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7편 (57/66)
자, 그럼 이 고심암 문을 열어 볼까요?" 그 소리에 홍칠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홱 돌렸다. 구천인은 허리를 굽실하고는 천천히 문께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어 장풍을 날렸다. 그러자 두꺼운 문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다. 그는 왼쪽 손을 마저 내밀어 구멍 한 개를 또 뚫었다. 그런 연후에 손을 구멍 안으로 집어 넣어 그대로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와지끈 소리와 함께 암자의 대문은 덜렁 떨어져 나갔다. 가짜 미립이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멋지군요. 참 멋진 장법이에요! 이봐요, 홍칠공! 연인들의 상봉이란 자고로 참말 눈물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장면인데, 당신은 그래 만나 보지 않을 참인가요? 그럴 거면 왜 몇 십 리를 걸어 이 고심 암까지 찾아온 거예요? 자, 어서 들어가 보세요! 그녀가 말을 안 한다 해도 얼굴만 봐도 그게 어디라구……." 여인은 한껏 빈정거렸다. 홍친은 여인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한편으론 미립을 만나는 것이 겁나기도 했다. 그녀의 싸늘한 눈길, 굳어 버린 표정, 그리고 자기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리란 것에 생각이 미치자 홍칠은 몹시 답답했다. 더욱이 미립이 승복을 입고 삭발을 한 채 머리 숙여 염불만 외우고 있을 그 구슬픈 광경을 떠올리자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짜 미립은 여전히 요염한 웃음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저 계집이 자기를 물러가게 할 수작으로 이 말 저 말 산란하게 해놓고 그런 후에 미립을 해치려 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인 미치자 홍칠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당신이 문을 열었으니 난 뒤따라 들어갈 생각이오." 가짜 미립은 크게 웃어젖히더니 성큼성큼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뜨락 안에, 헐벗은 몇 그루 나무는 자못 쓸쓸함을 자아냈다. 그들은 사합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 복판엔 관음보살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대정향로(大鼎香爐)가 놓여 있었다. 향로엔 재만 두터이 깔려 있을 뿐 향내가 풍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향객의 발길이 끊어져 향을 피우지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좌우에 각기 방석을 놓아두었는데 왼쪽에는 오육십 돼 보이는 여승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일심으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푸른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아름다운 머리칼을 채 감추지도 못한 채 꿇어앉 아 있었는데 그녀 역시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염불만 외우고 있었다. 미립이었다. "미립, 넌 경을 외우더라도 결코 좋은 곳을 찾아오진 못했구나. 이런 황폐한 곳에선 네가 아무리 열심으로 염불을 외워도 부처님은 귀담아듣지도 않아!" 가짜 미립이 소리쳤다. 미립은 그 자리에 엎드린 채 까딱도 하지 않았다. "미립, 넌 날 모르겠느냐? 그래도 네 연인이야 알아보겠지!" 미립은 불현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홍칠이 찾아왔음을 알아차리고는 더 열심히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노사부님, 이런 연세에 지금도 염불을 외우시는군요. 좀 쉬면서 하세요." 가짜 미립은 늙은 여승한테 다가가 한켠으로 힘껏 밀쳤다. 여승은 분노한 기색으로 고개를 반짝 쳐들었으나 가짜 미립의 눈빛이 사뭇 살기 등등하자 급히 읍을 할 뿐 채 말문도 열지 못했다. 홍칠은 미립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 여인이 아직도 진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았다면 꼭 나를 미워할 것이다. 나를 미워해도 하는 수 없지. 하지만 저 여인이 진심으로 부처님한테 귀의했다면 우리 둘 사이는 이제 끝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미립, 나요. 내가 찾아왔소. 미……." 홍칠은 미기를 찾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가짜 미립이 곁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뜻밖에도 홍칠의 목소리를 듣고는 미립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홍칠은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립, 그대는 어찌 속세를 떠나 불가에 귀의했단 말이오? 