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4편 (54/66)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가 그는 눈시울을 닦고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록 사람들이 아들의 얼굴을 대강 닦아 놓기는 했으나 아직도 얼굴 여기저기에 흙 모래가 묻어 있었다. 그는 아들의 시체를 우물에서 건져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사람을 이렇게 우물 안에 처넣어 죽이다니…….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두 번째 관을 열어 보다가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 온순하고 착한 며느리, 며느리는 지금 옷 한 가지 걸치지 못한 채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저 시체를 거둔 사람이 급히 가져다 덮어 놓은 듯 천 조각 하나만 덜렁하니 국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범장천은 악이 치받쳐 자기도 모르게 발뒤축을 쿵쿵 굴렀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놈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 갈기갈기 찢어 죽였으리라. 범장천은 성마르게 관 뚜껑을 와락 당겨 닫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세 번째 관을 열어 보았다. 열두 살 어린 손자가 마치 잠든 것마냥 조용한 낯빛으로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자의 입가엔 시뻘건 선지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 이 일의 내막을 밝히지 않고서는 내 어찌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으리!' 범장천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손자의 시체를 안아 관에 기대앉혔다. 아이는 힘없이 손가락을 내려뜨린 채였고, 눈동자에선 검푸른 빛이 돌았다. 그는 의아해졌다. '내가 개방을 배반하고 미운산 방주을 살해하는 데 공모했다고 하여 개방이 우리 가솔을 몰살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걸 보아하니 다른 어떤 놈의 소행임에 분명하다. 과연 누굴까?' 그는 자기와 원수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그러나 딱히 누구라고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이 글썽 차오르며 손자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얘야, 나도 차마 네 여린 몸에 칼을 대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고 손자 애를 반듯이 땅에 눕혔다. 그는 손자의 웃옷을 쭉 찢고는 장화 안에 꽂고 다니는 칼을 휙 뽑아 손자의 가슴을 쿡 찔렀다.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와락 밀려왔다. 범장천은 하늘을 우러러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꾹 감았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손으로 어린 손자의 가슴을 짝 짜갰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애의 심맥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철장방이다! 철장방!" 범장천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며 불꽃이 파팍 튀었다. 그는 남이 들으면 큰일나겠다 싶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골몰했다. 내막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천인의 수하 놈들이 겁 없이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건 반드시 그 여인이 배후에서 모종의 지시를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집은 벌써 자기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밀고를 한 놈은?…… 그는 또다시 의문에 빠져들었다. 범장천 은 천천히 도포를 벗어 손자의 시체를 싸서는 관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는 관 앞에 꿇어앉은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주르르 주르르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되풀이 되풀이 곱씹었다. 그는 너무나 절통하고 기력이 쇠잔하여 네 번째 관은 열 힘조차 없었다. 대문 밖으로 쫓겨나 있던 개방 사람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범장천이 나오지 않자 그가 너무나 비통하여 자살해 버린 것은 아닐까 덜컥 의심이 났다.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문을 두드렸다. "범 장로님! 범 장로님, 문을 여시오. 어서 문을 여시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다급해진 개방 사람들은 그대로 문을 부숴 버리고 화들짝 뛰어들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우르르 몰려 들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들 그 자리에 엉거주춤 멈춰 섰다. 