을 비기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노경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내력만 가지고 견준다면 홍칠이 엄연한 고수인지라 노경은 근본상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서로의 방장이 마주 닿자 노경은 대력이 밀물처럼 자기 쪽으로 흘러드는 듯하더니 온몸에서 혈기가 마구 끊어지는 것 같았다. 홍칠은 분개하여 목소리를 덜덜 떨며 외쳤다. "네 놈은 이제 끝장이다!" 노경은 일순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선지피를 울컥 토해냈다. "네 놈은 이젠 죽어!" 홍칠은 격하게 외치고는 있는 힘껏 장을 내밀었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이 한 장을 치우자 그 틈을 타 장으로 홍칠을 가격하려 했다. 그러나 홍칠이 오른손에 힘을 주자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 짜내도 밀릴 판이었다. 자칫하면 홍칠에게 밀려 담벽에 가 박힐 형세였다. 노경은 전신의 힘을 왼쪽 장에 모아 홍칠의 장력을 막아냈다. 홍칠이 떼었던 장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노경, 네 놈은 죽어 가면서도 참말 지독하구나!" 홍칠은 장으로 있는 힘껏 노경의 어깨를 가격했다. 노경은 홍칠의 장풍에 여지없이 밀려나며 뚝 소리와 함께 어깨뼈와 쇄골이 부서져 나갔다. 그는 더는 버텨 내지 못하고 구석 쪽으로 밀려가 옴짝달싹도 못했다. 홍칠은 더는 손을 쓰지 않았다. 나대통이 달려 나오며 외쳤다. "먼저 간 개방 형제들을 대신해 네 놈에게 한 장 안겨 주마!" 나대통은 노경의 다른 쪽 어깨를 장으로 마저 가격했다. 노경은 처참할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두 어깨뼈는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이번에는 소미타 추우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네 놈이 바깥 놈들을 끌어들여 우리 두 방주님을 해쳤으니 그 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주먹으로 노경의 아랫배를 내질렀다. 노경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노유각도 달려들었다. "가증스러운 놈! 네 놈을 죽이지 않고는 죽어도 이 원한을 풀 수 없다!" 노유각은 노경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노경의 팔이 담벽에 부딪히며 그는 다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다시금 나대통이 나섰다. "개방 사람들은 네 놈 때문에 개망신을 당했다!" 그는 이빨을 바드득 갈며 노경의 머리를 걷어찼다. 노경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노경은 수그러들지 않고 홍칠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홍칠이 이 놈! 내 죄가 죽일 죄라면 의당 죽여야지 어찌 이리 못살게 구는 게냐!" 홍칠은 서서히 노경 앞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노경, 네 놈은 너무나도 무참히 개방을 해쳤다. 난 결코 네 놈을 용서할 수 없다……." "호, 홍칠, 그래…… 죽을 죄를 졌다. 그러나 네 놈들은 너무나도 비겁하게 구는구나." 노경와 얼굴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하자 홍칠은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흘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 비켜!……. 네 놈은 속죄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구나. 하지만 개방에서는 네 놈에게 그처럼 지독하게 굴지는 않겠다. 자, 이제는 원대로 죽여 주지!" 홍칠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방장을 내밀었다. 노경은 일어서려고 발악을 하다가 홍칠의 장력이 밀려들자 마치 자기 위로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여 그대로 푹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납작하게 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입가에 선지피가 낭자한 채 그는 서서히 숨이 넘어갔다. 노경이 죽었다 해도 그들은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개방 사람들이 무수한 수난을 당한 것은 모두 다 이 노경과 그 여인 때문이었다. 그들은 치떨리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당장이라도 그 계집년의 목숨을 끊어 놓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홍칠아, 미 방주님께서 널 찾아왔다! 어서 나와 맞이하거라!" 홍칠 등은 지체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계집애들이 두 줄을 지어 밀려 들어와 양쪽으로 갈라 서자 그 사이로 여인 하나가 손에 녹옥죽봉을 들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여인 뒤로 서독 구양봉과 철장방 방주 구천인, 일점지 나장태가 차례로 뒤따랐다. 여인의 행색은 보통 때와 달라 보였다. 이전처럼 머리를 틀어올리지 않고 뒤에 늘어뜨려 하나로 질끈 동여맸으며, 요란하게 화장을 하지도 않아 좀 창백해 보였다. 여인은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홍칠을 발견하자 그에게 눈길이 멎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쩐지 요염한 웃음도, 독살스런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홍칠공, 내가 이렇게 친히 당신을 찾아왔는데, 조금도 달가워 하지 않는 기색이군요." 홍칠은 코방귀만 뀌었다. "흥, 마침 잘 왔소! 그대가 나한테 심어 놓은 밀정은 오늘부로 처치해 버렸지! 어디 한번 보겠소?" 홍칠은 그 여인의 심보가 독사보다도 지독하여 출수표 노경의 죽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 사람이 조만간 죽고 말리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어요." 