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50편 (50/66)
가다니? 가긴 어딜 간단 말이오?" 홍칠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다그치듯 물었다. 미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심산 고찰 청등고불(靑燈古佛)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 미립이 가 있을 곳인 줄 압니다." "아니, 낭자, 낭자는 제정신이 아니군요! 미 방주님의 원수도 못 갚았고, 동생 미기의 행방도 모르는 터에 낭자는 그 무슨 망발이오?" 홍칠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미립은 아주 냉담한 기색으로 장탄식을 하였다. "인생이란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법……. 우리 아버지는 개방을 위해 한평생 분망하셨지만 가시는 길은 그토록 참혹하였으니 인생이란 정말 무엇인지 난 알 수가 없어요. 이제 다시는 그런 피비린내를 맡긴 싫어요." 미립은 말을 마치고 조용히 돌아서 나갔다. 홍칠은 몹시 조급해졌다. 그는 개방의 급한 일들을 일단 처리하고 나면 미립과 성례를 올려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꿈을 키워 왔었다. 그런데, 그런데 미립이 자기를 버리고 가 버리려 하다니…… 홍칠은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립은 천천히 대청을 걸어 나갔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그리고 나대통과 노유각 등은 미립을 말리고 싶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홍칠이 저토록 입을 다물고 있는데야 그들이 어떻게 나서겠는가. 한순간 홍칠이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가 미립을 가로막았다. "가지 말아요! 나와 함께 미기를 찾으러 갑시다!" 미립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미기의 생사 여부를 알게 되면 저한테 기별이나 주세요." 미짐은 의외로 확고했다. 풍랑을 겪고 난 후 그녀는 사람마저 달라져 버렸다. 인간 속세 세상 만사가 다 시들시들하게만 보이고 그 어떤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홍칠과의 일도 그러했다. 미기 일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하면 애절한 마음 금할 길 없으나 애써 동생을 찾아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미립은 뭇사람들에게 또 한 번 읍을 하고는 결연히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느덧 정원을 지나는 듯싶고, 어느새 대문 가에서 희끗하더니 그녀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슴 한구석에 정하니 찬바람이 일더니 홍칠은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이제라도 뛰어가 어떻게든 미립을 설득해 보고, 아니면 억지로라도 끌고 올 수도 있었지만 홍칠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꼼짝도 안 했다. 억지 춘향으로 여인의 정을 붙들어 두기는 싫었다. 그는 다만 애절한 심정으로 미립을 선연히 떠나 보냈다. '이 세상에서 남녀간의 사랑만큼 번거로운 것은 없다. 내가 그토록 미립을 아끼고 사랑했건만 그깟 대수롭지 않은 요리 때문에 그만 책을 잡혀……. 앞으로 설령 미립과 부부가 된다 하더라도 미립은 그 일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나를 바로 보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이런 옭매듭을 풀지 못하고야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홍칠은 애석하고 구슬픈 심경 달랠 길 없어 남몰래 한탄만 자아냈다. 어쩌면 다시는 미립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저미듯 마음이 아팠다. 제24장 변해 버린 인심 도도하게 굽이치며 흘러오던 드넓은 양자강은 건강 일대 평원 지역에 이르면 한결 뉘엿뉘엿 흘러간다. 부산히 노를 저으며 급히 떠내려가는 배도 몇 안 되고 대부분 그저 강물에 몸을 맡긴 채 흔들흔들 서서히 떠내려갈 뿐이었다. 강기슭 가까이에 대 놓은 배도 여러 척 되었다. 개중 하나에 얼굴이 넓적하니 준수하게 생긴 공자 하나가 사뭇 위엄을 풍기며 이물 쪽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각각 농부 차림, 나무꾼 차림, 서생 차림을 한 세 사람이 아무 말없이 그저 묵묵히 공자 뒤에 앉아서, 이물에 앉아 있는 공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물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강호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대리(大理) 황제 남제(南帝) 단지흥(段留興)이었다. 남제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도도한 양자강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중대한 일로 골똘히 사색에 잠겨 있음에 틀림없었다. 파도는 밀려올 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연신 쏴쏴 휘몰아치며 하얗게 뱃전에서 부서졌다. 