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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3편 (53/66)

2026-09-29 07:52:03 조회 25
제일 작은 것은 술잔만했는데, 물고기 눈알 몇 개와 지느러미 몇 개가 동동 떠다녔다. 구천인은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그저 맛만 두어 번 보고는 한켠으로 밀어 놓았다. 그 다음 큰 것은 사람의 주먹보다 좀 작을까 한 것이었는데 남방의 부채(腐菜), 부간(腐肝) 그리고 콩알 같은 것을 한데 넣어 끓인 것으로 남모르는 조미료를 넣어 아주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구천인은 그것도 그저 몇 입 뜨는 시늉만 하고 한켠으로 밀어 버렸다. 세 번째 뚝배기는 주먹보다 좀 컸는데 두부를 끓인 것이었다. 뚝배기 안에서는 아직도 두부가 펄펄 끓고 있었다. 구천인은 대수롭지 않게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어 쓱 입으로 가져 갔다. 입이며 식도가 다 익어 버릴 만큼 뜨거운데도 구천인은 낯색 한 번 변하지 않고 펄펄 끓는 두부를 연신 입에 집어 넣고 우물거렸다. 그것만 봐도 구천인의 무공이 매우 고강함을 알 수 있었다. 노명성은 내심 흠칫 놀랐다. 사환은 이번엔 좀전의 것보다 각기 조금씩 더 큰 뚝배기를 세 개 또 가져 왔다. 이번에도 좀전처럼 뚝배기 크기에 따라 제가끔 맛이 달랐다. 구천인은 노명성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 야밤에 노 장로가 여기 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소이다. 하나 뚝배기국을 한 가지만 먹어서야 어디 재미가 있겠소? 자, 이 뚝배기국이나 한번 맛보시오?" 그러더니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개중 제일 큰 뚝배기를 노명성 앞으로 휙 날려보냈다. 노명성은 오늘 저녁 구천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확연히 알아차리고는 급히 젓가락 두 개를 들어 그 뚝배기 사발을 막아냈다. 그러나 날아오는 힘이 어찌나 센지 뚝배기 사발에 부딪히자마자 젓가락은 뚝 하고 두 동강이 나고 노명성은 그대로 국물을 옴팡 뒤집어썼다. 급히 얼굴을 돌리긴 했으나 그의 오른쪽 뺨은 그대로 뚝배기 국물로 범벅이 되어 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구천인 뒤에서 있던 철장방 무리들은 킥킥킥 키들거렸다. 노명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탁자를 뒤엎으려고 양 모서리를 딱 잡았다가 간신히 참았다.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구 방주님의 배려,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간이 없어서 방주님의 맛좋은 요리를 먹을 수가 없었군요. 허허……."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구천인 뒤에 서 있던 넷이 급히 내달아 문을 막아서며 노명성을 에워쌌다. 일이 예사롭지 못함을 느끼면서도 노명성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구천인에게 말했다. "구 방주님도 개방을 도모하고자 하고, 개방 장로인 나도 방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무슨 일로 제게 노여움을 사셨는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노 장로가 날 노엽게 해서야 안 되지. 그랬다면 벌써 죽은 목숨인걸. 지금은 그게 아니야. 그대는 내가 아니라 한 여인을 노엽게 했어!" 그 말에 노명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기와 범장천이 홍칠을 만나 같이 개방을 다시 진흥시킬 일을 논의한 것은 셋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한 사람 더 알고 있다면 출수표 노경……. 그러나 그는 믿을 만한 인물이다. 한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벌써 그 여인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일까? 뿐만 아니라 철장방 방주 구천인까지도 알고 있다니……. 노명성은 반신반의하며 짐짓 능청을 떨었다. "구 방주님께서 무슨 악몽이라도 꾸신 게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를 의심……." "노 장로를 믿지 않는 사람이 내게 시켰네. 후에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없애라고!" 구천인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천히 뚝배기 두 개를 들어올려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놀림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러나 뚝배기 두 개엔 장풍의 힘이 실려 노명성을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거기에 일단 얻어맞았다 하면 상해도 보통 상하는 게 아니리라 직감하고 노명성은 급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쭉 뻗쳤다. 그리고는 악 소리를 내질렀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맞닿아 뚝배기는 공중에서 딱 멎었다. "이 쥐새끼 같은 녀석! 언감생신 내 장풍을 막으려 들다니!" 