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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5편 (55/66)

2026-09-29 07:52:03 조회 21
아홉째는 은근히 화가 났다. 나장태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사람을 풀어 노명성을 후려패고 온몸을 다 뒤져 지니고 있는 것을 몽땅 이리로 가져 와! 상처는 입히지 말고!" 아홉째는 나장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맏형님이 금의파와 오랫동안 등지고 살아오더니 노명성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사정없이 몰아세우기만 하겠다는 건가?' 아홉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장태의 분부인지라 거역할 수도 없어서 무뚝뚝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가 보지요." "안 돼! 지금 당장 갔다 와! 자네들이 누군지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끔, 그저 개방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교묘히 꾸미고! 자, 어서 지금 당장!" 나장태는 자못 결연했다. 아홉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하는 수 없이 꾸뻑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노명성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맞은편 쪽에서 조무래기 거렁뱅이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고 개중 하나가 소리쳤다. "날 붙잡아 봐야 소용없어요. 난 돈이 없다니깐요." 그 뒤쪽으로 쫓아오던 거렁뱅이 하나가 맞받아 소리쳤다. "이 놈, 게 못 서느냐? 빨리 가진 거 다 내놔! 가진 거 내놓으란 말야! 동전 한 닢 없다는 게 말이 돼?" 조무래기들은 점점 더 노명성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일은 거지들 사이에선 다반사였다. 그러나 자칫 휘말려들었다가는 다치기 십상이었다. 노명성은 얼른 길 옆으로 피하려 했다. 그런 데 피한다는 것이 그만 조무래기들을 바로 뒤따라온 거렁뱅이 사나이에게 부딪혀 그는 쿵 넘어지고 말았다. 거렁뱅이 사나이는 대뜸 노명성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따위가 다 있어, 이거? 왜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게야?" 두 눈을 부릅 뜨고 으르대더니 사내는 갑자기 소리쳤다. "앗, 여기 돈이 있다! 어서 와서 빼앗아라!"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무래기 거렁뱅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노명성을 깔고 앉아 주먹질을 해댔다. "이 놈 몸을 뒤져라. 발칵 뒤져 봐. 행색은 별 볼일 없지만 돈깨나 있는 품세다!" 조무래기들은 노명성의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몽땅 꺼냈다. 서른여섯 개나 되었다. 그것에 족하지 않고 조무래기들은 땅에 떨어진 것들도 모조리 주워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더 샅샅이 뒤져 봐. 어디 또 돈이 있을지 모르니까. 있는 대로 몽땅 꺼내, 하나도 남기지 말고." 한 놈이 또 소리쳤다. 노명성은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심히 수상쩍기도 하였다. '옛날 내가 장로로 있을 때, 이 거렁뱅이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장로님, 장로님 하며 허리를 굽실거리고 내가 지나가고 나서야 발을 떼던 놈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지경이 되니 별 딱정이 새끼같은 거지 애들마저 날 이렇게 능멸하다니……." 노명성은 손을 쓰려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치고 만다. 그는 그저 고개를 가슴에 틀어박고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척했다. "자, 술값도 톡톡히 벌었으니 가서 술이나 실컷 마시자." 사내들은 희색이 만면하여 히히덕거리며 조무래기들을 끌고 어디론지 급히 사라졌다. 노명성이 품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은 반 시진도 못 되어 일점지 나장태의 손에 들어갔다. 나장태는 거렁뱅이들이 가져 온 물건들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살펴보다가 동전 서른여섯 개를 골라냈다. 일점지 나장태는 이 동전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서 물었다. "이것말고 또 없던가?" 아홉째는 크게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다. "이젠 더 없습니다요." 일점지 나장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동전 서른여섯 개를 하나하나 줄지어 늘어놓고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노명성은 지금 기한(飢寒)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는 한심한 거렁뱅이에 불과했다. 