좀전에 그대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몸을 흠칫 떨었는데……. 그대는 옛정을 잊지 않은 게 분명하오. 옛정을 잊지 않았다면 어찌 불전의 사람이 되려 하는 게요?" 홍칠은 탄식하며 말했다. 가짜 미립은 홍칠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미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립, 네가 정작 이렇게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니 홍칠공이 비로소 너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걸 넌 모를 거다. 저인 네가 이곳으로 들어온 후부턴 나도 아랑곳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내 보기엔 너는 이 사람과 다시 좋아할 만도 할 것 같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가짜 미립의 말에 미립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홍칠은 격분하여 성마르게 외쳤다. "나와 이 여인은 개방의 은원지간이오. 이 여인은 나와 수화상극(水火相剋), 조만간 내 친히 미 방주를 대신해 이 여인에게 복수를 하리다. 미립, 당신은 날 따라갑시다! 가서 내가 개방을 재건하는 일을 도와주오." 미립은 다시 고개를 들고 홍칠에게 예를 올렸다. "홍 방주님, 미립은 이미 죽었사옵니다. 고심암엔 다만 선심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 말에 홍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립이 이처럼 냉정하게 자기를 남 대하듯 하다니……. '미립이 이 암자에서 나가기를 원치 않으니 아무리 설복해도 소용없을 게다. 이번에는 그냥 돌아가고 훗날 다시 와야겠다.' 홍칠은 생각을 가다듬고 담담히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소. 오늘은 이만 돌아가리다. 하나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훗날을 기약해 두겠소. 그럼……." 홍칠은 등지고 앉은 미립에게 예를 올리고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가짜 미립이 홍칠과 미립을 번갈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모두들 사랑의 굳은 맹세는 참말 진심아라고들 하더니만 그건 모두 입에 발린 소리였군. 미립, 홍칠공은 정말 인정사정이 없구나. 지성껏 설복도 안 해 보고 저렇듯 떠나가 버리다니!" 홍칠은 가짜 미립이 뭐라든 아랑곳 않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에 미립이나 자기나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채 몇 발자국도 못 가서 미립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홍칠은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구천인은 한 손으로 미립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잡아먹을 듯이 홍칠을 쏘아보며 외쳤다. "홍칠이 이 놈, 네 놈은 하루하루 질질 끄는 성미지만, 이 구천인은 그렇지 않다. 난 바쁜 몸, 너무 오래 임안에 머물 순 없단 말이다. 이까짓 일을 가지고 질질 끌면 사내답지 못하다는 걸 왜 모르는가? 어떤가, 이 여인을 죽여 버리길 원하는가?" 홍칠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구천인, 당장 그 여인을 놓지 못햇!" 구천인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맞받아 고함을 질렀다. "홍칠아, 개방은 조만간에 나의 철장방 수하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네 놈이 그깟 방주가 되었대도 소용없어. 차라리 나와 여기서 생사를 가르는 것이 어떠냐? 그럼 일은 단번에 해결될 텐데?" "구천인 네 이 놈, 일개 대방의 방주로서 무슨 너절한 짓이냐? 네 놈이 미립을 놓아주지 않으면 내 친히 네 놈을 죽이리라." 가짜 미립은 일이 묘하게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얼른 끼여 들었다. "하하하, 구 방주님, 그 년을 놓아주지 마세요! 저 홍 방주란 위인은 한 입 갖고 두말하는 위인이라 그 년을 놓아주면 당신과 싸우지 않고 그냥 가 버릴 거예요." "옳은 말이오!" 구천인은 구차하게 여러 말 않고 손을 내밀어 미립의 정수리에다 철장을 올려 놓았다. "자, 봐라! 나와 싸우겠느냐, 싸우지 않겠느냐?" "좋다! 구천인, 먼저 손을 써라!" 홍칠은 자세를 잡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구천인은 내심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원래 이 가짜 미립이 황궁 사람으로 강호에 오래 머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여인이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자기는 엄연히 개방과 철방장을 총괄하는 대방주가 되는 것이다. 그전에 홍칠만 죽여 놓으면 만사는 다 그가 생각한 대로 착착 진행될 터였다. "좋다! 우리 둘이 승부를 가리자!" 구천인은 악쓰듯 내뱉고는 얼른 미립의 대혈을 찍어 한켠으로 밀쳤다. 그리고는 홍칠과 일 장 사이를 두고 마주 섰다. 그 사이 가짜 미립은 미립을 보며 빈정거렸다. "미립, 너도 홍칠공을 좋아하고 나도 홍칠공을 좋아하니 우리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어떨까?" 