구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천인의 만중에는 단황 나으리, 황약사, 서독 구양봉을 내놓고는 누구도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감히 그깟 개방 장로 노명성 따위가 자기와 맞서려 하자 분기탱천하여 이빨을 악물었다. 한편 노명성은 등골에 식은땀이 쫙 내배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구천인이란 놈은 천하 악인 중의 악인이다. 철장방이 지독하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알고 있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 놈 손에 목숨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노명성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손바닥에다 온 힘을 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뚝배기 두 사발은 차츰차츰 노명성 쪽으로 움직여와 급기야는 그의 가슴 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노 장로, 그렇게도 뚝배기국을 좋아한다면서! 내 오늘은 실컷 먹게 해 주겠다는데도!" 구천인은 크게 웃어제치며 마지막 힘을 가해 뚝배기를 노명성 앞으로 쓱 내쳤다. 다음 순간, 노명성은 뚝배기 두 사발을 가슴에 안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는 뜨거운 뚝배기에 두 손이 데고, 얼굴에선 식은땀이 송송 내돋았다. 그때 철장방 수하 넷은 이미 노명성 뒤쪽으로 옮겨 와 빙 둘러서 있었다. 이제 노명성은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진퇴양난으로 좌우를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철장방 무리들이 뛰어들었을 때부터 뚝배기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하나 둘씩 슬금슬금 빠져 나가 지금은 이 뚝배기점에 오직 구천인과 철장방 무리 그리고 노명성만 남아 있었다. "구천인, 사람을 이토록 못살게 굴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소!" 노명성은 노호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 두 손바닥을 힘껏 밀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도 구천인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뚝배기 두 사발을 구천인에게 들씌워 그를 비 맞은 수탉꼴로 만들어 놓아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노명성이 쌍장에 힘을 주자, 천만 뜻밖으로 갑자기 연이어 퍽퍽 소리가 나며 뚝배기 두 사발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구천인이 노명성보다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오히려 노명성이 온몸에 뚝배기 국물을 뒤집 어쓰고 비 맞은 수탉 꼴이 되고 말았다. 노명성은 얼굴이고 가슴이고 두 다리고 할 것 없이 몽땅 뜨거운 국물에 데어 온 데가 쓰리고 아렸다. 다행히 가을날 깊은 밤이어서 옷을 껴 입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심하게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노명성은 악에 받쳐 악다구니를 썼다. "네 놈이 나를 이렇듯 업수이 여긴단 말이냐. 좋다! 내 목숨을 내걸고 너와 싸우리라!" 그리고는 주먹을 휘두르며 날쌔게 구천인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구천인만은 못해도 노명성의 무예는 개방에서도 으뜸으로 일점지 나장태, 부귀산인 범장천과 견줄 만했다. 그는 온몸에 힘을 모아 구천인의 앞가슴을 냅다 갈겼다. 한데 구천인은 산더미처럼 꼼짝도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노명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도 다시금 구천인의 앞가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 구천인이 움찔하는 듯싶더니 잽싸게 그의 주먹을 덥석 쥐었다. 노명성은 그 에게 주먹이 꼭 쥐인 채 빼내려고 온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나 구천인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의 주먹은 옴쭉달싹도 하지 않았다. 구천인은 서서히 서서히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명성은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져 가고 우지직우지직 소리가 나면서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다섯 손가락은 뼈마디가 다 으스러져 몇 십 개로 조각이 나고 그의 얼굴에선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세상에 나한테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애석하게도 네 녀석은 아니닷!" 구천인은 노명성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노명성은 소리를 지르려 해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노 장로, 네가 그 여인을 배반한 죄 실로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여인은 하는 수 없이 네 놈을 죽이는 것이지만 나는 진작부터 네 놈을 죽이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네 놈은 우리 철장방의 원수다!" 