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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9편 (59/66)

2026-09-29 07:52:03 조회 26
자세히 들어보니 구천인의 말은 실로 사리에 맞았다. 만일 이 셋째와 넷째가 참말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얼마든지 황제 시중을 들 듯 자기를 받들게 조종할 수도 있다. 재물과 고운 계집을 넘치도록 안겨 주면 그만 아니겠는가.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심으로 자기를 죽일 생각만 한다면 그야말로 상서롭지 못하다. 그는 예전에 유운장(留雲莊)에 당도한 후 노독물 신독행한테서 독약을 사용하는 재간을 배웠기 때문에 기실 독약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백타산에는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요, 만일 구양극이 이 두 놈한테 중독된다면 그땐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구천인은 구양봉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내가 네 놈을 설복하는 게 네 놈을 위해 그러는 것인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 요리사 놈들이 네 놈을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난 그렇게 되기를 쌍수를 들고 바라는 바이다. 나는 다만 묘씨네 일을 벌여 놓기만 하고 뿌리를 뽑지 못한 격이 될까 봐 그러는 거다. 후에 이 두 놈이 또다시 말썽을 일으킨다면 만의 하나 우리 철장방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구천인은 철장방 방주가 된 후 강남에서 자기의 세력을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자기의 명성이 점차 커지자 그는 더더욱 야심에 불타 올라 자기의 철장방을 천하에서 가장 큰 무리로 만들 일념으로 꿈을 키워 왔다. 마침 조정에서 개방을 없애 버리려고 하자 천재일우의 호기라 생각하고 개방을 없애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며 개방을 돕는 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구천인은 묘대야 앞으로 다가갔다. 묘대야는 벌써 기가 죽어 있었다. 그는 중상을 입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묘가야, 난 네 놈은 꼴도 보기 싫다! 지난번엔 그냥 살려 뒀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너희 세 놈은 모두 한곳에 모이거라!" 구천인은 큰소리로 외치더니 묘대야의 병장기를 집어 들었다. "고작 요리사 주제에 위풍을 부리다니……. 이까짓 식칼과 국자가 그래 병장기가 될 수 있다더냐?" 구천인은 가소롭다는 든 웃어젖혔다. 그러더니 한순간 냉랭하게 표정을 굳히며 국자를 들고 묘대야한테 달려들었다. "묘가야, 내가 네 그 알량한 스물네 가지 국자 쓰는 법수를 펼쳐보일 테니 어디 내 솜씨를 보아라." 그는 식칼과 국자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휙휙 바람소리가 나면서 식칼이 묘대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국자가 번쩍거렸다. 묘대야는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이제나저제나 죽기만 기다렸다. 한순간 바람소리가 멎고 주위는 정적에 잠겨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기미가 없자 묘대야는 의아해하며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고 있던 옷은 오간데없이 사라지고 몸엔 실오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칼도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구천인이 법수를 자랑하느라고 한바탕 식칼과 국자를 휘두르는 통에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대머리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묘대야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구천인, 네 놈이 날 죽이려면 죽일 거지 왜 이다지도 능멸을 하느냐?" "묘가야, 난 그저 국자 스물네 가지 법수를 써 본 것일 뿐이다. 네 놈 보기엔 내 국자 쓰는 재간이 어떠냐? 네 놈보다 나으냐?" 묘대야는 말없이 구천인을 쏘아볼 따름이었다. 그는 구천인을 쏘아보다가 구양봉 곁에 서 있는 셋째와 넷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 두 사람은 죽지 부러진 장닭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의 그 위풍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묘대야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리고는 호통을 쳤다. "구천인, 이 개 같은 놈! 네 놈은 우리 다섯 형제를 해치고 둘째를 죽였다.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 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그래, 원귀가 되게 해 주지. 내 네 놈한테 진짜 국자와 식칼 맛을 보여 줄 테다!" 구천인은 식칼과 국자를 들고 기세 등등하게 묘대야를 찔러 나갔다. 