잘살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자가 나타나는 법이지만 가난하면 저잣거리에서도 알은척하는 사람 하나 없다는 말도 있지만, 노명성은 달랐다. 개방 장로로 수하에 거느렸던 사람도 많고, 재산을 흩어 주고 개방에 가담하면서 구해 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노명성이 이지경이 되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가져 오고 은이 있는 사람은 은을 가져 오 고 또 집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건만 그는 그것을 단호히 사절하고, 오로지 매일매일 구차하게 구걸하여 얻은 몇 푼으로 근근이 목구멍에 풀칠을 해 가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그 연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점지 나장태는 각상 위에 놓인 동전 서른여섯 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명성은 하루에 동전 몇 닢을 써먹지?" "어떤 사람 말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그저 호떡 두 개만 사는데 그것도 국물도 없이 맨떡으로만 먹는답니다." 아홉째가 대답했다. "이것 좀 보게, 이 동전 서른여섯 개! 하나하나가 모두 반들반들하지 않은가? 노명성은 이 동전 서른여섯 개를 그냥 주머니에 넣고만 다니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는 걸까? 이걸 지니고 다녀 무엇을 하겠다고?" 일점지 나장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26장 미립의 죽음 일점지 나장태는 천천히 개방 총부로 들어섰다. 그는 적이 근엄한 기색으로 걸어갔다. 그럴 때 그는 곁눈 한 번 파는 법이 없었다. 사뭇 위엄이 풍겼다. 근자에 들어 개방 사람들은 한층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유독 이 일점지 나장태 한 사람만이 미립 방주를 따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즈음 행동거지에 한결 신경을 쓰며 근엄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저 고 개만 약간 끄덕거려 보일 뿐 인사하는 말에 대꾸도 않고 곧장 개방 총부의 대청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짜 미립은 대청에서 그를 맞아들였다. "나 장로, 개방이 새로이 섰기에 나 장로께서 수고해 주셔야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여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나장태는 쌀쌀맞게 내뱉었다. "미 방주님, 미 방주님이 새로이 방주님이 되신 후 개방 장로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여 10대 장로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소. 이젠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그러자 여인은 깔깔거리며 말했다. "제가 10대 장로들에게 소홀했던 게 아니라 기실은 그분들 중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 나를 믿고 따르지 않은 거였어요. 그러니 내가 어찌 그분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나 장로는 달라요. 저는 나 장로만은 믿고 있어요. 그래서 나 장로한테 큰일을 맡길까 해요." "방주님의 명이라면 내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소." "아, 고마워요, 나 장로님! 창천이 개방을 보우한다면 앞으로 개방 방주는 필시 나 장로께서 맡아 주셔야 될 거예요."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그 말에 나장태의 눈길이 반짝 빛났다. 나장태는 개방 오의파 2대 장로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개방 방주 자리를 차지하고자 야심을 품어 왔다. 그 점에서 금의파의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가 노명성과 쌍벽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미 방주님께선 그런 좋은 방주 자릴 왜 양보하려 하오?" 말은 비록 점잖게 했지만 나장태는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나 장로님은 이까짓 방주 자리를 제가 탐내는 줄 아세요?" 여인은 의기양양하게 웃어댔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나 장로님께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전 강호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묘대야 등에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 저는 정말로 황궁에 몸을 둔 사람이에요." 그녀는 옥벽 반쪽을 꺼내 보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 이것을 징표로 황궁을 드나들지요. 황궁에 있는 사람들도 이 내막은 잘 모른답니다. 황제께서는 저한테 이 옥벽 반쪽을 하사하시면서 저더러 강호 군웅(群雄)들의 수령이 되라고 당부하셨지요. 황제에게 소속된 사람들은 이 옥벽을 보기만 하면 제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지요. 