예상과 달리 그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얼굴엔 웬지 슬픈 기색이 깃들여 있었다. 홍칠은 그것을 눈치채고는 머리를 돌려 나대통과 노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출수표 노경의 시체를 들어 내오라는 뜻이었다. 노경의 시체는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여인은 천천히 걸어가 노경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노경, 이 꼴이 뭔가요? 아무리 힘을 다해도 그저 남한테 이용이나 당하고 값없이 죽을 뿐인데 이토록 고생을 하다니……." 개방 사람들은 모두 적이 놀랐다. 그들의 심중에 이 여인은 그저 사악하고 오만한 계집으로만 굳어져 있을 뿐, 연약한 여인의 인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여인은 한참을 울더니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머리를 들어 홍칠을 바라보았다. "홍칠공, 전 당신과 수화상극으로 지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한 번은 싸워야겠어요! 모레 우리 두 사람은 결판을 내지요." 홍칠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 여인이 개방의 반대 세력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자기의 방주 자리를 확고히 할 타산으로 마침내 정면 대결을 청하는 거라고 짐작되었다. 하지만 조만간에 결전이 불가피하리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빨리 도전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는 다소 의심이 갔다. 그러나 홍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홍칠에게서 눈길을 거둬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을 향했다. "홍칠공, 개방 장로는 그 수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죽었군요. 지금 당신한텐 장로가 두 분밖에 없고 저한테는 나 장로 한 분뿐이에요. 그럼 모레 우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홍칠은 다시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은 무슨 일이든 독단전횡을 하며 당최 일을 상논하는 법을 모르는데, 자기에게 결전을 청하면서도 마치 집안일을 상논하는 듯하지 않은가. "그대 생각을 먼저 말하시오. 난 그 연후에 말하겠소." 여인은 대답을 않고 홍칠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치 어떤 궁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홍칠공, 제가 당신한테 저의 진짜 이름을 알려드리지요. 전 미립도 아닐 뿐더러 그 이름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대가 미립이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었소." 여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홍칠공, 제 이름은 운의예요. '구름 같은 의복에 꽃 같은 얼굴'이란 시구가 있는데 제 이름은 그 구절에서 따온 것이에요. 당신은 구름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나요?" 여인은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 여인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점점 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홍칠은 이 여인이 갑자기 미립과 꼭 같아 보여 흠칫 놀랐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음탕하기 짝이 없고, 천진하고 수줍은 처녀다운 구석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 늘 미립과는 천양지차라고 여겼는데, 이 순간만큼은 분명 깊은 애수에 잠겨 있어 너무나도 미립과 흡사했다. 여인은 탄식하는 어조로 계속 말했다. "기실 당신은 제 이름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당신한테 이렇게 알려 드리는 것도 다 쓸데없는 일일지 모르지요." 구양봉도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난 이전에 이 여인을 늘 칭찬했었다. 나 이 노독물처럼 남한테 지는 걸 지독히도 싫어했는데 오늘은 왜 이 모양인가? 비애에 잠기고 탄식을 하고. 방주 같은 위풍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 구천인도 속으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만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여인은 저 홍칠이란 바보를 좋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홍칠이 녀석의 세력이 이렇게 커 가다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여인은 여전히 느릿느릿 말했다. "홍칠공, 난 모레 당신과 결전을 벌일 때 남들이야 어떻게 싸우든 당신과 단독으로 싸우겠어요. 당신이 날 죽일 수 있으면 이 녹옥죽봉은 당신 것이 되는 거에요. 내가 당신을 죽이게 된다면 당신을 따라간 개방 사람들은 나한테 복종해야 하고." 구양봉은 맘속으로 이 여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무예를 놓고 볼 때 저 여인은 홍칠의 절반에도 못 미치니 일단 맞붙는다면 목숨을 잃고 말 것임이 분명하였다. 구천인도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하였다. 철장방이 개방을 합병하는 일이 거의 눈앞에 보이는데 저 여인이 저렇게 얼빠진 소리를 하다니……. 홍칠이 저 여인과 싸운다면 식은죽 먹기로 저 여인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개방은 홍칠한테 귀속되고 자기가 오랫동안 고생한 보람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홍칠공, 당신과 싸우기 전에 당신한테 당면한 한 가지 일을 얘기하고 싶어요."