범장천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도포는 걸치지도 않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 퍼질러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불현듯 벌떡 일어서더니 정신없이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다. 그의 눈에선 소름끼칠 정도 로 광기가 번뜩였다. 한순간 범장천은 우뚝 멈춰 서서 발뒤축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아…… 나도 가자. 천당을 가든 지옥을 가든 나도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그는 미쳤음에 틀림없었다. 개방 사람들은 넋나간 사람마냥 멀거니 서 있다가 와락 달려들어 그를 잡아 끌었다. "이 놈들, 이 무슨 무엄한 짓인고! 날 내버려둬! 내버려둬!" 범장천은 몸부림을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개방 사람들은 넙죽 꿇어 엎드려 통사정을 했다. "범 장로님, 고정하십시오! 제발 정신차리십시오. 그래도 아직 손자님이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손자님이 커 가는 걸 보시면서……." 범장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말에 귀기울이더니 외쳤다. "손자? 손자? 그래 내 손자! 내 손자 어디 있어? 지금 어디 있나 말이다?" 그는 개방 사람을 덥석 붙잡고 어서 자기 손자를 내놓으라고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개방 사람들은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며 소리쳤다. "아이고, 개방 총부에 있어요. 안심하세요! 방주님이 데리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범장천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더니 고개를 돌려 관 네 개를 바라보며 마치 나들이 가는 사람마냥 태연히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다. 잘들 있거라." 그는 이제 눈물도 말라붙고 슬픔도 다해 버린 듯했다. 개방 사람들은 이 미친 범장천이 혹 거리에서 개방 망신을 시키면 어쩌나 염려되어 황상을 옹위하듯 좌우 앞뒤를 에워쌌다. 범장천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문을 나서고 돌다리를 건너 동사조항을 떠나갔다. 거리로 들어서자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 손자, 내 손잔 지금 어디 있단 말이냐? 어디에?" 늦은 시각이라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은 서로 수군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범장천 쪽을 힐끔거렸다. 개중에 한 노파가 어린애를 안고 서서 혀를 끌끌 차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범장천은 노파와 눈길이 마주치자 팔죽지를 잡고 있는 개방 사람들을 휙 뿌리치며 갈지자걸음으로 노파에게 헐레헐레 뛰어갔다. "오오, 여기 있구나! 내 손자, 내 손자 여기 있었구나!" 산발을 한 사람이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자기 쪽으로 달려들자 노파는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꼭 끌어안고 횅하니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범장천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거리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서더니 앙천대소를 했다. "허허허허…… 손자 놈이 달아났다. 내 손자 놈이 달아났어……. 내겐 이젠 손자가 없다, 손자가 없어!" 그러더니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범장천이 개방 사람들에게 끌려 개방 총부로 돌아왔을 때 가짜 미립은 대청에 앉아 있었다. 그 좌우로는 여인을 따르는 자들이 둘러서 있었다. 범장천은 대청에 누가 누가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듯 모둠발로 통통 뛰며 제 소리만 쥐어짰다. "아이고 죽었다, 내 손자가 죽었다. 내 손자 모두 죽었다!" 가짜 미립은 범장천을 유심히 쏘아보았다. 영민하기 그지없던 그가 삽시에 저토록 미치광이가 돼 버리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도무지 성한 놈의 짓거리는 아니었다. "범 장로께서는 너무나 비통하여 정신이 돌아 버린 모양이다. 저 지경이 되면 미쳐 버릴 수밖에 없겠지……." 가짜 미립은 가볍게 탄식을 하고는 두 수하에게 범장천을 데려다가 쉬게 하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범장천을 부축하려고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범장천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그 두 사람에게 장풍을 날렸다. 삼십육식 탈혼장 중 암연소혼이라는 법수였다. 다행히 앞가슴을 맞지 않아 경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단박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개방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범장찬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정신 이상이 된 상태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천 인은 가짜 미립 곁에 앉아 내내 냉담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그의 두 대혈과 혼수혈(昏睡穴)을 연거푸 찍었다. "이 놈, 이 놈……." 