황제는 그 사람들에게 이 옥벽을 보면 그 옥벽을 가진 사람을 황제 대신으로 여기라고 당부하셨답니다." 나 장로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적지 않이 안심이 되는 듯 긴 숨을 몰아 쉬었다. 그 여인은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고는 급히 말했다. "개방이 장차 철장방에 가 붙게 되겠는지 혹은 독립적으로 발전해 나가겠는지 하는 건 전적으로 나 장로님께 달려 있어요." 나 장로는 그 말에 무척 흥취를 느꼈다. "방주님, 분부를 내리십시오." "좋아요. 개방 금의파 장로 청한자자 노명성은 철장방 구천인한테 상해 가지고 가두에서 문전걸식하고 있어요. 난 이자를 죽여야겠어요. 그러니 그대는 그자부터 먼저 죽이세요. 그런 연후에 저는 당신을 부방주로 임명하겠어요." 일점지 나장태는 기쁜 나머지 크게 읍을 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돌아가는 길로 부하를 시키지요." "아니에요! 손수 손을 쓰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장태는 머리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그에게 직접 청한자자 노명성을 죽이라 함은 그녀를 배반한 개방 장로를 나장태가 친히 처치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표명하라는 것임에 진배없었다. 그때껏 나장태가 나서서 개방 장로를 처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독한 여인이다. 나장태는 여인의 심사를 대번에 알아차리고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개방 방주가 되려면 먼저 개방 장로 하나쯤은 죽여야 한다는, 그리하여 자기를 따르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표명하라는 것 아닌가. 일점지 나장태는 망설이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좋소. 내가 직접 죽이지요. 안 그래도 난 개방에서 그 노명성과 범장천을 가장 미워했었소." "범장천은 굳이 당신 손을 빌리지 않겠어요. 그 놈은 내가 처치하지요. 그 두 놈을 그대로 두고서야 개방 위신은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노명성을 처치하라는 가장 큰 이유요." "나도 평소 그렇게 생각했었소. 명색이 개방 장로였는데 동냥 거지에 불과한 행색으로 거리를 쏘다니니 남부끄러워서, 원……." 그러자 여인은 냉소를 쳤다. "동냥 거지 행색이라고요?" 그녀는 갑자기 깔깔 웃더니 나장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느덧 웃음기는 싹 가셔 버렸다. "그대가 개방에서 쫓겨나 동냥 거지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음식을 사 먹으라고 그대한테 돈을 준다면 어쩌시겠소? 그 사람이 그대한테 장원을 선사한다면 어쩌시겠소? 그대는 아마 거절하진 않을 거요. 그러나 노명성은 달라요. 사람이란 뜻이 크면 의지도 굳세지는 법입니다. 청한자자 노명성은 명성이 작은 사람이 아니에요. 깔봐선 안 돼요!" 나장태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당신을 방주로 추대한 까닭을 알 만하외다. 그대가 나를 무엇 때문에 방주로 삼으려 하는지도 알 만하외다." 나장태는 이렇게 한마디하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말을 더 들으려 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노명성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호떡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호떡집 주인 늙은이는 노명성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각별히 동정심을 보이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개방 사람들과 남다른 친 분이 있어 이 초라한 몰골의 나이 지긋한 거렁뱅이가 노명성이란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노 장로로구먼. 어서 자시게!" 노명성은 자리에 앉아 품을 뒤적여 동전 두 닢을 꺼냈다. 그때 품에서 절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으로 보아 그에겐 아직 동전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늙은이는 생각했다. "노 장로, 오늘은 호떡 한 개만 자시려우?" "한 개면 됩니다." 노명성은 뚝뚝하게 대꾸했다. "여보시오, 노 장로, 한 개 더 자셔 보구려. 한 개 더 자시고 훗날 갚아도 되니……." 노명성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하나면 됩니다." 늙은이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동전을 꺼낼 때 절렁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필시 돈이 많음에 틀림없어. 이렇듯 거지 꼴을 해 가지고서도 품속에 돈이 있고 또 마구 써버리지도 않으니 이건 필시 거지들의 습성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좀 이상하군!' 노명성은 한입 한입 아껴 가며 호떡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에서 사람 하나가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호떡집을 향해 내처 걸어와 노명성 앞에 딱 멈춰 섰다. 