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6편 (56/66)
범장천은 실성해 버려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되었고 다만 자네와 나 두 사람만 남았는데 자네만 그 계집을 따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매일 밤마다 자넨 개방의 10대 장로 생각만 하노라면 마음이 편치가 못할걸세. 내 보기엔 자네도 그 계집년을 떠나 버리는 게 좋아!" "주둥아리 닥쳐!" 나장태는 고함을 쳤다. 그는 노명성이 그따위로 자기를 질책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청한자자 노명성은 쌀쌀한 기색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게 될 사람인데 말 좀 하게 내버려두게!" 그는 나장태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장태, 그 계집이 황궁에 돌아간 뒤 꼭 자넬 개방 방주로 삼는다고 믿기도 어려워. 자네가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거야. 자넨 교활한 사냥개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 주구란 종당에는 끓는 가마 속에 들어가게 될 뿐이야. 나와 범장천을 보게. 그 계집은 조만간 자네도 그냥 놔두진 않을걸세." 노명성의 목소리는 비분으로 하여 심하게 떨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나장태, 그 계집이 자네더러 날 죽이라고는 했지만 자넨 속으로 그걸 원치 않는다는 걸 난 알고 있네. 큰 거리에서 손을 쓰지 않은 것도 다 그 때문 아닌가?" 노명성은 조용히 말을 맺더니 동전을 집어 천천히 문가로 걸어가 앉았다. 그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한 줄에 일곱 닢씩 네 줄을 만드니 스물여덟 개가 딱 맞아떨어졌다. 노명성은 그 것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저승에 가서 돈이 없으면 악귀가 길을 막는 것만 두려울 뿐. 이승에선 어디 가나 두려우니 이승이 저승보다 살기가 어렵다오……." 노명성은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나장태, 자넨 자네 앞길을 그르치지 말게." 그는 외마디 비명처럼 한마디 꺼내 놓더니 장화목다리에서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을 힘껏 찔렀다. 노명성의 가슴에서 삽시에 피가 용솟음쳐 흘러 나왔다. "나 장로, 개방에 자네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자네도 아마 재미가 없을걸……." 노명성은 있는 힘을 다 쥐어짜 한마디 한마디 간신히 더듬거렸다. 그는 채 말을 맺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갔다. 일점지 나장태는 얼빠진 사람처럼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스물여덟 닢 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모았다. 그는 그 동전을 품에 넣고 돌아 나가려다가 언뜻 맞은 편 벽에 노명성이 던진 동전 여덟 닢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나장태는 그쪽으로 다가가 그 여덟 닢 동전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냈다. 그는 동 전 여덟 닢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모두 서른여섯 닢이라……. 이만하면 괜찮은걸."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점지 나장태가 골목을 나와서 보니 멀리에 자기네 오의파 수하 거렁뱅이 둘이 보였다. 그는 그 두 거렁뱅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 둘은 일점지 나장태임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저기 저 집 뜨락에 시체가 있으니 너희들이 널빤지를 얻어다가 염습이나 해 주어라." 나장태는 한마디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대통이 헐레벌떡 홍칠을 찾아왔다. "방주님, 누가 방주님을 찾습니다." "누가?" 홍칠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글쎄 사람을 시켜 전갈을 했는데, 음식을 여덟 그릇 보내 왔습니다. 방주님이 보시면 아신다고 합니다." 홍칠은 그 말을 듣자 대뜸 짚이는 바가 있어 미소를 띄웠다. "아마도 묘씨네 세 사람이 날 만나려 하는 모양이군." 홍칠은 혼자말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날 어디로 오라 하였소?"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저 방주님더러 이 음식 그릇을 들고 저자거리 밀가루 음식 난전을 찾아오라고만 했습니다……. 제 보기엔 심히 수상쩍으니 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나대통이 만류하자 홍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개방의 원한이란 바로 그 계집에 대한 원한이오. 지금 그 계집은 구양봉과 구천인을 철석같이 믿고 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묘씨 등 세 사람은 모두 그 계집의 졸개들이오. 그들 다섯 요리사들 중 근자에 둘째가 죽었는데 그 계집과 무슨 관련이 있는 듯싶소. 필히 그들을 한번 만나 봐야겠소."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방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대통이 여전히 걱정스런 낯빛으로 말하자 홍칠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소. 