미립은 가짜 미립을 보자 불끈 화가 치밀어 이미 불문에 몸담은 처지란 것도 잊어버리고 침을 퉤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누가 네 년하고 속마음을 나누겠느냐, 독사 같은 년!" 그러나 가짜 미립은 여전히 방글거렸다. "그래, 맞아! 넌 홍칠공을 좋아하면서도 그 마음을 숨기고 있고, 난 드러내 놓고 홍칠공을 좋아해. 그래, 난 그에게 바싹 다가섰지, 넌 숨기고 난 바싹 다가섰는데 우리 둘 중 누가 홍칠공을 빼앗는지 어디 두고 보자꾸나." 미립은 기가 막혀서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가짜 미립은 홍칠을 바라보며 다시금 외쳤다. "홍칠공, 당신은 나, 이 진짜 미립을 좋아하죠? 안 그래요?" 홍칠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구천인과의 일점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무예로 친다면 둘 다 엇비슷하지만, 오늘은 미립이 놈들 손에 있으니 자칫하면 열세를 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가짜 미립은 성가실 정도로 다시 외쳤다. "홍칠공, 당신이 내 말을 듣겠다면 내가 이 미립을 놓아주겠어요. 하나 그러지 않겠다면 내 필히 이 년을 요절내고 말 거예요!" 가짜 미립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검 끝으로 미립을 겨눴다. "홍칠공, 당신은 구 방주님과 싸우지 마세요. 그저 내가 셋을 셀 동안 그에게 순순히 잡히는 거예요, 알겠죠? 미립의 생사가 위태롭다는 걸 명심하세요!" 구천인은 그 말을 듣고 팔을 내려뜨린 채 손을 쓰려 하지 않았다. 기실 그 역시 가짜 미립의 수작은 의외였다. 그는 다만 지켜보면서 홍칠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점쳐 보았다. 미립은 홍칠을 바라보았다. 그러노라니 오만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 찾아 들었다. 그때 그 석실에서 홍칠은 자기를 품에 안고……. 두 사람은 얼마나 정다운 나날을 보냈던가. 기실 미립은 그 때부터 마음속으로 홍칠을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그 석실에서 능히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알 수 없어 가슴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후에 가짜 미립 농간에 맥없이 둘이 놀아나는 일이 없었더라면 미립은 결코 이렇게 출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립은 다시 홍칠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그는 구천인한테 패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만일 홍칠이 패한다면 개방의 삼십만 사람들과 미기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홍칠공, 한 가지만 묻겠어요. 그때 당신은 그 여덟 그릇의 음식이 더 소중했나요, 아니면 제가 더 소중했나요?" 홍칠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목이 메어 대답했다. "무, 물론 당신이오. 내게는 무엇보다도 당신이……." "잘 알겠어요. 당신의 진심을 알게 돼 기뻐요. 홍칠공, 이후 당신은 평생 동안 다시는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둬서는 안 돼요. 그리고 요리에만 정신을 팔지도 말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잽싸게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기의 가슴을 푹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무도 말릴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털썩 땅바닥에 쓰러졌다. 가짜 미립은 자기의 꾀는 역시 신통하다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검으로 미립을 겨누면 홍칠은 자기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렇듯 뜻밖에도 손 하나 까딱 않고 미립을 처치하게 되다니……." 미립은 힘없이 고개를 들고 가짜 미립을 올려다보았다. "네 년이…… 저이를…… 아, 아무리 좋아해도…… 다 부질없는 일……." 그때 가짜 미립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계집을 한 번 더 찔러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홍칠이 잽싸게 미립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미립, 미립…… 아아, 미립, 왜 이런 짓을……." 홍칠은 진정으로 미립을 사랑했노라 말하고 싶었다. 미립과 함께 석실에 갇혀 있던 나날 동안 그는 처음으로 거렁뱅이한테도 마땅히 집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비록 섬세한 사람이었으나 따뜻한 말로 여인의 환심을 살 줄은 몰랐다. '미립, 이 홍칠이 그래 당신 말대로 고작 여덟 그릇의 요리에 정신이 팔려 당신과 부부간의 정분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 한심한 작자이겠소? 결코 그렇지 않소! 난 이 여인을 멸시하오! 증오하오! 