노명성은 그 말에 언뜻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그가 개방 장로가 된 이후에 그는 수하들을 데리고 철장방과 한 번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노명성은 철장방 열 몇 명을 단번에 쓰러눕혔다. 그 싸움에서 노명성은 큰 승리를 거뒀고 그로 인해 개방에서 위신도 높아졌다. 벌써 수년 전의 일인데도 구천인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니……." "이번 이 한 장(掌)은 그때 죽은 우리 철장밖 형제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거다." 구천인은 팍 하고 장풍을 한 번 날렸다. 삽시간에 노명성의 왼쪽 귀가 뚝 떨어져 나가고 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노명성의 눈에서 번쩍 살기가 튀었다. 그는 맞받아 또다시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구천인은 이미 으스러질 대로 으스러진 노명성의 주먹을 한 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조각난 뼈들이 비수처럼 살을 파고 들었다. 노명성은 악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왼팔에서도 기운이 빠져 나가고 내치던 주먹은 털렁 무릎께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되니 또 왼손을 휘둘러? 내 왼손마저도 가루를 내놓겠다. 그때 가서 네 놈이 어쩌는지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구천인은 노명성의 왼손까지 텁석 틀어쥐고는 얼굴이 파르르 떨리도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노명성은 왼손마저도 으스러져 버렸다. 부서진 뼈 조각들이 삐죽삐죽 살가죽을 뚫고 비어져 나왔다.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노명성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명성은 머리에 무엇인가가 철썩철썩 들씌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철장방 무리들이 탁자 위에 남아 있던 뚝배기 국물을 모조리 쓸어 모아 그의 머 리 위에 퍼붓고 있었다. 그는 그 국물을 옴팡 뒤집어써서 얼굴이 온통 찐득찐득하고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구천인 이 놈! 사지를 찢어 죽일 수는 있어도 이렇듯 모멸감을 주는 법은 천하에 없다. 죽이려거든 깨끗이 죽일 것이지 이런 능욕을…… 처, 천하에 모, 몹쓸 노옴……." "하하하, 아직 입은 살아 있군 그래. 두 손은 다 요절나고, 귀까지 하나 덜렁 떨어져 버렸는데 이제 누가 너를 청한자자라고 하겠느냐? 영락없이 문전걸식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 꼴이다, 으하하하……." "네 놈의 만행은 꼭 보응을 받고야 말리라." 노명성은 칠을 질질 흘리며 쥐어짜듯 내뱉었다. 구천인은 순간 웃음을 딱 멈줬다. "그으래? 그렇담, 좋다?" 그리고는 대뜸 노명성을 향해 한 주먹 힘껏 내리쳤다. 노명성은 턱이 탁자에 짓찧이며 이빨이 하나 툭 분질러져 나갔다. 구천인은 사이를 두지 않고 그의 등허리 대혈을 번개같이 내지르고는 그의 뒷다리를 움켜잡고 종아리와 발뒤축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어 힘줄을 뚝뚝 끊어 버렸다. 노명성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소름 끼치게 비명을 내질렀다. 귀신의 호곡이 꼭 그러하리라. 구천인은 뚝배기점이 떠나가라 웃어제쳤다. "어쨌든 목숨은 살려 주겠다. 이만하면 대단히 사정을 둔 것이니 가서 너네 그 새 방주를 모시고 어디 한번 우리 철장방을 집어삼켜 봐라!" 구천인은 노명성을 한 번 걷어차고는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뚝배기점을 걸어 나갔다. 범장천은 그의 숙소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삼십육식 탈혼장은 일종의 음유(陰柔)한 내력으로 그 장력이 신기하고 법수가 변화무쌍했다. 그리하여 범장천은 매일 무예 수련을 할 때마다 반드시 음초지맥(陰焦之脈)과 소음(少陰) 양처의 경맥을 연마하여 음유가 하나로 통하도록 내력을 형성시키곤 했다. 그가 금방 수련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요?" "방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대청으로 좀 오시랍니다." 범장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돌아가 방주님께 아뢰게. 내 바로 간다고." 범장천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혹 흠잡힐 만한 점이 없는지 두루 두루 생각해 보았다. 그럴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암청자(暗靑子)를 매고는 옷을 갖춰 입은 뒤 선뜻 문을 나서 앞뜰에 있는 대청으로 걸어갔다. 가짜 미립은 대청 복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범장천을 보자 얼굴에 꽃 같은 웃음을 방글거리며 그를 맞아들였다. "뭐 긴한 일이 있어 부른 건 아니에요. 긴긴 밤에 혼자 심심해서 범 장로와 그저 한담이나 하려고 부른 겁니다." '이런 화냥년같으니라구. 밤낮 사내들을 껴안고 음탕하게 뒹굴다가 맥이 빠지면 수하 남자들을 불러 한담이나 하겠다고? 이런 계집이 대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범장천은 속으로 계집을 욕하면서도 사뭇 정중히 응수했다. "방주님께서 그러시다면 저 역시 마다하겠습니까?" 