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60편 (60/66)
운의는 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신첩(臣妾)이 황제를 배알하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떨려 나왔다. 영종 황제는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애첩은 일어서거라. 애첩이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고?" 운의는 머리를 들어 여아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여아가 있는 자리에서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종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서향헌에 외인은 없느니라." 운의는 한결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하는 수 없이 개방의 일을 쭉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 "개방의 일은 이미 마무리되어 가고 있사와요. 홍칠만 처치하면 소녀는 방주 자리를 일점지 나장태한테 물려주고 궁으로 다시 돌아오려 하나이다." 영종 황제는 일순 얼떨떨해졌다. 그는 운의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귀비는 이미 출궁한 몸이라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노라. 이 궁전이 뭐가 그리 좋은고? 이 여아는 밖에서 궁궐에 들어온 뒤 갑갑해 못 견뎌 내고 있단다. 여아는 나한테 임안의 재미있는 일들을 알려 주는데 실로 흥미 있더군. 나도 변복을 하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겠다고 내시들한테 말했지만 그들은 말리기만 하고 어디 들어줘야 말이지. 정말 답답한지고, 답답한지고……." 영종 황제는 성이 나는지 목소리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여인은 황제의 말을 듣고 속으로 탄식을 했다. '폐하께선 바깥 일이 재미있다고 여기시지만 소녀가 강호에서 갖은 위험을 겪은 일을 어찌 아시리까? 개방 하나를 빼앗으려고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나들고 피비린내 나는 일까지 다반사로 겪었는데 그게 어이하여 재미있는 일이기만 하겠사옵니까?' 여인의 심사는 복잡했다. 황제는 강호 사람들의 형편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며 이 운의가 겪은 고초를 짐작도 못할 거라 생각하자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영종 황제는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그 홍칠이란 놈은 정말 무지한 녀석이야. 그대는 서둘러 그 놈을 죽여 버리고 개방을 철장방 밑에 복속시키라. 개방 놈들이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그런데 일이 왜 이토록 늦어지는고?" 황제는 그 말뿐 뚝뚝하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운의는 황제가 무례하다고 느꼈으나 뭐라 강변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자기한테 정을 두고 있어 둘 사이가 정답다면 여러 가지 어려운 속사정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나 황제가 이처럼 무서운 기색으로 나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운의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다만 당혹스런 표정으로 황제와 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영종 황제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운의, 그대는 마침 잘 왔노라. 짐이 한 가지 일이 있어 그대를 만나려던 참이었노라." 그 말에 운의는 조심스레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황제는 뭔가 중차대한 일이 있어 자기한테 그 일을 시키려 함이 분명했다. 이는 황제가 아직까지도 자기를 신임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운의는 활짝 웃으면서 황제한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분부하시는 일이라면 신첩은 만 번 죽더라도 하고자 하나이다." "이 일은 그대만이 할 수 있노라. 하지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황제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운의는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쳐댔다. '황제께선 그래도 옛정을 잊지는 않으셨구나.' 그녀가 다가가자 황제는 꽃병을 가리켰다. "우리 둘이 이걸 들어 복판에다 옮겨 놓자." 그 꽃병은 송나라 때 정요(定窯)에서 만든 정말 아름다운 꽃병이었다. 사람의 키만큼 컸고 병 입이 보름달처럼 동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이까짓 꽃병 따위는 황궁에서는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운의는 황제가 무엇 때문에 꽃병을 옮겨 놓으려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영종 황제를 도와 그 꽃병을 조심스레 복판으로 옮겼다. 그러자 영종 황제는 여아를 보며 다정스레 웃었다. "여아야, 어서 오너라. 