범장천은 구천인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다가 쿵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젠 범 장로를 모셔다가 쉬게 하라." 여인이 침통하게 명했다. 수하 몇은 범장천을 총부 뒤채로 들고가 침대 위에 눕혔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웃으며 구천인에게 물었다. "구 방주님 생각엔 범 장로가 정말로 미쳤다고 보세요?" 구천인은 씁쓰레한 미소를 떠올리며 뇌까리듯 말했다. "난 종래로 철장방 방주로 있으면서 수하 사람들을 믿어 본 적이 없소……." 여인은 방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게 누구 없느냐?" 여인이 소리치자 시녀 몇이 달려왔다. "범 장로님께서는 일시 상심하셔서 정신이 돌아 광기가 생긴 것 같다. 혹 범 장로 손자를 데려다 보이면 정신이 맑아질지 모르니 너희들은 어서 가서 손자를 데려다 보여 봐라." 시녀들은 허리를 굽실하고는 급히 물러갔다. 여인은 구천인을 돌아보며 깔깔 웃었다. 구천인도 따라서 쩔쩔 웃어젖혔다. 자못 득의 양양한 웃음이었다. 가짜 미립의 명을 받들어 시녀들은 범장천의 숙소로 그의 손자를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범장천의 큰 손자였다. 열대여섯 소년이라 웬만큼 철이 든 아이였다. 할아버지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허둥지둥 따라왔다. 시녀 하나가 문 밖에서 소리했다. "범 장로님, 범 장로님네 공자 분이 오셨습니다." 방안에선 응대가 없었다. 시녀들은 잠시 기다리다가 대답이 없는 그대로 범 장로의 손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 장로는 침대 위에 앉아서 이불을 이리저리 들추면서 자락 자락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방안에는 천 조각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시녀들은 어리벙벙해서 서로 마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범 장로님, 범 공자께서 장로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실성한 모습을 보자 목이 메어 울부짖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범장천은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뭐,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내가 무슨 네 할아버지냐?" 손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죽고 동생들도 모두 죽은 터에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실성을 하시다니, 아이는 가슴을 뜯으며 소리쳤다. "아이고 할아버지, 저예요, 저예요오……." 그러나 범장천은 손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희멀건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기들이, 범장천이 정말로 실성한 것인지 그 진위를 염탐하러 왔다는 것도 잊은 채, 시녀들도 그 광경을 보고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범장천은 계집아이들이 훌쩍거리자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져서는 개중 하나에게 와락 덮쳐 들며 으르댔다. "울긴 왜 울어? 울긴 왜 우냔 말이야?" 시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울먹였다. "범 장로님, 난…… 난 울지 않았어요……." "하하하…… 울지 않았다고? 울지 않았다고? 거짓말 마라! 방금 전에 울었잖아? 울었지, 울었지, 엉?" 그는 뒤룩뒤룩 눈망울을 굴리며 시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기괴하게 웃음을 흩뿌리며 입고 있는 옷을 훨훨 벗어부쳤다. 그리고는 짧은 속곳바람으로 침대 위로 훌쩍훌쩍 뛰어오르며 주절주절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난 개방 방주가 되련다, 개방 방주! 흥, 노명성 놈? 나장태 놈? 그따위 거렁뱅이 놈들이 방주 자리를 넘봐? 어림도 없는 소리! 개방 방주는 내가 된다, 내가 돼! 으하하하하……." 시녀들은 어리벙벙하니 보고 있다가 서로 귀엣말을 속닥이고는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녀들은 그 길로 곧장 대청으로 뛰어갔다. 가짜 미립은 거만한 얼굴로 시녀들이 달려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자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며 의미 심장하게 물었다. "그래, 어떻더냐? 미친 게 분명하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범 장로님은 확실히 미쳤습니다. 자기 손자도 못 알아보고…… 그리고 또……." 시녀는 범장천이 짧은 속곳바람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종종걸음을 치면서 허튼소리를 주절거리던 모습이 생각나 말을 잇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녀는 가짜 미립과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싸쥐었다. "네 말이 사실이렷다? 