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1편 (51/66)

2026-09-29 07:52:03 조회 25
두 사람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고 홍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출수표, 말은 호탕하게 잘하는구려. 그러나 그대도 조심하시오! 그 여인이 갖은 계책으로 개방 방주 자리를 빼앗아 우리 개방을 없애려고 작당을 부리는데, 그댄 그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면서요? 그것도 사내대장부의 소행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댄 그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오?" "입 닥치시오! 그런 알량한 소리로 내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고 수작을 부려 봐야 꿈쩍도 않을 테니 꿈도 꾸지 마시오!" 출수표 노경은 큰소리를 쳤다. 출수표 노경은 평소 과묵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도 철저하게 그 계집의 꽁무니를 따르리라고는 홍칠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는 놀랍기도 하고 성도 나서 탁상을 쾅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범장천이 기괴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강물도 굽이쳐 돌다가 똑바로 흐르고, 사람도 잘못을 고치면 새 사람이 된다. 나와 노 장로는 지난날 과오가 한두 가지가 아니나 과거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고자 결의를 다졌다. 우리는 이제 홍 방주를 받들어 모시고 개방을 예전처럼 진흥시키는 데 매진하려 한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네 잘못을 인정치 않고 그토록 좁은 소견으로 남을 헐뜯으려 드니, 정히 그렇다면 내 너에게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출수표 노경은 코웃음만 쳤다. "당신들 둘의 재간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만의 하나, 당신들 손에 죽는다 해도 그뿐, 난 조금도 겁내지 않소." 홍칠은 원래 노경에게 그 계집을 떠나 개방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려 했었다. 한데 노경은 의외로 완강했다. '소검 오평과 그 계집은 서로 치정으로 얽혀 있고, 또 미운산 방주도 그 계집의 요염한 미색에 미혹되어 그 결과 오늘날 개방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나도 알고 있는 바이나, 출수표 노경 이 작자도 그 여인과 무슨 치정 관계에 있단 말인가?' 홍칠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범장천은 천천히 걸어 나가 출수표 노경과 두 장 거리를 두고 섰다. 중간에는 탁자 세 개가 가로놓여 있었다. "내 삼십육식 탈혼장(三十六式奪魂掌)을 받으라! 단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고분고분 홍 방주님의 말을 따르면 목숨은 살려 줄 터인즉!" 그러자 출수표는 옷자락을 확 가르며 크게 웃었다. "이미 지난번 과청천 제갈옥생 손에 한 번 죽다 살아난 목숨! 다시 태어난 몸이나 진배없으니, 내 오늘은 기꺼이 너에게 죽어 주마!" 출수표는 범장천을 노려보며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댔다. 그때 홍칠이 고함을 내질렀다. "잠깐!" 범장천은 홍칠의 말에 급히 손을 거두었다. 홍칠은 범장천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방금 그가 섰던 자리에 대신 가 섰다. "노 장로, 먼저 나와 겨루어 봅시다! 암기는 모두 얼마나 지니고 있소?" 홍칠이 노경을 똑바로 노려보며 외쳤다. "육십네 개요!" "많지도 적지도 않구먼." 출수표는 홍칠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홍칠공, 이번의 이 난이 없었다면 나 출수표 노경도 당신이 방주가 되는 것을 찬성하였을 거요. 당신의 무공이 나보다 훨씬 출중하기에 나를 죽이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임을 나도 아오. 그러나 나를 죽이기 전에 그대는 반드시 내 육십네 개 표창 맛을 보고 염라부 문전에 한번 갔다 와야 할 거요." 출수표 노경은 자기의 육십네 개 표창을 철석같이 믿고는, 비록 홍칠의 무예가 자기보다 한 수 위라 해도 한가닥 요행수를 바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홍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노 장로, 난 그저 여기 가만 서 있기만 할 테니 마음대로 해 보시오. 그 육십네 개 표창 중에서 하나라도 나를 맞힌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 추궁도 하지 않고 순순히 그대를 돌려보내겠소. 그러나 만일 하나도 못 맞힌다면 안됐지만 그 목숨은 여기 두고 가시오!" "좋소!" 출수표 노경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결연히 말했다. 출수표 노경과 홍칠은 석 장 사이를 두고 섰다. 홍칠은 밝은 데 서고 노경은 어두운 데 서 있었다. 자운재 창문으로 비쳐 드는 햇빛에 홍칠 쪽은 환히 밝은데다가 어디 한구석 몸을 피할 곳도 없어 홍칠은 그야말로 천상 표적 감이었다. 