나와 운의를 위해 신명을 다해 춤을 추거라." 운의는 다시금 여아라는 이름을 듣자 일순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여인의 이름이 여아라고?' 운의가 처음 개방으로 갔을 때 그녀는 온몸으로 미운산을 유혹했으나 미운산은 자기보다도 여아라는 계집을 더 좋아했었다. 여아는 본시 아주 음란한 여인이었다. 미운산의 눈길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운의는 갖은 수단을 다하여 여아, 운낭을 죽였던 것이다. 그 일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런데 이름이 똑같은 여인이 나타나 이번에는 자기와 황제 사이에 끼여들다니……. 운의는 여아를 바라보며 생각을 더듬었다. 하지만 황제가 운의의 이런 심정을 알 턱이 없었다 "여아야, 어서 춤을 추라니까!" 여아는 한껏 교태를 부렸다. "아니, 안 추겠어요." '여아야, 넌 매일 밤 내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춤을 추지 않았느냐? 오늘 운의가 왔는데 저 여인을 위해서도 한 번 추라는데!" "전 다만 폐하를 위해서만 춤출 따름이에요." "옳은 말이다. 넌 다만 짐을 위해서만 춤을 춰야지. 하나 운의가 밖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그 공로가 얼마나 크냐. 네가 운의를 위해 춤을 추면 그건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일이요, 운의한테 상을 주는 거나 진배없느니라." 그러자 여아는 마지못해 하면서도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꽃병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마리 나비 같이 사뿐사뿐 춤추는 모습은 정말 황홀했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돌아칠 때마다 황제에게 머리를 돌리며 추파를 던졌다. 적이 요염했다. 과연 지난날의 궁정악기(宮廷樂妓)들에 못지않았다. 영종 황제는 장단을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다. 운의는 황제가 자기한테 성은을 베풀고 총애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 여아가 자기를 대신해 자기보다 더욱 총애를 받고 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쓰라렸다. 영종은 웃음을 머금고 노래를 부르며 시종 여아만을 바라보았다. 운의에게 눈길을 주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운의는 서글퍼서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제한테 읍을 하고는 나직이 말했다. "신첩은 출궁해야겠사와요. 밤이 너무 늦어 더 이상 지체하면 위험할까 하옵니다." 황제는 한창 흥이 나 있는데 운의가 이렇게 말하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이곳에서 성은을 받고 있는 줄 알지어다. 짐이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가겠다고 하니 실로 망녕이 났도다.' 하지만 황제는 내색하지 않고,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그대가 출궁하겠다고 하니 뜻대로 하라. 개방 일은 그대가 맡아 처리하라." 여인은 읍을 한 후 황망히 몸을 돌려 서향헌을 물러 나왔다. 여인은 걸어가면서 지난날 자기가 몸담았던 황궁의 내원(內院)을 살펴보았다. 그 당시에는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오늘따라 쓸쓸하고 음산해 보였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상했다. 임금을 섬긴다는 것이 마치 호랑이를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볼 만치 보았고 알 만큼 알고 있었으나, 그녀 자신이 그것을 절감하게 되리라곤, 그녀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어느 여인이건 황제가 여인을 사랑할 땐 그 여인 자체가 아니라 다만 색에 반해 거기에만 빠져 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황제를 위해 얼마나 전심전력을 했든 일단 마음이 떠나고 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실총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제야 깨닫는 것이었다. 홍칠은 정신을 한데 모아 오로지 무예를 연마하는 데 전념했다. 요 며칠 사이 매우 빠르게 진전을 보였다. 때로는 미립과 함께 석실에서 보냈던 나날을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고삐를 바싹 죄었다. 일평생 다시는 미립 같은 여인을 만나지 못하리라. 그래도 이제 그런 일에는 결코 마음을 두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는 미운산 방주의 강룡십팔장을 완전히 익히는 데만 매진했다. 다행히도 그는 내력이 대단했다. 전날 대리국 황제 단 지흥의 도움으로 심맥(心脈)이 갑절로 늘었고, 후에는 대협 왕중양과 여협 임조영의 도움으로 진력(進力)을 전수 받았다. 이젠 공력이 남제, 동사와 어깨를 견줄 만하게 되었으며 당대에서 일류가는 고수라 자부해도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내력 때문에 그가 강룡십팔장을 연마하기란 아주 용이했다. 그리하여 항룡유회로부터 용비어천에 이르기까지 이 강룡십팔장을 숙련되게 연마하자 그의 무공은 날로 높아 갔다. 장을 내밀고 당겨 오는 데 변화가 무방하거니와 매우 힘차고도 맹렬하여 법수와 법식들이 모두 다 정교하기 그지 없었다. 