음식을 그렇게 먹었기로,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아아, 미립, 미립……." 홍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 한마디도 못했다. 미립은 가느스름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힘없는 눈길을 보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치밀어 소리쳤다. "미, 미립, 나, 난 다시는……."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 한생에 더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미기를…… 잘…… 돌봐 줘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운 채 나직이 한마디하더니 털썩 고개를 떨궜다. 홍칠은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꿈쩍도 안 했다. 한순간, 그는 반짝 머리를 치켜 들고는 똑바로 구천인을 쏘아보다가 갑자기 무서운 비명을 질러댔다. 나대통도 적개심에 불타 올랐다. 두 사람은 횅 하니 몸을 솟구치며 결사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가짜 미립이 홍칠을 힐끔 곁눈질하면서 구천인에게 한마디 했다. "구 방주님, 비분에 잠긴 군대는 꼭 패하는 법이에요. 홍칠공이 지금은 창자가 찢기는 듯 괴로울 테니 우리 오늘은 인정머리없이 굴지 말고 이만 하도록 해요. 훗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구천인은 손이 근질근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홍칠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홍칠, 이 미 방주의 명도 있고 하니 분하다만 내 오늘은 참겠다. 네 놈이 싸우고 싶거든 일찌감치 날 찾아오너라. 난 이젠 갑갑해 죽을 지경이다. 만일 네 놈이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너희 개방놈들을 모조리 손봐 줄 테다." 그의 목소리는 고심 암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윽고 가짜 미립이 앞장서 나가자 구천인, 묘씨네 삼형제도 뒤따라 고심암을 떠났다. 홍칠은 미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를 구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미립의 짧은 인생은 얼마나 슬프고 고독했던가. 행복했던 나날은 불과 며칠뿐…… 그 석실 안에서 함께 보냈던 그 며칠뿐이었다. 그들은 남들처럼 신혼의 기쁨을 나누며 앞날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은 살아날 희망을 버리고 죽어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때 그들은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했었다. 홍칠은 그때 그 석실에서 보냈던 그 나날들이 떠올라 한없이 눈시울을 적셨다 홍칠은 미립의 시체를 안고 고심암 밖으로 나왔다. 나대통과 여승들이 힘을 도와 미립을 매장해 주었다. 잿빛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을씨년스런 날이었다. 고심암은 정적에 잠겨 있다. 한없이 우울하고, 고독이 밀려드는 쓸쓸하고 적막한 오후였다. 홍칠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무덤에 돌 두 개를 세웠다. '미립, 안심하오. 미기는 내가 돌볼 테니. 미씨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내 결단코 최선을 다하리다. 그 애가 어른이 되었을 때 미운산 방주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내대장부로 자라게 할 거요. 그대는 그때 구천에서나마 웃음을 머금을 수 있으리다……' 홍칠은 말없이 맹세를 다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심암의 여승들은 경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의 평온한 목소리가 홍칠의 마음을 적지 않이 가라앉혔다. 홍칠은 다시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로지 개방을 위해 매진하기로 각오를 새로이 하였다. 제27장 보이는 적과 숨은 적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은 침착하고 믿음직한 사나이였다. 그는 올곧고 매사에 신중해 개방에서 일찍 미운산 방주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요행히 미운산 방주의 아들 미기를 만나 임안 성 작은 골목에 집 한칸을 얻어 미기를 그곳에 안전하게 숨겼다. 그리고는 미기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름을 말하지 말며, 개방의 전임 방주 미운산의 아들이라고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미기는 아직 어렸지만 그 동안 숱한 변고를 겪으며 험악한 강호를 익히 경험 한 터라 노경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하여 몇 사람말고는 그가 미기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다. 미기가 뜨락에서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미기야! 