묘대야의 몸뚱이 위에서 식칼과 국자가 어지러이 춤추더니 등허리에서 삽시에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묘대야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분노가 치받쳐 부르르 몸을 떨면서 악을 썼다. "구천인, 이 개 같은 놈! 내가 네 놈을 죽여 버리고……."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오를수록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이제는 온몸과 얼굴이 피에 얼룩져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구천인은 손을 멈추고 빈정거렸다. "묘가야, 네 놈은 이제 곧 저승길인데, 그래도 나한테 굽어 들지 않을 테냐?" 묘대야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구천인, 네, 네 놈이 거꾸러지는 꼴을 못 보고 죽는 게 하, 한이 될 뿐이다……." 그는 기진하여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쏘아보기만 했다. "좋다! 네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내가 소원을 풀어 주지." 구천인은 식칼과 국자를 높이 치켜 들어 식칼로 국자를 힘껏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가 나며 국자 끝이 자루에서 떨어져 나갔다. 구천인은 소리를 지르면서 길다란 국자 자루로 힘껏 묘대야를 찔렀다. 그러자 묘대야는 뒤로 휙 날아가 벽에 붙박히고 국자 자루는 그의 앞가슴에서 용수철처럼 덜렁거렸다 "묘가야, 이젠 네 놈 차례다! 어디 마음놓고 죽여 보아라!" 묘대야는 아직도 숨이 남아 있었다. "구천인, 빨리 날 죽여라……."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구천인은 손에 들었던 식칼을 힘껏 뿌렸다. 푹 소리가 나며 식칼이 묘대야의 앞가슴에 깊이 박혔다. 셋째와 넷째는 이를 악물고 그 참상을 바라보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구천인한테 달려들었다. 구천인은 얼른 손을 뻗쳤다. 그때 구양봉이 껄껄 웃으며 가로막았다. "구천인, 이 두 놈은 내 거야. 죽여도 내가 죽인다!" 구천인은 급히 한켠으로 물러났다. 구양봉은 잠시 여유도 주지 않고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그의 장풍을 막았으나 허사였다. 다섯 형제가 함께 덤벼도 안 될 판인데 하물며 이 두 사람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구양봉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독사 장으로 그들 둘을 마구 밀어붙여 정신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서 항복해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어떠냐, 날 따라 백타산으로 가겠느냐?" 구양봉은 연신 장풍을 날리면서 거듭 소리쳤다. 셋째와 넷째는 그의 말은 아예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구양봉은 왼쪽 장을 끌어 당겼다가 팍 하고 셋째의 어깨를 갈겼다. 그러자 셋째는 휘청하더니 간신히 한마디 토해냈다. "넷째야, 난 먼저 간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혀를 깨물어 자결하고 말았다. 넷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셋째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더럭 겁이 났다. 다섯 형제가 순식간에 구름 흩어지듯 흩어져 버리고 자기만 오롯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사정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욱이 앞에 맞서고 있는 자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대악한 구양봉! 더 싸워 봐야 목숨만 잃을 뿐이다. 넷째는 두려운 나머지 더듬더듬 소리쳤다. "구양 선생, 당신께 충성을 다하렵니다. 다섯 요리사 중 제 재간은 보잘것없다 할 수는 있으나, 그래도 가장 못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어떻게……."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넷째야, 아까는 싫다고 하더니? 지금은 왜 마음이 변했는고? 한데 이제는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테냐?" 넷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결을 하려 해도 용기가 있어야 하는 법, 넷째에겐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저 비는 수밖에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그는 구천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구 방주님, 구양 선생께 사정 이야기 좀 해 주칩시오! 제발 목숨만 좀 구해 주십시오!" 구천인은 냉소를 치며 구양봉과 넷째를 번갈아 보았다. "구양 선생, 원한다면 저 놈을 그곳으로 데려가구려. 저 놈이 서역 오랑캐 놈들보다야 음식을 잘 만들지 않겠소?" 구양봉은 오랑캐란 말이 심히 거슬렸다. 구천인이 자기를 비꼬고 있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참기로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천인, 자네가 권하지 않았던들 난 저 놈을 용서해 주었을 거다. 