그날도 홍칠이 장법을 연마하고 있는데 나대통, 노유각이 기별을 알렸다. "방주님,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장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하셨소?" "두 장로님께서 두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데 두 사람은 방주님께 직접 고해야 한다며 아무리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답니다." "그 두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시오." 노유각, 나대통은 읍을 하고 물러갔다. 잠시 후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그 두 사람을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아주 남루한 거지 행색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홍칠공이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소!" 두 사람은 홍칠을 보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쌀쌀히 바라보면서 대뜸 말했다. 홍칠은 아랑곳 않고 아량 있게 웃어 보였다. "두 분은 개방에 무슨 일로 오셨소?" 그러자 그중 한 사나이가 말했다. "난 일곱째이고 저 사람은 여섯째인데 우리 맏형님이 당신을 불러오라 하셨소!" 그러더니 그 사람은 무엇을 말할 듯 말할 듯 하면서도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주위를 물리라는 뜻 같았다. "두 장로님은 잠시 바깥에 나가 있으시오." 홍칠이 한마디하자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은 읍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일곱째가 문을 잠그고는 홍칠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우린 모두 개방 사람인데 저 사람은 개방의 육대 제자 노불정(盧不停)이고, 저는 칠대 제자 운권(雲權)입니다. 우리가 방주님을 찾아온 건 나 장로의 명을 받들어 소식을 전하고자 함입니다." "나 장로와 난 이젠 아무 관계도 없소. 내가 그 사람보고 그 여인 수하를 떠나라고 권고했지만 그 사람은 듣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소식을 전하겠다는 거요?" "나 장로께서는 방주님께 개방 중에 밀정이 있다는 걸 알려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밀정은 바로 출수표 노경입니다." 홍칠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개방 중에 밀정이 있다면 나대통, 노유각, 소미타 추우, 사개 정원 네 사람 중에 있으리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출수표 노경이 밀정이라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장로께서는 우리 두 사람더러 방주님께 이 소식을 알리라고 하면서 이전의 일은 달리 생각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홍칠은 심기가 산란하여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 두 사람도 그의 거동을 보고 그가 기분이 몹시 언짢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말을 않고 읍을 하고 물러 나왔다. 홍칠은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노유각, 나대통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노유각이 대뜸 대로하여 외쳤다. "개자식 같으니! 그 자식이 우리 개방의 숱한 사람을 죽이고도 인자한 척 사탕 발림을 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내 그자를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 사개 정원도 외쳤다. "참말 그 놈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소미타 추우는 저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도 신중해야 합니다. 방주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직접 신문해 보십시오. 참말 그러하다면 죽여 마땅하지요." 홍칠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소. 추 장로, 그래도 추 장로께서 가셔서 그 사람을 청해오는 게 좋겠소. 조금도 내색하지 말고 출수표 노경을 청해 오란 말이오. 내가 일을 상론하잔다고!" 소미타 추우가 매사에 신중하였기에 홍칠은 그에게 명했던 것이다. 소미타 추우는 노경을 찾아가 홍칠의 명을 전했다. 노경은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추우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홍칠은 의자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켠에서 사개 정원이 비웃는 기색으로 쌀쌀히 쏘아보며 두 마리 독사를 주무르고 있었다. 출수표 노경은 그 두 사람의 험악한 남색을 보고 낌새를 쳤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방주께서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홍칠은 의미 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노 장로, 당신 말이 듣기 이상하구려. 내가 당신을 찾은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당신을 찾은 거요." 