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해 보시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홍칠은 다시금 흠칫 놀랐다. 이 여인이 어떤 곤경에 처하였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 여인은 지독하고 사악한 반면, 솔직하고 둘러 말하지 않는 일면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여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나대통, 노유각은 홍칠이 그녀와 단독으로 만나는 것을 꺼려 했다. 만의 하나 홍칠이 실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홍칠에게 그 말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좋소!" 그는 손을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청했다. 모두들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개방 중에서 대립되는 이 두 우두머리가 집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 구천인은 이 여인이 궁리가 뛰어나고 처사가 비범하니 홍칠과 함께 두 사람이 방안에서 만나게 되면 기필코 홍칠한테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홍칠의 무예가 여인보다 뛰어나다 하나 홍칠은 지략 면에서는 결코 이 여인을 따르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구양봉과 구천인은 홍칠이 기필코 여인 손에 잘못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대통, 노유각과 개방의 두 장로는 그들 나름대로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이 여인이 홍칠과 한방에 들어가 몇 마디 수작하는 것처럼 하다가 틈을 보아 손을 쓰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제까짓 것이 손을 쓴대야 홍칠의 적수가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문이 열리면 홍칠의 손에 녹옥죽봉이 들려 있고 여인은 집 안에 죽어 널브러져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을 닫아 건 다음 여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홍칠공, 제가 당신한테 말씀드리지요. 전 영종 황제의 총기(寵妓)예요. 황제는 워낙 저를 가장 신임했어요. 황제 폐하께선 궁중에서 누가 자기를 암살할까 봐 늘 나와 함께 주무시면서 제가 폐하를 보호하도록 하셨지요. 그 당시 폐하께서는 저를 심히 총애하셨어요. 이 년이 지났는데 궁중엔 자객이 나타나지 않았지요. 하루는 폐하께서 저를 보고 나의 이런 재간으로 궁중에만 남아 있으면 실로 기재(奇才)를 썩이게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웃으면서 그러면 나를 궁 전 밖으로 파견하시라고 청을 들였지요. 폐하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당시 나는 그저 농담삼아 한 말인데 황제께서는 엄숙한 어조로, '황제의 말은 농담이 아닐진저' 하고 말씀 하시더니 개방을 없애 버리라고 궁전 밖으로 파견한 거랍니다……." 홍칠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이 여인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칠공, 전 당신을 만나자마자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다만 당신이 데면데면하여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홍칠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은즉 네 년과 나는 수화상극이야. 모레면 둘 중 한 사람은 거꾸러져 야 한단 말이다. 이런 판에 와서 네년이 나한테 그따위 간사한 소리를 하여 내 심사를 헝클어 놓을 수 있을 줄 아느냐? '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홍칠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기색을 보니 제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군요. 당신이 믿지 않는 바에야 제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홍칠은 어정쩡하여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홍칠공, 당신은 이 녹옥죽봉을 그냥 가져 가세요. 당신이 절 좋아했다고 한마디만 해 주고……." 홍칠은 머리를 저으며 이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년이 독사 같은 여인이 아니라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더라도 난 네 년과 가까이할 수 없다. 나는 미립말고는 이 한생에 다시는 어떤 여인과도 관계를 가지지 않을 거다. 미립은 이미 죽었다. 죽어도 아주 불쌍하게 죽었단 말이다. 그녀는 끝까지 날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용서하려 하지도 않았지. 그녀는 나를 연인으로서는 가까이하지 못할 사내로 여겼지. 그러나 난 언제까지나 미립만을 사랑해.' 홍칠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난 그대의 녹옥죽봉을 가질 수 없소. 이 녹옥죽봉은 구양봉이 나의 사부님한테서 빼앗아 간 거요. 내가 다시 그대한테서 빼앗아 개방과 그대의 은원을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거요." "홍칠공, 당신은 바보예요. 당신이 참말로 날 죽인다면 당신은 꿈속에서도 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내 생각을 하게 되면 꼭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기분이 좋겠나요? 당신이 참말로 개방 방주가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좋은 일이겠나요?" 홍칠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홍칠공, 당신은 제가 왜 미립을 죽였는지 아세요?" 홍칠은 그녀가 이 일을 끄집어내자 또다시 원한에 사무쳤다.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왜 미립을 죽였소?" "말씀드리지요. 