여인은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레 말했다. "범 장로께서도 미 방주의 딸 미립을 보셨겠지요?" 범장천은 흠칫 놀랐다. "예, 보긴 보았습니다만……." 기실 미립을 본 사람은 범장천만이 아니었다. 미립이 그때 용골묘에 뛰어들어 자기가 진짜 미운산의 딸 미립이라고 하면서 그 당장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펼쳐 보였을 때 개방 상하가 다 두 눈 멀정히 뜨고 번연히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오늘 이 계집은 생뚱맞게 이 말을 꺼내는 걸까? 범장천은 사뭇 긴장했다. 가짜 미립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난 내가 진짜 미립이라 하고, 그 여잔 자기가 진짜 미립이라고 하지만 진짜가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없는 일 아니에요? 범 장로같이 총명한 분들은 모두 그 여자가 가짜이고, 내가 진짜 미립이란 걸 믿고 있겠죠?" 여인은 또 호호호 요염하게 웃어댔다. 범장천은 이 계집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았다. 이 계집은 마음속 깊이 홍칠을 연모하고 있다. 그러기에 진짜 미립을 더 더욱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립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자기 미모가 진짜 미립을 능가한다고 여기길 바라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장천은 공손히 말했다. "방주님은 능력도 미모도 모두 그 계집에 비해 훨씬 월등합지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허허허……." 그러자 가짜 미립은 또 한 번 살짝 웃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짐짓 비통한 기색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범 장로님,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아아, 할 수 없이 말해야겠군요……." "방주님께선……." 범장천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감히 더는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 버렸다. "어제 임안성 동사조항 돌다리 옆 범 장로의 집에서 범 장로의 가솔 다섯이 그만……."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장천은 벌떡 일어섰다. "뭐라구요?" 지략이 뛰어나고 담대한 범장천이건만 임안성 동사조항 돌다리 옆의 집이라는 말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 나오자 숨이 탁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아아 범 장로님, 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식솔들은 모두 죽고 오, 오직 어린애 하나만 도망쳐 나왔는데……." 범장천은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사정없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막혀 꺽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그…… 그게……아니, 그게…… 저, 정말……." 가짜 미립은 매우 비통한 기색으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을 시켜 급히 달려가게 하였지만 그 땐 이미 때가 늦어 오직 그 집 손자만이……." 범장천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의 두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 방울이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범장천은 동사고항 집에 있는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이 피 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각별히 몸조심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그 악몽이 바로 현실이 될 줄이야……." "내 소, 손자가 아직 살았다구요? 지, 지금 어디 있소?" 범장천은 맥없이 물었다. 그러자 개방 장로 출수표 노경이 어린애 하나를 부축해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범장천을 보자 쏜살같이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도 죽고 엄마도 죽었어요……. 동생들도 모두……." 범장천은 손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재산을 나눠 주고, 집을 버린 채 개방에 가담한 것은 오로지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였다. 오늘에 이르러 이렇듯 가솔들이 모두 비명에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다행히 창천이 보우하사 손자 하나는 살아 남아 범씨 후대는 잇게 되었다만……." 범장천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자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 엄마는 어떻게 죽었느냐? 어느 놈들이 죽였지?" 어린 손자는 흐느끼면서 그때 일을 두서 없이 늘어놓았다. 