만의 하나 잘못 본 거라면 네 목숨은 없다는 걸 알렷다!" 가짜 미립의 말에 그 시녀는 흠칫 놀라 읍을 하며 다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가 보기엔 범 장로는 확실히 미친 것 같사오나 방주님께서 미심쩍으시다면 다시 한 번 시험해 보시옵소서……." 그 말에 가짜 미립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미쳤으면 미친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녀는 표독스럽게 웃어젖혔다. 범장천과 노명성이 이미 자기를 배반한 이상 두 놈은 이미 무용지물이요, 뿐더러 큰 장애물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노명성은 병신이 되었고 범장천 또한 실성했으니 자잘한 근심 걱정은 얼추 사라진 셈이었다. 그녀는 시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부했다. "네가 수하의 시녀들을 배치해 돌아가며 매일매일 범 장로 시중을 들게 하라. 아무데도 나가지 말게 해야 한다. 달아나서 길거리에서 미친 짓을 하면 우리 개방의 대 망신이다!" 며칠 전부터 경도 임안에 귀가 하나 날아가고 형색이 볼품없이 남루한 거지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그 몰골에 보는 사람마다 혀를 끌끌 찼다. 거렁뱅이 개방 사람들도 누군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 거지, 이 거지는 바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청한자자 노명성이었다. 그는 문전걸식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부잣집 대문 앞에서 엎드려 새우등으로 추운 밤을 지새고는 동녘이 희부여니 밝아올 무렵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또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워낙 거렁뱅이였던지라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내밀어도 주저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혹은 몇 전 집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는 그 돈으로 저잣거리에 가 호떡 몇 개를 사서 배를 불렸다. 그날도 그는 한 골목을 찾아 들어 잠자리를 찾았다. 마침 적당한 데를 골라 누우려 하니 거기엔 이미 거렁뱅이 둘이 누워 있었다. "자리 좀 내주게나." 노명성이 청하니 두 거렁뱅이는 두말없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틈을 비워 주었다. 세 거렁뱅이는 추위를 이겨 보려고 서로 몸을 바싹 달라붙였다. 깜박 잠이 들려 하는데 두 거렁뱅이 중 하나가 노명성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소곤거렸다. "노 장로님, 누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노명성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알고 있네." "노 장로님, 난 노유각이외다." "그것도 알고 있었네." 노명성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이번에는 노유각 옆에 있는 사내가 말했다. "나는…… 나대통이외다." "그것도 알고 있어." 노명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대통과 노유각은 노명성 곁으로 더욱 다가붙으며 물었다. "노 장로님을 해친 놈이 대체 누굽니까? 노 장로와 범 장로가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게 이미 발각된 게 아닙니까?" 노명성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히 말했다. "그런 것 같진 않네. 발각되었으면 놈들이 잡아다가 신문을 할 터인데 그러진 않고 다짜고짜 죽이려고 들겠나. 듣건대는 놈들이 일점지 나장태 수하 사람들로 가장하여 범 장로네 손자만 하나 남기고 네 식솔을 모조리 도륙했다고 하더군." 그 말에 노유각과 나대통은 절통하여 가슴을 쳤다. 노유각은 가까스로 격분을 억누르고 진중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노 장로님, 이 골목을 빠져 나가면 끝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십시오. 우리 개방의 은거지로 데려다 줄 겁니다. 가셔서 몸을 보전하십시오." 그러자 노명성은 갑자기 번쩍 두 눈을 뜨고 노유각과 나대통을 노려보았다. "날 해친 놈을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가긴 어딜 가!"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권해도 소용없으리라 생각하고 나대통과 노유각은 그 얘긴 접고 다시 물었다. "놈들이 어떻게 노 장로님을 해쳤는지 소상하게 알려 주십시오!" 노명성은 목소리를 낮춰 냉랭한 어조로, 구천인에게 당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침울한 어조로 덧붙였다. "보아하니, 놈들은 아마 나와 범 장로의 계획까진 모르되 우리가 홍칠을 만난 일은 알고 있는 모양이네. 그러지 않고서야 그 계집이 이렇게 마수를 뻗칠 수야 있는가. 그 계집년은 홍칠을 만나고도 잡아 오지 못한 것 하나만으로도 이런 짓을 능히 저지르고도 남을 년이네. 구천인 독단적으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터, 필시 그 계집이 개입되어 있어!" "잘 알겠습니다. 