미립이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고 저도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어요!" 홍칠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 만 했다. 모두들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그 문으로 오직 한사람만 나올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 다 나올 것인가……." 마침내 문이 열렸다. 뜻밖에 여인과 홍칠 두 사람이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여인이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더니 입을 열었다. "사게, 소미타 당신들 두 사람에게 말하겠어요. 모레 저는 홍칠공과 결전을 벌이기로 했어요. 비나 오지 않으면 좋겠군요." 소미타와 사개는 모두 대답이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은 이 여인에게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여인에게서 어찌하여 좀전의 그 애수에 잠긴 기색은 사라지고, 저처럼 희색이 만면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자기가 꼭 이기리라고 굳게 확신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도마 위에 놓인 고기를 바라보기라도 하듯이 홍칠의 수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기색은 유난히 한가롭고 태연자약했다. 제29장 와신상담 범장천은 잠시도 쉬지 않고 춤을 추다가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수청을 드는 시녀들은 처음에는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여러 날이 흘러가자 싫증이 나서 날로 등한해졌다. 범장천은 이젠 개방 총부 안에서는 아주 자유로워져 그 안에서라면 어디든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었다. 개방 사람들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도 범장천은 자기 방에서 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쪽 비탈진 골목길, 골목 옆에 돌다리 있고, 돌다리 곁에……." 노래를 부르고 부르다가 범장천은 일순 얼떨떨해졌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했다. 그는 얼른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밖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는 삽시에 얼굴이 굳어지며 재빠르게 흑의를 두르고 천으로 얼굴도 가렸다. 철장방 복색이었다. 그는 옷을 갖춰 입자 모기장을 드리워 놓고 그 속에 베개를 놓은 뒤 이불을 덮어 마치 사람이 자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 놓고 총총히 밖으로 나왔다. 범장천의 손자는 작은 방에 들어 있었는데 개방의 두 시녀들이 보살피고 있었다. 시녀들은 범 공자라고 깍듯이 대해 주었다. 그러나 범 공자는 그저 묻는 대로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가자 이 두 시녀들은 범 공자와 잠을 자려고 한껏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범 공자는 겁이 나서 숨도 바로 내쉬지 못하고 그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까딱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두 시녀는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온몸을 더듬고 허튼소리를 해댔다. 그는 전전긍긍하기만 할 뿐 도무지 취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밤에는 범 공자가 꿈을 꾸었다. 동사조항 골목에 있는 집이 나타나고 온 식구들이 참살당하는 모습이 꿈속에서도 생생하게 펼쳐졌다. 범 공자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뛰쳐 나가려다가 옆에 있는 시녀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 그 시녀는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었다. 범 공자는 엉엉 울면서 그때부터 이 두 시녀들한테 꼭 달라붙어 더는 다 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깊은 밤이었다. 범 공자는 한창 젊은 나이라 밤 일을 즐기기 시작하자 이젠 일찍 자는 법도 없었다. 그와 두 시녀가 모두 자지 않고 있는데 삐꺽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쓱 들어섰다. 그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는 범 공자가 누워 있는 침대머리로 왔다. 그 사람은 밤에 움직이기 수월하라고 그랬는지 온통 새까만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었다. 손에 오용(烏龍)철장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철장방 사람임에 분명했다. 범 공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어쩔 셈이오?" 그 사람을 보자 범 공자는 동사조항 골목에서 벌어졌던 그 참상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는 철장방으로 위장하고 끝끝내 자기를 죽이려고 다시 찾아온 것이리라. 시녀들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은 철장방 사람이죠? 도대체 어쩔 셈이죠? 구 방주님이 두렵지도 않아요?"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않고 침대머리에 앉더니 오용 철장으로 한 시녀의 어깨를 가리켰다. 눈결같이 새하얀 계집의 어깨에 새까만 오용 철장을 들이대자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했다. 시녀는 겁에 질려 찍소리도 못했다. 그 사람은 급히 두 시녀의 대혈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