미기야!" 미기는 달리 생각지 않았다. 자기가 이곳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출수표 노경과 그의 심복뿐이고, 아니면 홍칠이나 나대통뿐이었기에 그저 그들 중 하나겠거니 하고 기뻐 환성을 지르며 문을 열었다. 빗장을 끄르자마자 문을 확 열어젖히며 흑의를 걸친 사나이 넷이 들이닥쳤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뜨락에 들어서자 뒷발질로 문을 쾅 닫고는 감때사납게 미기를 쏘아보았다. "네 놈이 미운산의 새끼냐?" 미기는 흠칫 놀라면서도 맞받아 목청을 높였다. "네 놈은 누구네 새끼냐?" 사나이는 미기가 사뭇 당당하자 잠시 당황하다가 다시 기세를 돋워 외쳤다. "미운산도 죽고 네 누나도 죽었다. 혼자만 살아 남아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네 놈도 아버지와 네 누나 뒤를 따르게 해 주지!" 사내는 한마디 내뱉으면서 성큼 내달아 미기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영특하고 민첩한 미기는 얼른 몸을 피했다. 사내는 성이 나서 낯색이 시뻘개졌다. 그자는 철장방에서도 이름난 위인으로 무예도 비범한데 어린애 하나 붙잡지 못하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미꾸라지 같은 녀석!" 사내는 고함을 내지르며 홱 돌아섰다. 그자는 쌍장을 뒤로 주춤 끌어들였다가 미기를 향해 철장개산(鐵掌開山) 법수를 힘껏 펼쳐 냈다. 아무리 영특해도 아직은 어린 나이라 미기는 그만 그 힘에 밀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털버덕 나동그라졌다. 넘어지면서 땅바닥에 얼굴을 짓찧어 미기의 입가에선 선연히 피가 흘러내렸다. 미기는 팔뚝으로 쓱 입을 문지르며 소리쳤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무슨 일로 나를 해치려는 거예요?" 미기는 이 사람들이 개방 사람들이 아니란 걸 진작에 짐작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그 말에 코대답도 않고 자기 뒤에 서 있는 세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우리 넷이 돌아가며 한 장씩 날릴 테니 누구 장이 더 센지 한번 맛을 보아라!" 그러자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개중 하나가 선뜻 나섰다. "단 한 장으로도 저 녀석을 죽여 버릴 수 있지." 그 사내는 눈알을 험상궂게 부라리며 미기에게 다가와 덥석 팔을 붙잡았다. "네 누나도 죽고 너 혼자 살아 남아 아무 재미도 없겠지? 안 그러냐?" 그리고는 힉 하고 미기의 동가슴을 장으로 내질렀다. 미기는 꿀꺽 선지피를 토해냈다. 사내의 근 장에 중한 내상을 입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앨 죽여서는 안 되네." 이어 한 사내가 또 이죽거리며 미기가 마치 무예 연마 상대라도 되는 듯 미기를 붙잡고 한바퀴 빙 돌며 아이의 몸뚱어리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미기의 등에 한 장을 먹였다. 사나이는 손에 사정을 두었으나 그 장을 얻어맞자 미기는 마치 천식증에 걸린 늙은이마냥 연거푸 쿨럭거리며 입에 피 거품을 물었다. 정말 인정사정없는 놈들이었다. 미기는 이미 그 두 장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는데도 나머지 두 놈은 차례로 미기에게 한 장씩 먹였다. 그러자 미기는 땅 바닥에 납작 쓰러져 뭍에 나온 물고기마냥 심하게 온몸을 퍼덕거렸다.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 시각에 출수표 노경은 나대통, 노유각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사람은 어지간히 취해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었다. "개방에서 난 미운산 방주님을 가장 존경했었네. 그분은 매사에 아주 공정했으며, 사람들의 자그마한 허물에는 늘 관대하게 대해 주셨지. 내가 그분 수하에서 일하면서 실책을 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방주님께서는 늘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난 감격을 금할 수 없다네." 출수표 노경은 격분을 눌러 가며 담담히 말했다. 나대통, 노유각도 저마다 미운산의 됨됨이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기실 미운산은 출수표 노경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진중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미운산은 방주 자리를 소씨 거렁뱅이한테 넘겨 주었으나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 대사는 뒷전이고 떠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리하여 개방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운산이 여인의 손탁에 휘말려들어 개방은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새로이 방주가 된 홍칠 역시 그 여인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 나왔다고는 볼 수 없었으며 녹옥죽봉도 여전히 그 여인 수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