출수표의 표창 육십네 개가 일시에 날아든다면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고서는 절대 그 표창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출수표 노경은 한바탕 웃음을 토해내더니 외쳤다. "홍칠공! 자, 내 표창을 받으시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쉭쉭쉭 정신없이 표창이 날았다. 표창은 두세 개씩 혹은 일고여덟 개씩 짝을 지어, 혹은 두 개가 서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가 다시 반사되어 날아가기도 하면서 연신 홍칠을 향해 날아갔다. 하도 빨리 날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표창 육십네 개가 순식간에 모두 홍칠에게 날아들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홍칠의 무예가 노경보다 훨씬 뛰어나기에 아무리 표창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일단 그가 손을 뻗치기만 하면 이 표창들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범장천과 노명성 자신들도 막아낼 수 있는 판에 홍칠이야 더 말할 게 무언가. 그러나 육십네 개 표창이 쌩쌩 날아드는데 도 홍칠은 발 한 번 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눈 한 번 깜빡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엉겁결에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눈을 번쩍 뜨고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는 입이 헤벌어졌다. 표창은 단지 앞, 뒤, 옆, 탁자 위, 땅 위 등 홍칠을 에워싸고 사방으로 날려 꽂히며 홍칠을 옴쭉달싹 하지 못하게 했을 뿐, 홍칠의 몸에 꽂힌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을 바라보며 감탄하여 부르짖었다. "대단하오! 대단한 담력이오!" 홍칠은 여전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노 장로, 내 보기엔 노 장로는 그 계집의 무리가 아닌가 싶소." 그러자 출수표는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웃어젖혔다. 그는 내심 홍칠의 담력에 탄복하며 연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담력과 의리를 가장 중히 여긴다. 그는 홍칠에게 과인한 담력이 있음을 새삼 깨닫고 그야말로 방주의 소임을 떠메고 나갈 수 있는 적임자라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홍칠은 웃음기를 머금고 노경을 바라보았다. "노 장로, 날 찾아온 걸 보니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법한데, 대체 무슨 일이오?" 노경은 범장천과 노명성을 돌아보며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분명 그 둘이 꺼려져서 말을 못하는 눈치였다. "범 장로와 노 장로가 있어도 괜찮으니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시오!" 그러자 출수표는 웃음을 거두고 정중하게 말했다. "홍칠공, 나를 따라오시오." 홍칠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노경을 따라 나섰다. 노명성과 범장천도 홍칠이 혹 무슨 꾐에 빠져 들지 않을까 염려되어 함께 따라가려고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홍칠은 빙그레 웃으며 만류했다. "겉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출수표 노경은 결코 그 계집의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두 분께서는 너무 염려 마시오. 그리고 두 분은 어서 그 계집에게로 돌아가 그 계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하시오! 지금 두 분이 할 일은 바로 그것이오!" 홍칠이 그렇게 나오자 범장천과 노명성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굽실 읍을 했다. 홍칠은 노경을 따라 자운재를 떠났다. 출수표 노경은 홍칠을 데리고 거리를 지나고 골목을 구불구불 돌아 어느 자그마한 집 앞에 이르더니 발길을 멈췄다. 홍칠은 의아해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노경의 뒤를 따랐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더니 훌쩍 담장을 뛰어넘었다. 홍칠도 뒤따라 담장을 넘었다. "이제 오세요?" 발자국 소리를 들었음인지 안에서 웬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뭇 반가운 기색이었다. 홍칠은 그 소리에 노경 뒤로 성큼 다가섰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뛰어나왔다.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바로 미기였다. 미기는 홍칠을 보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미기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어리벙벙해져 아무 말도 못했다. "미기야!" 홍칠이 소리쳤다. 그러자 미기는 한달음에 달려와 홍칠의 품에 매달렸다. 아이의 두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홍칠은 한동안 가만히 미기를 품에 안고 말없이 서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자기를 원망하던 미립의 그 눈길도 눈앞을 스쳐 갔다. 