나 혼자 간다고 해서 그자들이 날 어쩌진 못하오!" 나대통은 홍칠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요. 방주님 생각대로 하십시오. 한데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게 정말 이상스럽습니다. 그 사람 말이 자기는 개방 사람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믿지 않지만 저와 방주님만은 믿는다고 하더이다. 그러니 방주님께서는 가시더라도 자취 없이 가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홍칠은 여러 사람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노 장로와 범 장로가 해를 입은 것도 필시 누가 그 여인한테 밀고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그 놈이 어느 놈인지 모르고 있는 판이라 결코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나 혼자 가니 소문이 나진 않을 거요." 홍칠은 그 여덟 개의 작은 음식 그릇을 소매 속에 감춘 뒤 거리로 나갔다. 그는 나대통이 가르쳐 준 대로 저잣거리로 가 밀가루 음식 난전만을 살폈다. 그는 한 난전에 이르러 멈춰 섰다. 난전 주인이 소리쳤다. "볶은 국수요. 한 사람한테 한 그릇씩만 파니 차례가 안 돌아가는 분들은 내일 다시 오시오!" 주인은 국자로 국수를 볶아 내면서 연신 소리쳤다. 이 요리사의 음식 솜씨는 대단하여 맛이 일품이었으나 하루에 조금씩밖에 팔지 않았다. 홍칠이 다가가서 은자 두 냥을 꺼내 그 앞으로 쓱 내미니 그 사람은 힐끔 보고는 외쳤다. "그릇!" 홍칠은 내심 흠칫 놀랐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 곁에 그릇이 가득 쌓여 있는데도 그릇을 내놓으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는 소매 속에서 그릇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요리사는 홍칠의 돈을 챙기고는 국수를 퍼서 그가 내민 사발에 담아 주었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왼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쪽으로 가시오." 홍칠은 그가 담아 주는 국수를 먹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좀더 앞으로 걸어가니 어깻죽지에 멜대를 멘 사람이 대쪽을 짝짝 맞부딪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탁주요, 탁주!" 찹쌀 막걸리를 파는 장수였다. 홍칠은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찹쌀 막걸리요?" "그럼, 그럼요. 그렇다마다요." 그 사람은 냉큼 대답하고 나서 멜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대나무 통 뚜껑을 열었다. 기가 막힌 냄새가 확 풍겨 왔다. "그릇을!" 이 사람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홍칠은 또 흠칫 놀랐다. 홍칠이 소매 속에서 그릇을 꺼내자 그 사람은 그 그릇에다 막걸리를 가득 퍼주었다. "술을 다 마신 다음에는 그릇은 나한테 주시오!" 그는 태연하게 말하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대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홍칠은 대번에 알아차리고 단숨에 술을 들이켠 다음 왼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식으로 몇 군데를 거치고 나니 이제 홍칠의 수중에는 그릇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 말린 고기를 주렁주렁 걸어 놓은 가게에 이르렀다. 홍칠이 집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은 칼을 들고 말린 고기를 실오리같이 썰고 있었다. "먹을 것 있소?" 홍칠이 한마디하자 주인은 웃으면서 또 같은 말을 했다. "그릇을!" 홍칠은 얼른 그릇을 꺼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릇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홍칠공이 왔습니다!" 그러자 밖에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묘대야, 허삼야, 우사야였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주인은 얼른 빗장을 지르고 문가에 서서 망을 보았다. 묘대야 등은 홍칠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권했다. "홍 방주님, 어서 앉으시오!" 홍칠도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묘대야가 입을 열었다. "홍 방주께서도 우리 다섯 사람이 황궁에서 아주 편히 지냈다는 걸 알 겁니다. 비록 어선방에서 일했지만 대신들 못지않게 존경을 받았지요. 그런데 황제의 성미가 변덕스럽다 보니 며칠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조그마한 실수를 트집잡아 우릴 황궁에서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강호에서 옥벽 반쪽을 가진 사람을 만나거든 황제의 명으로 알고 그의 명령을 받들라고 하였죠. 이리하여 우리 다섯 사람은 합심하여 그 여인의 명을 받들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우릴 어떻게 대했는지 아십니까? 다섯째가 죽었는데도 우릴 놓아주지 않아요. 그러기는커녕 싸움에서 후퇴했다고 혹독하게 꾸짖고 당신의 사부님인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트집을 잡았지요. 