하지만 이 구양봉은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절대 남의 말을 듣는 법이 없다!"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않고 코방귀만 뀌었다. '그러니까 멋대로 하라구.' 구양봉은 넷째에게 바싹 다가가 징그럽게 웃어댔다. "네 놈은 마땅히 나한테 빌어야지 어찌 구천인한테 굽실거리는 게냐?" 그러자 넷째는 화들짝 놀라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구양 선생,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넷째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오만하게 웃으며 거들먹거렸다. "네 놈이 아무리 빌어도 이젠 늦었다!" 그는 약간 사정을 두고 우사가 넷째라고 해서 발로 그의 앞가슴을 연거푸 네 번 걷어찼다. 넷째는 저만치로 패대기 쳐졌다. 구양봉이 다가가 살펴보니 넷째는 이미 지각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은 죽었군. 이런 걸 상대로 손을 써야 하다니, 제기랄!" 그는 시답잖다는 표정으로 사장을 들어 넷째의 머리를 내리쳤다. 넷째는 사지를 뻗어 버리고 말았다. 임안 성 작은 골목으로 두 사람이 총망히 걸어가고 있었다. 일점지 나장태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아서 작은 집에 가 멎었다. 그 집 뜨락에선 평소와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거나 노름을 놀고 조무래기들이 한데 몰려 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급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일점지 나장태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일점지 나장태에게 읍을 하고는 말했다. "큰형님……." 그가 말머리를 떼자 나장태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홉째, 이 의잔 오늘 내가 은자 서른 냥을 주고 사 왔네." 아홉째는 의아해하며 유심히 의자를 뜯어보았다. 모양도 괴상하고 낡아서 볼품이 없었다. 용이 부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팔걸이 한쪽이 떨어져 나간데다 남아 있는 하나마저 온전치 못했다. 이런 고물을 왜 그렇게 비싼 값에 사 왔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장태는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건 개방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의 걸상이었네. 그 사람은 홍안루에 가면 늘 이 걸상에 앉아 있곤 했다네." 그제야 두 사람은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듯도 하였다. 나장태는 줄곧 개방 방주 자리를 탐내 왔다. 지금 개방에는 방주가 둘이나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장태 자신이 방주가 된다는 건 실로 하세월이 아니겠는가. 나장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홉째, 또 무슨 일인가?" 아홉째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울먹거렸다. "셋째형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나장태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 후닥닥 뛰어 일어났다. "뭐라구? 누구 손에?" 아홉째는 머리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했다. "구, 구천인한테 발각되어 그만 스스로 목숨을……." "난 셋째에게 묘가한테 알리고는 즉시 자리를 뜨라고 했었는데, 그렇담 묘가는 어찌 되었는가? 묘씨네도 몽땅 죽었다고 하던가?" 나장태는 혼비백산했다. 아홉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장태는 탄식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난 그 사람들을 구해 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 셋째의 시체는 염습은 했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 요리사들도 묻어 주게. 비석은 세우지 말고. 셋째와 한곳에 묻지도 말고." 나장태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망히 밖으로 나갔다. 일점지 나장태는 걸상에 앉아 앞뒤로 흔들거리다가, 혼자말을 하며 쓸쓸히 웃었다. "소씨 거렁뱅이, 불편해서 이 걸상에 어떻게 앉아 있었나……." 그는 몹시 답답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바깥 바람을 쐬자 기분이 다소 나아지는 것 같았다. 때마침 저 만치에서 구양봉과 구천인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점지 나장태는 벌써부터 얼굴에 웃음을 발라 가며 말했다. "구양 선생, 구 방주님, 두 분은 웬일로 한가하십니까?" "오늘은 그렇네. 보다시피 산보나 하고 있지." 구양봉이 시답잖다는 듯 대꾸했다. 구천인은 오만하여 워낙 개방 사람들을 깔봤지만 웬일인지 나장태에게만은 달랐다.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짜 미립이 황중으로 돌아가면 기필코 이 일점지 나장태가 개방 방주가 될 터이다. 