이제 미기를 찾았으니 미운산 방주의 영령에 한 가닥 위로는 되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미립까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미립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홍칠은 감개와 비애가 엇갈려 말할 수 없이 착잡했 다. "우리 누나는요? 우리 누난 무사한가요?" 미기는 눈물을 훔치며 다그치듯 물었다. 홍칠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나는 무사히 잘 있다. 염려 말아라." 그 얼마 동안 미기도 꽤 철이 들고 성숙해 있었다. 그는 홍칠의 말투에서 그가 그 어떤 말을 숨기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노 장로, 개방을 대표하여 노 장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홍칠은 출수표 노경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나는 이미 개방 형제들이 홍칠공을 새 방주로 내세운 것을 알고 있었소. 정말 기쁜 일이오! 나도 일심으로 개방을 진흥시키고자 전심전력 다할 것이오!" 그 말을 듣고 홍칠은 감격하여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개방의 앞날에 먹구름만 드리운 줄 알았는데 이렇듯 범장천, 노명성 그리고 노경까지 다시 개방에 돌아오기를 숙원하니 어찌 개방이 비운하다고만 할 순 있겠는가. 이 세 장로에 집법장로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까지 합치면 살아 있는 개방 장로는 대부분 다시 개방으로 돌아온 셈이 된다. 홍칠은 가슴이 부풀어올라 개방의 금의파, 오의파 장로 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일점지 나장태를 직접 찾아가 설복해 보리라고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나장태만 돌아온다면 개방은 이제 옛 면모를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홍칠은 결연히 말했다. "노 장로, 지금 당장 나와 갈 데가 있소!" 출수표 노경은 읍을 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방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나 장로를 찾아가려 하오. 가서 다시 개방으로 돌아오라고 설복해 볼 작정이오!" 출수표 노경은 얼굴을 굳힌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장로들 중에서도 일점지 나장태와 부귀산인 범장천 그리고 청한자자 노명성, 이 셋을 가장 하찮게 보고 있었다. 이들 셋은 모두 방주 자리를 탐내는 야심가들이다. 노경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방주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범 장로나 노 장로, 그리고 이 나장로는 개방과 한마음 한뜻으로 일하기가 매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들 셋은 비록 개방 10대 장로 중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했으나 야심이 많고 심보가 바르지 않으니 방주님께서는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홍칠은 그 말에 가볍게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무슨 뜻이신지 잘 알겠소. 하나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보오." 홍칠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이 나온 김에 그 길로 곧장 일점지 나장태를 찾아볼 작정이었다. 홍칠의 결의가 남다른 것을 알고는 출수표 노경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이럽시다. 일단 가서 그 사람을 만나봅시다. 하나 여차직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손을 쓰겠으니 밖주님은 얼른 몸을 피하십시오." 그 말에 홍칠은 크게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엄중하려구?" "내 말대로 하시지 않겠다면 난 가지 않겠습니다." 홍칠은 출수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개방 방주로서 자기가 개방 대사를 어깨에 지고 나가야 하는데 만의 하나라도 자기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이는 개방 전체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출수표 노경은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홍칠은 그에게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잘 알겠소. 그러지요. 노 장로님 말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미기를 남겨 두고 개방 오의파 장로인 나장태를 찾아 떠났다. 나장태는 시정배 출신으로 시장 바닥에서 구걸을 일삼는 거렁뱅이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는데 개방에 들어와 운이 터서 강호에 자자하게 명성을 날렸다. 그는 개방에 든 다음에도 예전대로 시정에서 살면서 개방엔 아주 드물게만 드나들었다. 