소인은 구양봉한테 목이 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결국 철장방 방주 구천인한테 맞아서 우리 둘째는 죽어 버리고……." 묘대야 등은 둘째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대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런데 날 찾은 목적은?" 홍칠은 단호하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건대는 개방 사람들 중에 필시 그 년의 심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자에 그 년이 연거푸 개방 사람들에게 손을 써서 개방 10대 장로들은 거의 다 죽고 말았지요. 나는 그 년과 갈라지기는 했지만 분이 가시지 않아서…… 그 년이 죽어 넘어가야 이 속이 풀릴 겁니다. 한데 도무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당신을 청해온 겁니다, 그 계책을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 홍칠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묘대야의 말은 딱딱 사리가 맞았다. 묘대야 등을 잘 구슬리면 범장천, 노명성을 해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그 여인 신변에 가까이 있어야 거사를 꾸미기 쉽겠지만 이 사람들이 딱히 개방과 깊은 인연도 없는 터에 그런 모험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홍칠은 은근히 말했다. "당신들 새 사람은 원수를 갚으려 하지는 마시오! 내 보기엔 당신들은 피하는 게 좋을 듯하오." 그러자 묘대야는 홍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홍칠공, 만일 당신이 우리 말을 안 듣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더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홍칠은 그들 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순 묘대야가 칼과 국자를 틀어쥐자 셋째와 넷째가 번개같이 홍칠을 에워쌌다. "당신이 우리 말을 안 들으면 우린 당신과 함께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소!" 홍칠은 그들의 뜻이 의외로 강고한 것을 보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들은 그 계집과 상극이 되었구나.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겠다!' "그렇다면 당신들 세 사람은 내 말을 듣겠소? 그런 각오는 돼 있소? 이 일은 힘들고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소." 홍칠은 다짐하듯 말했다. "우린 죽더라도 그 년에게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묘대야는 이빨을 악물었다. "좋소! 당신들 세 사람 뜻이 그러하다면 내 계획을 말하겠소. 당신들은 돌아가 우리 개방의 범 장로와 노 장로를 그 년에게 고해바친 자가 누군지 알아보시오. 그것만 알아내면 그 놈을 당장에 죽여 버릴 테니!" 홍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묘대야는 국자와 칼을 내던지고 홍칠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요, 홍칠공! 당신 말씀대로 우리 세 사람은 다시 돌아겠습니다!" 묘대야는 다시는 그 여인과 마주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하지만 홍칠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을 뿐 아니라 밀고자를 제거해 우환거리를 없앤다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그러고 나면 자기들은 홍칠과 힘을 합해 그 여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홍칠은 결코 그 여인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홍칠을 돕는 것은 곧 자기들의 원수를 갚는 길이기도 했다. 묘대야는 굽실 읍하면서 말했다. "내 맹세하오이다. 홍칠공,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우리 세 사람은 그 계집년한테로 가겠으니 일단 소식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개방 사람들은 신임하기 어려운데 누구를 통해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소?" 홍칠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금후의 일은 모두 나대통을 통해 전하시오!" 묘대야는 말없이 읍을 했다. 홍칠은 뜻하지 않게 기회를 잡게 되니 한결 홀가분해져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개방 일이 끝나 세 분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 홍칠은 가만히 궁궐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 번 그 원앙오진회를 맛볼테요." 홍칠은 소탈하게 한마디하고는 읍을 하고 자리를 떴다. 주인은 문가에 서 있다가 홍칠이 나가자 구운 고기를 꿰어 놓은 꼬챙이를 하나 건네 주었다. 홍칠은 그 뜻을 얼른 알아차렸다. 그래야 이 가게에 고기를 사러 들어왔다 나가는 사람 모양이 될 것 아닌가. 주인은 술도 한 병 주었다. 홍칠은 얼른 받아 꿀꺽꿀꺽 몇 모금 마시고는 몸에다가도 술을 좀 뿌렸다. 