우리 둘이 가서 방주님께 이 일을 알리겠으니 노 장로께선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노유각이 가만히 말했다. 그때 골목 초입으로 거렁뱅이 둘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복색은 거렁뱅이나 의연히 머리를 쳐들고 흔들흔들 활개를 치며 걸어오는 품이 단순한 거렁뱅이 같지는 않았다. "자네들 둘은 어서 여기를 떠나게." 노명성이 말했다. 노유각과 나대통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노명성은 절룩거리며 그자들을 맞받아 걸어갔다. "형제들, 돈 몇 전…… 사정 좀 봐 주게……." 그 두 사람은 노유각과 나대통이 사라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속이 탔다. 개중 하나가 목을 빼들고 계속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주시하면서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며 귀찮다는 듯 뇌까렸다. "에잇, 성가셔. 옜소!" 노명성은 손가락 마디가 다 으스러져 버려 미처 그것을 받아 쥐지 못했다. 동전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렀다. 그는 급히 쭈그리고 앉아 동전을 줍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으로 가련한 몰골이었다. 두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노유각 등이 사라진 쪽으로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명성은 동전을 주워 들고 도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정신을 가다듬으며 운기(運氣)를 시작했다. 그는 이젠 주먹과 발을 도저히 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차 한 번은 꼭 써 먹으리라 다짐하고 동전을 암기(暗器) 삼아 새로운 무예를 연마하는 중이었다. 그는 늘 손에 동전을 가지고 놀았다. 이번에도 그는 그 조막손으로 동전닢을 던져 올렸다 받곤 하면서 연마에 열중했다. 그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경도 임안 거리 어느 골목 작은 뜨락, 일전에 홍칠이 찾아갔던 바로 그곳에 살고 있는 오의파 장로 나장태는 지금, 눈시울을 내리깔고 침대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예의 그 개잡이꾼이 들어왔다 "맏형님, 아홉째가 벌써 돌아왔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일점지 나장태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일점지는 아무 말 없이 손사래를 쳤다. 사설은 생략하고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들 셋이 앉자 나장태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소식인가?"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소씨 거렁뱅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뿐이라 강을 따라 내려가며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소씨 거렁뱅이를 봤다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이미 죽은 게 분명한 성싶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기쁜 기색도 아니요,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무표정하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일곱째한테 눈길을 돌렸다. "맏형님, 전 범장천에게 가 보았는데 두 계집애가 곁에서 수청을 들며 여러 가지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심드렁할 뿐, 그 고운 계집들을 한 번 끌어안지도 않으니 실성을 해도 단단히 실성한 모양입니다." 그는 일점지 나장태의 기색을 흘낏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맏형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이 범 장로는 언제나 여자를 끼고 놀기 좋아하는 풍류객인데 지금은 이쁜 처녀 애들이 벌거벗고 달려들어도 그저 멍청하니 앉아 있기만 하니 글쎄 아무리 봐도 실성했다니깐요." 일점지 나장태는 무표정하니 듣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그래 범 장로는 손자는 만나 보았겠지?" "만나는 보았지만 제 손자인 줄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일곱째 말에 나장태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묻지 않았다. 나장태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자 아홉째가 한마디했다. "노명성 역시 매일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문전걸식만 하는데, 그 얼굴엔 비분강개하는 기색도 없고 아무 표정이 없습니다. 그저 동전 몇 닢을 얻어 가지고는 어느 집 대문통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 말에 나장태는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명성은 하루에 동전을 몇 닢씩 얻어 가지던가?" 아홉째는 말문이 막혀 즉시로 대답을 못했다. 그가 하루에 동전을 몇 닢이나 구걸해 가지는지 그것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