뒤죽박죽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범장천은 대강의 경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이의 말을 듣건대, 그 복색은 개방 사람들임이 분명하고, 홍칠의 수하들의 악행임에 틀림없으나 그건 결코 아니다. 홍칠은 나와 대사를 의논하고 서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런 악행을 자행할 수 없다. 홍칠의 수하 사람들이라면, 건강 분타 타주 나대통과 절강 분타 타주 노유각일텐데 이 둘은 모두 그런 유의 강간과 살인을 절대로 범하지 않을 올곧은 사람들이다. 그들 입으로 직접 자기네가 일점지 나장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지만 실상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개방 중에서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오직 이 가짜 미립…… 이 년의 수하 놈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개방을 가장한 딴 놈들의 소행……." 지모가 뛰어난 범장천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면서도, 십중팔구는 이 악독한 여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쥔 근거가 없으니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터, 그는 솟구치는 비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었다. "범 장로님, 홍칠은 정말 극악무도한 인간입니다. 하나 홍칠에게 보복하는 건 잠시 훗날로 미루고 범 장로님께선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서 후사를 처리하십시오." "그래야겠습니다!" 범장천은 의언히 대답하고 손자를 데리고 대청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여인은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얘야,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말고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게 어떠냐?" 범장천은 흠칫 놀랐다. 이 계집의 손에 손자를 맡겨 놓고 가다니, 그럴 순 없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내 범장천이 백치가 아닌 이상 네 년의 지독한 심보와 악독한 수단을 모를 리 없다. 하나 앞날을 기약하려면 하는 수 없지.' 범장천은 웃는 낯으로 손자에게 말했다. "그래,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 저분이 개방 방주님이시다. 너를 극진히 아껴 주실 게다." 손자를 두고 나오자니 범장천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여인에게 그런 속내를 들킬까 봐 손자의 손을 놓고 황급히 대청을 걸어 나왔다. 범장천은 숨이 턱에 닿도록 한달음에 내달아 황망히 동사조항 돌다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집에 당도했다. 관 네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뜨락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뜨락을 휘둘러보고 나서 범장천은 관을 지키고 있는 개방 사람 몇에게 소리쳤다. "내 친히 할 일이 있으니 너희들은 대문 밖에 나가 파수를 서도록 하라. 어느 놈이건 내 명도 없이 들어왔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는 마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식솔을 해친 원수이기나 한 것마냥 두 눈을 부릅 뜨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 벌벌 떨며 쫓겨가듯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범장천은 대문 빗장을 지르고 뜨락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지난 날 즐거운 웃음 소리가 흘러 넘치던 뜨락, 화기애애하던 집……." 심정이 울적해질 때마다 그는 이 동사조항 돌다리 옆에 있는 이 집으로 와서 마음속의 우수를 털어 버리곤 했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세 손자를 거느리고 여섯 식구가 마음 편하게 담소를 나누던, 이곳은 범장천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듯 피바다가 되어 버리고, 식솔 모두 비명 횡사를 하다니…… 더욱이 요행히 살아 남은 손자 하나마저 그 계집의 손아귀에 앗겨 버려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범장천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기분이었다. 그는 관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관 뚜껑을 짚고 슬픔에 잠겨 말했다. "얘들아, 모두 내 탓이다. 나 때문에……." 그리고는 두 손에 힘을 주어 관 뚜껑을 밀어 열었다. 그 안에 아들이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소년 상부(少年喪父), 중년상처(中年喪妻),노년 상자(老年喪子), 이 세 가지를 가장 큰 불행으로 여긴다. 그리고 누구나 노년에 이르면 아들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범장천은 아들 범옥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