남제는 지금 일양지공(一陽指功)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일양지공은 그즈음 큰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의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화산의 무예 시합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그도 무예 시합에 참여해 왕중양이나 황약사, 개방의 소씨 거렁뱅이, 홍칠 등등과 당당히 겨뤄야 했다. 그 외에도 천하에 무림 고수란 고수들은 다 모여들 터였다. 그때 중양궁에서, 화산 무예 시합에서 최후로 이기는 사람이 《구음진경》을 가지기로 약정한 일은 다만 왕중양과 단지흥, 그리고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 도화도 황약사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 제법 한다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터이고 일단 그 소식을 접하고 나면 구미가 당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화산의 무예 시합은 그야 말로 천하 무예 고수들이 다 한데 모여 갖가지 무예를 겨루는 시합장이 될 것인바, 승부를 단언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남제는 세속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 오직 어떻게 하면 일양지공을 더욱 고강하게 연마할 수 있을 것인가만을 연구할 뿐, 무예의 승부와 강약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는 강물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일양지공의 내력도 의당 저렇게 끊임없이 밀려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내공이 세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번 손가락을 뻗어 혈도를 찍기만 하면 단번에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절기를 이미 지니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찍고 나면 당분간 내력이 끊긴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공이 끊기지 않고 계속 밀려오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되면 일양지공은 더 더욱 강고해질 터인데……." 남제는 이미 하루 낮 하루 밤을 끼니도 때우지 않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뱃전에 앉아 골똘히 강물만 바라보면서 이 난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즈음이었다. 남제가 타고 있는 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언가 희끗한 물체가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하며 출렁출렁 떠 내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농부 차림 사내가 제일 먼저 그것을 발견하고 소리치려 하는데 선비 차림이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옷깃을 가만해 잡아당겼다. 농부 차림 사내는 선비 차림을 힐끔 바라보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 같소." 그러자 그때껏 잠자코 있던 남제가 그 소리를 듣고는 문득 제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깜짝 놀라 분부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어서 저 사람을 건져라!" 선비 차림 사내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 피리를 농부 차림에게 넘겨주고는 물에 텀벙 뛰어들었다. 남방 사람들은 거개가 수영에 능했다. 그 역시 남방 사람으로 능숙하게 손사래를 치며 앞으로 쭈욱 나아가더니 어느덧 한 손으로 그 떠내려오는 물체를 잡고 소리 높이 외쳤다. "맞습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순식간에 그 사람을 끌고 배 쪽으로 헤엄쳐 왔다. 배 위의 사람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끌어올리고는 선비 차림이 배에 오르는 걸 도와주었다. 남제는 물에서 건져낸 사람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 사람은 개방의 신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가 아닌가! 코에다 바싹 손을 대 봤지만 숨결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급히 손목의 맥을 짚어 봤지만 허사였다. 남제는 머리만 가로 흔들 뿐 말이 없었다. 남제의 어(漁), 경(耕), 초(樵), 독(讀) 사대 호위 중 남제 곁에 있던 농부, 나무꾼, 선비 세 사람은 망연히 남제만 바라보았다. "폐하, 어떻게 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남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거늘 구하고 못 구하고가 어찌 인력으로 되겠는고…… 어서 배를 기슭에다 바짝 갖다 대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 사람은 부산스레 노를 저었다. 