개방의 삼십만 무리들을 철장방에 복종하게 하려면 미리부터 이 나장태한테 점잖게 보여 놓아야 한다. 자칫 그의 기분을 잡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구천인은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나와 돌아다니는 걸 보니 나 장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려?" "헤헤헤, 저야 뭐……. 오늘 두 분께서 기분이 좋으신 듯하니 제가 두 분께 술을 좀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구양봉은 곱지 않은 눈길로 나장태를 흘겨보았다. 그는 누군가 자기한테 술 마시기를 청하면 그것은 필시 자기한테 무엇을 바라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쌀쌀한 눈길로 나장태를 쏘아보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천인은 활짝 웃으며 반색을 했다. "나 장로는 개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장로인데 어찌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구양봉한테도 읍을 하였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다 자기를 존중하는 기색을 보이자 득의 양양해져서 앞장서 걸으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네, 네, 홍안루로 모십죠." 나장태는 허리를 낮추 꺾고는 앞장서 길을 잡았다. 그들은 홍안루에 당도해 누각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나장태가 넙죽넙죽 말을 주워섬겼다. "구양 선생, 구 방주님, 이 홍안루는 경도 임 안에서도 이름난 곳으로 자운재, 취선루, 낙사거 세 곳과 어깨를 견줄 만한 곳이지요. 일찍이 이곳에서 소씨 거렁뱅이가 요리사로 있었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적이 흥분된 기색이었다. 구양봉은 그저 나장태를 바라볼 뿐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천인은 한눈에 나장태의 속셈을 환히 꿰뚫어 보았다. "그러기에 나 장로는 예전에 소씨 거렁뱅이가 앉던 낡은 걸상을 은자 서른 냥이나 주고 사지 않았소?" 구천인은 능청을 떨었다. 나장태는 그 말에 가슴이 찔끔하였다. '구천인이 철장방 방주 노릇을 하며 그녀 곁에서 일을 도모하더니 임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르는 게 없구나.' 나장태는 남한테 속셈을 들여다보인 게 창피한지 낯색이 새빨개졌다. "구 방주님이 바로 알아맞히셨습니다. 만일 미 방주께서 아신다면……." 그러다가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구천인은 껄껄 웃었다. "이건 내가 미 방주한테서 들은 얘기요. 그렇지 않다면야 나 장로가 날이면 날마다 방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도 나 장로를 의심하지 않을 턱이 없잖겠소!" 나장태는 그 말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는 그 여인이 비록 무예는 대단치 않으나 심사가 지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여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 여인은 자기 나장태가 오히려 야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름을 놓고 있는 것이다. "헤헤헤, 저는 그 여인이 나이가 어려 중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나이도 어리고 섬약한 여자 몸이라 일을 그렇게 멋들어지게 해낼 줄은 참말 몰랐지요. 개방 대사를 처리하는데도 아주 과단성이 있어 누가 미 방주님을 해코지하려고 해도 참말 쉽지가 않지요." 나장태는 사뭇 감탄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구천인과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천인이 쌀쌀한 기색으로 맞받았다.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면야 그 여인 혼자 어찌 홍칠의 내막을 그처럼 잘 알 수 있겠소?" "그렇지요, 그렇지요! 미 방주께서 이런 성취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다 구양 선생과 구 방주님 공덕 때문이지요." 구양봉이 코방귀를 팬면서 한마디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출수표 노경이 암암리에 그 여자 편을 들어 주고 있기 때문인 거야. 그자는 겉으로는 홍칠한테 가 있지만 기실은 그 여자의 심복일세. 그자 역시 조정 사람이거든." 일점지 나장태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누군가 했더니 바로 그자였구나!' 나장태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양봉, 구천인에게 다시 한 번 읍을 하며 술을 따랐다. "첫말이 아닙니다. 이 나장태는 수십 년 개방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 무수한 사람을 겪어 봤지만 구양 선생처럼 유능한 인물은 보지 못했고, 구 방주님같이 기백 있는 인물도 못 보았습니다. 오늘 두 분을 모시고 술을 마시게 되니 이 나장태, 일생의 영광입니다." 구양봉, 구천인은 나장태가 한껏 추켜 올리자 기분이 좋아져 들어가는 대로 술을 퍼마셨다. 