그리고는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 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홍칠은 마음속으로 늘 범장천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때건 범장천이 홀로 개방 총부에서 나오면 꼭 한 번 만나 볼 심산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노유각이 급급히 달려와 그날 아침에 범장천이 개방 총부를 나왔다고 기별했다. 홍칠은 매우 기뻐하며 노유각과 함께 황망히 범장천을 찾아 떠났다. 경도 임안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자 저만치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이 보였다. 홍칠은 빽빽히 모여 선 사람들을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과연 거기엔 범장천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신발짝을 두드려 장단을 맞춰 가며 거렁뱅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임안 거지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노래였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어울린 이 노래를 읊조리며 거렁뱅이들은 밥을 빌어먹었다. 노래를 다 부르더니 범장천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임안 성은 정말 아름다워라. 동쪽은 비탈지고 골목이 가로 세로 뻗었네. 동사조항 돌다리 지나서 작은 뜨락 보이는 곳에 내 집이 있네. 다섯 식구가 사는데……." 그 광경을 보고 홍칠은 가슴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여직껏 자기 집 작은 뜨락을 못 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범장천의 미친 짓거리를 보고 죽겠다고 웃어댔다. 홍칠은 이곳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어쩔 수 없자 노유각을 한쪽으로 불러 거렁뱅이 한 무리를 모아 오라고 분부했다. 잠시 후 거렁뱅이 한 무리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서로 밀쳐 가며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몰려 섰던 사람들은 코를 싸쥐고 저마다 꽁무니를 뺐다. 거렁뱅이들은 한 주점으로 범 장로를 끌고 들어갔다. 홍칠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는 범장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울먹이듯 외쳤다. "범 장로, 나요! 홍칠이오!" 범장천은 희멀거니 홍칠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두고 겁먹은 눈망울로 노유각과 둘러선 거렁뱅이들을 힐끔거렸다. 그러더니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홍칠이? 홍칠이가 누구요?…… 아니, 너 범옥이 아니냐?" 그는 와락 홍칠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홍칠은 살짝 피했다. "범 장로, 범 장로! 정신을 차리시오! 그 심정은 내 감히 짐작하기 어려우나 정신을 차려야지요. 이러시면 어떻게 원수를 갚겠소? 놈들은 필시 그 계집 신변에 있소. 일점지 나장태가 사람을 보내 한 짓이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소!" 범장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멀뚱하니 홍칠을 바라보다가 또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범옥아, 애비다! 애비를 몰라보느냐, 엉! 애비야, 애비!" 범장천은 횡설수설 늘어놓으며 또다시 홍칠을 끌어당기려 했다. 무예가 출중해서 그 정신에도 그는 손을 뻗치기만 하면 삼십육식 탈혼장을 쓰는 것이었다. 홍칠은 또 살짝 피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범장천은 실심하다 못해 정말 미쳐 버렸구나. 아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개방은 또 한 사람 잃게 되었으니 범장천은 탁자 위에 있는 것을 모조리 쓸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범옥아, 범옥아! 이 애비를 몰라보다니……. 가자, 임안 성 동쪽 비탈로 가자. 거기서 작은 돌다리를 지나 우리 그 작은 뜨락으로 가자꾸나!" 그리고는 홍칠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홍칠은 울적한 심정 달랠 길 없었다. '그 계집년을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구양봉과 구천인을 그 년에게서 떼놓아야 손을 쓸 수 있다. 지금 개방에는 철장방 구천인과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과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다. 무슨 수를 쓴다지……." 홍칠은 범장천을 만나면 개방에 숨어 있는 밀고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암담하기만 했다. 개방 대사로 머리 속이 어지러운 중에도 홍칠은 미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작에 개방 사람들을 풀어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했었다. 어느 날, 나대통은 반가운 소식을 물고 홍칠을 찾아왔다. "미립 아가씨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임안 부근 작은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 합니다." 