원래 기슭 가까이에 있었기에 노를 몇 번 젓지 않아 배는 곧 기슭에 가 닿았다. 남제는 수하 셋에게 소씨 거렁뱅이를 업고 배에서 내리라고 명했다. 세 사람은 재게 몸을 놀려 소씨 거렁뱅이를 기슭에 내려놓고, 그의 배를 힘껏 눌러 뱃속에 든 물을 빼냈다. 소씨 거렁뱅이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채 입으로 한 양동이는 됨직한 물을 쏟아 놓았다. 그러자 얼굴은 아직도 종잇장처럼 창백했지만 맥이 조금씩 뛰 는 듯싶고, 숨결도 가냘프게 들려 왔다. 그 모습을 보고 남제는 얼굴에 희색이 돌며 흥분한 기색으로 외쳤다. "어서, 어서 부축해 앉히고 옷을 말리게. 불을 지펴, 빨리! 난 진력을 좀 넣어 주겠네." 세 사람은 남제의 분부대로 소씨 거렁뱅이를 부축해 앉히고 저마다 서둘러 불을 지피고, 겉옷을 벗겨 말렸다. 옷을 벗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소씨 거렁뱅이의 등에 난 상처는 여간 깊은 게 아니었다. 마치 등허리 살점을 억지로 잡아뜯은 것마냥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가 지독히도 참혹한 형색이었다. "폐하, 이 상처……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되어……." 선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남제는 길게 장탄식을 하며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우리도 작은 집에서 철장방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나? 이 독약은 구천인 수하들이 쓰는 것인데 일단 사람 몸에 묻기만 하면 살이 썩고 뼈가 녹는 아주 독한 것이라네. 비록 해독은 할 수 있다하나 회복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일단 이 독에 중독된 사람들은 대부분 참혹한 말로를 맞이했네." 수하 셋은 그 말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하나같이 앞으로 철장방 놈들과 맞닥뜨리면 각별히 조심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소씨 거렁뱅이는 간신히 눈을 떴다. 그러나 맥박은 여전히 극히 미약했고, 동공도 크게 확대되어 그저 허공만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따끔 들릴락말락 헛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이 소씨 거렁뱅이는 다른 데도 상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데…….' 남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수하들에게 소씨 거렁뱅이의 옷을 홀딱 벗기고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라고 명했다. 하나 등말고는 아무데에도 무슨 상한 흔적이라곤 없었다. "자네들이 잘 잡고 있게. 어디 내가 한번 살펴보겠네." 남제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훑어보다가 드디어 목 양켠에 각각 자그마한 붉은 점이 하나씩 찍혀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가로 흔들며 탄식했다. "아, 악독한 놈…… 악독한 놈……. 자네들은 구양봉이란 악당놈을 본 적이 있나? 사람들이 하나같이 구양봉이 들고 다니는 사장은 악독하기 그지 없다고 하더니만, 이 소씨 거렁뱅이는 그 놈에게 당한 게 틀림없구먼. 사장엔 아주 독한 독사가 두 마리 있다는 데 그 독사한테 물리기만 하면 살아 남는 사람이 없다네. 이 상처를 보게. 이건 필시 그 독사들에게 물린 이빨 자국이야. 한데 양켠의 이빨 자국이 각기 다른 걸로 봐서 두 마리가 똑같은 독사는 아니란 말일세." 남제의 말에 세 사람은 유심히 그 상처를 살펴보았다. 과연 오른쪽 목에 난 이빨 자국은 깊고 좁았으며, 왼쪽 것은 얕고 컸다. 셋은 모두 등골이 오싹해지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폐하! 그렇다면 이 사람을 살려낼 수 있사옵니까?" 농부가 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남제는 침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내 보기엔 어찌 어찌 살릴 수는 있다 해도 영 반병신밖에 못 되겠군. 이거 정말 큰일일세." 그 말에 세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한숨만 지었다. 남제도 가볍게 탄식하더니 기도를 드렸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이 사람이 성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남제는 잠시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기더니 수하 셋에게 얼른 나무를 엮어 들것을 만들게 했다. 들것이 다 만들어지자 네 사람은 소씨 거렁뱅이를 그 위에 눕히고 길을 떠났다. 