비록 교활하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이나 누군가 추켜 주기만 하면 그들은 마치 어린애마냥 기뻐하곤 했다. 나장태도 개방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인지라 그가 자기들을 추켜 세우니 두 사람은 한량없이 기뻤다. 제28장 운의의 비애 황성(皇城) 안에 어둠이 깃들여 고요하고 쓸쓸했다. 궁전의 위전(圍殿)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등불을 든 위사들이 가끔 오가기도 했으나 등불 자락을 끌고 지나가고 나면 황궁의 높은 담벽 안은 한층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후궁 귀퉁이 문 밖으로 한 여인이 걸어갔다.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는 그 여인은 후궁의 위사한테 반쪽짜리 옥벽을 꺼내 보였다. 후궁 위사는 여인이 황궁에서도 최고의 신물(信物)인 이 옥벽을 가진 것을 보자 더 물을 생각도 않고 황급히 달려들어가 보고를 올렸다. 한참 있다가 황실 문하 사람이 손에 등불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이 여인은 그 사람을 따라 수 없이 궁문을 지나고 구불구불 돌아서야 서향헌( 香軒)에 당도했다. 이곳이 바로 황제가 그녀를 만나는 곳이었다. 지난날 황제와 온밤을 지새며 즐겁게 지내던 일이 생각났다. 다시 이곳에 불려 온 이 여인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자못 긴장되었다. 다시 황제를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눔으로써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을 생각을 하니 가슴은 사정없이 두근거렸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붙안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간드러진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오지 않아요, 오지 않아!" 그녀는 비꼬듯 말하고는 또 깔깔거렸다.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 같았다.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듣고서야 당조(唐朝)의 대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비파 소리를 왜 옥쟁반에 은구슬 떨어지는 소리에 비유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웃음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녀마저 괜스레 흥취가 일며 웃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영종(寧宗) 황제는 용상에 가 앉고 한 여인이 그 곁으로 다가가 바싹 붙어 서서 옥 같은 한 쌍 의 팔로 황제의 목을 그러안은 채 웃으면서 아양을 떨었다. "폐하, 폐하께선 날마다 수염을 쓰다듬고 계시는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사와요. 매일매일 이 전 위에 앉아 계시자니 너무 무료하여 이처럼 수염을 쓰다듬는 습관이 생긴 게 아닌가 하오이다." 그리고는 또 까르르 웃어대는 것이었다. "여아(麗兒), 네 말이 맞아. 넌 황제 노릇을 못해 봤으니까 모르겠지만 황제 노릇이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란다. 이 전 위에 앉아 있으면 대신들이 몰려와 한두 마디면 될 것도 장황하게 늘어놓곤 한단다. 모두 쓸데없는 말들인데 온종일 앉아서 그걸 듣자니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그래서 이렇게 태연자약한 척 수염을 쓰다듬는 버릇이 생긴 게야." 영종 역시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두 사람은 한데 어울려 한바탕 웃어젖혔다. 머리에 베일을 쓴 여인은 심히 착잡하였다. '내가 출궁한 지 시일이 오래였더니 황제께서는 또 한 여인을 총애하고 계시는구나. 저 여인이 저토록 아름답고 목소리까지 저토록 옥을 굴리는 듯한데 황제께서 총애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여인은 한없이 구슬퍼졌다. 황제는 아마도 다시는 자기를 생각하지 않을 듯싶었다. 황제는 언뜻 머리를 들고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아야, 저 여인을 좀 보거라. 저 여인은 천하의 기녀(奇女)이니라." 여아가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한 여인이 서 있는데 밤옷을 입고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다. 황궁 안에서 이런 옷차림을 한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저 여인은 누군가요?" "저 여인은 이전의 나의 귀비, 운의야." 황제의 말을 듣고 베일을 쓴 여인은 적이 불안해졌다. '황제께선 이제 나를 그저 귀비라고 하시는구나.' 여인은 마음이 쓰라려 황제한테 다정하게 대하려던 마음이 삽시에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황제는 웃는 낯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운의, 이 아이는 여아이니라." 여아 역시 약빠른 여인인지라 운의를 보자마자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여아는 예쁜 눈매로 운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