그런 고로 그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글쎄 나장태가 거기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나를 따라 거기부터 가 봅시다." 출수표 노경은 한마디하더니 청하니 길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그들은 임안 거리를 지나고 골목을 여러 개 돌아 한곳에 이르렀다. 양켠에 높직높직하게 담벽이 솟아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집 집마다 문들을 모두 꽁꽁 걸어 잠그고 있었다. 출수표는 그 골목길을 따라 또 한참을 걸어서야 한 자그마한 낡은 문 앞에 이르렀다. "자, 여깁니다. 한번 들어가 봅시다." 홍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경이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누구요?" "누더기 옷을 입고 이 빠진 사발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헌 지팡이로 헌 문을 두드리고 있소." 출수표 노경이 대답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반쯤 문을 열고 하품을 하며 내다보았다. 홍칠과 노경은 그 틈으로 잽싸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 사람은 급히 문을 닫았다. 들어가 보니 뜨락은 매우 넓었다. 그 넓은 뜨락 여기저기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뜨락 한켠 우물 옆에는 아이들 한 무더기가 오밀조밀 몰려 서서 한 사나이가 개 잡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달아맨 개 한 마리를 주둥이에서부터 쭉 가죽을 벗겨 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개는 아직 숨이 넘어 간 게 아니라서 몸서리쳐지도록 비명을 질러댔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흠모 어린 눈길로 넋을 놓고 그 사나이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뜨락 한켠에 있는 탁자에서는 사나이 예닐곱이 주사위를 놀고 있었다. 낭하에서는 사나이들 몇이 큰 솥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며 힘자랑을 하고 있었고, 더러는 공중제비를 돌아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제 나름의 재간을 뽐내고 있었다. 무술깨나 하는 놈들 같았 다. 아무리 봐도 개방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한 사람 홍칠과 노경을 개의하려 들지 않았다. 홍칠은 금방 문을 열어 준 키 큰 사나이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 어귀에는 언뜻 봐도 무예가 만만치 않을 성싶은 장한이 서넛 서 있고 그 맞은편 의자에 일점지 나장태가 앉아 있었다. 홍칠은 나장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나장태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지금 한창 몸이 달아 그대를 찾고 있는 판인데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오다니……. 내가 그대를 붙잡아 그녀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걸 두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한다던가!" 홍칠은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장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개방에도 되다 만 놈들이 적지 않거든. 나는 종래로 우리 거러지 개방에 그 무슨 금의파니 뭐니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걸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래, 비단을 몸에 걸치고 네활개를 치며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서 거러지 개방 사람입네 하면 부끄러운 노릇 아니겠소?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웃으며 손가락질할 일이오! 난 범장천이나 노명성 따위를 가장 미워하오. 사람이 뜻을 품었으면 먼저 인심부터 사야 하거늘……. 그댄 옛날 맹상군(孟嘗君)의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 홍칠은 정중히 대답했다. "모르오!" 그러자 일점지 나장태는 장황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춘추 전국 시기에,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제(齋)나라의 맹상군,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룽군(信陵君), 네 공자가 있었는데 당시 이들은 천하에 이름난 사군자(四君君子)로서 모두 제 집에 아주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춘신군이 거느린 식객들은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그 집 계집종들까지도 큰 구슬이 달린 신을 신고 다닐 만큼 의복도 퍽이나 버젓했다. 그런가 하면 맹상군은 재 산과 능력은 이 춘신군보다 더하였으나 그의 식객들은 결코 출신군의 식객만 못하였다. 