홍칠은 범장천과 노명성이 어떤 속셈을 품고 있는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그들이 그 계집에게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 계집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자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계집이 범장천의 가족을 해치겠다고 협박하여 그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했으며, 노명성에게는 비록 근심할 가족은 없으나 그가 지난날 나쁜 짓을 일삼은 적이 있어 계집이 그것을 꼬투리 잡으려 하자 노명성은 그만 단박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 해 벌벌 떨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말대로 그들은 마음이 내켜 계집의 앞잡이질을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뭐라고 딱 단안을 내릴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홍칠은 일단 두 사람을 만나 직접 타진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사람을 풀어 그들 두 사람을 찾아냈다. 마침내 임안 자운재(紫雲齋)에서 두 사람과 만나기로 약정이 됐다. 홍칠은 임안에 이르러 곧장 임안 4대 명소 중 하나인 화방(書舫) 자운재를 찾아갔다. 자운재는 임안의 명소답게 풍광이 뛰어났다. 그는 누각 위로 올라가 정좌하고 앉았다. 짐짓 경치를 감상하는 듯 했지만 그는 한곳만을 골똘히 응시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두 사람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고요히 끈기 있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에서 두 사람이 느려터진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범장천 , 노명성이었다. 홍칠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앞만 똑바로 노려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모습은 나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주인장, 여보 주인장!" 마침내 누각 아래에 당도했는지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주인부터 불렀다. 주인은 급히 달려 나오다가 두 사내가 비단옷을 걸친 것을 보고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어서, 어서, 누각 위로 오르십시오!" 범장천은 누각 아래쪽을 둘러보다가 홍칠이 보이지 않자 위에 있으리라고 짐작하고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누각 위에도 앉을 자리가 있겠지?" "있지요, 있다뿐이겠습니까." 주인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구부린 채 두 사람을 누각 위로 안내했다. 홍칠은 그들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꿈쩍도 안 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내심 참괴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개방을 배반하고 소씨 거렁뱅이와 소검 오평을 해친 일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음에 저마다 참혹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홍칠을 대하니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홍칠은 덤덤하니 손을 흔들었다. "두 장로는 거기 앉소!" 범장천과 노명성은 송구스러운 듯 의자 한 귀퉁이에 엉덩짝을 들이밀고는 가만히 홍칠의 말을 기다렸다. 홍칠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운산 방주님께서는 생전에 일찍이 오늘과 같은 때를 예측하시고 이미 나를 개방의 새 방주로 정해 두셨소. 더불어 차제에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그리고 또 타주 몇 사람의 공동 추천이 있어 나는 개방의 새 방주가 되었소." 범장천과 노명성은 홍칠의 말에 뜨끔했다. 두 사람은 기실 이때껏 개방 방주 자리를 노려 왔으며, 그런 허욕에 불타 오늘날 이렇듯 사악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홍칠이 이미 개방의 새 방주가 되었다고 하자 그들 둘은 자기들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토록 악행을 저지르고 죄업만 쌓았는데 어느 누가 자기들을 개방 방주로 추대해 주겠는가. 그렇다고 그 여인 쪽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 때 배 위에서 홍칠을 죽이지 못한 것으로 책을 잡아 은근히 따돌리는 눈치일 뿐만 아니라, 과시하듯 과이야를 죽여 겁을 주지 않던가. 이리저리 두 사람은 후회막급한 심경이었다. 그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앉은 자리에서 홍칠에게 굽실 절을 올렸다. 주루(酒樓) 안이라 절만 했을 뿐 개방의 신임 방주에게 예를 갖추는 격식대로 침을 뱉는 것은 생략했다. 홍칠은 이제 그만 하라는 뜻으로 손을 내젓고는 물었다. "두 장로는 미기를 못 보았소?" 범장천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개방 방주…… 아니……."