노명성은 머리를 숙인 채 천천히 입을 오물거리고만 있었다. 매일매일 하루 세 번씩 이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지만 한 번도 질리는 법 없이 먹을 때마다 맛이 새로웠다. 노명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곁눈질로 힐끔힐끔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같이 거지 행색이었는데 두 눈엔 살기가 등등하고 사뭇 험상궂었다. 노명성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오른손을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안 되겠수. 하나 더 주시우." 그때 불현듯 옆에 선 사내가 손을 내밀어 그의 두 손목을 확 거머잡았다. 노명성은 제꺽 그 사람을 쏘아봤다. 사내는 눈을 부릅 뜨고 노명성을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재수 없군.' 노명성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는 다름아닌 평소부터 노명성과 사이가 가장 떨떠름하던 일점지 나장태였다. "나 장로, 호떡 하나 자시지 않겠소?" "노 장로, 내 그대한테 할말이 있소!"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팡이를 노명성의 옆구리에 끼워 주고 내처 자기가 왔던 쪽으로 손을 잡아 끌었다. 노명성은 몹시 언짢았지만 하는 수 없이 나장태에게 끌려갔다. 나장태는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서 어떤 집 문 앞에 다다랐다. 나장태는 얼른 좌우를 살펴보고는 아무도 없자 발길질로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문 안쪽으로 노명성을 냅다 밀어 넘어뜨렸다. "노 장로, 자네는 매일 호떡 세 쪽으로 배가 고프지도 않나?" 노명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배가 고픈들 별 수 있겠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장태가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노 장로, 자네는 생각이 깊은 사람 아닌가? 나는 평소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자네와 범장천 두 사람이 가장 식견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한데 지금은 완전히 바보가 되어 버렸구먼. 품속에 동전을 서른여섯 닢이나 갖고 있으면서도 그 동전이 반들반들 닳아 빠지도록 먹고 싶은 음식도 맘대로 사 먹지 않다니……. 그렇게 배를 곯려서야 어찌하겠나……. 또……." 나장태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데 노명성이 외쳤다. "허튼소릴랑 그만 하게." 나장태는 냉소를 한 번 치더니, 목청을 돋웠다. "노명성, 자네 심사를 다 알고 있다. 나뿐 아니라 미 방주께서도 진작에 다 알고 계셔!" 노명성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그는 동냥을 하고, 남의 집 문전에서 노숙을 하는 등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그 동전 서른여섯 닢으로 그 계집에게 복수하는 꿈을 키워 왔었다. 언젠간 그런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 비록 동전 한 닢만 그 계집을 명중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날이 오면 그는 마음속에 맺힌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점지 나장태뿐만 아니라 그 계집까지도 이미 자기의 심사를 꿰뚫어보고 있다니……." "그…… 그래…… 그녀도 다 알고 있단 말이지?" 그는 몹시 당황하여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제야 사태를 똑바로 보는군. 그 여인은 네 녀석 머리 꼭대기에 있어. 여인은 나에게 네 놈을 죽이라고 분부하셨다." 그 말에 노명성은 기가 죽었다. 그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장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날 죽이려거든 어서 죽여라. 두말 말고……." 노명성은 자못 비장했다. 과연 개방 금의파, 그 위풍 당당하던 청한자자 모습 그대로였다. 일점지 나장태는 코웃음을 쳤다. "훌륭하군. 과연 청한자자다워!" 두 사람은 마주섰다. 노명성은 자기가 지금 일점지 나장태와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허망하게 그의 손에 죽는다는 건 영 달갑지 않았다. 그가 오매불망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여인이지 결코 이 일점지 나장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실로 뜻하지 않게 일점지 나장태와 생사 판가름을 해야 하다니,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체념한 사람마냥 오른손을 천천히 품속에 집어 넣어 동전 서른여섯 닢을 꺼냈다. "노 장로, 난 실로 그대에게 탄복하는 바이다. 날마다 배를 곯리면서 그 동전을 써 버리지 않고 무술을 연마하다니……." "이제야 알 만하군. 며칠 전에 거지 몇 놈이 거리에서 나의 동전 서른여섯 개를 빼앗아 갔는데 그게 바로 네 놈 짓이로군." 