출수표 노경은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사람이라니요? 누구요?" 그는 홱 고개를 돌려 등뒤를 살폈다. 뒤쪽에 소미타 추우와 개방의 2대 타주인 나대통, 노유각이 서 있었다. "방주님,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부를 내리십시오!" 노경은 시치미를 뗐다. "노 장로,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게로군. 내가 그대를 찾은 게 아니라 미 방주가 당신을 찾는단 말이오." 출수표 노경은 약간 추춤거리다가 말했다. "미 방주께선 이미 사망하셨는데 어찌 저를 찾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홍칠은 비웃음을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개가 소리쳤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맞는 말이오! 미 방주께선 이미 돌아가시고 여러 장로들도 죽었지. 그분들은 지금 저 세상에서 그대의 공로를 따지려고 기다리고 있소." 출수표 노경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 이제야 알 만하구먼, 워낙 당신들은 날 의심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노경이 사위를 돌아보니 이미 네 사람이 그를 빙 둘러싸고 차디찬 눈길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내심 당황했으나 태연하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날 의심하는 게요? 미기를 구한 건 나요! 철장방 놈들이 미기를 죽일 때 난 노유각, 나대통과 함께 놈들을 뒤쫓았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굴 원망하는 거요?" 그러자 나대통이 노기를 띠며 외쳤다. "그건 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다! 네 놈이 사람들을 불러 그 애를 죽이게 하고 또 우리가 그 집에 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게 했어. 놈들은 우리 세 사람이 당도하는 걸 보고 그제야 도망갔단 말이야. 내 보기엔 그 네 놈의 무예는 실로 약하지 않았다. 철장방에서 네 사람이나 보내 어린애 하나를 죽인다는 게 격에 맞는 짓인가?" 노경은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쳇, 당치도 않은 소리! 철장방 놈들이 미기를 죽인 게 대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당신은 함부로 모함하지 마시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이 얼었다. 이윽고 홍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 장로, 그대가 왜 그 계집을 돕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시침 떼지 말고 솔직히 털어놓으시오!" 출수표 노경은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흐흐흐흐……. 그래, 난 그 여인을 돕고 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난 개방에 들어오기 전에 황제의 수하에 있던 사람이었다. 난 임안 경조윤(京兆尹) 막하의 지휘사(指揮使)이다!" 그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두 바퀴 돌았다. "홍칠이 이 놈, 넌 무지한 놈이라서 거지 우두머리가 제격이다! 네 놈이 그래 때와 장소를 아는 놈이냐?" 그 말에 너나없이 분기탱천하여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로 뒤룩 뒤룩 눈알을 굴렸다. 노경이 개방에 들어와 군자를 자처하며 뒤로는 갖은 죄악을 다 저지르고 허다한 개방 형제들을 해친 생각을 하며 제까끔 통탄해 마지않았다. 조금이라도 일찍 놈의 흑심을 간파했더라면 일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홍칠은 악이 치받쳤다. 그는 대죄를 저지른 놈은 한시라도 목숨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 손이 근질거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출수표 노경에게로 다가갔다. "서랏!" 노경이 고함을 질렀다. 홍칠은 멈춰 서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경을 쏘아보았다. "노경, 네 놈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것인가!" "홍칠, 네 놈은 날 잘못 봤다. 이 출수표 노경이 아무 재간도 없는 줄 알았더냐. 내 오늘이야말로 본때를 보여 줄 테다!" 그 순간, 사개 정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같이 악독한 놈은 독사의 밥으로 만들어야 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개 정원의 손에 있던 두 마리의 작은 독사가 쏜살같이 노경에게 덮쳐 들었다. 출수표는 순식간에 두 손을 휘둘렀다. 휙 암기가 날았다. 그러나 소리만 날 뿐 암기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공중으로 사개가 날려보낸 두 마리 독사가 날고 있었다. 독사들은 어느덧 출수표 노경의 눈앞에까지 다가갔다. 일순 공중에서 팍팍 소리가 들리더니 두 마리 독사는 툭 땅바닥에 떨어져 몇 번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뻗어 버렸다. "하하하, 이게 바로 내 절묘한 침 법수이다. 