홍칠은 내심 매우 기뻤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는 자기와 미립 사이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개방 일은 어차피 시일이 필요하므로 그는 그녀의 행방을 안 김에 먼저 미립부터 데려다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홍칠과 나대통은 임안 성을 빠져 나와 고심암(枯心庵)이라고 하는 작은 절로 향했다. 고심암은 딱히 별다를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절이었다. 사람 키 절반에 못 미치는 높이로 담장이 둘러서 있고 담장 주위엔 빽빽히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담 안쪽으로 사합원(四合院)이 한 채 서 있고 그 옆으로 암당(庵堂)이 하나 있었는데 다 스러져 가듯 낡아서 보기에도 쓸쓸했다. 그 안에 켜 놓은 향불도 가물가물한 것이 적이 황량해 보였다. 홍칠은 그곳을 둘러보고 우울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미립, 그대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게요? 이렇듯 쓸쓸한 곳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홍칠은 우울증을 날려 버리려고 일부러 힘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문을 두드려서야 삐꺽 문이 열리며 한 어린 여승이 내다봤다. "두 시주님께서는 이 고심암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난 미립이란 여승을 찾아왔소." 홍칠이 말을 받았다. "이곳엔 미립이란 여승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어린 여승은 짤막하니 한마디하고는 이내 문을 닫으려 했다. 나대통이 급히 막아 나섰다. "그런 여승이 없다면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얼마 전에 이 암자에 한 낭자가 출가해 왔지요 이름이 무언지는 알 수 없소만." 그러자 어린 여승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홍칠은 어린것이 무례하게 군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그 순간 등뒤에서 여인의 요염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얼른 돌아보았다. 거기엔 뜻밖에도 가짜 미립이 서 있었다. 좌우로 몇 사람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가짜 미립은 홍칠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홍칠공, 듣자 하니 당신도 새 방주가 되셨다면서요? 개방 장로 셋을 수하로 끌어들이고? 당신도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홍칠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인 뒤로 구천인이 서 있고 구천인 뒤로는 묘대야, 허삼야, 우사야가 서 있었다. 가짜 미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죠? 석실에서 보냈던 그 즐거운 나날들을?"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웃음기를 싹 거두고 홍칠을 빤히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길에선 노한 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녀는 천하의 사내들이 다 자기의 놀잇감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자기한테 넘어가지 않은 사내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이 홍칠만은 아무리 검질기게 달라붙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그녀는 더 더욱 홍칠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를 자기 곁에 끌어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원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옛정이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여인은 고심암에 들어갔단 말이죠?" 그녀는 또다시 깔깔 웃으며 이죽거렸다. "홍 방주, 내가 그대에게 승가에서 쓰는 그 여인의 이름을 알려드릴까요? 그 여인은 고심암에 들어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매일매일 좌선에 빠져 있지요. 그래서 이름을 선심(禪心)이라 지었답니다. 그러나 홍칠공,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당신의 그 미립은 진짜가 아니에요. 여기 서 있는 제가 진짜 미립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미립을 좋아하신다면 마땅히 저를 좋아하셔야죠." 말을 마치고는 여인은 다시금 요염하게 웃어젖혔다. 그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굴자 홍칠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저 년 가까이 있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저 년에 대한 개방의 원한이 바다처럼 깊거늘 꼭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참아야 한다!' 홍칠은 그저 그 여인을 노려보고만 있다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자, 그만 갑시다, 나 타주!" 그러자 가짜 미립이 소리쳤다. "구 방주님, 홍 방주께서 가시더라도 우린 여기 있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