일점지 나장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다. 내가 그랬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동전 한줌을 꺼내 노명성에게 던졌다. 노명성은 급히 몸을 피했다. 그 동전은 파파팍 벽에 가 박히며 죽을 사(死)자를 새겨 놓았다. 그것을 보고 노명성은 조막손으로 서른여섯 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장태, 자넨 나 같은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아 이 동전 서른여섯 닢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구먼. 동전은 한꺼번에 써 버려서는 안 되네. 매일 두 개씩만 써야 한단 말일세. 배가 몹시 고프면 동전 한 닢으로 호떡 한 개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그래도 배가 고파 밤잠을 못 이루겠거들랑 그때 가서야 또 한 닢으로 호떡 한 개를 사 먹는단 말일세. 이 서른여섯 개의 동전은 바로 내 목숨일세. 자네처럼 서른여섯 개 동전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면 이튿날엔 무얼 먹고 살아 가겠나?" 노명성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동전 두 닢을 움켜쥐고 휙 내던졌다. 동전 두 닢이 쌩 바람소리를 내며 일점지 나장태를 향해 날아갔다 나장태는 강호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대적고권(大赤尻拳)이었다. 만일 그가 심기가 조급하지만 않으면 노명성과 싸워 간신히 비길 수 있거나, 재주 좋게 운이 조금 따른다면 약간 우세한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노명성은 이미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동전 두 닢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나장태를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장태는 살짝 몸을 비켜 두 손으로 벽을 짚고는 발을 탕 구르더니 훌쩍 날아 노명성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노명성은 한 번의 공격이 무로 돌아가자 장탄식을 했다. "가난한 거진 무슨 큰일은 해내지 못한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나장태야, 너는 대단한 사람이니 동전 두 닢만으로는 거꾸러뜨릴 수 없겠다." 노명성이 왼손을 쳐들자 또 동전 여섯 닢이 나장태를 향해 날아갔다. 구천인이 노명성의 오른손을 으스러뜨려 그는 왼손만 쓰고 있는 것인데 아무래도 기세가 약했다. 뿐더러 그가 손을 놀리는 것은 보기만 해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 손으로 나장태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장태는 몸을 날려 노명성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노 장로, 헛수고일랑 작작 하고 조용히 죽는 게 어떤가?"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손으로 노명성의 손을 텁석 틀어쥐었다. 쥐어 보니 노명성의 손은 손이라기보다 벌레 먹은 나무 등걸 같았다. 이런 손으론 동전을 뿌리기는커녕 짚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나장태가 노명성의 손을 잡아 흔들자 그의 손에선 동전이 모조리 떨어져 내렸다. "그 여인은 자네가 살아 있는 걸 원하지 않아. 그래 내게 자넬 죽이라고 명한 것이니 자넨 날 원망치 말게." 나장태는 이렇게 말하면서 노명성의 정수리를 내리치려 했다. 만일 나장태가 그대로 내리쳤다면 노명성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노명성이 노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는 바람에 그는 주춤 손을 멈췄다. 노명성은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노 장로, 자넨 뭐든 후회가 없는가?" "내가 무엇을 후회한단 말인가?" "자네와 범장천이 그때 날 죽여 버렸더라면 자네는 오늘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노명성은 뜻밖에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장태, 대단한 척 말게! 자넨 뭔가? 자넨 그 계집년의 주구일 따름이야. 그 년이 자네한테 날 죽이라고 하면 자넨 감히 거절할 수 없단 말일세. 자네 인생이 불쌍하이. 자네가 그 모양으로 개방 방주가 된들 뭘 하겠는가? 남의 주구에 불과할 뿐. 나와 범장천은 방주가 되려고는 했지만 남의 주구 노릇은 하려고 하지 않았어!" 노명성은 말을 마치고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아무리 암기를 쓰는 법수를 연마한다고 해도 그 손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폐인이 된 이상 인간 세상에 살아 남으면 수모나 받을 따름 아니겠는가. 그는 지그시 나장태를 바라보았다. "나 장로, 날 죽이겠으면 어서 죽이게. 개방의 10대 장로 중에서 제일 먼저 운중연, 옥면검객, 과천청이 죽었고 그 다음으로 소검 오평이 죽었네. 지금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그리고 출수표 노경은 모두 홍칠공을 따르고 있지. 이젠 자네와 범장천, 나 이렇게 세 사람만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