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짜 미립 얘기를 하려던 것인데 홍칠이 이미 방주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이상 그 앞에서 그 여인을 방주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어떤 다른 칭호도 쓸 수가 없어 매우 난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 여인의 말에 의하면, 구양봉이 그 여인의 분부를 받들어 미운산 방주님을 살해하였는데, 그는 비단 미운산 방주님뿐만 아니라 미운산의 가족들과 소 방주님까지도 모두 살해한 모양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범장천, 노명성은 일제히 머리를 푹 숙였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 몇이 그 여인의 수하로 들어가 충복 노릇을 하지 않았던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계략이 뛰어나다 해도 그 여인 독단적으로는 그런 악행을 자행할 수 없지 않은가. 홍칠 역시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에 대해선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그 계집은 지금 뭘 하고 있소?" 홍칠의 목소리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다소 주저하면서도 사실 그대로 여인의 계획을 홍칠에게 다 알려 주었다. '몹쓸 계집년! 네 년이 날 죽여? 까마귀 꿩 잡아먹는 생각은 하지도 마라.' 홍칠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내내 조심스러이 홍칠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홍칠이 별다르게 분노하는 기미가 없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범장천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방주님, 저와 노 장로가 저지른 죄,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 두 사람은 새로이 각오를 다졌습니다. 앞으로는 개방 형제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홍칠은 굳이 이 마음 저 마음 품어 보려 하지 않았다. 저들이 저토록 공손하게 나오는데야 쓸데없이 의구심을 품어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누 아래쪽에서 소란스레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를 누 위로 안내하라니깐!" 뒤미처 주인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안 됩니다. 그런 옷차림으로는 누 위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이 아래에 계십시오. 대접은 결코 소홀치 않겠습니다." 주인이 극구 말리는데도 그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아니, 못 비켜? 그럼 내 주먹 맛을 한번 보겠다는 거야, 엉?" 그 사람은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힐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바로 개방 금의파 장로인 출수표 노경이 아닌가. 둘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홍칠에게 말했다. "방주님, 잠시 몸을 피하십시오! 저자는, 저자는 출수표 노경입니다. 우리가 저자를 멀리 데리고 갈 테니 어서 자리를 피하세요, 어서요!" 그러나 홍칠은 입가에 가볍게 냉소를 흘릴 뿐 꿈쩍도 안 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홍칠이 노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 새 방주의 담략이 보통이 아니라고 내심 탄복하였다. 그들 둘은 평소 노경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닌데다가, 노경은 자원하여 그 여자의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노경이 누각 위로 올라오면 필시 난리가 나고야 말리라고 두 사람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안절부절못했다. 마침내 주인을 밀치고 노경은 누각 위로 뚜벅뚜벅 올라왔다. 홍칠과 개방 금의파 장로인 부귀산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냉소를 치며 천천히 다가왔다. 출수표 노경은 세 사람 앞으로 유유히 다가서서 도포 앞자락을 확 열어제쳤다. 허리에 넓은 띠 같은 것을 둘렀는데, 필시 암기를 많이 넣어 둔 암기 띠임에 분명했다. 그는 암기 대가로서 몸통 앞 뒤 어디에나 암기 자루를 주렁주렁 달고 다녀서 보기만 해도 흉맹스럽기 짝이 없었다. 노경은 차디찬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범 장로, 노 장로!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옳든 그르든 간에 한 번 결정했으면 결정한 대로 행해야지, 이 무슨 망발이오? 미 방주를 버리고 새 방주를 따르기로 했으면 일심으로 새 방주를 보좌함이 지당하거늘 장로님네 둘은 왜 이 모양으로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오? 미 방주를 배반하더니 이번엔 또 그 여인을 배반해? 이게 어디 소인배들의 작태지 대협이 할 짓이오?" 개방 10대 장로로서 평소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높던 범장천과 노명성은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건만 노경의 이 말에는 얼굴만 하얗게 질릴 뿐 아무 대꾸도 못했다.