맹상군에게는 풍훤(馮 )이라는 식객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맹상군이 풍훤더러 위나라로 가 빚을 받아 오라 하였다. 풍훤은 위나라로 가서 빚을 갚지 않은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다 놓고 빚 문서를 몽땅 태워 버리면서 말했다. "맹상군께서는 자네들이 불쌍해서 빚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빚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제부터 자네들에겐 빚이 하나도 없다." 그러자 위 땅의 사람들은 감지덕지 좋아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맹상군은 풍훤이 돌아오자 빛을 얼마나 받아 왔는가 재우쳐 물었다. 빈털터리로 돌아온 풍훤은 오히려 자기가 그 빚돈으로 의(義)를 사왔다고 대답했다. 맹상군은 심히 불쾌했지만 일이 이왕지사 그렇게 된 바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후 과연 맹상군이 화를 만나 위 땅으로 피란 가게 되었을 때 위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 백성들이 백 리 밖에까지 나와 맹상군을 임금처럼 모셔 갔다는 것 이다. 맹상군의 일화를 홍칠에게 들려주며 일점지 나장태는, 세상 큰 일을 하려는 자들은 모두 그에 맞는 수단을 쓰는바, 청한자자 노명성이나 부귀산인 범장천 같은 사람들이 자기 집 재물을 나눠 주고 개방에 들어올 적엔 필시 그보다 더 큰 이익을 노렸음에 틀림없다고 의미 심장하게 덧붙였다. 홍칠은 그 말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들어넘겼다. 범장천과 노명성에 대한 나장태의 경계심을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그에 대해 뭐라 변해할 생각도, 딱히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하면서 나장태에게 말했다. "이때까지 우리 개방에선 금의가 옳으냐 오의가 옳으냐 옥신각신이 많았소. 하나 기실 금의건 오의건 그건 큰 문제가 아니오. 문제는 마음이 정직하고 행동이 광명정대해야 우리 개방사람답다는 것이오." 일점지 나장태는 홍칠의 말이 듣기 거북한지 그저 담담히 웃어보일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나 장로, 개방 일은 지금까지 미운산 방주님이 주재하셨지만 미운산 방주님이 타계하셨다고 하여 우리 10대 장로가 자기 잘못을 서로 남한테 덮어씌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나 장로도 미운산 방주님을 살해하는 데 단단히 한몫 했으니 미운산 방주의 명령이 결코 용서치 않을 게요. 미 방주께서는 지하에서나마 우리가 다시 개방을 진흥시킬 것을 학수고대하고 계실 터인즉, 나 장로 생각은 어떠하신지? 우리 개방을 도울 수 있으시겠는지? 부귀산인과 청한자자,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노 장로는 이미 우리 개방으로 돌아섰소." 홍칠이 일사천리로 쏟아 놓자 나장태는 크게 웃어젖혔다. "홍칠공, 나를 속이려고 그따위 잔꾀를 부리다니. 그대가 이미 범장천과 노명성을 만났고 또 저 출수표 노경도 만난 걸로 봐서는 개방 금의파와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뭣 때문에 나 같은 걸 찾아온 게요?" 그 말에 홍칠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일점지 나장태는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다른 말 말고 어서 여기서 나가시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난 상관 안 할 테니 그대도 날 간섭치 마시오!" 홍칠은 원래 나장태를 설복하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고작 몇 마디 말에 이렇듯 나장태가 성화를 부리니 딱히 할말을 잃고 말았다. 나장태의 대갈일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들짝 문이 열리며 장한 몇이 들어섰다. 개중 하나는 피투성이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아까 뜰에서 본 그 개 잡던 사내였다. 그는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더니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허공으로 높이 던져 올렸다가는 낚아채듯 잽싸게 받아 잡기를 되풀이하면서 출수표 노경을 똑바 로 노려보았다. 그 칼로 출수표 노경과 한차례 자웅을 겨루어 보자는 눈치였다. 출수표 노경은 눈들이 사나워 당장이라도 손을 쓰려고 허리춤께에서 손을 움찔거렸다. 홍칠이 얼른 가로 막았다. 그리고는 나장태에게 말했다. "나 장로, 나 장로는 나와 노 장로가 여기 온 것을 그 여인에게 고해 바칠 생각인지 어떤지 모르겠소." 나장태는 껄껄껄 웃어제쳤다. "날 그렇게 얕잡아 보다니! 그대와 출수표가 여기 온 일을 그 여인에게 고해 바칠 내가 아니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시오. 난 결코 그댈 돕지는 않소! 그러나 만약 그대가 장담한 대로 개방을 다시 진흥시키지 못한다면 그땐 내 가만있지 않으리다! 개방 72개 분타 타주들을 모조리 불러다가 그댈 방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 테니까." 나장태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홍칠은 그 말을 듣고 나장태가 비록 속이 좁고 성미가 괴팍하기는 하나, 그래도 나름대로는 꿋꿋한 사내대장부로 그 여인과 콧김을 같이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