나는 침으로 너희 몇 놈을 일시에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화가 치밀어 다짜고짜 앞뒤에서 출수표 노경에게 달려들었다. 노경은 자기가 만일 포위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개방 사람들은 밀정을 제일 미워하는지라 자기를 죽이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터, 자기와 같이 간특하고 반복이 무방한 사람을 이 개방 사람들이 용서할 리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출수표 노경은 결사적으로 암기를 날려보냈다. 윙윙 바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가 뿌린 침은 각각 노유각, 나대통,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한테는 침을 한줌이나 뿌렸다. 출수표 노경의 암기를 쓰는 법수는 실로 놀라웠다. 모두들 그가 이런 뛰어난 재간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개방 대회에서 과천청 제갈옥생과 맞붙었다가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도 다 일부러 꾸며 낸 수작이었다. 그의 무예는 과천청 제갈옥생을 훨씬 웃도는, 실로 경지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개 정원은 출수표 노경한테 덮쳐 들어 주먹으로 노경을 갈기려다가 은침 두 개가 눈앞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놀라서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공중제비를 돌 듯 땅바닥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뒹굴고 나서 벌떡 일어났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죽거나 두 눈이 멀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노경이 뿌린 침 네 개는 소미타 추우의 기해(氣海), 담중(膽中) 두 대혈로 곧바로 날아들었다. 소미타 추우는 내공을 돋웠다. 침은 정확히 꽂혔으나 그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급히 내공을 돋우지 않았다면 전신의 내력이 파괴되어 모든 공력이 물거품이 될 뻔하였다. 그러나 나대통과 노유각은 끝내 침을 피하지 못했다. 노유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나대통은 공중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두 다리가 뻣뻣해짐을 느끼면서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출수표 노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개방에는 나의 침에 맞설 만한 호한이 없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칠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장은 눈 앞으로 날아온 침들을 종적 없이 날려보내고 출수표 노경의 머리 위에 한 가닥 선풍을 몰아붙였다. 노경은 침을 뿌린 다음 모두들 그것을 피하느라 자리를 비키는 틈을 타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침을 날려보내자마자 오히려 그쪽으로부터 선풍이 휘몰아쳐 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홍칠이 다시 장풍을 날리려고 몸을 비키자 앞에 비집고 나갈 틈이 생기는 듯하여 출수표 노경은 잽싸게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홍칠이 떡 막아 섰다. "노경, 네 놈이 아무리 악독한 놈이기로서니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홍칠은 무섭게 소리를 내질렀다. 노경은 호기를 놓치자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홍칠은 눈을 부릅 뜨고 계속 외쳤다. "노경, 네 놈 수중에 표창이 예순네 개나 있다고 해도 내 몸은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한다." 노경은 자기와 홍칠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표창을 던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뒤로 물러나 홍칠에게 손을 쓰려 했다. 그때 소미타 추우가 외쳤다. "방주님, 틈을 두지 말고 어서 죽여 버리시오!" 그러나 홍칠은 여전히 두 눈을 부릅 뜨고 노경을 쏘아보기만 하면서 그가 물러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노경은 홍칠과 일곱 장 남짓한 거리로 물러나 호기롭게 웃어젖혔다. "홍칠! 오늘은 내 제삿날이 되든, 네 제삿날이 되든 결판을 내자!"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표창을 뿌렸다. 표창은 어지러이 허공을 날았다. 표창이 날자마자 홍칠은 강룡십팔장 법수를 펼쳐 냈다. 처음엔 항룡유회 법수, 그 다음엔 침룡재연(沈龍在淵) 법수, 그 다음에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견룡재전 법수를 쓰는 것이었다. 그가 세 가지 법식을 연거푸 펼쳐 내자 출수표 노경이 날려보낸 예순네 개의 표창은 다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노경, 네 놈은 이젠 밑천이 다 떨어졌군. 방주님을 수고시킬 것 없이 어디 나와 맞붙어 보자!" 소미타 추우가 외쳤다. 그는 삽시간에 몸을 훌쩍 날려 노경에게 장을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